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너더리통신 82/180423]‘엄마 아바타’ S누이의 ‘봄나물 택배’
곰곰이 생각할 것도 없이, 단박에 생각해도, 나는 무척 유복(裕福)한 넘이다. 물어볼 것도 없이, 92세 아버지와 89세 어머니가, 연로하셔 심신(心身)이 상당히 불편하시긴 해도 여전히 고향집을 지키고 계시기 때문이다. 결혼 환갑이라는 ‘회혼(回婚)’을 넘기고 72년째 해로(偕老)하고 계시니, 누가 봐도 부러운 일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게다가 4남 3녀, 우리 7형제 모두 무고하다. ‘군자삼락(君子三樂)’ 중 일락(一樂)이 ‘부모구존 형제무고(父母具存 兄弟無故)’가 아니던가. 물론 내가 군자라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환갑생일에 나 자신을 되돌아본 적이 있었는데, 이락(二樂)인 ‘앙불괴어천 부부작어인(仰不傀於天 俯不怍於人)’ 즉,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다’고 말하면 솔차니 오버한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부끄럽고 쪽팔리는 일이 있을 것은 또 없었다. ‘보통 사람’ ‘보통 남자’로서 무난히 1갑(甲)을 헤쳐나왔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득천하영재 이교육지(得天下英才 而敎育之)’ 즉, ‘천하의 인재를 얻어 교육을 시키는 일’은, 교육자가 아니므로 비유가 적절치 않지만, 종종 인문학 특강을 하는 것을 삼락(三樂)으로 치부하자. 실제로 지난 3년간 3000여명에게 역사를 교양삼아 강의를 해왔다.
그런데, 어찌 군자의 삼락만 있을 것인가? 나는 소인(小人)이 갖춰야 할 삼락(三樂)도 있으니, 이 또한 고마운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첫째 즐거움이 시간 날 때마다 경치 좋은 산하(자연)를 찾아가는 일이다. 등산도 좋고 트레킹도 좋고 천렵도 좋다. 강화 석모도 눈썹바위에서 석양의 지는 해를 바라보기도 할 일이고, 통영 미륵산에서 한려수도의 푸른 빛 도는 바다도 바라보며, 횡성 주천강 천렵도 즐겨볼 일이다. 눈 내리는 날은 하다못해 우리 고향 뒷산에 ‘눈 무게’로 짜악-짝 찢어진 소나무 가지도 보아야 할 일이다. 둘째 즐거움은 당연히 막역한 친구들과 노는 일이다. 중국의 절경을 찾기도 하고, 사랑과 인생의 유한함을 이야기하며 밤새워 수담(手談․바둑)을 나눠도 좋으리라. 세 번째 즐거움은 식도락(食道樂)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재미와 즐거움은 그 어떤 것과도 양보하고 싶지 않는 법이다. 제철 음식엔 어찌 술 한잔이 빠질 수 있으랴. 우리는 그래서 틈만 나면 친구들과 어울렁더울렁, 산에도 가고 바다에도 가고 맛집 순례도 한다. 그 재미가 말도 못하게 쏠쏠하다.
기쁨 세 가지와 즐거움 세 가지를 고루 갖추고 있으니, 이 세상에 나보다 더 유복하고 해피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30년을 넘게 동고동락(同苦同樂)하고 있는 예쁜 아내가 있고,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건장한 30대 초반의 두 아들이 있다. 당연히 조신하고 참한 며느리도 둘이다. 거기에다가 세 살짜리 손자라니? 이 귀염둥이는 우리 집의 영원한 기쁨둥이일 터. 금을 준들, 은을 준들 살 수 있을까? 어림짝도 없는 일. 보고만 있어도 그저 입이 헤벌레 벌어지는 것을, 나 보고 어쩌란 말인가? 또한, 내가 아직까지 확실한 현역(現役)이라는 것이다. 연봉(年俸)의 많고 적음이 문제 아니다. 환갑이 넘어 출퇴근하는 확실한 직장이 있다는 것도 복 중에 큰 복일 듯. 직무적성까지 딱인 것을. 능력이 있어서인가? 운이 좋은 것인가? 그것도 따질 것 없다. 더구나 정년(停年)을 한 후 돌아갈 고향과 아버지가 물려준 전답(田畓)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는 것이 뭐 별 것이더란 말이냐? 이것이 진짜 행복(幸福)이다. 요즘말로 ‘소확행(小確幸․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아닌가 말이다. 아니, ‘대확행(大確幸)’이 따로 없다.
지난 14일(토요일) ‘택배사건’에 대해 얘기하려고 너스레를 길게 떨었다. 조조프로로 <그날, 바다>라는 세월호의 미스테리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아내와 같이 본 후, 안산의 정부합동분향소를 처음 찾았다. 감독도, 애초 기획한 분도 고마웠다.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한 우리로서야 몇 푼 성금을 내고 관련영화와 책이나 볼 수 밖에 없지만, 그것 하나 “잊지 않겠다”는 것만은 다짐하자. 16일 마지막 추도식을 끝으로 분향소가 4년만에 철거된다는데, 한번은 가 분향을 해야 한다는 ‘민주시민’으로서 약간의 의무감이 작동한 거다. 그 긴 세월 동안, 팽목항 한번 가보지 못한 게 죄스러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는 도중에 우체국 택배가 올 거라는 메시지가 떴다. 우리가 ‘광주댁(宅)’이라 부르는, ‘S(사귄) 누이’가 무엇을 부친 모양이다. 대체 무엇을 보냈을까? 지난해 나의 생일 때 환갑을 축하한다며 예쁜 티셔츠를 보내 우리를 감동케 했던 친구다.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고? 2016년 11월 7∼11일 우리 부모가 주인공인 ‘인간극장’ 5부작 <총생들아, 잘 살거라>를 보았더란다. 90세 농부의 자식들에 대한 헌신과 몸이 불편한 아내에 대한 순애보(純愛譜)에 필(FEEL)이 꽂혔다는 거다. 하여, 시골집을 수차례 찾아와 인사를 드렸다는 아버지 전언(傳言)에 고마워 책을 몇 권 보내주고, 광주에 간 김에 ‘데이트’도 했더란다. 졸지에 50대 초반의 누이가 생긴 것이렷다.
‘이 인간’이 보낸 우체국 상자를 뜯어보니, 신문지로 싼 뭉치가 6개. 내용물을 보자. 달래, 머위잎삭, 대파, 쪽파, 상추, 쑥…. 세상 살다살다봉개 이런 봄나물을 통째로 받아보기도 하는구나. 신문지로 싸야 푸성귀가 금세 상하지 않는다. 신문지의 또다른 기능이다. 이것은 우리 어머니가 몇 년 전까지 하던 ‘일’이었다. 몇 자식한테 보내려면 쑥을 얼마나 많이 캤어야 했을까? 못해도 지게 한 바작은 캐 노놨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어머니가 아파 중단된 일을, 사귄 지도 얼마 안된 광주의 S누이가 봄나물을 ‘공간 이동’시키다니? 럴수, 럴수, 이럴 수가? 아내는 보자마자 약간 짜증이 났다지만, 성의가 너무 ‘괘심’하여 정성껏 다듬어 식탁에 올려놓았다. 이건, 숫제 감동(感動)이다. 달래와 상추를 양념장으로 싸먹어 보았을 것이다. 흐미-. 좋은 것! 해마다 봄이 오면, 어머니의 ‘쑥 택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약간은 질긴 듯해도, 적당량의 된장을 푼 쑥국의 그 향내, 코를 자극하다 못해 코를 막히게 했던 고향의 맛과 향기를, 누이 덕분에 맡보게 되다니? 군자 삼락이고, 소인 삼락이든, 이보다 더한 행복이 여기에 있었구나. 주말 저녁이 몇 가지 봄나물로 이래 풍성하거늘, 내 무엇을 더 바라리오. '엄마 아바타'가 따로 없구나. 고맙다. 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