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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54.24
26.08.25(화)
오늘 본문 말씀은 불과 4단어로 이루어져 있는 지극히 짧은 구절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런데 이 짧은 구절이 얼마나 중요하냐하면 창세기 첫 구절일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의 시작 구절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믿음은 바로 이 구절에서부터 시작되는 거여요.
이 말씀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만약 믿는다면 이 말씀을 어느 정도로 믿느냐에 따라서 한 인간의 인생의 삶의 방향과 과정과 질과 의미와 수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 나를 포함해서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결국 원숭이 후손일 수 밖에 없죠
우연히 태어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 인생의 주인을 자기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여러분 어느 나라든지 사람들은 핏줄을 중요시합니다. 혈통을 중요시하는 거죠. 왜 그럴까요? 피가 생명이기 때문에 어떤 생명 줄을 타고났느냐 중요할 수 밖에 없지 않겠어요.
만약에 창세기 1장1절을 믿지 못해서 원숭이 후예로 살아간다고 하면 원숭이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겠습니까?
원숭이의 혈통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원숭이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겠느냐 그런 말이어요 창세기 1장1절을 믿지 못한다면 우연히 태어난 존재입니다.
우연히 이 세상에 던져진 돈 존재여요 삶의 목적이 있을 수 없죠 삶의 의미가 있을 수 없죠 무엇이 바른 삶의 향방인지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 수 있겠어요.
그저 이리저리 마음 내키는 대로 살다가 끝나는 수밖에 없겠죠.
창세기 1장1절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 각자 인간이 우리 각자 인생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가 과연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될 자질과 능력과 수준을 갖추고 있는가 여러분 우리가 가끔 하는 말 중에 내 마음 나도 몰라 이런 말이 있어요.
여러분 우리가 나를 모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언행을 하고 나서 곧 돌아서면서 왜 내가 그랬을까?
내가 이해 안 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내 마음을 스스로 알지 못하는 존재인데 내 인생의 주인 역할을 바르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더더욱 우리의 코끝에서 호흡이 멈추는 순간부터 우리는 썩어 문드러지는 존재 아닙니까?
그래서 결국은 한 줌의 흙으로 끝나버린단 말이죠.
그런 존재가 내 인생의 주인 역할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결국 창세기 1장 1절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는 망망대해 속에 버려진 일엽편주와도 같습니다.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그 항해의 목적도 향방도 찾지 못한 채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파도가 밀리면 밀리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어느 순간에 흔적도 없이 망망대해 속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지요.
그러나 창세기 1장 1절을 믿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포함해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셨기에 창조의 목적이 있으실 것 아니에요.
1장 1절을 믿으면 내 인생의 목적이 생깁니다.
내 인생이 비로소 의미를 가져요
그분이 나를 창조하셨음을 믿는다면 내가 결국 가야 할 곳이 그분 아니겠어요. 내 인생의 향방이 결정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셨음을 믿는다면 내 인생이 아무리 망가져도 아무리 깨어져도 아무리 회생 불능처럼 보여도 그분이 고치실 수 있으실 것 아니에요. 그분이 고쳐주실 것 아니에요.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을 믿으면 소망이 생기는 거예요.
내가 창세기 1장 1절을 믿는다면 그분이 나를 창조하신 분이시기에 창조하신 그분의 말씀대로 살면 내 인생이 바르게 구축되지 않겠느냐 말이여요.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셨음을 믿는다면 이 성경 말씀은 인생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인생 사용 설명서로 받아들여지거든요.
따라서 창세기 1장 1절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서 이처럼 삶은 확연하게 달라져요
우리가 창세기 1장 1절을 믿어도 인생은 망망대해의 일엽 편주와 같다는 의미에서는 동일하다 할 수 있어요. 인생은 망망대해입니다. 이 망망대해에 비하면 우리는 일엽 편주와도 같아요.
그러나 내가 창세기 1장 1절을 믿으면 똑같이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이 일엽 편주인 것 같지만 나는 내가 어디로 항해해야 할지를 아는 거예요.
이 항해의 방향을 압니다. 이 항해의 의미가 뭔지 내가 알아요. 내가 타고 있는 이 일엽 편주가 보잘것없다. 할지라도 이것을 어떻게 가꾸고 다루어야 할지를 압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창세기 1장 1절을 믿을 때에 이 일엽편주의 선장이 나를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 되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똑같이 망망대해에 일엽편주가 가는 것 같지만 전혀 다르죠
블랭크 혼이라고 하는 분이 지은 찬송가 중에 이런 은혜로운 가사의 찬송가가 있습니다.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두운 바다 저 등대의 불빛도 희미한데 이 풍랑에 빠지어 항해하는 주 예수님 이 배의 사공이라 나 두려움 없네 두려움 없도다 주 예수님 늘 깨어 계시도나 이 흉흉한 바다를 다 지나면 저 소망의 나라에 이르리라
망망대해 속에서 항해하는 일엽편주이지만 때로는 풍랑을 만나지만 때로는 폭풍을 만나지만 두려워할 것이 없어요.
왜 이 배의 사공이 나를 창조하신 그분이세요.
내가 1장 1절을 믿을 때 그리고 그분이 나를 데리고 저 소망의 나라로 인도하신단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창세기 1장 1절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믿는다면 얼마나 믿느냐 이 1장 1절의 하나님께 내 삶을 얼마나 의탁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삶의 내용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창세기 1장 1절의 구체적인 단어의 의미들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한글말로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원어를 한번 보십시다.
히브리 말은 거꾸로 가죠 그죠
그래서 브레시트 태초에 언제 태초에 우리 한글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 이렇게 되어 있는데 원어는 태초에 무슨 일이 빠라 창조하셨다 태초에 창조가 있었다.
누가 창조했다는 말이냐 엘로힘 하나님이 뭘 창조하셨다는 말이냐 에트 하셔마인 하늘과 제 앤드 에트 하 아레츠 땅을 창조하셨다
그래서 히브리 말로도 저렇게 기록이 되는데 우리말하고 순서가 지금 조금 달라져 있죠.
그래서 히브리 원어 순서대로 한 단어씩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처음에 태초라는 말이에요.
이 태초라는 말은 이거는 뭐뭐 안에 영어로 인이라는 말이에요.
그 다음에 브레시트라고 하는 이 말 브레시트 여기 뿌에 레시트 요 뒤에 있는 이 말은 기원 시작 이런 말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인 더 비기닝 이렇게 번역을 했어요.
10:20
우리말은 태초에 그랬는데 뭐가 시작할 때란 말인가 그래서 사실 이 말을 우리말로 더 정확하게 번역을 한다면 시초에 처음이 시작될 때에 이 말이에요.
그렇다면 저게 도대체 뭐가 시작될 때란 말인가
지금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 만물을 지으시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모든 사람을 포함해서 모든 만물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잖아요. 그죠
하나님은 영원 속에서 존재하셔요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개념이죠.
그런데 인간을 포함해서 형체를 지니고 있는 만물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간 속에서 시간을 통해서만 존재합니다.
우리는 시간이 없으면 존재할 수가 없어요.
저는 1949년 4월 11일 날 태어났습니다.
그날부터 이재철이가 존재하는 거예요.
언제까지 존재하는가?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내일이든 10년 후든 20년 후든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때가 있겠죠.
그러면 저는 1949년 4월 11일 그 시간부터 하나님께서 저를 데려가시는 그 시간 동안만 저는 이 땅에 존재하는 거여요.
이 지구라는 공간이 있기 때문에 이 지구라는 공간 속에서 주어진 시간속에 나는 살아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만물은 여기에서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그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언제 하셨는가 브레시트에 하셨다는 거예요.
브레시트 그럼 저게 무슨 기원이겠어요.
시간의 기원인 것입니다.
바로 시간이 시작될 때에 그 말이어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존재하게 하시기 위해서 시간을 만드신 거여요. 영혼 속에 시간이라는 개념이 들어오면서부터 거기에서부터 땅도 있을 수 있고 하늘도 있을 수 있고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면
요한 사도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창세기 1장 1절도 태초에 그랬는데 요한사도도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누구시라고요.
예수님 그러니까 성자 하나님도 태초에 계셨다고 지금 요한사도가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또한 요한 사도가 태초에라고 이야기할 때 헬라말로 엔 아르테라고 썼습니다.
이 엔 아르테라고 하는 말은 영원 영원속의 이 말이에요. 하나님은 영원 속에 계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말 성경으로는 성자 하나님이 계시던 영혼과 브레시트가 다 태초 태초돼서 구별이 안 되지만 하나님은 영원 속에 계셨다는 거예요.
그 영원 속에 그 영원이 시간과 만나는 접점이 브레시트였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영혼 속에 계시는데 인간은 시간이 있어야 존재하니까 하나님께서 태초에 시간을 만드신 그때가 브레시트였다 이 말이에요. 이해가 되십니까
자 저 단어가 왜 중요한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시간을 먼저 만드셨다 시간의 기원을 먼저 만드셨다 이게 왜 중요한 말인가
첫째로 저 단어 자체가 하나님께서 자존자이심을 일깨워주는 거예요. 우리는 시간속에 갇혀서 시간의 흐름과 동시에 우리는 노쇄합니다. 늙어가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끝나면 우리는 생이 다 끝나버려요
그러나 하나님은 엔 아르케 영원 그 자체로 계시다가 인간을 위해서 시간을 만드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은 이 시간과 상관없이 스스로 계시는 자존자이심을 의미하는 거예요.
자존자이시기 때문에 시간을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자존자시라고 하는 것은 왜 중요한가? 하나님은 시간을 벗어난 자존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늙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세요.
2천 년전 우리 신앙 선조들이 하나님을 믿을 때 그리고 2천 년후에 우리 자손들이 하나님을 믿을 때에도 하나님은 변함이 없는 분이셔요
이사야 46장 3절 4절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태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하나님께서 네가 태 너 어머니의 태에서 날 때부터 내가 너하고 함께 있었다. 그런데 네가 노년이 될 때까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네가 백발이 되기까지 너를 품을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 나이로 한번 따져보셔요 내 나이가 많습니까? 하나님 나이가 많습니까?
시간 개념으로 나이를 따지자면 그분이 더 많으시잖아요.
내가 태어나서 백발이 되기까지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시면 그분은 노인 중에 노인이라야죠
백발이 되기까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나보다 더 오래 계신 분이 내가 늙었으면 내가 오히려 그분을 업어 드려야 되는데 내가 너를 업어주겠다는 거예요.
너를 품어주고 구하여 내겠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프레시트 시간 개념 밖에 계시는 자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떤 종교의 신화이든 신화를 보면 다 창조의 이야기가 나와요.
그런데 그 창조의 이야기는 주로 어떻게 시작돼요.
아주 먼 옛날에 태고적에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떤 종교 어떤 창조 이야기에서도 시간을 만드셨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시간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뿐이시고 자존자는 그분뿐이시니까 다른 인간들은 생각을 못하는 것이죠. 저 단어가 왜 중요한가.
두 번째 저 단어야말로 하나님께서 초월자이심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십시오. 우리는 공간 속에서 시간을 통해서만 존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계신 분이라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초월자시라는 게 우리에게 중요합니까?
그분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내가 어떤 상황 속에서 내가 어디에 있어도 그분은 나와 함께해 주실 수 있는 분이셔요
시편 139편 7절 10절을 통해서 다윗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리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으시리이다
여러분 하나님은 저 멀리 계셔서 우리가 찾아가야 되는 분이 아니잖아요.
내가 산 위에 있어도 내가 바다 위에 있어도 비행기를 타고 하늘 속에 있어도 그분은 나와 함께하셔요
그분은 초월자이시기 때문에 바로 저 단어를 통해서 당신이 초월자이심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시는 겁니다.
시간의 기원을 뜻하는 즉 브레시트라고 하는 단어가 왜 우리에게 중요한가.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저 단어가 우리의 생명이 시간임을 일깨워주기 때문입니다.
수요 성경 공부하면서 몇 번 말씀드렸죠 그죠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생명은 시간에서 시작해서 시간으로 끝나요? 시간 자체가 우리의 생명입니다.
20:03
에베소서 5장 16절에
너희들 세월을 아끼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아끼라고 하는 이 단어가 무슨 뜻이라고 그랬습니까? 엑사고라조 건져 올린다는 얘기라고 했습니다.
1초 1초 시간이 우리를 다 스쳐 지나가고 있어요.
이 시간을 진리로 건져 올리는 사람에게 시간은 생명으로 남는 것이고. 이 1초 1초를 내 욕망을 위해서 헛되이 보내는 사람은 오늘도 자기 생명 갉아먹은 거예요.
여러분 절대로 생명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디지털 시계건 아날로그 시계건 시계를 들여다보시고 1초 1초 흘러가는 그것이 여러분의 생명인 줄 아십시오.
20:57
1초 1초가 내 생명임을 알면서 살아가면요 여러분 인생은 충분히 깁니다. 인생은 진리를 심기에 충분히 길고요. 인생은 진리의 열매를 거두기에 충분히 길고요.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며 열매를 거두기에 충분히 깁니다.
절대 짧지 않습니다. 내가 30대에 이 세상을 떠난다 해도 그 인생은 길어요. 왜 1초 1초가 생명인지 아는 사람은 영원과 접속되어서 살아가거든요
그러니까 그 인생이 이미 영원의 일부이기 때문에 길어요. 그러나 1초 1초가 생명인지를 모르고 살아가 보십시오. 90살을 살아도 인생은 일장춘몽이에요.
100살을 살면 길 것 같습니까?
1초 1초가 생명인지 모르는 사람은 100살을 살고도 돌아가실 때 인생은 짧다 한탄하고 돌아가실 거예요.
두 번째 단어 한번 보십시다.
창조하셨다 빠라 만드셨단 말이죠.
그런데 성경에는 만들었다는 이 히브리 단어가 여러 단어가 나와요.
처음에 여기 아싸라고 하는 단어가 나와요.
여기 아싸는 좀 이 된소리예요. 그래서 아싸 아사가 아니고 아싸 그런데 이 아싸라고 하는 단어의 뜻은 이미 있는 재료를 가지고 뭘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을 한번 찾아보십시다.
창세기 1장 7절 한번 보십시다.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할 때 아싸여요.
창세기 1장 1절 제가 읽겠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단 말이죠.
나중에 가서 다시 설명드리겠습니다마는 여기에서 천지는 천지 그 자체를 말하기도 하지만 천지를 구성하는 재료들을 의미하기도 해요.
그래서 창세기 1장에 말씀하신 천지 천 할 때는 복수로 나와서 이 우주를 만드셨다 그 말이여요.
그런데 1장 7절에서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사 이 궁창은 눈에 보이는 스카이 대기권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1장1절에서 이미 만들어 놓으신 것 그 재료를 가지고 스카이를 만드셨단 말이여요. 그래서 아싸여요 있던 재료를 지금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거예요.
또 1장 16절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시고 이것도 아싸여요. 해와 달을 만드신 것 이것도 1장 1절에 천지를 만드실 때의 재료가 다 거기에 만들어져 있단 말이죠. 그것으로 만드셨어요.
그래서 아싸 이렇게 구별해서 표현을 하셔요
또 성경에 창조했다라고 만들었다는 단어 중에 야차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저 야차르라고 하는 단어는 무엇을 만들긴 물론 재료가 있죠.
어떤 재료로 만들긴 만드는데 그 만든 것의 섬세함을 강조할 때 야차르라는 단어를 써요
한번 성경에서 확인을 해 보십시다.
창세기 2장 7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재료가 있죠. 그죠 하나님께서 1장 1절에서 만드신 흙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할 때 야차르여요.
야차르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진흙으로 우리를 지으실 때 얼마나 섬세하고 정교하게 우리를 지으셨어요. 그래서 야차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또 창세기 2장 19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자 흙으로 재료가 있죠.
각종 들 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이것도 야차르여요
하나님께서 흙으로 새와 짐승을 지으실 때도 섬세하고 정교하게 지으셨다는 거예요. 세포 만들었다고 하는 또 다른 단어가 빠나가 있습니다.
빠나 이건 뭐냐 하면 이것도 물론 재료를 가지고 만드는데 어떤 전체 계획 속에서 순서대로 만드는 것을 강조할 때 빠나라는 단어를 씁니다.
창세기 2장 22절 보십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자 갈빗대라는 재료가 있죠. 그죠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여자를 만드시고 남자를 먼저 만드시죠.
먼저 하나님께서 남자를 만드셨죠 그죠 그리고 그 남자를 돕는 배필로 여자를 차례대로 만드셨잖아요. 그 차례를 강조할 때 빠나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 1절에 나타나는 저 빠라라고 하는 저 동사는 끊어버린다 낳는다 양육한다.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저 빠라라고 하는 동사가 만든다는 의미의 동사로 사용될 때는 반드시 하나님에게만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만든다는 의미로 구약성경에 저 단어가 44번 나오는데 사람에게는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어요. 하나님에게만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빠라 만든다 라고 하실 때의 의미는 무에서 유를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있는 재료로 만드시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에 하나님께서 온 우주 땅을 만드는 모든 재료를 만드셨다 이거는 있던 게 아니란 말입니다.
철저하게 없던 무에서 하나님께서 유를 만드셨다는 거예요.
창세기 1장 27절 한번 보십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뭐 하셨다고요.
아까 창세기 2장 7절에서는 뭘 강조했지요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 그런데 정교하게 지으셨다 그때는 이미 재료를 강조하니까 야차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재료 이야기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사람의 생명을 창조하셨다는 거예요.
생명은 재료가 있어서 창조하는 게 아니잖아요.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기에서도 빠라여요.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를 만드실 때는 빠라라는 동사를 쓰시고 재료를 강조할 때 아싸라는 동사를 쓰시고 재료로 섬세함을 강조할 때는 야차르라는 단어를 쓰고 그리고 순서를 강조할 때는 빠나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3천 4백년 전에 모세가 성경을 쓸 때 모세의 실력으로 이런 구별이 되겠습니까? 아까 요한 사도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영원속이라고 말하고 모세가 천하만물을 창조하실 때는 브레시트 시간의 기원을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2천 년 전에 무식한 어부 요한 그리고 3400년 전에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하던 모세 비록 40년 동안 애굽 왕궁에서 제왕 교육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가 자기 실력으로 이 하나님의 이 모든 창조의 비밀스러운 단어들을 저절로 알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영감으로 쓰게 안 했으면 이런 구별은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저 빠라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다고 하는 저 단어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언가 바로 저 단어 하나로 하나님은 그야말로 창조주이심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창조가 뭐예요? 여러분 없음에서 있음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없음에서 있음이 가능한 것입니다.
바로 그 사실을 알면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데 나한테 없음은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30:50
내 주머니가 비어 있는 것 아무 문제가 안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없음을 있음으로 만드시는 분이시니까 내가 어떻게 그분과 바른 관계를 갖느냐가 문제이지 내게 있느냐 없느냐는 그 자체는 하나도 문제가 안 된다. 그 말이에요.
구약성경에 예루살렘의 복이라는 말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예루살렘의 복이라는 게 과연 뭔가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제가 94년도에 예루살렘을 직접 가서 제 눈으로 보고 아 이게 이런 의미이구나 가보신 분 아시겠습니다마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가 본래 못 쓰는 땅 덩어리 아닙니까? 황무지 아닙니까? 그런데 예루살렘은 그중에서도 황무지여요.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인데 하나님께서 이 땅을 거룩한 도성으로 만드시겠다고 딱 찍으니까 어떻게 됐어요. 기독교 천주교 유대교 이슬람교 세계 4대 종교가 성지로 가꾸는 도시입니다.
온 세계 사람들이 가장 가보고 싶어 하는 성도가 됐습니다. 그 없음의 황무지가 하나님께서 찍어지는 순간에 온 세상에서 우뚝 서는 예루살렘이 된단 말이죠.
그게 예루살렘의 복이어요 내가 황무지 같은 인생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세우실 수 있다는 거예요. 창조주라는 것을 강조하는 저 단어가 중요한 이유는 저 단어가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전능자이심을 우리에게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없음을 있음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전능하신 분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누구도 불가능합니다. 전능이라는 게 뭐죠 능치 못함이 없으신 분이시다 그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만 없음에서 있음으로 바로 세우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까지도 영혼까지도 새롭게 깨끗하게 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통간하고 그 남편까지 죽이지 않습니까?
그리고도 자기는 그것이 죄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죠 나단 선지자의 지적을 받고 그것이 큰 죄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다윗이 지었던 회개의 시가 시편 51편 아닙니까
그 51편 10절에서 다윗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죄에 찌들은 내 마음을 정하게 재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남의 여자를 범하고 그 남편까지 죽였다면 다윗은 인생 끝장난 사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 다윗의 심령을 하나님께서 다시 창조해 주실 수 있으셨던 것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동안 공부했던 고린도 후서를 통해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고백하지 않습니까?
고린도후서 5장 17절입니다.
그런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이 뭐야?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해주셨다는 것이어요
내가 아무리 흉측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창조주이시고 그분은 전능자이시기 때문이지요
세 번째 단어가 엘로힘이에요.
엘로힘 여기에 제일 끝에 엘로힘이라고 인자가 붙어있는데 이건 복수라는 말이에요. 본래 저 단수는 엘로 아흐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힘이 있고 권능이 있는 분이다 라고 하는 단수 엘로 아흐의 복수형이 엘로힘 하나님을 복수형으로 불렀단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빠라 아까 동사 빠라 있었지 않습니까? 그 빠라는 단수동사예요.
하나님은 복수형인데 동사는 단수형이다.
그러면 바로 저 단어 속에서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죠.
요한복음 1장 1절에 성자 하나님께서는 태초의 말씀으로 계셨죠
다음 시간에 보겠습니다마는 창세기 1장 2절 보니까 하나님의 영 성령님도 그때 이미 계시지않아요.
그 세 분이 한 분으로 함께 역사하셨음을 이미 창세기 1장 1절부터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겁니다.
삼위일체라고 하는 말이 뭔가 새 신자반을 통해서 여러분들 배우셨죠 성부성자성령 세 위격이 하나의 실체인 하나님 안에서 역사하는 것이다.
굉장히 말이 어렵죠 그죠
그래서 아주 쉽게 이렇게 표현을 했죠.
삼위일체를 설명하면
첫째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세 분이시다
이 말을 흔히 사람들은 인간의 역할론으로 설명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교회에서 목사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희 집에 가면 제 자식들에게는 제가 아빠예요. 그죠 제 처한테는 남편이지 않습니까?
한 사람인데 목사도 되고 아빠도 되고 남편도 되어요
그 삼위일체를 그렇게 설명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사실은 바른 설명이 아니라고 그랬죠
제가 목사로서 교회에 있는 동안 저는 집에 있을 수가 없잖아요. 제가 집에서 남편과 아빠로 있는 동안에 이 교회에 저는 있을 수가 없어요. 저는 동시에 두 곳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런 역할론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3년 동안 계실 때 하늘은 텅텅 비어야죠 그럼 온 우주가 엉망이 됐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 예수님은 땅에 계시고 성령님이 비둘기같이 열린 하늘 문으로부터 강림해서 내려오시고 하나님은 하늘에서 음성으로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러니까 한 분이시지만 그분은 그 세 분은 또 세 분이시기 때문에 각각 같은 시간에 하늘에도 계실 수 있고 땅에도 계실 수 있고 온 공간에 충만하실 수 있단 말이죠.
삼위일체 두 번째 설명하는 것은 하나님은 세 분이시지만 그러나 한 분이다는 것이어요 만약에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것만 강조되면 결국 하나님은 삼신이죠 세 신이죠.
그 세신들 사이에 일치나 조화가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신들끼리 서로 싸워서 편안이 없겠죠. 그런데 하나님은 세 분이신데 또 한 분이시라는 거예요.
이것을 초대 교부 터툴리안은 태양으로 설명했다고 그랬습니다. 태양은 세 개가 아니고 분명히 하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태양은 하늘에 떠 있습니다.
태양으로부터 나오는 빛은 온 우주에 충만해요.
그리고 그 태양에서 나온 열은 땅바닥에서 일한단 말이죠 역사한단 말이죠.
그래서 태양은 하나이지만 태양 빛 열로 세개로 존재한다. 그렇게 설명을 했지만 그것도 올바른 설명이 아니죠.
왜 태양은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까?
여기 태양이 있다면 지구 반대쪽은 태양이 없단 말이죠. 주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세 분이 한 분이고 한 분이 세 분일 수 있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고 그랬죠 하나님은 본래 그런 분이란 말이에요. 여러분 생각을 한번 해 보십시오.
40:07
개가 네 발로 걷는 개가 자기 집 주인이 어떻게 두 발로 걷는가 평생 개머리로 생각한다고 규명이 되겠습니까? 절대 안 됩니다 개머리로는 규명이 안 돼요.
개가 우리 주인은 으레 두 발로 걷는 분 이러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왜 두 발로 걸을까 질문하기 시작하면 거기에는 평생 괴롭게 살아야죠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세요. 하나님은 신이세요. 하나님은 본래부터 세 분이신 동시에 한 분이시고 한 분이시지만 세 분이세요.
그걸 지금 창세기 1장1절이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삼위일제 하나님은 왜 중요한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그랬죠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만 유일신이 될 수 있다고 그랬어요.
내가 바다에 가서 포세이돈 신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가서 아폴로를 찾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어디를 가든 삼위일체 하나님이 항상 어디든 거기에 계시므로 그분만 온 우주를 주관하시는 유일하신 신이 될 수 있다고 그랬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부르는 것으로 다 해결되기 때문이라고 그랬습니다.
힌두교에는 신이 600여 여명이 있는 인도 사람도 정확하게 숫자를 잘 모른다 그러지 않습니까? 그래서 코감기에 걸리면 코 감기를 낫게 하는 신을 찾아서 불러야 되고
복잡한 거죠. 신을 믿기가 그러나 내가 하나님 아버지 할 때 그 아버지 안에서 구원의 성자 하나님과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함께 역사하셔요
내가 눈을 감고 예수님하면 그 호칭 안에서 아버지와 성령님이 함께 역사하십니다. 내가 성령님을 부를 때 그 성령님 안에서 성자 하나님과 성부 하나님이 함께 역사하신단 말이죠.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분이 되시는 거죠. 그것을 창세기 1장 1절이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뭘 창조하셨는가 에트 하 샤마인 이 하샤마인 인자가 없으면 복수라고 그랬죠 그래서 하늘들 그래서 온 우주 눈에 보이는 저 대기뿐만 아니라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트래 앤드 그리고 에트는 뭐 무엇을 하는 겁니다. 목적격이죠.
하늘 아래 저 땅을 창조하셨다 이건 단순한 흙이 아니라 지하 온 지하 세계까지 다 만드셨다 그래서 다음 시간에 다시 상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마는 그저 눈에 보이는 저 하늘과 땅만 지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3절 이후부터 하나님께서 매일매일 창조하시기에 필요한 모든 재료를 저 날 다 만드셨다 그런 의미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셨다 이 천지라고 하는 것 저 단어가 우리에게 주는 중요성이 뭔가 뭐라고 그랬죠
눈에 보이는 형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포함해서 만물들은 공간의 토대 위에 시간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그랬죠
우리에게 시간이 있다고 해도 공간이 없으면 우리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재하시기 위해서 지금 공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 공간의 재료를 확보해 두시는 것이죠.
따라서 저 단어는 우리가 일평생 살아가는데 내가 처해 있는 공간의 중요성을 일깨어 줍니다.
내가 어떤 인격의 소유자이냐가 여러분 무엇을 통해서 드러나겠습니까?
첫째는 나의 언행을 통해서도 드러나겠죠.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언행으로 우리를 가릴 수 있잖아요. 남 앞에 가서 연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속일 수 없는 게 있어요.
속일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처해있는 공간이에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내가 처해있는 공간을 보면 알아요.
내가 어둠의 사람이라면 나를 아무리 밝은 공간에 갖다 두어도 나 때문에 내 주위는 어두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빛의 사람이라면 나를 흑암속에 던져두어도 나 때문에 내가 처해 있는 공간은 밝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존재하는 아파트에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100주년 기념교회가 양화진에 있기 때문에 이 양화진이라는 공간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요?
여러분 한 사람이 100주년 기념 교회의 교인으로 합류하심으로 인해서 이 양화진이라는 공간에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공간의 중요성을 우리는 알아야 돼요.
시간이 생명이라면 그 생명의 실체는 우리의 공간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가정이라는 공간이 정말 화목한 공간인가 사랑의 공간인가 행복한 공간인가 중요한 것이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저 천지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중요성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저 큰 하늘과 땅을 누구를 위해서 지으셨어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리를 위해서 이 광활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심을 깨달으면서 살아갈 때만 우리는 비로소 좁고 좁은 나라는 우물에서 탈피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내 우물에서 벗어나는 거라고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넓은 천지를 만드시고 이 넓은 천지 속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셨는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감옥에 갇혀 살아요.
하나님을 자기 감옥으로 끌어다 놓고 마치 히브리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 가두어 놓고 살듯이 내가 내 우물 속에 가두어 둔 하나님이라는 우상을 섬기고 살아간단 말이죠.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살게 하신 이 공간은 이 넓은 공간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때에만 비로소 나라는 우물에서 벗어나 사회가 내 눈에 보이고 이 나라의 역사가 보이고 인류의 미래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보잘것없지만 자존자이시오. 초월자이시오. 창조자이시오. 전능자이신 그분의 섭리 속에서 내가 살아있는 이 시간 동안 이 인류의 역사 한 페이지 속에 내가 어떤 족적을 남기며 살아갈 것인지를 보고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의 삶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죠.
이미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마는 내가 우리 집 마당을 쓴다 우리 집 마당을 쓰는 것이 아니죠.
이 우주의 한 부분을 쓰는 겁니다. 그때부터 달라지는 거예요. 이 우주의 한 부분을 쓴다라고 할 때부터 내가 우리 집 마당만 내 마당이라고 생각하는 그 작은 생각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이 네 단어는 성경 66권의 에센스가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구절로부터 시작해요.
중요한 것은 이 성경을 누가 언제 썼어요.
3400년 전에 모세가 쓴 것 알죠
그 당시에 일차적으로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쓴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3400년 동안 모든 사람 앞으로도 주님 오시는 날까지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쓰여진 말씀이지만
모세가 3400년 전에 이 말씀을 쓸 때 이 성경을 보는 1차 대상은 누구예요? 400년 동안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여요
그들은 인생의 향방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죄와 사망의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면서 한번도 스스로 서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50:11
그들이 있는 공간이 어디입니까? 광야에요 망망대해의 일엽편주처럼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도구 삼아 성경을 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신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이
얘들아 나는 자존자야 나는 초월자야 나는 창조자야 나는 전능자야
바로 내가 없음에서 있음으로 이 천지를 지었어 내가 너희들을 생명을 창조한 사람이야 창조한 하나님이야 내가 이제부터 너희들 인생과 함께 한다. 그것을 일깨워 주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 광야에 떨어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통해서 이 말씀을 받았을 때 그들이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그들이 가야 할 삶의 방향이 이 말씀의 거울 앞에서 비로소 보여지지 않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어떤 존재들이어요
다 죄와 사망의 올무에 묶여 있던 노예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그 죄와 사망의 노예살이로부터 출애굽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광야에 떨어진 일연편주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 존재들인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오늘 창세기 1장 1절을 통해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재창조해 주실 것임을 우리에게 약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가 수요 공부를 통해서 창세기 공부를 해가는 가운데에 여러분들의 삶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에 의해 날마다 아름답게 재창조되어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창세기를 공부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세기 1장 1절 네단어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메세지를 마음속에 각인시켜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인생이 망망대해 속에 버려진 일엽 편주와 같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더 이상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사공이 되어 주시고 우리가 가야 될 곳을 방향을 확연히 알게 해주시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무에서 유를 있게 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육 간에 새롭게 하시고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재창조해 주실 것임을 약속해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날이 갈수록 우리의 삶이 창세기 1장 2장 3장 더해지게 도와주시고 그와 같은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늘 재창조하시는 기쁨을 우리의 삶으로 경험하고 주님을 찬양드리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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