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바쁘기도하고, 그리고 생활의 여유가 있어서 누구나 다 차를 타고 다니니 주위의 풍경을 돌아 볼 겨를이 없다. 그래서 진주에 사는 사람들도 진주를 잘 모르고, 우리들이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도 자연의 변화에 따라 계절은 바뀌고 그리고 세월은 흘러 가더라. 몇 일 전 남강변을 걷다가 우리들이 쉽게 차를 타고 스쳐지나가는 풍경들을 눈여겨 보았다. 차를 타고 다닐 때에는 보지 못하였던 그 풍경들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래서 내 사랑하는 친구들을 남강변으로 초대한다. 진주에 살지 않는 친구들은 고향 생각 날 것이고, 진주에 사는 친구들도 우리 어렸을 때의 추억속으로 빠져 들 것이다. 누구나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주관적인 것이라서 나하고는 다른 생각을 가질지는 몰라도 그래도 우리는 추억을 함께한 친구니까 많은 사람들이 내하고 같은 생각을 가지리라 짐작한다. 자 그러면 영산홍이 한창이고 신록이 우거진 남강변으로 같이 가보자! 집에서 아침 8시 10분에 출발했다. 등산 티셔츠에 조끼만 입었더니 바람이 불어서 약간은 쌀쌀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하늘은 맑고 더구나 어제 비가 내려서 멀리까지도 잘 보인다. 그리고 기분도 상쾌하고. 집앞의 법원을 지나서 법원 서쪽편의 진양교이다. 사진의 오른쪽은 산업대학교이고. 인도는 자전거도로로 만들어져서 걷기에 아주 좋다. 약간의 쿠션감이 있어서 발바닥도 아프지 않고. 진주가 우리나라에서 자전거 도로가 제일 잘 된 도시라더라. 내가 다른 도시에 걸음 걸으려 많이 다녀 보았지만 진주 만큼 걷기 좋은 데도 없더라. 얼마 전에 서울 한강변 걸으러 갔다가 진주보다 못하다고 생각되어서 서울 사람들을 진주에 초대하여 같이 걸었더니 진주 남강변이 서울 한강변보다 시설이 더 좋다고 엄청 부러워하더라. 진양교에서 바라본 뒤벼리이다. 도로를 따라 팬지 행잉바스켓이 걸려있고. 강변을 따라 도보도로와 자전거도로가 만들오져 있다. 우리 동네 사람들이 중앙시장에 갈 적에 많이 걸어 가는 길이다. 나도 시내에 갈 일이 있으면 강변 도보 도로로 걸어 다닌다. 시내에서 술 약간 먹고 이 길을 따라 걸어 오면 술이 모두 깨어 버려서 술값이 아깝기는 하지만 뒷 날 술 때문에 고생은 하지 않는다. 진양교 위이다. 이길이 진주의 자랑 자전거 도로이다. 오늘 우리가 갈 길 8km 모두 이런 포장이 되어있다. 그것도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아도 되고. 가로등에 걸려있는 행잉 바스켓이다. 지방자치가 실시 된 이후 이런 도로치장이 참 많아 졌다. 그리고 시민들의 의식도 발달되어 훼손하는 일도 없고 오늘 이런 바구리를 많이 보게 될것이다. 바구리에 담겨진 꽃은 페튜니아 인데. 꽃이 오래가기도하고 참 예쁘다. 우리집에 뜰이 있다면 심고싶은 꽃이다. 한여름 장마때에 과습만 되지 않으면 4월초에 심어서 11월초까지 이 상태를 유지하더라. 미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베고니아 보다는 나는 이꽃이 더 좋던데.. 길가 공터에도 페튜니아를 심어서 장식했더라. 장소는 산업대학교 산학협동관 앞이다. 진양교를 건너서 여기에서 남강 강변 둔치로 들어 선다. 이꽃 말고도 지금은 여러가지 꽃들이 엄청 화려하게 피어있던데 올 릴 수 있는 사진 매수가 한정되어 있어서 그냥 내문서에 간직만 하련다. 남강 둔치로 내려서는 길이다. 차도와 둔치 사이의 사구에 나무를 심어서 가꾸고 둔치는 자전거 도로와 잔디밭 그리고 도보로를 만들었다. 강 곁의 도보로를 따라서 걸으면 강바람도 쏘이고 물속의 피래미도 보면서 그리고 강가의 수생식물도 구경하면서 엄청 즐겁게 걸을 수 있다. 남강변 둔치의 자전거 도로이다. 도로 왼쪽에 심겨진 풀은 벌개미취인데 꽃은 꼭 쑥부쟁이처럼 보인다. 쑥부쟁이를 모르면 들국화라고 이야기 할까?(사실은 들국화라는 꽃은 없는 데) 그러나 피는 시기가 쑥부쟁이 보다는 좀 빨라서 진주에서는 9월초에 핀다. 이길이 도보로이다. 물에 붙여서 만들어져 있다. 그래도 사람들은 딱딱한 길보다는 부드러운 흙길이 좋아서 흙으로만 다닌다. 그래서 잔디위에 사람들이 밟아서 흙길이 만들어져있다. 나도 저 잔디위의 길로 간다. 강변에 심겨진 풀은 붓꽃이다. 조금있으면 자주색 꽃을 피우겠지. (붓꽃은 꽃을 피우기 전의 봉오리가 글을 쓰는 붓을 닮았다고 붓꽃이라고 한다더라.) 그 꽃을 꺽어서 누군가에게 주고 싶기도하고. 그제께 산에 갔다가 각시 붓꽃을 보았다. 각시 붓꽃은 산에서 자라는 데 보통 소나무아래에서 자란다. 꽃의 모양은 붓꽃하고 같고. 풀의 키가 10cm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붓꽃보다 더 예쁘다. 파와서 화분에 심어서 책상 위에 두고 싶은 꽃이다. 그런데 절대로 그리하지 말아라. 옮겨 심으면 모두 죽는다. 붓꽃이 심겨진 강 가장자리를 보면 모두 자연석으로 만들어져있다. 환경부에서 진주를 시범적으로 하여 자연 친화적 하천으로 가꾸었다. 강 가장자리의 시멘트를 모두 제거하고 모두 자연석을 다시 쌓았다. 아직도 상평공단근처에는 공사중인데 세월이 조금지나서 새로 심은 나무들이 자라면 엄청 멋있을 것이다. 아마 진주의 자랑이라해도 되지 않을런지! 여하튼 대한민국에서 처음 만든 자연친화적 하천이다. 그리고 다른 지역의 강에 비하여 강의 수량이 많다고 느껴질 것이다. 진양교 아래쪽에 수중보를 만들어서 남강의 수위를 조절한다. 그래서 남강에는 항시 물이 가득차 있다. 그래서 유등축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수중보를 고무튜브로 만들어서 홍수때에는 튜브의 바람을 빼면 수중보가 없어지고 강의 오염물질을 모두 흘려보낼 수 있다. 그래서 남강의 깨끗한 수질을 유지할 수 있다. 엄청 좋은 시설물이다. 그리고 진양호 댐도 일반적인 저수식 댐이 아니고 우리나라에서는 하나 밖에 없는 그리고 세계에서도 보기 힘든 유역 변경식땜이다. 그래서 남강의 수위 조절이 쉽다. 그래서 유등축제는 진주에서만 할 수 있는 독특한 축제가 될 것이다. 다른 도시에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예술회관 앞 야외 공연장 근처 주차장으로 가는 길옆의 꽃 밭 영산홍이 너무 많이 피었더라. 친구들을 위해 내가 찍은 사진 모두를 올리고 싶은데 글의 용량이 정해져있어서 아쉽다. 그리고 사진 솜씨도 모자라고 카메라도 안 좋고.. 그래도 아쉬워서 너무 아쉬워서 꽃 사진 하나는 남겼다. 하얀 영산홍인데 너무 청초하더라. 내 중학교때 s누나가 입었던 셔츠처럼 보이더라. 그 누나가 입었던 A라인 치마와 하얀 부라우스가 좋아서 .. 마눌한테 옷을 그리 입으라했다가 욕만 먹었다. 사진을 찍으면서 내 머리 그림자가 사진에 나와서 사실은 못 쓰는 사진이다. 문화예술회관이다. 내는 예술회관보다 꽃이 더 좋다. 그래도 예술회관 대단한 시설이다. 아마 시 자체 재정으로는 저만한 시설 할 수 없으끼다. 간혹은 공연도 보러가고 하는 곳이다. 그래도 라훈아 콘서트는 돈이 아까워서 못가고 돈 적은 것만 .. 이제 남강교가 보인다. 강변 벤치에 앉아서 담배 한 대피우고, 운동시설에서 운동 30분하고 쉬었다 간다. 쾌적한 봄바람이 좋다. 남강교 교각사이로 촉석루가 보이더라. 어릴적 그 처럼 무성하던 남강변 대숲이다. 그 때에는 왕대가 무성했었는데 예전에 한 번 대꽃이 피고 그래서 대가 모두 죽고 시에서 시민들의 추억을 생각해서 새로 조성한 대밭이다. 대나무는 평생에 한 번 꽃을 피운다. 대나무가 꽃이 피면 그 대밭은 대나무가 모두 죽는다. 제 아무리 큰 대밭이라해도 대나무들은 모두 뿌리로 연결되어져 있다. 그러니까 그 큰 대밭이 모두 한 그루의 대나무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다가 그 땅에서 대나무가 필요한 양분을 모두 흡수하고 나면 그 대나무는 꽃을 피워서 종족 퍼뜨리고 자신은 말라 죽게 된단다. 나도 아직은 대나무 꽃을 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 대밭도 꽃을 피웠단다. 인도나 동남아시아의 대나무는 우리나라 처럼 밭에 골고루 자라는 것이아니라 몇 나무씩 모여서 듬성 듬성자라더라. 그것들은 그 대밭이 전부 한나무는 아니겠지! 사진에 보이는 데크는 촉석루 포토 포인트이다. 저곳에서 찍은 의암바위 촉석루 사진이 제일 멋있게 나온단다. 우리가 달력에서 흔히 보는 촉석루 사진은 저기에서 찍은 것들이 제일 많다. 강 가장자리 제일 가까운곳에서 촉석루 사진을 찍어보았다. 누군가 촉석루 아래에 벌통을 가져다 놓았구나! 중학교때 의암바위에 옷 벗어 놓고 목욕하던 때도 있었는 데. 그리고 2십대 후반 대학 다닐때에는 커피값이 없어서 지금 사진 찍는 이곳 강변에서 데이트하고.. 하기는 그 때에는 모래밭이었고 데이트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었다. 대학때 내 자취집이 망경동에 있어서 여기에서 밤으로 목욕도 많이 했다. 하기는 그때 집에 욕실이 없어서 강 아니면 목욕할 수 도 없었고, 강위에는 황포돗배가 한가로이 떠있다. 인형을 세워서 전시해 놓은 것이 너무 장사속 인 것 같다. 이제 천수교가 보인다.저 다리를 건너서 돌아 가면 되겠지! 강변 사구위에 모란이 많이 있더라. 좀 연출을 하더라도 잘 찍고 싶은데. 모란은 너무 화려하다. 그래서 왕성한 성욕을 지닌 여자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향기가 없다나 뭐라나! 그래서 모란꽃에 벌 나비가 앉은 것을 보지 못하였다. 강변 둔치에서 천수교를 건너기 위해 이길로 사구위로 향했다. 망경동 둑길과 강변 둔치 사이의 사구길이다. 진주 성지 안보다 더 정성스럽게 가꾸어 놓았다. 오면서 보니 공공근로하는 분들이 강변 둔치를 가꾸는데 모두 할머니들이더라. 이 나무들이 자라면 여기도 숲속길이 되겠지! 천수교 남단에 있는 시인 설창수 동상이다. 진주에 개천예슬제를 만들고 진주의 문화 예술 진흥을 위해 힘쓴 사람이니 진주의 기념물 천수교에 동상을 세우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리라. 15년쯤 전에 설창수씨를 내가 심하게 나무란 적이 있다. 그 때 사대부중에서 2학년 담임을 할 때 였었는 데 내가 촌놈이라서 그 근성을 못버리고 우리반 아이들을 데리고 학교 공터에 텃밭을 가꾼적이 있었다. 순전히 삽으로 텃밭을 일구고 거기에다 상추 오이 호박 드 여러가지 작물을 키우면서 아이들이나 나나 정성을 들여서 가꾸어 나갔는데 어느날부터 오이와 가지가 저꾸만 없어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같이 근무하는 선생님들이 그런 것은 아닌가 하고 탐문해도 범인을 찾을 길이 없었고 하루는 범인을 잡기위해 아침 일찍 학교에 출근을 했는데 어수룩한 영감 한사람이 마침 우리학급 텃밭에서 오이를 따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성질 고약하고 또 급하였으니 그 영감을 잡고 얼마나 나무랐을까? 그 영감은 미안하다고 잘못하였다고 내게 사정하고 빌고 나는 그것이 큰 죄나 되는 것처럼 호통치고 나무라고.. 그래도 부모뻘도 더 되는 영감이 하도 잘못했다고 비니까 나도 마음이 풀어져서 교무실로 올라오니 교장 선생님이 교장실로 불렀다. 교장실로 들어서니 교장선생님 왈 "이 선생님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그처럼 호통쳤어요" 알고보니 그 영감이 설창수였었다. 잘못했다고 그처럼 사정하면 나이를 보아서라도 그냥 보내주지 왜 그리 심하게 나무랬냐고 .. 하기는 그 영감도 이야기가 아침에 잠이 안와서 일찍 학교 운동장에 나와서 운동을 하고 그 시간쯤이면 배도 많이 고프고(영감들은 새벽 세시만 되면 잠이깬다.) 미안하지만 학생들이 농약도 치지않고 비료도 주지않고 키운 무공해 채소라서 먹고 싶어서 좀 먹었다고 하더라. 지금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도 가고 그 사정이면 나도 따 먹을 것 같았는데 그 뒤에 두고두고 그분한테 미안했었다. 그 영감은 그 이후로는 창피해서 우리학교에 운동하러 오지않았고... 이곳도 예쁘게 잘 가꾸어 놓았다. 확실히 옛날의 임명직 시장하고 요즘의 선출직 시장은 차이가 많이 난다. 천수교 남단의 교량 건립 기념 조형물들이다. 이 외에도 기념 조형물이 더 있는데 별로 큰 공적도 아니면서 자기 이름 엄청 올리고 싶었는가 보다. 하기는 누구나 그런 욕망은 있을 것이다. 1969년 12월 어느날 저녁에 그때 나는 고3이었다. 술을 엄청먹고 새로 건립된 진양교를 건넜다. 다리난간의 시멘트가 아직 굳지도 않았을 때였다. 공사장 주변의 대못을 주워 다리 난간에 " 인간 이재효 여기에 다녀가다. 1969. 12월 모일"이라고 파놓았다. 그 뒤에 일년 정도 지나서 그 난간에 보니 그글이 그대로 있어서 흐뭇해 했는데 그 뒤에 보니 시멘트를 덧발라서 모두 지웠더라. 저 조형물에 자기의 이름을 올린 사람들 그때의 내마음하고 같지 않을까? 천수교 다리위의 자전거 도로이다. 서장대이다. 어렸을 때 중2때 성안에 살았었는데 그때에 저기 놀러 많이 갔었다. 그 때 여름 어느날 새벽은 어떻게 오는 지 밝혀낸다고 저 벼랑의 중턱에 앉아서 밤을 새운적이 있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 지나고 밤 새소리, 여울에 강물지나는 소리도 잦아들 즈음, 갑자기 세상이 고요해지면서 호국사의 종소리도 잦아들고, 동녁이 발가오더라. 흔히 어른들이 말하는 동트는 새벽녁이겠지! 그래서 아침은 이렇게 찾아 오는 가 했는데 동이 트던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스산한 바람이 불더라. 그러다가 여명이 밝아오고... 강물이 다시 흐르더라. 그 기억이 진실인지는 모르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아침은 그렇게 온다고 믿고 있다. 그 신비한 경험은 내 평생잊혀지지도 않고... 지금도 믿는다. 새로운 세상이 오기위해서는 천지가 다시 한 번 어둠에 휩싸인다는 것을.. 요즘은 서장대에 야간 조명을 한다. 밥 늦게 천수교를 지나다 보면 어두운 하늘에 찬란한 누각하나가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천상 누각이라고 할까? 늦은 밤 혹은 이른 새벽에 그것도 달도 없는 깊은 밤에 천수교에서 서장대를 한 번 보라 아주 신비하다. 나불천과 남강이 만나는 합류지점이다. 이 둔치에서 진주 소싸움을 하다가 지금은 진양호쪽으로 소싸음 경기장을 옮기고 분수대 풍차 등을 설치하였다 이곳은 본래 "진주 민란"의 주모자 류계춘이 처형된 곳이다. 진주 민란은 1862년 철종 13년에 일어난 진주지방의 농민 봉기 운동이다. 그 당시 토지 소유의 불균형 그리고 과다한 세금에 항거하여 일어난 우리나라 최초의 농민항쟁이다. 동학란은 이보다 뒤에 일어 났었고 지각없는 그들의 행동 때문에 외세가 조선을 지배하는 빌미를 제공했지만 진주 민란은 그들이 진주성을 함락시키고도 외세 침입을 염려하야 류계춘 스스로 포박되어 서장대 아래에서 참수되었다. 우리들이 어렸을때 부르던"이거리 저거리 갓걸이 진주 망건 또 망건..."하는 노래가 그 당시 농민군들의 군가였었단다. 동학란때의 군가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남ㄱ에 앉지마라.." 아마 우리나라 군가 중에서 제일 빠른 것이 이거리 저거리 갓걸이 이끼다. 류계춘의 묘소가 진수교 남단에 있는데 가보니 찾는 사람도 없고 참 쓸쓸하더라. 아마 진주 정신의 정체성을 찾는 다면 나는 이 철종조때의 농민 운동과 그 뒤의 형평운동이 아닌가 한다. 이 농민 운동을 효시로 해서 철종조때에 각지에서 농민소요가 들불 같이 일어 났다. 글의 후미에 진주 민란의 자료를 올려놓는다. 진주 정신을 알고 싶으면 읽어보라. 서장대, 더운 여름날 이곳에 오면 바람이 참 시원했었는 데 호국사, 이순신 만이 충무공인것이 아니고, 진주성 대첩을 이룬 김시민도 충무공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충무공은 고유명사가 아니고 훈장 이름을 말하는 보통명사이다. 진주 박물관이다. 건물만 좋다. 내용은 안 좋다. 본래는 가야사 전문 박물관이었다. 그래서 가야 유물을 보려면 반드시 진주에 와야만 했었고 찬란한 가야 문화에 대한 자부심도 내게 있었다. 우리는 흔히 가야가 고구려나 신라. 백제보다 문화가 떨어지는 나라인줄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알기에는 그렇지 않다. 삼국시대?(사국시대)때에 왕의 무덤에 사람을 순장시킨 나라는 가야밖에 없다. 사람을 순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강력한 왕권을 가졌다는 증거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 때 진주박물관에는 철기가 아주 많이 전시되어있었다. 고구려 박물관은 보지 못했지만 경주 박물관 부여박물관 공주박물관의 철기는 아주 빈약하다. 지금도 김해에 있는 국립 박물관에 가보면 진주 박물관에서 전시했던 말갑옷등 수많은 철기 가야 유물이 있다. 가야는 사국중에서 제일 먼저 철기를 받아들이고 생산한 나라이다. 철기와 청동기의 싸움은 지금으로 말하면 탱크와 전투기의 싸움 정도라고 할까? 그러나 가야는 한나라가 아니고 12개국?연합체이므로 영토의 확장에는 곤란했겠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가야를 합병 할 수 있었던것도 울산 부근에서 신라 자체로 철을 생산 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골동품점에 가보면 가야토기는 몇 만원에 살 수 있다. 가야토기가 신라토기나 백제토기보다 조형미에 있어서는 뛰어나게 예쁜데도 그리고 시기적으로도 더 빠른데도 가격이 싼 것은 그양이 ?아서 이다. 그만큼 가야 사람들이 신라나 백제 고구려보다 화려하게 생활했었고 무덤에 더 많은 부장품을 넣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 만큼 문화가 발달했다는 이야기 이겠지! 그 찬란한 가야 유물들을 진주 박물관에서 5년쯤전에 김해 박물돤으로 모두 옮겼다. 진주 박물관에는 가야 유물이 한 점도 없다. 심지어 진주 사람들이 기증한 유물(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진주 박물관에 가야 유물울 기증했었다.)들마저도 기증자의 뜻과 다르게 김해 박물관으로 모두 옮겼다. 그리고 진주 박물관은 임진왜란 유물만 전시한다. 찬란한 가야 역사를 빼앗기고 우리 5000년 민족사의 극히 작은 조각(7년) 그 것도 일부분만 받아 온 것이다. 박물관의 유물을 바꿀 때에 진주 지역의 지역 신문도 시민단체도 아는 지 몰랐는지 아무 반응이 없었다. 힘없는 내가 아무리 술자리에서 억울함을 역설해도 소용도 없고 진주 사람들 바보처럼 당했다. 지금도 가야의 옹관묘, 곡옥, 도전, 철기 말갑옷, 등을 보러 김해에 갈때도 있다. 지금 생각해도 억울하다. 진주 사람들 바보이다. 지금은 진주 박물관에 절대로 안간다. 5000년 민족사에서 7년 왜란이나 36년 피침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 기념 박물관을 만들고, 삼일절, 광복절, 독립기념관을 만드는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한글날은 없애면서 말이다. 안산마을이 있던곳이다. 정윤화. 정권화, 김순옥이 주그집이 있던곳이다. 지금은 동네가 없어지고 깨끗한 잔디밭으로 변했다. 진주성 북문이다. 문 중앙 통로의 왼쪽에 박종철이 주그집이 있었고 오른쪽에 키다리 차용환하고 이재효가 살고 있었고 문을 지나면 왼쪽에 김도봉하고 공상구가 있었고 조금 더가서 중안학교 교문에 박종수 주그집 이었다. 그자! 조금 더가서 중안학교 뒷쪽에 조재을이 있었고. 서부시장 곁에 최상복.. 루석촉이다.촉자가 곧을직자 세개로 이루어져 있더라. 그돌은 잘 부러지겄다. 아마 진주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는 글자라고 생각된다.(쓴 방향대로 읽으면 루석촉이다) 옛날 KBS 방송국앞의 공터 개천 예술제 할때 대부분의 행사를 여기에서 치루었다. 그 때 내는 집이 부근에 있었는데 예술제 행사기간 내내 새벽에 일어나서 여기에 동전 주으러 왔었다. 당시에는 상당한 수입이 있었다. 그 돈가지고 짜장면도 사먹었고..... 형평운동 기념비이다. 백정들의 인권운동인데.. 그 당시에도 진주에서는 인권운동을 했는 갑더라. 정동주의 장편 대하소설"백정"이 형평운동을 배경으로 쓴 소설이다. 진주의 과거를 알고 싶으면 그 소설을 읽는게 제일 빠르다. 진주 각 지역의 예날 이름 유래 그리고 사람들 모두 알 수 있다. 형평운동을 이끈 강상호의 묘소는 석류공원 근처에 있다. 그 묘소는 표지판도 있어서 찾기가 쉽다. 진주성 촉석문에서 남강교까지의 도보로, 자연석으로 이루어진 강 가장자리로 걸으니 참 좋다. 남강교 교각 사이로 본 진주성, 나는 다리 아래가 좋더라. 때 이르게 노란 붓꽃이 피었더라. 남강교에서 동방호텔까지의 도보로 동방호텔이다. 이제 거의 다 왔다. 곁의 남강한주에 우리의 지기 태열이가 산다.(이거 안쓰모 혹시 카페에 몬들어 오게 할까바서 쓴다) 동방호텔을 지나고 뒤벼리쪽으로 가는 데 길아래에 이런 도보길이 있다. 겨울에는 따?하고 길가의 애기 똥풀이다. 우리들이 흔하게 보는 풀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름도 모르고 그냥 무심히 이름없는 풀이라고 지칭하는 꽃이다. 줄기를 잘라보면 애기똥처럼 노란 물이 나온다. 그래서 애기 똥풀이라고 한다. 처음 필적에는 참 예쁜데 이제 질때가 되어서, 꽃이나 사람이나 늙으면 가야하능기라. 이제 다왔다. 이곳에서 물을 뽑아 올려서 초전들로 간다. 그 취수구 위이다. 진양교가 보인다. 집으로 가다가 남의집 울타리에 있는 라일락 본래 우리나라에서는 라일락을 "수수꽃다리"라고 했는데 서양사람들이 가지고 가서 품종에 손을 대고 라일락이라고 이름해서 우리한테 넘어왔다. 그래도 꽃 송이는 수수 같다. 그자! 내 마눌 가로사대 "완전히 돌았다" 하기는 돌기는 돌았다 남강 한바퀴 그것도 완전히! 그래도 운동 한 번 잘했다.
진주 농민 봉기 운동 1862년(철종 13) 경상도 진주에서 일어난 농민봉기.임술년인 1862년에 단성에 이어 2번째로 발생했는데, 본격적으로 전개된 후 여타 지역의 농민봉기를 선도했다. 진주에서는 농민층 내의 소유와 경영을 둘러싼 계층분화가 극심했고, 많은 농민들이 빈궁에 허덕이고 있었다. 즉 소유분화가 심하여 1846년(헌종 12) 진주 나동리의 경우 약 6%의 토지소유자가 44%의 농지를 소유했으며, 63%에 달하는 빈농층은 18%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또한 경영상의 분화도 극심해 1845년 가서리의 경우 1결 이상 경작하는 부농은 3.6%이며, 이들의 경작면적은 29.6%에 달했다. 반면 25부(負) 이하를 경작하는 빈농은 72.5%에 해당되나 경작면적은 27.3%였다. 특히 10부 이하의 극빈농층이 있었다. 부세를 이용한 수탈이 심각해지면서 진주농민들은 한층 더 궁핍해졌다. 관속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횡령한 후 그 횡령분을 농민 부담으로 전가시키려 했는데, 특히 진주목사 홍병원(洪秉元)이 주도한 도결(都結)과 우병사(右兵使) 백낙신(白樂莘)이 주도한 통환(統還)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진주농민항쟁의 전개과정은 발생시기별로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1단계는 2월 14~17일에 봉기가 발발하고 각 면·리별로 집결한 과정이다. 이때는 도결과 통환을 철폐하기 위해 향회를 개최하여 농민들의 공론을 모아 경상감영에 그 철폐를 호소하는 한편, 철시(撤市)를 비롯한 실력행사를 했다. 이 단계에서 유곡면(柚谷面) 내평촌(內坪村)에 살던 몰락양반 유계춘(柳繼春)과 초군(樵軍)의 좌상으로 극히 빈한한 몰락양반이었던 이계열(李啓烈)이 활약했고 이 지역의 명문사족이자 홍문관 교리를 지낸 이명윤(李命允)도 부당한 부세문제의 시정을 위해 참여하여 민 주도의 향회개최시 관의 개입을 막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제2단계는 2월 18~20일에 읍내 공격이 단행된 시기로 수곡(水谷) 도회(都會)와 수청가회의를 통해 의론을 결집한 농민들이 무력봉기를 꾀하여 읍내를 점거했다. 읍내 공격에는 공동노동 조직으로서 자체 결합력을 지니고 있었던 초군들도 대거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농민들은 외형상 부세수취를 담당했던 이서(吏胥)들을 살해했다. 제3단계는 20~23일에 무력봉기를 지역적으로 확대한 시기로 외곽으로 나가 각지의 양반, 무단토호, 보수적 요호부민(饒戶富民) 등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이 시기에는 주로 빈농·초군 등 항쟁과정에서 부각된 인물들이 농민군을 편성하여 주도권을 장악하고 지주제 등 광범한 봉건적인 모순을 문제삼고 있었다. 4일 동안의 공격을 끝내고, 23일 밤에 일단 해산했다. 그러나 그 이후 농민군은 완전히 해산하지 않고 재차 봉기했는데, 이를 제4단계로 보고 있다.
진주민란의 전개과정에서는 국가 대 농민의 조세수취관계의 모순에 대한 시정에서 점차 지주제 등 제반 봉건적 모순에의 항거로 그 목표가 전화되었으며, 주도층 역시 항쟁의 내재적 발전에 따라 전이(轉移)·발전해가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같은 진주의 농민항쟁에 대해 정부에서는 안핵사 박규수(朴珪壽), 암행어사 이인명(李寅命), 영남선무사 이참현(李參鉉)을 파견하여 수습하게 했다. 이중 박규수는 진주민란이 사족(士族)과 요호부민의 주도에 의해 일어나고 농민들은 이에 추종한 것에 불과하다고 파악하여, 사족과 요호부민의 각성을 촉구하면서 농민에 대해서는 유화책을 취하려 했다. 항쟁의 직접적인 계기는 삼정(三政)의 문란, 특히 환곡의 문란에 있다고 분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삼정의 구조적·제도적 개혁을 촉구했다. 진주민란은 기본적으로 반봉건투쟁의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개항 이전의 시대적 한계로 지주제 개혁과 농민적 토지소유의 실현에 대한 농민들의 요구는 반봉건투쟁의 전반적인 강도와 수준에 비해 미약한 편이었다.
형평운동
백정이라는 칭호는 고려시대에는 평민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도살업(屠殺業)을 전문으로 하는 천민계층을 뜻하게 되었다. 백정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해방의안(解放議案)에 의해 법제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여러 가지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다. 백정들은 기와집에서 살거나 비단옷을 입을 수 없었고, 외출할 때는 상투를 틀지 않은 채 평량자(平凉子:패랭이)를 써야 했으며, 장례 때도 상여를 사용할 수 없었다. 또한 학교나 교회에서도 함께 수업을 받거나 예배를 볼 수 없었고, 상민들과 떨어져 집단으로 거주했다. 더욱이 일제는 조선의 봉건적 질서를 온존하는 정책을 썼기 때문에 행정적으로도 차별을 받았다. 즉 민적(民籍)에 올릴 때 이름 앞에 붉은 점 등으로 표시하거나 도한(屠漢)으로 기재했을 뿐만 아니라 입학원서나 관공서에 제출하는 서류에도 반드시 신분을 표시하도록 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불만은 조직적인 사회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1923년 4월 25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강상호(姜相鎬)·신현수(申鉉壽)·천석구(千錫九) 등 양반 출신 사회운동가들과 장지필(張志弼)과 같은 백정 출신 지식인, 이학찬(李學贊)과 같은 경제력을 갖고 있던 백정은 계급을 타파하고 백정에 대한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고 상호 친목을 도모하여 백정도 참다운 인간이 되게 한다는 목적하에 형평사를 설립했다. 이들은 발기총회에서 결정된 사칙을 통해 진주의 본사를 중심으로 각 도에 지사를, 각 군에 분사를 두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구성할 것을 명시했다. 이에 호응하여 전국 각지에 지사와 분사가 활발히 설치되자, 1924년 2월 전국의 지사·분사 대표 300여 명이 부산에 모여 '형평사전조선임시총회'를 개최했다. 이때 전라도·충청도·강원도를 기반으로 한 장지필 등 혁신파는 본사를 서울(경성)로 이전할 것을 주장했고, 경상도를 기반으로 한 강상호·신현수 등 보수파는 진주 본사를 고수할 것을 주장해 내부 대립이 표출되었다. 전자가 형평운동을 사회주의 노선에 입각한 계급해방운동으로 발전시키려 한 반면, 후자는 형평운동을 인권운동으로서 유지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2파의 노선 차이는 컸다. 혁신파가 부산 임시총회 후 천안에서 '형평사혁신동맹창립총회'를 열어 본사의 서울 이전, 잡지 〈형평〉의 발간, 피혁공장 설립 등을 결의하자, 보수파는 그해 4월 진주에서 '형평사전국대회'를 따로 열었다. 이러한 양파의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 같은 해 7월 양파 간부들이 간담회를 열어 형평사 통일을 논의하고, 8월 대전에서 '형평사통일대회'를 열었다. 양파는 각자의 조직을 해체하고 '조선형평사중앙총본부'를 결성하기로 합의하고 서울에 본사를 두기로 했으나, 다시 내분이 발생해 진주 본사측에서 대전대회의 불승인을 결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사회운동단체의 지원에 힘입어 양파의 통일은 진전을 보여, 1925년 4월 양파 합동으로 서울에서 '전조선형평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이후 운동은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또한 1924년부터 조직된 형평청년회·형평학우동맹의 구성원들이 청년운동단체에 가입하면서 다른 사회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나갔는데, 이러한 형평사의 조직과 운동의 확대에 힘입어 형평청년회는 조선형평청년총동맹으로 발전되었다. 이에 1926년 1월 장지필은 '재경(在京) 사상단체 합동신년간친회'에서 형평운동 부분을 보고하고, 조직강화와 무산운동(無産運動)으로의 진출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1926년 12월 고려혁명당사건으로 서광훈(徐光勳)·장지필 등 간부들이 구속되자 1927년 4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5차 형평사대회에서 명칭을 조선형평사총본부로 바꾸고, 1928년 4월 제6차 정기총회에서는 일본 수평사(水平社)와의 제휴를 정식으로 결정했다. 이 시기부터 다른 사회운동과의 제휴를 주장하는 신파와 전통적인 평등운동을 주장하는 구파 간의 대립이 다시 일어나 1929년 제7차 정기대회에서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이후 신파는 형평사 해소론을 제기했으며, 해소론을 둘러싼 대립은 1930년대초까지 계속되었다. 1934년 일반 사회운동의 저조 속에서 형평사 지부의 재정리가 단행되고 활동도 공제활동 정도로 축소되었으며, 1935년 대동사(大同社)로 이름을 바꾸면서 적극적인 사회운동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형평운동은 형평사 창립 초기부터 많은 시련에 부딪쳤는데, 그중 하나는 봉건적 관습에서 탈피하지 못한 일반 농민들의 거부감에서 오는 반(反)형평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형평운동이 인권운동의 차원을 넘어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 속에서 다른 사회운동과 제휴하여 전개됨에 따른 일제의 탄압이다. 이러한 2가지 시련에 대한 투쟁은 형평운동이 반제국주의적·반봉건적인 성격을 갖게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형평운동은 백정들의 신분해방·인권운동인 동시에 다른 사회운동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 진행된 민족해방운동의 한 부분이기도 했다. → 조선형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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