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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중용 9강 시중 時中, 타이밍의 예술
질문; 동서양의 고학적 세계관은 확실히 다릅니다. 그러나 서양의 신의 자리에 천지를 대입시키면 결국 같은 이야기가 아닐까요? ( 시카고 대학 물리학과 학생)
저 학생의 질문도 매우 어려운 질문인데 동양의 천지인 사상에 대해서 서양에는 인간과 신이 있지만 이 신에 천지를 대입시키면 결국 같은게 되지 않냐 물론 같아지죠. 그런데 서양사람들은 이렇게 안본다는 게 문제죠.
서양사람들은 신을 얘기할 때 여기 중요한게 일반적으로 creatio ex nihilo 라고 해서 이 세계를 무로부터 갑자기 빅뱅 스타일로 그냥 뻥해가지고 그냥 창조했다는 거거든요.
빅뱅이론도 사실 물리학 이론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문제가 잇어요. 물론 빅뱅이론 말고도 스테디 스테이트 라든가 여러 가지 다양한 우주발생에 관한 물리학적 이론들이 있지만 신이라고 얘기할때는 서양 기독교 사상 특히 주데오 그리스쳔 트레디션에 있어서는 신이라는 것은 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창조를 하는 동시에 인간은 이 창조와 별도로 또다시 창조를 한거예요 인간은. 어느날 뭐를 만드시고 어느날 뭐를 만드시고 인간가지 만드셨다 이러니깐 인간은 신에대해서 항상 피조물로 규정이 돼있단 말이죠. 그래서 서양에서는 세계와 신과 인간이 어디까지나 별도로 떨어져 있는 거예요. 근원적으로 대립적 관계란 말이죠. 그러기 때문에 인간과 이 세계의 관계도 항상 대립적 관계로 나타난다는 거예요.
* creatio ex nihilo ; 무로부터의 창조. 하나님은 물질적 소재로부터 이 세계를 창조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입론. 근세 신학자 마르틴 부버도 이 설을 열렬히 주장.
* 빅뱅 이론; 우주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과거 한 시점에서 엄청난 밀도와 온도의 상태로부터 폭발했다는 우주 론. 무로부터의 창조와 관련이 있다.
* 스테디 스테이트 이론 steady-state theory; 우주는 중용의 밀도 상태를 유지하며 시작도 끝도 없다. 마이크로 웨이브 배경복사 microwave background radiation 를 설명 못하는 단점이 있지만 동방적 사유에 더 가가운 우 주론.
그런데 이 천지인 사상에서는 천과 지와 인이 구분이 안된다는 거예요.무슨 얘기냐면은 천지인 삼재라고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가 천지인이라니깐. 인간속에 천지인이 있다니깐. 무슨 말이냐면 인간의 상초가 하늘이라고 그리고 인간의 하초가 땅이예요. 그리고 인간의 중초가 인간이라니깐.
동양인들은 이게 복잡해요. 인간자체를 하나의 소우주이기 때문에 여기서 인간이 뭘까?
하늘이라는 것은 이게 sky 가 아니예요 이게.땅이라는 것도 이게 땅 dirt 가 아니라고. 천과 지는 동양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천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무형의 세계예요.지라는 것은 유형의 세계라고. 그래서 천을 形而上者라고 하고 땅을 形而下者라고 하는 거예요.
* 天 - 무형 - 형이상자 - 道 - 神
地 - 유형 - 형이하자 - 器 - 貞
인간에게 있어서는 무형의 세계가 신의 세계이고 땅의 세계가 정의 세계라고.그래서 이걸 합쳐서 우리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정신이라는게 spirit의 번역이 아니라고.
정이라는건 인간의 땅, 물, 우리가 정액이니 정자니 이런걸 우리가 다 이걸 가지고 썻잖아.이건 인간의 땅의 세계야.땅에서 번창하는 거야. 근데 이 신이라는 건 spirit 정신의 세계, 관념의 세계, 의식의 세계 이런건 다 하늘이란 말이야. 사람에게 있어서 하늘이야.
그러기 때문에 저 학생이 얘기한대로 천지인과 서양의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 내가 너무도 할말이 많은데 갈길이 바쁘니까 중용으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 서양과학에 있어서조차 인간이 자연과 대립하여, 자연을 무생명적 착취와 고문과 실험의 지배대상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 정신은 spirit의 번역어가 아니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를 가능케 하고 있는 하늘(神)과 땅(精)의 총칭이다.
庸-0202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反]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
군자지중용야는 군자이시중이오 소인지(반)중용야는 소인이무기탄야니라
군자가 중용을 함은 군자이면서 때로 맞게 하기 때문이요, 소인이 중용에 반대로 함 은 소인이면서 기탄이 없기 때문이다."
주자는 소인이 어떻게 중용이 있어 소인지중용이라고 할수 있느냐해서 소인지 반중용야 라고 들어가야 된다. 라고 말했는데 이게 맞는가요 들렸나요? 틀렸죠. 주자는 공자만큼 인간에 대한 보편적 견해가 없다는 거지.
군자느 중용하고 소인은 반중용한다. 이것은 인간을 류별로 나눈거죠.
그런데 공자는 군자든 소인이든 다 중용은 하는 거야. 그만큼 대접은 해. 그런데 군자의 중용하고 소인의 중용이 컨셉이 너무 다르다 이거야.
* 주희는 인간에 대한 보편주의적 발상이 부족하다. 천리와 인욕의 이원론이 너무 강하다. 군자는 천 리의 구 현체, 소인은 인욕의 상징체로 나누어 본다.
여기서 君子而--> 君子然 (군자다웁다)
而는 그리고 and 가 아니라 부사로 然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니까 군자의 중용이라는 것은 군자다웁게 시중하고 소인의 중용은 소인배답게 무기탄한다.
군의 중용이라는 것은 중용을 하되 중을 실천하되 그 중이라는 것은 반드시 時 때 속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라는 거야.
우리가 노자 도덕경에 도가도 비상도에서 도는 도라는 의미가 있지만 말한다는 의미도 있어요.
도를 도라는 개념속에 집어 넣어버리면 우리의 개념속에서 고정화 돼버린 그 可道之道는 상도가 아니다 그랬죠.
그런데 이 상도는 변화하는 도죠.항상 동양사람들이 생각하는 도라는 것은 항상 변화속에 있는 도란 말이죠.
* 道; 지고의 도의 의미와 말한다는 의미가 같이 있다. 희랍어의 로고스도 지고의 도라는 의미와 말씀이라는 의미 가 같이 있다. 동서양의 언어가 일맥 상통한다.
* 可道之道는 常道가 아니다. 상도는 변화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항상스러운 도이다.
현대물리학적인 세계로 말하자면 모든 존재는 시공의 변화속에 있는 거예요.그거를 우리가 법칙적으로 이해를 해도 그 법칙에 대한 이해는 인간이란 존재의 하나의 약속에 불과한 거예요. 그건 패러다임이니까.
또 다른 시대가 되면 물리학적 법칙도 변해요.그 우주를 이해하는 법칙도 변화하는데 하물며 이 우주 삼라만상 우주 만물중에서 시간을 것어나는 건 없다 그말이요.근데 시간을 벗어나는 듯이 보이는 유일한 인간의 장난이 언어속에 있는 거예요. 언어.
그러니깐 무슨얘기냐면 모든 존재하는 사물은 시간속에 있다 그말이요. 우리 삶이 모든 것은 시간속에 있는거예요.시간을 벗어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존재하지 않아요.
* 불변 changelessness 이란 오직 인간의 관념과 언어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도 유한한 약속체계일 뿐이 다.
그니깐 여기서 말하는 것은 뭐냐면 發而皆中節 나의 희노애락이 감정이 발현되어서 그 상황에 들어 맞는다 그랬잖아 근데 그 상황이라는게 뭐야? 그게 바로 시간이란 거죠.
* 節은 시간이다.
동양사람들이 말하는 市라고 하는 것은 이게 객관적인time에 대한 연구가 아니예요.time이라는 명사를 가지고 時를 쓴적은 없어요. 동양사람들은 시라는 것은 발이개중절 그 중절의 時라고.
무슨말이냐면 우리말로 쉽게 얘기하면 시간이라고 하는 어떤 추상적인 개념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살아가는 삶에 자리에 있어서 timing에 대한 문제라는 얘기야. 그러니깐 같은 진리라고 적절해야지 timely해야지.
* 동방인의 時는 시간time 이라는 명사에 대한 이론적 탐구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시간이며 삶의 움직임의 타이 밍timing 에 관한 것이다.
내가 욕을 한다 그래도 살면서 욕지거리를 하더라도 욕이야말로 타이민의 예술이다. 이런 말이 있거든요.
개그맨이 웃긴다 전부가 타이밍이죠. 야구선수 김선우는 자기가 야구를 할 때 연습을 하지 않고 도올선생 강의를 듣는다 그랬어. 한국일보에 인터뷰난게 그게 더 도움이 될 때가 많다.아마도 김선우가 말하는 것은 이 時의 문제일거예요.
* 마르언더이수 罵人的藝術 매인적예술; 욕은 타이밍의 예술이다. 중국의 영문학자 리앙 스치우가 쓴이래 중국 문 학가들이 잘 쓰는 표현.
* 원래부터 김용옥 성생을 좋아했다. 책도 보고 강의도 본다. 새로 주문한 책이 곧 올거고 강의는 56강까지 봤다.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보고 잇으면 그냥 마음이 편해진다. (스포츠 한국 도올에 푹빠진 김선우 기사)
투수로서 던진다고 할적에 속구를 잘 이게 스트라이크만 던진다고 해서 이게 이기는게 아니거든.
그 사람의 심리를 읽어야 되고 던지더라도 타이밍을 쪼금 늦추고 빠르게 하고 하는게 전부 시중의 문제라는 거죠.
타이밍의 기술이란 말이죠. 그니간 같은 걸 치더라도 똑같이 방망이를 치는데 타이밍에 따라서 어떤거는 파울이 되고 홈런이 되는거 아냐. 그렇게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모든 것이 시의 문제라는 얘기예요.
그래서노자도 동선시라고 했거든. 움직인다고 하는 것은 때를 잘타야 된다 이거야.
* 動善時 ; 사람이 움직일 때는 그 때를 좋게 해야 한다. (노자 8장)
여러분들이 제갈공명을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하는게 뭐야 지사라고 말하는게 뭐야 그사람은 때를 안다는거죠.
어느때 어떤 작전을 어떻게 피는냐 그때를 안다는 거요.
그니깐 동양사상에 있어서는 항상 이 중이라고하는 것은 이 시간을 토해서 발현되는 거죠.
서양인들은 상도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可道之道, 머릿속에 관념화시킨 도를 가지고서 항상 얘기를 했다는 거요. 그니깐 그게 이데아의 세계예요. 이데아의 세계는 근원적으로 시간을 거부하는 세계란 말이죠.
* 이데아 idea ; 플라톤 사상의 핵심. 관념과 이상의 뜻이 같이 있다. 이상적인 것은 관념적인 것이다. 따라서 사 양 사람들은 모든 이상은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다. 플라톤이 이데아론과 기독교의 천국론이 결합하여 중세신학 을 형성.
그니간 시간이 없는 세계에서 아무리 중을 지켜본들 소용이 있냐 이거예요.
장자의 도척편에 보면 이런게 있거든요. 미생고라는 사람이 이쁜 여자하고 약속을 했어. 그래가지고 옛날에는 사람들이 보니깐 대개 다리밑에서 만나자 이러거든. 그래서 어떤 여자하고 오후5시에 만나자 이렇게 된거야 어떤 여자하고. 5시까지 세상없이 나는 약속을 지켜야한다. 이거 훌륭한 사람이죠.
그런데 비가 쏫아지는 거야.그래서 물이 불었는데 이 사람은 다리 기둥에 몸을 꽁꽁 묶고 이 약송을 지켜야 된다 이거야. 그러다가 죽어버렸어.이 얼마나 비참한 얘기냐.ㅎㅎ
비가 오면 언덕에 올라가 있다가 여자가 오면 영자야~하고 부르면 될 것을 어떻게 이걸 부둥켜 안고 죽냐.
그니깐 중이라는 것은 반드시 시속에서 이루어지는 중이어야 한한다는 거죠.
* 尾生與女子氣於梁下, 女子不來,水至不去,抱梁株而死(장자 도척편)
인생의 지혜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시속에서 중을 발현하느냐. 이거를 우리가 지혜wisdom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 동방인의 지혜라는 것은 시속에서 중을 발현하는 것이다. 중용은 가운데가 아니라 시중이다.
군자의 중용이라는 것은 항상 군자다웁게 시중하는 것이다. 이 시중이라는 말을 반드시 기억해야 됩니다.
중용이라는 말보다 시중. 중용이라는 말은 별 의미가 없어요. 마치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좌파와 우파의 중간 그건 회색분자죠. 그건 나쁜 놈이지. 좌면 좌고 우면 우고 정환한 정견을 가지고 살아야지. 거기에 나는 중간을 지켜 중용을 지킨다. 그런 타협주의자고 절충주의자고 기회주의자요.그런 중용이라는 것은 우리 동양사상에는 없어요.
중이라는 것은 희노애락지 미발이 중이고 그 중이 시중 어떻게 때에 맞추어서 발현되느냐. 이것을 군자의 중용이라고 보았다.우리가 군자가 된다는 것은 항상 그때에 맞게 우리가 살아가는 거죠.그 때를 아는 거죠.
그래서 동양사상은 항상 시간을 거부하는 적이 없다 이거죠.
* 시간만이 영원하다. 우리의 삶은 시간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삶의 연속이 곧 영원, 천당은 영원이 아니다.
청춘이여! 지금 여기를 살라!
여러분들이 영원히 살아야 될 것은 시간속에서 살고 시간속에서 죽는 거거든요.
시간을 벗어난 저 하늘나라가 있다.예수님게서 뭐라고 그러셨어요. 하늘나라가 이땅에도 임하옵소서 그랫잖아 주기도문에서 시간속에서의 천국을 구현하자는 거지 기독교가. 이 세상을 시간을 버리고 하늘로 올라가자는 얘기가 아니예요.
* 당신이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옵소서.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주기도 문 마태 6;10)
나뭇꾼과 선녀도 나무꾼이 사는 이땅으로 데려와 살아야지 왜 올라가. 그거 타고 올라가봤자 재미없게 살았을거야. 행복할거 같죠? 그런데 왜 그런 얘기가 나왔겠어요? 옛날에. 워낙 사는 세상이 괴로우니까 전 선녀가 사는 세상으로라도 올라 가자는 거죠.
* 선녀의 세상으로 올라가는 것이 해결은 아니다. 선녀가 이땅을 떠나지 않도록 현세의 정치를 바르게 해야 된다.
현세를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어 가면서 천국을 제시하면 안된다.
그니간 현세에 대한 부정이 우리 인간에게 없을수는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이 시중이라는 문제가 동양사상의 핵심이다 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이 시간에 알아야 돼요.
여러분들이 살아야 될 것은 앞으로 참으로 시간속에서 더떻게 중용을 실천하고 구현하고 사느냐 하는 것이 인생의 과제상황이죠. 나는 시간을 벗어나서 영원한 하늘나라로 갇나고 하는 것이 여러분들의 과제가 아니예요.
이 시간속에서 이 역사속에서 이 문명속에서 나의 삶속에서 나의 가치를 얼마나 발현, 구현하느냐 이것이 여러분들의 인생의 목표라는 거예요.
* 인간은 자기 삶에 내장되어 있는 천명의 가치를 시간 속에서 역사속에서 문명속에서 최대로 구현해야 한다.
신독, 인간존재는 끊임없는 고독의 심연속에서 파고 들어갈 어떤 매면의 깊이가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수신, 자기 몸을 닦으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발견하고 점점점점 깊게 내려가는 거예요.
잠수부가 깊은 해저를 고독하게 탐색하듯이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몸의 세계를 탐색해야 되고 여러분들의 정신세계를 탐색해 들어가야 돼요.
그 고독한 존재의 심연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난다는 거예요. 그 나의 몸속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이것이 주체의 심화 그니간 우리 동양사상에는 주체라는게 인식의 주체가 아니라 우주의 주체고 천지가 낸 몸속에 들어가 있는 주체라는 얘기예요.
그래서 서양사상가들이 동양사상의 심오한 측면을 이해하지 못하고 동야사상은 시간속에 현세속에만 빠져있는 천박한 사상이라고 오해를 한거예요. 그러나 시간이라는 것처럼 위대한건 없다는 거예요.
* 서양철학사에 공통된 것은 시간에 대한 중시가 없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나 헤겔의 생성철학도 궁극적으로 생성의 긍정이 아니라 생성의 초월이다. 서양인들은 동방인들에게 시간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그래서 여기서 대비적으로 말씀하시는 게 뭐냐면 소인의 중용은 소인다웁게 無忌憚이라 이거야. 기탄이 없다 그거야.이게 무슨 말이냐. 그냥 막가파라 이거야.시간을 무시한다는 거예요.
* 무기탄 ; 기탄, 즉 거리낌이 없다는 뜻. 무기탄은 궁극적으로 시간의 부저이다. 시중의 반대 개념이다.
그냥 기탄없이 여러분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제군들 기탄없이 말해봐. 그런말 쓰죠? 그거 위험한 말이죠.gg
여러분들은 소인을 만드는 거예요. 기탄이 있어야죠.기탄이란게 뭐냐면 거리낌, 나에게 항상 시중을 실현하려는 사람에게는 항상 기탄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과거에 우리 정치인들에게 있어서도 가장 폐해가 무기탄 했다 이거야. 이상도 좋고 신선한 아이디어도 많았는데
말하나 하는 것도 무기탄으로 말해버리니까 항상 문제가 됐다 이말이예요.
그래서 좋은 뜻이 가려져 버리고 항상 우리 사회가 무기탄의 논리속에 너무 막가버렸다는 얘기야.
진보세력이든 보수세력이든 너무 무기탄하다 이거야.
그러니까 소인의 중용의 특징이 뭐냐 무기탄이라는 거야. 그러니가 우리는 항상 정책을 하거나 모든 것이 어던 기탄이 있어야 된다 이거야.
* 정책이나 인사는 항상 기탄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중용의 정치는 반대의견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될 수 있 는 대로 많은 비판을 수용하여 기탄있는 중을 구현해야 한다.
거리낌이 잇어야 된다 이거야.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면서도 항상 한번 꺼리김을 가져 보는 것, 두려움을 가져 보는 것, 그리고 생각을 되씹어보고 말한마디를 하더라도 항상 기탄이 있어야 된단 말이죠.
그런데 항상 기탄없이 하는 게 졸은 것은 아니란말이요. 이게 서양문화와 동양문화의 다른점인 거예요.
여기 여러분 앉아있는 학생들의 얼굴을 보면 우리 여러분들 얼굴 속에는 다 기탄함이 있어요. 얌전하잖아요.
뭔가 조심스러운 전통이 있거든요.유교 전통이.
* 미국의 자유주의교육 the liberalist educayion 은 인류에게 무기탄을 살포해 왔다. 자유의 가치를 증진시키는 데 일조한 면이 있으나 자유주의 교육은 도억적 인성을 파괴해 왔다. 이제 중용의 교육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니까 유학의 과제는 내가 한국신학대학에도 대학원에서도 나는 지금 목사를 가르키는 거거든요 지금.
목사가 될사람들을 가리키는데 어떻게 보면 내 사상은 위험하지 않겠어요. 신학으로 본다면.내가 신학대학에서 목사님 가르켜서 되겠어. 근데 내가 가르켜야죠. 왜? 그대들은 목사가 되기전에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사람이 돼야 된다고.
유교의 위대성은 모든 종교에 대해서 안티가 없다는 거예요. 기독교인도 유교를 믿을수 있고 불교도도 이슬람교도도 유대인도 유교를 믿을수 있어요.
* 유교 confucianism는 지구상의 어던 종교와도 불협화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것은 신앙의 체계가 아니라 인간 의 내면적 도덕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것은 기독교도인이고 불교도인 이기 이전에 사람이 되는 문제니까. 이건 어떤 특정한 신관과 관련 없는 인간의 기본을 가르키는 거란 말이죠.
인간이 인간이 된다 이거는 무슨 신앙을 말하는게 아니잖아요 뭘 믿으라는 것이 아니잖아요. 지금
거리낌이 있어라 이건 얼마나 중요한 거냔 말이죠. 뭐를 믿어라 그것은 외재적인 대상을 놓고 믿으라는 거예요. 그러나 너 가슴에 놓고 한번 생각해봐라 거리낌을 가진 인간이 되라. 그리고 너의 가능성을 발현할때 반드시 때를 생각해라.
* 유교는 신앙인이 되기 전에 사람되기 learning to be human를 가리친다. 유교의 기반위에서 신앙을 선택하면 그 신앙은 광신의 폐해에서 벗어난다.
내가 나갈때인가 물러날 때인가.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면서 시중을 어기면 큰 인물이 못됩니다. 잘팔린다고 막 떠들어 대고 연애인들도 그냥 무슨 프로건 각 방송사을 다 쓸어.그런데 그러다가 망하잖아요.물러날 줄을 알아야죠.
그러니까 항상 타이밍의 예술을 놓치지 않는 사람 이것이 동양인들의 지혜인들의 특성이예요.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가진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서 인간의 가능성을 최대한 끄집어 내야 된다는 거죠.
* 유교는 근대화과정에서 과학과도 충돌을 일으키지 않았다.그래서 유교는 서양과학을 흡수하는데 매우 열심이었 다. 格物致知 격물치지의 이론이 동아시아의 과학의 번영을 가져왔다.
그리고 이장을 끝내기 전에 우리가 중용이라는 말에 있어서 하나만 더 해설을 하겠습니다.
중요이라고 할적에 용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이것이 凡庸 범용의 의미거든요.
뚜웨이밍 교수는 중을 cetrality 용을 commonality 라고 번역했어요. 항상 common한 거라는 거죠.
그러니간 동양에서 용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스러움이라는 거죠. 용이라는 말은 常이라든가 恒과 항상 관련이 있어요.
* 중; cetrality 용; commonality
하버드대학교수 현재 북경대학 고등인문연구원 원장 뚜 웨이밍 杜維明의 번역
* 다산 정약용도 용을 항상 恒常 경상 經常의 의미로 파악했다.
그러기 때문에 노자에서도 夫物芸芸, 各復歸其根 (만물이 쑥쑥 자라나는데 그것들은 각각 제 뿌리로 돌아간다.)
라고 말했고 거기에서 말하는 歸根曰靜, 是謂復命 復命曰常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고요함이라 하고 도 이것을 일컬어 천명으로 돌아간다 한다. 천명으로 돌아가는 것을 일러 상이라고 한다) 자기의 뿌리로 돌아간다. 그리고 복명이라고 했거든요. 이복명이라는 것을 상이라고 했거든요.
* 復命曰常 ;천명으로 돌아가는 것을 느 그러함, 즉 상이라고 한다( 노자 16장)
여기서 말하는 常이 곧 庸용이다.
천명지위성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깐 용이라는 것은 항상 천명으로 되돌아 간다는 의미가 있는거예요.
* 우리의 범용의 삶이야말로 천명으로 항상 되돌아가는 모습이 되어야 한다.
이 중용의 의미의 심오한 것은 항상 용이라는게 단순하 용이 아니라 범용하다는 거 인간의 범용한 현실 시간 속에서 흘러가는 인간의 범용한 현실이야말로 가장 우리가 항상 천명의 제자리로 돌아가는 그러한 범용이다 이거죠. 그러니깐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범용처럼 위대한 건 없어요.
이거를 장자가 말하기를 庸야자, 用야 ( 庸이라고 하는 것은 用, 즉 쓰임의 듯이 있다. 만물이 제 쓰임을 발현하는 것이다. 用也者, 通也( 用이라고 하는 것은 만물이 제기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만물이 서로 通하게 된다. 通也者, 得也( 만물이 서로 通하게 되면, 만물은 스스로 덕성을 축적하여 자신의 自得하는 모습을 완성하게 된다( 장자 제물편)
그러니까 이 범용이라는 것은 인간이 범용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그 기능, 쓰임을 하는 거예요. 제 기능을 하게 되면 모든 것에 달통하게 된다.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고 서로 통하게 된다. 범용한 삶속에서 올바르게 쓰일수 있는 인간이 되면 항상 매사에 통하게 되는 거예요. 통하게 되면 그 통하는 것을 통해서 득하게 된다.지혜가 쌓이게 되고 그렇게 됨으로써 온전한 인간이 되어가는 거죠. 성인이 되어가는 거죠.
성인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범용한 일상에 있다. 매일매일 하루하루 생활에 있다는 거예요.
이것이 중용이 말할려고 하는 메시지란 말이죠.
군자는 중용하는데 그 중용은 군자다웁게 시중하고 소인은 소인다웁게 무기탄한다. 그런데 그것을하는데 중용이라는 용, 범용한 가운데서 그러한 삶의 매 마디마디에서 여러분들은 끊임없이 성인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