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 고수들 / 허숙희
동네 스피커에서 이장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기계 성능이 좋지 않아 잡음이 심하다. 정확하게 들을 수 없어 밖으로 나가서 들었다. 저녁밥은 회관에서 준비하니 한 분도 빠짐없이 모여 달라는 내용이었다. 농사일이 없는 집은 비료 주문이나 매실, 고사리를 비롯한 각종 농작물 수매 안내는 듣지 못해도 별문제가 없다. 그러나 마을 대청소와 동네 회의 안내 그리고 오늘 같은 내용은 놓쳐서는 안 된다. 다 같이 함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뉴스는 듣지 못해 궁금하면 인터넷으로 검색하거나 다시 보기로 알아낼 수 있다. 그러나 마을 방송은 다르다. 아무 때나 하고 재방송도 하지 않아 다시 들을 수 없다. 외출하거나 문을 꼭 닫고 집 안에 있어 못 들으면 내용을 알 수 없다. 언젠가 마을 어르신의 부고 소식을 듣지 못해 곤란한 적이 있었다. 그 후로 티브이(TV) 종합 뉴스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 신경 써서 귀를 기울인다.
방송에서 시간을 정확하게 알려 주지 않을 때가 많다. 오늘도 저녁 식사 시간이 몇 시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냥 각자 알아서 온다. 그래도 거의 같은 때 다 모인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고향에 내려와 처음에는 아침과 저녁이 몇 시를 말하는지 알지 못했다. 얼마 후에야 아침은 새벽 다섯 시쯤이고 저녁은 오후 여덟 시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동네는 비닐하우스에서 양상추와 수박 농사를 일 년 내내 짓는 농가가 대부분이라 더 바쁘기 때문인지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기준과는 너무 달랐다. 계절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이젠 나도 알고 행동한다.
오후에 미리 가서 도울 생각으로 서둘러 마을회관으로 갔다. 이른 시간이라 아무도 없었다. 주방에 들어가 보니 작은 생선이 한 바구니 있었다. 지난번 부녀회에서 문저리(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서 자라는 물고기인 망둑어의 사투리) 회무침을 해 먹자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마 그 생선인 것 같다. 누군가 이웃 장에 가서 사다 놓은 것이다. 준비된 재료가 있으면 손질해 놓으려고 여기저기 찾아보아도 냉장고 안에 김치만 조금 있을 뿐 재료 될 만한 것이 없었다. 물고기 손질은 자신 없어 손도 대지 못했다. 쌀만 씻어 놓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어둑어둑해지니 회무침에 들어갈 풋고추와 깻잎, 파, 무, 파프리카, 배, 마늘을 각자 알아서 챙겨 들고 부녀회 회원들이 다 모였다. 할 일을 나누느라 잠깐 웅성거리더니 어느새 각자 손길이 바빠졌다. 누군가가 생선의 머리와 지느러미를 떼어내면 옆에서는 배를 가르고 내장을 모두 꺼낸다. 그리고 막걸리로 바락바락 주물러 물로 살짝 헹군다. 다음엔 뼈를 발라내어 넓게 펴서 쟁반에 펴 놓는다. 키친 타월로 물기를 콕콕 찍어 내고 꼬들꼬들하게 해야 한다며 냉동실에 잠깐 넣어 둔다. 한쪽에서는 무와 배, 깻잎, 파프리카, 파를 채 썰고 마늘은 다진다. 그리고 고추장에 고춧가루, 매실청과 식초, 설탕을 적당하게 넣고 섞어서 초고추장을 만든다. 다음으로 손질해서 넣어 둔 문저리를 꺼내 도톰하게 썰어 커다란 양푼에 담고 준비해 놓은 갖은 채소와 초고추장을 넣어 버무린다. 마지막으로 통깨를 솔솔 뿌린다. 시작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끝났다. 큰 그릇에 하나 가득 꽤 많은 양이었다. 뒷집에 사는 ㅈ가 양념 묻은 손으로 꽤나 많은 양을 집어 입에 넣어 주었다. 새콤달콤하고 쫀득쪽득한 것이 어디에서도 먹어보지 못한 맛이었다. 레시피도 없다. 물론 계량컵이나 계량스푼도 필요 없었다. 그냥 눈대중으로 뚝딱 만들었다. 오래전 가을이면 해 주시던 어머니가 생각났다.
남편이 양손에 막걸리 몇 통을 들고 들어섰다. 뒤이어 이장이 마당에서 딴 단감을 한 소쿠리 그득히 담아서 가지고 왔다. 얼마 후 남자들이 모두 모였다. 상을 펴고 커다란 접시에 수북하게 담아서 내놓았다. 많던 회무침이 금방 없어졌다. 양념이 남아 있는 문저리를 버무린 그릇에 남겨 두었던 손질한 채소와 참기름을 넣고 밥을 비볐다. 순식간에 비빔밥을 만들었다. 모두 요리 고수들이다. 그들은 다음에는 전어 회무침을 해 먹기로 했다. 다음 장날에 들려 줄 이장님의 방송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