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젖은 복도 / 정선례
5년 전 병원에 입원해 있던 어느 주말 저녁이었다. 같은 호실을 쓰던 환자 두 분이 하루 이틀 간격으로 퇴원을 했다. 사람의 기척이 빠져나간 병실은 소리마저 달라졌다. 늘 켜져 있던 텔레비전 소리도 들리지 않고 마주보고 주고받던 수다도 없다. 원래 텔레비전을 보지 않아서인지 나는 소리에 무척 예민하다. 입원할때마다 스펀지 재질의 귀마개를 챙긴다. 일요일 저녁까지 이 고요를 누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은근히 들떴다.
이른 저녁을 먹고 병원 뒤쪽으로 이어진 산책로를 걸었다. 병원에서 유일하게 바깥 공기를 느낄 수 있는 길이다. 몸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그날은 발걸음이 가벼웠다. 병실로 돌아오니 침상 옆에 놓아둔 한약에 손을 대 보니 식어 있었다. 따뜻할 때 먹어야 하는데 어쩌나... 그냥 먹으면 효과가 떨어질 것 같고 데우자니 방법이 마땅치 않다.
그때 병실 입구 안쪽에 채소나 과일을 간단히 씻는 용도의 작은 세면대가 눈에 들어왔다. 한약이 담긴 비닐 봉지를 세면대 안에 넣고 바닥 중앙 배수구를 막은 뒤 뜨거운 물을 틀었다. 물이 차오르면 봉지를 감싸면서 데워질 것이다. 세면대에 물이 넘치는 것을 막는 구멍이 있다. 일정 높이에서 빠져나갈 거라 여겼다. 물이 차오르는 걸 확인하고 휴대폰을 들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를 예상하지 못했다. 샤워를 하며 휴대폰 동영상을 크게 틀었다. 물소리가 꽤 컸지만, 그 위로 익숙한 멜로디의 음악이 겹쳤다.
네덜란드 출신의 혼성 록 밴드가 부른 ‘팔로마 블랑카(Paloma Blanca)”로 1975년 히트곡이다. 밝고 경괘한 선율의 이 곡은 라디오 신청곡 순위에서 오랫동안 상위권을 차지해서 귀에 익은 멜로디로 제목은 우리말로 ‘비에 젖은 비둘기’이다. 한 마리 비둘기가 자유를 찾아 새장을 빠져나온 기쁨을 노래한 가사다. 스페인어로 ‘하얀 비둘기’라는 원곡이 경쾌한 선율로 흘러나오자 샤워기 물소리 속에서도 또렷이 들리는 밝은 멜로디가 병원이라는 공간마저 잠시 잊게 했다
엉덩이를 뒤로 빼고 양 팔을 올려 주먹을 가슴께로 모은 후 허리를 구부려 엉거주춤한 동작으로 몸을 양옆으로 흔들어 두 발을 번갈아 떼며 샤워를 즐겼다. 이렇듯 나는 때때로 흥을 주체 못하며 스스로 즐기는 버릇이 있다. 누군가 이 장면을 봤다면 혼자 보기 아까우리만치 우수광스러워했을 것이다.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고 있는데 화장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간호사가 황당한 얼굴로 짧게 말했다.
“복도로 물이 넘쳤어요.”
“네?” 깜짝 놀라 세면대를 보니 수도는 이미 잠겨 있었다. 환자복을 황급히 입고 복도에 나가보니 길게 뻗은 복도 바닥 위로 물이 흘러 번들거린다. 보호자와 환자들이 하나둘 나왔다. 누군가는 쓰레받이를 가져와 바닥의 물을 긁어 모아 한쪽으로 모이면 세수대야에 퍼 담았다. 또 다른 사람은 밀걸레로 바닥을 닦아 냈다. “이쪽 좀 더 밀어 주세요.” “여기 아직 미끄러워요.” 여럿이 손을 보태니 언제 그랬냐는 듯 상황이 금세 정리되었다.
문제는 넘침 방지용 구멍이었다. 세면대 앞쪽 곡선보다 그 구멍이 더 높은 위치에 뚫려 있어 물이 앞으로 넘치기 전에 세면대 앞쪽으로 먼저 넘친 것이다. 물은 바닥의 미세한 기울기를 따라 문 쪽으로 흘러가서 복도로까지 이어졌다. 상황이 수습되자 수간호사 선생님 얼굴이 떠올랐다. 입원해 있는 동안 잘 챙겨 줬는데 이런 민폐를 끼치다니 얼굴이 뜨거워졌다.
“내일 선생님 얼굴을 어떻게 보지?”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마주치는 게 미안해서 다음 날 수간호사가 회진을 도는 시간에 맞춰 나는 일부러 병실을 비웠다. 운동실로 가서 서성이다가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다시 돌아왔다.
지금도 어쩌다 라디오에서 이 곡이 흘러 나오면 물이 번진 복도와 민망해서 고개를 들지 못하던 순간이 떠오른다. 작사 작곡에 노래까지 부른 싱어송라이터 조지 베이커(George Baker)가 말하길 이 노래는 노예처럼 하루 종일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가난한 남미의 농부가 자유로운 새가 되는 꿈을 노래한 곡이라 했다. 하얀 비둘기. 자유, 순수, 희망을 의미한다. 그런데 내 머릿속에는 ‘비에 젖은 비둘기’라는 제목이 더 오래 남았다. 어딘가 젖어 있고, 어딘가 어설프고, 혼자서 수습하지 못해 주변의 손을 빌려야 했던 그날의 모습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첫댓글 선생님 덕분에 그 노래를 찾아 들었습니다. 경쾌한 곡에 그런 사연이 깃들여 있네요. 그때 얼마나 당황하셨을까요? 홍당무가 되셨을 듯.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누구나 실수는 하는데, 좀 일이 크네요. 하하!
재미있는 실수를 하셨네요.
민망했을 일을 생각하니
내가 아찔해지네요.
실수로 때로는 성숙해 지기도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그 노래를 다시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