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이야기
우리 동네 목사님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
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말마다 쑤근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뒤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
나야 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장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
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기형도詩)
첫 번째 이야기
아직도 나의 뇌리에 남아 있는 그 때, 그 목사님의 이름 마준수, 우리 가족이 고향 춘천을 떠나 부모님을 따라 정착한 곳이 경기도 포천의 신북면 소재지인 공섬이라는 동네 였는데 이사한 우리 집 바로 앞, 길 건너에는 작은 감리교회 하나가 있었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로 내 위의 누나와 5남매가 올망졸망하니 사니까 목사님이 전도한답시고 우리 집을 자주 찾아 오셨다. 춘천의 시골에 살때는 교회가 없어서 교회가 뭐 하는 곳인지 몰랐는데 목사님이 자주 찾아오시니까 교회에 호기심이 가기도 했다.
시골의 작은 예배당 이다보니 목사님이라고는 하지만 정식 목사님도 아니고 그 당시에도 80은 다 되신 아주 연로하신 노인이셨는데 연세에 비해선 정정 하셨다.
몇 달이 되지 않아 우리 형제들도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목사님은 우리 형제를 합쳐 20 명을 넘기지 못하는 주일학교 학생들을 모아놓고 예배당이 터질듯이 큰 목소리로 설교를 하시며 즐거워 하셨다.
그런데 나는 어릴 적부터 신기가 없었는지 몇 달을 다녀도 통 교회에 재미를 붙이지 못했는데 딱 한 가지 흥미를 끄는 것이 교회에 있는 낡은 풍금이었다.
예배 볼 때만 교회문을 열어 놓으니까 그 때나 풍금을 만져보곤 했는데 풍금을 조금 배우니까 풍금이 몹시 치고 싶었다. 목사님이 먼 동네로 심방을 떠난 것을 알면 몇 명의 또래들과몰래 교회담을 넘어 들어가 교회 쪽 창을 열고 들어가 풍금을 치기도 하였다.
교회담에 붙은 낡은 한옥에는 목사님과 목사님 사모님, 그리고 건넌방에는 오래전부터 사셨다는 전도사 할머니란 분이 계셨는데 그 할머님의 성격은 어린 우리가 보기에도 참으로 유난 스러웠다. 교회에 나온 아이들에게도 아주 인기가 없어서 우리들은 그 전도사 할머니를 마귀할멈 이라고 불렀는데 목사님과도 사이가 좋질 않아서 가끔씩 두 분이 다투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몰래 풍금을 치다가도 이 할머니한테 들켰다 하면 그날은 정말 된 서리를 맡고 있는욕, 없는욕 다 듣고 들깨밭, 콩밭속으로 숨어들곤 하였다.
그럴때면 우리들은 모여서 모의를 하였다. 저 욕쟁이 마귀 할머니를 약 올리기로,
교회앞의 커다란 아카시아 나무에는 예배시간을 알리는 종이 매달려 있었는데 교회가 가난하다보니 일반 교회종이 아니라 산소통을 개조해 종으로 매달아 놓았었다.
여러명의 아이들이 양손에 돌맹이를 들고 종앞으로 뛰어 달아나며 던져대면 “댕댕댕댕.....”
하고 종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그 소릴 듣고 할머니가 뛰쳐 나오면 우리들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할머니가 허공에 대고 욕을 해대는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먼곳에 앉아서 즐거워 하였다.
목사님은 눈이오나 비가오나 시간만 있으면 굽은 등에 상자를 메고 이마을 저마을로 전도를 다니셨다. 목사님이 등에 메고 다니시는 것은 텔레비전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텔레비전이 귀한때라 목사님께서는 수동 텔레비전을 만드셔서 그 수동 텔레비전을 상영하면서 전도들 하셨는데 수동 텔레비전이란 나무상자앞을 화면처럼 만들고 나무상자 속에 두무마리 그림을 설치해서 한 쪽에서 물레돌리듯이 돌리면 화면이 바뀌는, 그 당시에는 시골사람들의 집중력을 모아 전도 할 수 있는 그럴듯한 기구였다. 목사님이 그림솜씨가 있어서 예수님도 유다도 텔레비전 필름을 모두 그리고 중간중간 성우역할도 하였으니 참, 눈물나는 전도였지만 주일날 오는 교인들은 열 댓 명을 넘기지 못했다.
이미 돌아가신지 오래 되셨지만 ‘마준수’목사님이야 말로 가장 당당하게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목사님이다.
두 번째 이야기
“홍구야! 홍구야!”
주일날이면 어김없이 봉고차를 우리 집 앞마당에 세워놓고 우리 집 막내인 홍구를 부르며 목사님이 들어오신다. 창문을 열고 슬며시 내려다보면 봉고차 안에선 너 댓 명의 아이들이 웅성거리고 목사님은 홍구가 대답할 때까지 2층을 향해 목청껏 홍구를 외쳐댄다.
아내는 그때까지 자고 있는 막내 녀석 홍구를 다그쳐 깨우며 빨리 세수하고 교회가라고, 목사님 밖에서 기다리신다고 야단이다.
홍구는 세수도 못하고 목사님한테 끌려가거나 어떤 날은,
“목사님! 목사님 먼저 가세요. 제가 금방 자건거 타고 갈게요.” 하면 목사님은
“그래, 그럼 나 먼저 갈테니 예배시간 늦지 않게 얼른 오거라.”
시골의 작은 교회다보니 홍구만 교회를 빠져도 자리가 텅빈다. 목사님이 열명이나 남짓한 주일 학생들을 챙기느라 덜덜거리는 봉고차를 몰아 세곳의 동네를 돌다보면 예배시간도 빠듯하게 교회로 돌아오신다.
홍구가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올 때면 어김없이 한 손엔 빙과가 또 한손엔 빵이 들려져 온다. 어려운 교회에서 아이들 간식까지 챙겨주는 것이다.
목사님의 연세는 환갑은 되어보이시는데 사모님과 함께 교회의 사택에서 살고 있다. 읍내의 큰 교회에서 월급을 보내온다고 하는데 한 달에 50만원정도라고 한다.
동네 교회에서야 목사님에게는 아무런 보탬도 되어 줄 리가 없을 텐데..............
목사님의 자녀는 남매가 있는데 큰 아들은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 할 때까지 아르바이트를 한다며 직장에 다니고 딸아이는 대학교를 다닌다고 하는데 몇 명 안되는 신도들과 참으로 어렵게 교회를 꾸려나가고 어렵게 살림을 이어나가는 것을 보면 요즈음은 목사님도 천차만별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 번째 이야기
사촌 동서되는 안 서방은 기장교회(기독교장로회)장로다. 사촌처제가 친정이 용인 남사면인데 그 마을 산 밑에는 백년이 넘은 교회인 아리실교회가 있다. 마을에 오래된 교회가 있어서인지 그 마을에서는 교회를 다니지 않으면 품앗이도 하지 못한다는 교인들 촌이다. 사촌처제가 그런 연고의 워낙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다 보니 사위도 독실한 교인을 얻어서 지금은 장로가 되었다. 나는 교회를 다니지 않으니까, 장로면 장로인줄 알고 집사면 집사인가보다 하는데 가끔씩 동서의 말을 들어보면 교회도 이만저만한 내분이 꽤 많은 것 같다.
처음엔 동서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동서가 일부 신도들과 함께 목사를 내보내고 옛날에 자기와 인연이 있는 목사를 데려다 놓았었다. 그러고 몇 년이 지나더니 자신이 추대한 새로 온 목사와 또 갈등을 빚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동서와 처제가 몇 명의 신도들과 함께 다른 교회엘 나가고 있었다. 기장교회도 아닌 성결교회였다. 나중에 동서부부한테 이야기를 들어보니 새로 온 목사가 자기의 반대파 신도들과 함께 교회를 좌지우지하고 장로를 우습게 여겨서 나와 버렸단다.
며칠 전에 동서를 만났다. 그래도 우리 집과 가장 가까운 곳에 살고 직업도 같아서 자주 만나고 친하게 지내서 서로의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다가 동서가 지금 다니고 있는 교회 이야기가 나왔는데 동서 하는 말이, “형님, 지금 교회에 목사님이 안 계셔서 교회가 분위기가 그러네요.”
“아니 왜, 목사님이 같은 안씨 라고 그랬었잖아.”
“장로들이 목사가 장로 말을 듣지 않는다고 원로장로 다섯 명이 합의를 해서 합의금(퇴직금?)명목으로 3천만원을 주기로 해서................”
동서 말로는 60이 넘은 목사를 목사 월급으로 일백오십 만원에 일 년에 네 번 보너스를 주고 가끔씩 기도비도 주었는데 목사가 장로들의 말을 듣지 않고 목사 마음대로 교회를 운영했다고 교회 돈 2천5백만원과 농협에서 5백만원을 융자받아서 목사를 주고 장로들이 목사를 내보냈단다.
그 목사는 우리나라에선 살기 싫다며 이젠 목회활동도 접고 미국에 가있는 아들한테 가서 산다며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고 이야기를 했단다.
“형님, 지금 그 교회는요 목사들이 장로들한테 꼼작도 못해요. 교회가 오래되고 장로들이 많아서 왠만한 목사는 버티질 못해요.”
난 동서의 말이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겠다.
첫댓글 청산님은..... 참...... 내가 길 위에서 청산님을 알게 된것은 큰 행운이기도 합니다.
청산 선생님 올려주신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제가 전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상이네요 고맙습니다
글을 다듬질 못해서 엉성합니다.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온유님! 열심히 공부하고 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