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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8일 대림절 넷째 주일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찬송 38장입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겠습니다. 찬송 101장, 104장,입니다.
광고 / 헌금 / 기도하겠습니다. 성경 말씀은 요 1:9-18절(신 142쪽)입니다.
제목 :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
오늘은 대림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교회들은 성탄절을 맞이할 때까지 4주간의 대림절(待臨節, Adnent) 기간 동안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또 이미 이 땅에 오신 성탄절을 준비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첫 두 주간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세상 종말에 대한 말씀과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의 재림과 충성된 종의 사명을 상고하였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이 주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지만, 주를 믿는 우리에게는 최후 승리의 날이므로 기쁨과 소망으로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소유인 달란트(복음)를 맡은 자로서 열심히 일하며 그 날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셋째 주일과 넷째 주일 말씀은 성탄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지난 주에 나목사님께서 누가복음 1장 말씀으로 이방의 땅인 갈릴리 나사렛 동네의 처녀 마리아에게 주신 예수님의 수태고지를 상고하였습니다.
오늘은 요한복음 1:9-18절 말씀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상고하고자 합니다.
1.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이 ‘생명의 빛’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로고스)’이십니다. 즉, 예수님은 만물보다 선재(先在)하시고, 또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장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 1:1), 또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요 1:9) 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영원히 계신 예수님이 하신 사역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빛’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4)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과 같은 능력(신성)을 가지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의 집을 찾아가서 슬픔에 잠긴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게 믿느냐”(요 11:25,26)
하나님께서는 죄로 죽은 사람을 살리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같은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을 ‘참 빛’으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이전에도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을 이 세상에 ‘빛’으로 보내셨지만, 여전히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 가운데 머물고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과 같은 ‘참 빛’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또 그 빛은 과거에 잠깐 비추었다가 사라진 빛이 아니라, 지금도 각 사람에게 계속하여 ‘비추는’ 빛입니다. 또 그 빛은 선악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에게 비추는 빛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생명의 빛을 이 땅에 오신 후부터 지금까지 모든 사람에게 비추고 있지만, 어둠의 세력들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깨닫지 못한 자들의 책임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완악함을 미리 아시고 그들을 더욱 완악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표징을 그들에게 보이셨습니다.(출 9:7, 10:1) 출애굽기 10장에 보면, 재앙을 내리시는 하나님 앞에서 애굽의 바로는 계속하여 완악하였고, 하나님도 그를 완악하게 하셔서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음을 당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11절에, 예수님이 ‘자기 땅’ 이스라엘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은 그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가장 먼저 받아들이고 기뻐해야 할 자기 백성들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 11:25-36절에서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거부한 이유를 하나님께서 행하신 신비한 구원의 섭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이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롬 11:25,26) 하나님께서는 온 이스라엘, 곧 영적인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나라에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기까지 육적인 이스라엘로 하여금 예수님을 알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가 너무나 깊고도 신비해서 헤아릴 자가 아무도 없다고 말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속사를 우리 인간들의 이성과 지혜로는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나라에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기까지’ 그 생명의 빛을 계속하여 비추시는 예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먼 옛날에,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는 먼 나라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서 일어난 ‘아기 예수 탄생 소식’을 이 땅에 수많은 이방인들이 굿 뉴스(복음)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아니면 결코 성취될 수 없습니다. 그 복음을 오늘 우리도 영접한 사실은 정말 신비하고 놀랍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근거는 무엇입니까? 1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 난 자들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근거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친자식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인생 속에 영접한(람바노, 내 마음에 주님으로 받아들이다) 순간, 자연적으로 태어난 옛 사람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가리켜서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근본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음을 믿으시고 실제로 그렇게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밖으로 드러난 모습과 행동을 보고 “그리스도인”인 것을 판단합니다. 교회 출석, 예배, 기도, 구제와 헌금과 같은 눈에 보이는 행동으로 “내가 그리스도인이다” 생각하기 쉽습니다. 맞습니다. 밖으로 드러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생각과 결단이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이사할 때 ‘손 없는 날’을 찾고, 윤달(내년에도 3,4월이 윤달입니다)은 꺼림칙해서 결혼날짜도 피한다면 그는 아직도 근본적으로 완전히 바뀐 사람이 아닙니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하나님도 믿고 세상 문화와 미신도 따르고 있다면 이제라도 결단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 곧 바울이 말한 “새 사람”(고후 5:17)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우리가 결단하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를 완전히 새로운 인생으로 펼쳐 가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와 환경은 늘 변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이 세대(세상 사람들의 삶의 패턴)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롬 12:2)
2. 말씀이신 예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려고 오셨습니다.
14절에서 말씀이신 예수님이 육신이 되었다는 성육신(成育身, Incarnation)은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주는 기독론의 핵심 교리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1장부터 예수님의 신성을 계속하여 강조한 이유는 당시 이원론적인 철학을 가진 헬라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은 결코 악한 육신을 입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인 예수님은 결코 하나님과 같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과 표적들을 통해서 그의 신성을 직접 본 증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역했던 사도들 가운데 가장 마지막까지 남은 요한은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분명하게 증언할 필요성을 가졌던 것입니다.
광야에서 모세가 친 장막에 하나님이 임재하신 것처럼(출 33:7-11), 예수님도 우리 가운데 육신(flesh)이라는 장막을 치셨다는 것입니다. ‘거하신다’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장막을 치신다’(에스케노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30년 동안 이 땅에 육신의 장막을 치시고 우리와 똑같이 배고픔과 피곤함, 비통한 심정을 체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모두 경험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을 이해하시고, 우리 기도를 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가장 잘 아시고,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해 가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우리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를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1요 2:2)
구약에서 동물의 피로 드렸던 불완전한 제사를 폐하시고, 저주의 십자가에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목 제물이 되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여 주셨습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육신을 입히셔서 우리로 하여금 직접 보고 만지고 체험하게 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며 교제하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요한 1서 1:1-3절의 말씀입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우리가 너희에게도...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고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1요 1:1-3)
구약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광야에서 굶주리는 이스라엘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약속하실 때(출 16:10), 모세가 시내산에 계명을 받을 때, 또 회막을 세웠을 때(출 24:16, 40:34), 하나님은 자신을 이스라엘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이처럼 구약에서는 특별한 사건이 있을 때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카이로스)가 되자, 이사야가 예언한대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게 하셨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예수님은 이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믿음이 좋으면 함께 하시고, 믿음이 좋지 않으면 함께 하시지 않는, 즉 우리 조건에 따라 있고 없고 하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진 감정이나 생각, 이성에 근거하여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우지 않으면 자신의 이성이나 생각이 하나님보다 위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을 때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그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예수님은 우리 삶을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게 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는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대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과 같습니다.(요 4:14)
본문 16절에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는 말씀도 우리의 삶이 다할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된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올해 성탄과 연말을 맞이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하였습니다. 3년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는 코로나 19 팬데믹 속에서도 교회를 지키시고, 성도들의 사랑과 교제가 더욱 깊어지도록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광야 40년을 통해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셨습니다.(신 8: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코로나와 경제적 어려움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그리고 온 교회에게 주신 교훈은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이 신처럼 섬기는 재물도, 오래 사는 것도, 다름 사람보다 높아지는 명예가 아니라,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보혜사(파라클레토스, 옆에 계시는 분)되신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인내할 수 있게 해 주시고, 환난 가운데서도 마음에 평화와 안식이 계속 넘쳐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환난이 주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환난이 성도들에게 인내와 연단과 소망을 이루기 때문입니다.(롬 4:3,4) 연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롬 8:17)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4:3,4)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기쁨과 감사로 성탄을 준비하시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환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즐거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찬송 105장(오랫동안 기다리던)을 부르신 후에 통성기도와 축도로 예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