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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명칭 |
비고 |
殿(27) |
고로전(古爐殿), 관음전(觀音殿), 기묘당(紀妙堂), 나한전(羅漢殿), 향로전(香爐殿), 능인로전(能仁爐殿), 능인전(能仁殿), 동전(東殿), 명부전(冥府殿), 문수전(文殊殿), 미륵전(彌勒殿), 법원전(法源殿), 부도전(浮屠殿), 비전(碑殿), 서삼전(西三殿), 서전(西殿), 시왕전(十王殿), 신법당향로전(新法堂香爐殿), 약왕전(藥王殿), 영자전(影子殿), 원통전(圓通殿), 적광전(寂光殿), 조사전(祖師殿), 지장전(地藏殿), 향로전(香爐殿), 향식전(香食殿), 향적전(香積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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堂⒀ |
고법당(古法堂), 대하당(大河堂), 매화당(梅花堂), 반야당(般若堂), 벽안당(碧眼堂), 선당(禪堂),선설당(禪說堂), 선열당(禪悅堂), 설봉당(雪峰堂), 승당(僧堂), 식당(食堂), 신법당(新法堂), 영청당(迎請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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閣⑼ |
누각(樓閣), 도의국사영각(道義國師影閣), 불자각(佛子閣), 송월료누각(送月寮樓閣), 용자각(龍子閣), 종각(鐘閣), 천자각(天子閣), 첨성각(瞻星閣), 청풍각(淸風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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樓⑸ |
관음전공루(觀音殿空樓), 백학료공루(白鶴寮空樓), 부도전공루(浮屠殿空樓), 비전공루(碑殿空樓), 청학료공루(靑鶴寮空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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寮⑻ |
대동료(大同寮), 명월료(明月寮), 백학료(白鶴寮), 송월료(送月寮), 용천료(湧泉寮), 청학료(靑鶴寮), 탕진료(蕩塵寮), 해월료(海月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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舍⑵ |
고사(庫舍), 중목고사(衆目庫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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門⑾ |
금강문(金剛門), 대양문(大陽門), 동사문(東沙門), 보화문(普化門), 부도문(浮屠門), 비문(碑門), 서사문(西沙門), 조계문(曺溪門), 천왕문(天王門), 해탈문(解脫門), 홍살문(紅撒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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庫⑴ |
사고(寺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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室⑶ |
상실(上室), 욕실(浴室), 재주실(齋廚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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房⑴ |
지사방(持事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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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⑴ |
지침집[紙砧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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廨⑴ |
마굿간[廐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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庵⒄ |
남암(南庵), 내원암(內院庵), 도성암(道成庵), 동굴암(東窟庵), 동암(東庵), *명정암(明正庵), 부도암(浮屠庵), 불영암(佛影菴), 삼성암(三聖庵), 서부도암(西浮屠庵), 성도암(成道菴), 성전암(聖殿庵), *수남암(水南庵), 수도암(修道庵), 수동암(水東庵), 연대암(蓮臺庵), 청련암(靑蓮菴) |
암자 |
臺⑹ |
대송대(大松臺), 동부도대(東浮屠臺), 불영대(佛影臺), 송대(松臺), 월대(月臺), 폭포대(瀑布臺) |
암자 |
<보림사 중창기>보다 앞서는 조선시대 초기의 기록(<新羅國武州迦智山寶林寺事蹟記>(1457~1464)(<고고미술>8-4, 통권 81, 1967)에는 동서법당(東西法堂), 천자각(天子閣), 불자각(佛子閣), 용자각(龍子閣), 운자각(雲子閣), 좌우요사(左右寮舍), 행랑, 곁채, 누각, 문집 등의 건물명이 보인다.
일본강점기인 1928년 8월에 작성된 간단한 보림사 실측 도면(藤島亥治郞,<朝鮮建築史論>(1931: 경인문화사영인본, 1969))에는 해탈문(일주문), 천왕문, 대적광전, 대향각, 대웅전, 승실, 명부전, 응진당 등 8채의 건물이 보인다.
현재의 보림사에는 대웅전, 일주문, 사천왕문, 대적광전, 명부전, 조사전, 미타전, 심검당, 종무소, 주지실, 선원, 서부도전, 원당암 들의 건물이 있다.
이들 건조물은 1658년 법원전(法源殿) 중수(<보림사 중창기> 중창기에는 연호와 간지로 표기 되어 있는데 이하 서기 연대로 표기)가 처음 기록된 이래 1660년 신법당(新法堂) 중수 등 136회의 건립, 중수, 중창(52회) 등의 기록이 확인된다.
<장흥 보림사 중창기>의 불사 기록의 검토를 통하여 조선후기 사찰 운영의 일면을 고찰(김희태, 「조선후기 <장흥 보림사 중창기>의 고찰」, <역사학연구> 제36집, 2009.06, 107쪽~151쪽)해 본 바 있는데, 건조물관련 불사 가운데 고법당과 신법당 관련 기록을 간추려 소개 한다.
보림사 중창기(현재 대흥사 소장)
2. 고법당 중수 - 1712년, 좌수사 허가 받아 흥양에서 목재 운반
<보림사 중창기>에는 고법당(대적광전, 한국전쟁기에 불에 탔다가 복원했는데, 1995년 순천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한 결과를 토대로 중건하였다. 처음 복원 건물은 대웅보전 곁으로 옮겼다.) 관련 불사 기록이 20회가 확인된다. 건물의 불사가 6회이고 탱화, 향로, 대화로 등의 구입과 삼존 개금, 단청 등에 대한 것이다. 고법당은 ‘적광전(寂光殿)의 비로자나여래[遮那如來] 보처 보살’(<보림사 중창기> 1802년 기록)의 기록을 통하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모신 법당으로 적광전을 일컫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법당은 후대(1715년) 기록에서 언급된 것이기는 하지만, 1561년 중창기록이 가장 이른 시기이다. 그리고 1664년에 중수하고 1666년에 단청을 한다. 1692년에는 장자분합(粧子分閤) 2쌍을 새로 만들고 나머지는 중수한다.(1664년 항(康熙三年甲辰 古法堂 重修 木手 智軒 化主 玉淳 別座 印眞)과 1715년 항의 1664년 기록(康熙三年甲辰 閏六月 [古法堂] 重修 化主 前住持 玉淳 別座 印眞 信岑)은 약간 다르다.)
이어 1715년에 중창하는 기록에서는 자세한 서문이 있고 직임록 또한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조선후기 사찰에서 법당 불사의 과정과 참여인 등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 수 있다. 먼저, 고법당의 중창을 위하여 목재를 구입하여 운반한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다음의 기록을 보자.
좌수사(조선시대 순천도호부의 내례포, 현재의 여수에 있던 전라좌수영의 책임자인 전라좌도수군절도사를 말한다. 역사지명과 연혁에 대해서는 김정호, <지방연혁연구>, 1989 ; 윤여정엮음, <대한민국 행정지명>1-전남 광주편-, 향지사, 2009 참조) 이수민(李壽民, 1651∼1724, 무관, 본관은 靑海. 자는 一卿. 1676년 숙종 2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고, 낙안군수·장흥부사를 거쳐 1701년 숙종 27년 나주 討捕使·虞候 등을 지낸 다음, 철산부사를 거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忠貞이다.이 두둔해 준 덕으로 허가를 받아, 임진(1712년) 5월 일 육겸(六謙)과 광해(廣海) 신찰(神察) 경헌(敬軒) 등 여덟 분이 흥양 땅 외나로도(<신증동국여지승람> 권35 흥양현 산천조에 둘레 85리로 나오며 현 고흥군 봉래면 외나로도)에 들어가 재목을 통째로 잘라, 섬 주민들로 하여금 값을 치르기로 하고, 산에서 끌어내려 바다로 해서 강진 땅 구십포(현재의 강진군 강진읍 목리 탐진강 하류. <신증동국여지승람> 장흥도호부 산천조에 “遂寧川은 일명 汭陽江이라고 하는데 迦智山에서 나와서 장흥부 북쪽 2리를 지나 동쪽으로 전환되어 흐르고, 또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省巖에 이르러 강진현 구십포와 함께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수운로를 이용하여 목재를 운반했음을 알 수 있다.)로 옮겨왔다. 그 해와 다음 해 계사년(1713년) 2월부터 8월까지 연이어 예양강 물길로 운반해 들여 왔으니 … 부족한 경우가 없지 않아서, 한편으로 보성 땅 안(安)생원이 소유하고 있는 구류산(狗遊山)에서 육로로 운반한 재목이 14그루이며, 순천 대곡(현재의 전남 순천시 송광면 대곡리로 추정. 주암호건설로 수몰)의 조(趙)생원이 소유하고 있는 산에서 사서 정자천 수로로 운반한 재목이 크고 작은 것 합쳐 102주 정도 되었다. 그러고도 부족해서 서까래 나무 62개를 동복(현재의 전남 화순군 동복면, 이서면, 남면, 북면 일원에 있던 조선시대의 고을 이름. 1914년 화순군에 합해짐) 이(李)생원이 소유한 산에서 찾아 왔었고, 때론 근처에서도 사서 구했으며, 또 부족한 살미[山楣]와 도리(道里) 및 평방으로 긴 문설주[楔木] 재목은 모두 옛날 것을 그대로 썼으며, 간혹 개조해서도 썼으니, 보면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고법당 중창 병서, 1715)
위 기록을 통하여 고흥[당시 흥양] 외나로도에서 재목을 구입하여 해로를 통하여 강진 구십포로 옮겨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때 구입한 수량은 확인되지 않으나 2년에 걸쳐서 구입·운반했음을 알 수 있다.
흥양에서 구입한 재목이 부족하여 보성 구류산에서 육로로 12그루, 순천 대곡의 산에서 구입해 정자천을 통해 수로로 102주를 더 구입하였다. 서까래용 목재 62개는 동복에서 구입했으며, 살미, 도리, 평방 등은 옛것을 그대로 쓰거나 개조해서 사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고법당의 중창에는 장흥 보림사를 중심으로 흥양-강진-장흥의 해로와 수로, 육로, 보성 구류산-장흥의 육로, 순천 대곡-정자천-장흥의 수로와 육로, 동복-장흥의 육로를 통하여 구입하고 운반했음을 알 수 있다.
또 한 가지 눈여겨 볼 것은 좌수사의 두둔 아래 허가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이 시기 장흥지역에서 활동한 문인 방호 김희조(放湖 金喜祖, 1680~1752)의 「보림사대광적전중창병서」(<放湖集> ; 성춘경·이계표, 「장흥지방의 불교유적」, <장흥군의 문화유적>, 1989, 300~301쪽)에도 좌수영에 둔수(屯守)하던 이통상공(李統相公)이 후원했다는 내용이 있는데,<보림사 중창기>를 통하여 이민수 절도사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보림사 중창기>는 당시 불사 내용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지역의 명망있는 문인학자들을 통해 중창기문을 기록하게 함으로서 그만큼 기록의 신빙성을 더해 주고 있다.
다음으로는 참여한 대덕과 경비를 기록하고 있다. 시주인에 대해서는 ‘본 절에서 지내고 갔던 숫자가 거의 5백명에 이르는데, 모두 들보와 작은 기둥 그림에 기재해 두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번거로워 기록하지 않는다.’라 하여 500여 명에 이르고, 들보와 기둥 그림에 기재했음을 적고 있다. 고법당의 불사에 들어 간 경비는 1707년부터 이자를 받기로 하고 빌려준 곡식과 고법당 불상 도금하고 남은 쌀 등을 합하여 1,518두가 되었다. 다음의 내용이다.
전 행주지(行住持) 통정(通政) 석(釋) 계정(戒淨) 대덕(大德)이 고법당을 중창하게 되었다. 지난 정해년(1707년)에 이자를 붙여서 받기로 하고 빌려준 곡식을 지금까지 늘려 왔으니, 갑오년(1714년)에 이자와 원금을 합해 보니 약 6백여 섬이나 되었다. 그리고 차츰 차츰 화주한 것으로 고법당 불상에 도금을 하고 남은 곡식도 또한 고법당 중창을 위해서 썼다. 을해년(1695년)에 나누어 주었던 쌀도 또한 지금까지 모아 오다가 갑오년(1714년)이 된 즉 원금과 합쳐 1,518두(斗)가 되었다.(고법당 중창 병서, <보림사 중창기>, 1715)
이어 시주질과 연화질, 단청 화수질, 복전질, 화사질, 삼강 등을 기록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施主秩/願堂大施主 通政 前行住持 戒淨/願堂大施主 嘉善大夫 趙重達/供養大施主 李禮山. 供養大施主 通政 李道生/布施大施主 嘉善大夫 金孫伊/布施大施主 嘉善大夫 鄭雪 等
∙ 緣化秩/上邊手 能悟/副邊手 典平 이하 月圓(浮休善修의 8世이며 栢庵性聰의 5세인 海雲月圓은 법계가 浮休善修[1543~1614]→碧巖覺性[1575~1660]→翠微守初[1590~1668]→栢庵性聰[1631~1700]→石室明眼[1646~1710]→圓照太暉→愼庵丕玹→海雲月圓인데 연대상 맞지 않음.<해동불조원류>) 등 20人/冶匠 周仁昌/盖匠 處尙 등 4人/仰沙壁 太玄
∙ 丹靑畵手秩/上邊手 金錫/釋 卞權 /掌務 通政 信敏 20人 등
∙ 複殿秩/邊手 覺海 月圓 典平 등 18人/雲龍雕刻 鶴敬 등 3人
∙ 化士秩/化主 前行住持 兼 登階 通政 陸謙(六謙)/副化主 體玄/徹閑(哲閑)/守安/通政 信敏/頓悟
∙ 우측 各刹募緣 前行住持 致詳/神察/霽悟/좌측 各刹募緣 前行住持 皎玄/前行住持 景閑/慧英
∙ 別座 元 良佑/副 寶學/供養主 摠律(聰律)/文忍(文印)/諶海 등 10人/來往僧 通性/玉敏(淸虛休靜의 8世이며 雪坡常彦[1707~1771]의 제자인 玉敏이 있으나 연대가 맞지 않음.<해동불조원류>)/四牌將 良慧/浩印/楚云/解浻/三綱 霽湜/敬軒/神會/住持嘉善 通認(<보림사 중창기>, 1715)
그리고 정월 23일에 파옥하고 26일에 입주(立柱)하여 8월 초 4일에 마쳤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다음이 그 내용이다.
정월 23일 처음 파옥/ 2월 11일 부처를 옮겨 모시고 파옥/ 같은 달 26일 묘시 立柱/ 3월 28일 上樑/ 이어서 修粧/ 複殿/ 丹靑/ 모두 8월 초4일 일을 마침.(고법당 중창 병서, <보림사 중창기>, 1715))
1717년 11월 16일에는 고법당 각 시주들을 모시고 잔치를 베풀었는데 쌀이 120여두 정도 들었다. 1729년 7월에는 고법당 목재가 썩은 것들이 많아 새로 개조한다.
이상과 같은 고법당 건물의 중수 외에도 법당의 장엄을 위한 여러 가지 불사를 하고 있다. 1671년 고법당 상제석탱, 도의 원감 송계진영, 1671년 고법당 대향로, 1679년 고법당 대화로 구입, 1692년 고법당 용문금탁의, 1693년 화엄80권 고법당 올림, 1695년 고법당 삼존 개금, 1718년 고법당 후불탱, 1736년 고법당 삼존 개금, 1762년 고법당 개와, 1802년 고법당 삼존 개금, 적광전 여래보살개금 등이다.
3. 신법당 중수 - 1690년, 고주 평주 대들보 등 25그루를 순천 주암에서 구입
<보림사 중창기>에는 신법당(대웅보전. 원래 건조물은 조선초기로 추정되는 대표적인 중층 다포집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보물 제240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1951년 한국전쟁기에 불에 타 버린 뒤 1982년부터 1984년 사이에 중건) 관련 불사 기록이 13회가 확인된다. 1660년 신법당 중수에 이어 1692년에도 신법당을 중창하고 1693년에는 단청을 하고 단오에 경찬 수륙대회를 열었다. 1692년 중창시의 기록이 자세한데 백암 성총(栢菴 性聰)의 문인 충면(忠勔)이 썼다. 충면은<보림사 중창기>의 서문을 쓴 바 있다. 이 기문에는 신법당의 중창을 위하여 목재를 구입하여 운반한 과정과 구입한 목재의 종류가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파옥, 입주, 상량 일자도 기록하고 있다. 다음의 기록을 보자.
경오년(1690년) 봄부터 법당을 새로 중건하는 데 드는 재목으로 고주(高柱) 평주(平柱) 대들보[大樑] 등 25그루를 순천 주암면 신교동(新橋洞) 조(趙)씨 양택(兩宅) 산소에서 구해왔다. 4월부터 7월까지 날씨가 오래도록 비가 오지 않아 냇물의 흐름이 끊겨 물길로 운반할 수 없게 되어 다음해(1691년) 여름을 지나 겨우 비가 내려 물이 불어나게 되자 비로소 물길로 운반하여 본 부[장흥도호부] 장서면(長西面, 현남 장흥 장평면에 속한 조선시대의 면 이름. 1914년 부평면과 합하여 장평면이 됨.
22) 本面: 보림사가 소재한 전남 장흥군 유치면을 말한다.
23) 늑룡동: 전남 장흥군 유치면 늑룡리 늑룡마을. 1914년에 늑룡과 월천, 그리고 금사마을이 합해져 늑룡리가 되었음. 장흥호 건설로 수몰되었다.*21) 가치(可峙) 천변에 두었다가 겨울 11월에 끌고 왔다. 또 다음해 임신년(1692년)에 진목주(眞木柱) 및 가량(假樑) 추녀[春椽] 등 재목을 본면(유치면) 늑룡동(勒龍洞, 장흥 유치면 늑룡마을. 1914년에 늑룡과 월천, 그리고 금사마을이 합해져 늑룡리가 되었음. 장흥호 수몰지역) 문(文)씨 소유 산과 능주(綾州, 조선시대에 현 화순 능주, 이양면 일원에 있던 고을 이름) 정(鄭)씨 소유 산에서 얻어왔으며, 2월 27일 파옥(破屋)하고, 3월 17일 기둥을 세우고, 4월 17일 상량을 하였다. 그 나머지 조금씩 써야 할 재목들은 그 때 그때에 따라서 모았다.(신법당 중창[서문을 함께 씀], <보림사 중창기>, 1692)
이처럼 신법당 중건시에는 1690년 봄부터 2년간에 걸쳐 목재를 마련하여 1692년 2월 27일 파옥, 4월 17일 상량하였다. 재목은 고주, 평주, 대들보 등 25그루를 순천 주암면 신교동(新橋洞) 산에서 구했지만, 비가 오지 않아 물길로 이동할 수 없게 되자 그 이듬해 여름에 장흥 장서면 가치 천변까지 물길로 운반하였다가 11월 들어서 운반하였다. 1692년에는 진목주(眞木柱), 가량(假樑) 추녀[春椽] 등 재목을 보림사 인근의 유치면 늑룡동(勒龍洞)과 능주(綾州)에서 구입하였다.
그리고 신법당의 중건 불사에 참여한 시주질, 공사질, 화사질 등을 기록하였다. 이어 ‘정월에 처음 시작해 5월 보름에서 20일 사이에 이르러 서까래와 처마로 쓸 재목을 모두 들여왔다’는 기록과 함께 문호, 복전(複田), 조각, 그림, 불상 봉안 등 법당 건물 중건에 따른 세부 내용을 적고 있다.
수장차(修粧次) 능주 땅 쌍봉동(현 화순 이양면 쌍봉리. 조선시대에 능주목 도림면에 속했다가 1932년에 송석면과 합해져 이양면이 됨) 양(梁)씨 정(鄭)씨 두 집안의 산에서 재목을 사서 벌채했다. 또 보성 땅 안무안(安務安)댁의 구류산 에서 문호 재목을 모아 벌채해서 가지고 왔으며, 8월 보름전에 이르러 다듬기를 이미 마치고 여러 일꾼들은 보내고, 능오(能悟) 시담(時淡) 유감(惟鑑) 담경(曇冏) 등 4인에게는 머물러 주기를 청하여 복전(複殿)을 조성하였다. 그때 또 장성 수연사(隨緣寺, 영광군의 동쪽 35리 수연산에 있던 절)에 기거하고 있던 경호(敬浩) 등 2인과 운룡(雲龍) 몇 사람에게 요청해 조각 일을 하고, 그림 일을 시작해 10월 일에 이르러 완전히 마친 후 불상을 봉안하였음.(신법당 중창[서문을 함께 씀], <보림사 중창기>, 1692)
1723년 가을에 신법당 아래층과 식당의 동쪽편 기와를 고쳤으며, 1735년 9월에는 신법당 후면 추녀[春椽]가 썩어 깨져서 고치고, 4면의 활주(活柱)도 조립하였다. 그리고 1761년 다시 중창(都片手 順和 順㓏 17人, 盖匠 玉浻 등 3人, 畵工秩 都畵員 色旻 副畵員 是還 25人 仰沙辟 徐哥)을 하게 되는데, 2월에 시작하여 10월 6일에 일을 마친다. 이때는 상층 들보, 추녀, 하층 전후 추녀 등을 수리하는데, 다음이 그 내용이다.
창건한 연도가 오래되어 상층 들보와 추녀, 그리고 하층 전후의 추녀 등이 모두 썩어 떨어지므로, 신사년(1761년) 2월 일에 일을 시작하여, 5월 초4일에 상량을 하고, 6월 15일에서 8월 17일까지 단청을 하여, 10월 초6일에 끝을 맺었으니, 그간 힘들었던 것은 다 기록하기 어려운 일이다.(신법당 중창 연월일기, <보림사 중창기>, 1761)
그리고 신법당의 탁의 마련, 불상 개금 등의 불사도 진행된다. 1686년 신법당 홍금탁의 마련, 1695년 신법당 약사, 미타 중수복장, 나한 중수, 1707년 신법당 7불 개금, 1729년 신법당 홍포탁의 시주, 1748년 신법당 개금 등이다.
4. 보림사 사례로 본 불사 기록의 중요성
이상에서 <보림사 중창기>에 나타난 고법당과 신법당 중수 기록을 간추려 보았다. 고법당이 20회, 신법당이 13회의 중수기록이 확인 되었다.
이 같은 자료를 통해 우선은 사찰 기록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사찰 소장의 자료는, 순수한 사찰관련 자료(불교사 자료)와 국가 내지 관청 또는 지방의 유력집단과의 관계속에서 남겨진 자료로 크게 구분 할 수 있다. 먼저 순수한 사찰관련 자료로는 ① 사찰지나 기문·금석문 자료로 사찰의 연혁과 변천을 알려주는 것, ② 불교 결사적인 조직의 자료, ③ 전여문기(傳與文記)의 형태 등으로 남아 전하는 사찰재산문서, ④ 승려의 저술 등 문집자료가 있다. 다음의 국가나 지방관 혹은 지방사족과 관련된 자료로 지역(紙役)이나 각판 등의 공역과 관련된 절목류 자료, 승군·승병조직과 관련된 자료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중창불사기록은 사찰의 각종 건물의 창건과 중수, 불화, 조상, 동종, 불기(佛器) 등의 불사와 참여인의 직임록, 시주자, 장인 명단도 기록하고 있어 사찰의 불사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사찰지나 사적기도 사찰의 연혁과 중수 기록을 담고 있지만, 일정 시점에서 자료를 집성하여 편집한 자료라는 점에서, 그때 그때 중창불사기록을 정리한 중창기는 중요한 역사적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중창기록으로서 현전하는 사례는 많지 않다.
그런데 조선후기 장흥 보림사의 중창기록인 <보림사 중창기>는 180년간(1658∼1838) 246회의 불사를 한 기록이 상세하게 전하고 있어 중요한 가치가 있다.
보림사 성보 가운데에서도 건조물로서 대표라 할 고법당과 신법당의 중수기록은 30여회에 이르는데, 목조건물의 가장 기본이 되는 목재의 구입처와 수량, 운반로, 기간 등까지 기록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사찰 건물과 사찰의 운영을 넘어서 역사지리, 문화사, 교통로, 제도사, 경제적 배경, 향촌 사회사, 수공예 기술사, 회화사까지 연구할 수 있는 좋은 자료임을 알 수 있다. 앞으로의 연구를 기대해 본다.
* 김희태, 보림사 고법당과 신법당 중수기록-장흥땅·장흥사람들의 기록을 따라서5-, <장흥문화>33, 장흥문화원, 2010, 174~1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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