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2일 연중 제13주일 교황주일>
열등감 저 너머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마태 10,37-38) 예수님께 합당하지 않단다. 무슨 말씀일까? 그럼, 예수님을 제일 사랑하라는 것인데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함일까?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한다?’라는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혹시 ‘협소한 자아 상태’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사람은 태어나서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성장하고 자기 경험을 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마음의 토대를 만들어가지만, 이는 결국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기 위한 준비과정이다. 이 준비과정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며 사람은 세상을 향하여 ‘던져진 존재’로서 어떤 철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단독자’로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여전히 ‘아버지, 어머니’ 또는 ‘아들이나 딸에’ 머물러있다면 어떻게 될까?
‘십자가’는 고통의 상징이 아니다. 오히려 ‘십자가’는 ‘실현’ 또는 ‘구현’의 상징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의 실현’ 또는 ‘자기의 구현’이다. 이것은 ‘나’라는 존재가 가진 ‘의미’, ‘하늘의 뜻’을 삶으로서 ‘실현’, ‘구현’한다는 것이다. ‘이제 다 이루었다.’(요한 19,30, 공동번역본)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하겠다.
문제는 아무나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자아의 확장)이 아니고 아무나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아의 확장(성장)이 준비되지 않은 채 세상에 나가게 되면 사람은 자아의 힘으로 책임지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방어기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세상에서의 건전한 ‘자리매김’이 어려운 이유다. 또한 ‘자아 정체감’을 확고하게 하지 못한 채 십자가를 지게 되면 마치 ‘목적지(성소-존재 이유, 의미)’ 없이 떠도는 배처럼 정처 없이 시류에 휘말려 ‘무엇 하는 사람’인지 조차 알지 못한 채 시끄러운 인생을 살기 쉽다.
제1독서 열왕기 하권의 4장 8절 이하의 말씀에서 ‘한 부유한 여자’가 등장한다. 이 여인은 부유하였지만, 아들이 없었다. 이미 남편도 나이가 들어 인간적인 희망이 별로 없고 보유한 재산만이 유일한 위안거리일지도 모르는 인생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여인이 ‘음식을 대접하게 해 달라고’ 예언자 엘리사에게 간청했다는 것이다. 베풀려는 사람이 먼저 간청하는 의외의 모습이다. 왜일까?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이라는 이유였고 그녀는 이 ‘거룩한 사람’을 지나치지 않고 집으로 초대하였다. 이 여인은 깨어있는 의식으로 ‘마음놓침’(mindlessness)에 빠지지 않고 ‘거룩함’을 알아본 것이다. 자기 곁을 지나는 ‘거룩함’ 또는 ‘진리’를 놓치지 않고 자기 것으로 삼은 것이다.
제2독서 로마서(6장 3절 이하)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라고 외친다. ‘그분의 죽음’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분의 삶’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말과 같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발생한’(‘그리스도’라는 이름-존재의 은총과 나-존재의 선택적 결정이 만들어낸) 세례 성사를 통하여 우리의 존재는 이제 ‘그분’과 인격적으로 연결된다. 이제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넘어, ‘아들과 딸’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것이다. 이러한 ‘자아 확장’은 우리의 삶을 ‘진리에의 초대’이며 ‘하늘나라에 초대’하는 하느님의 은총이요, 거룩한 축복이 된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마태 10,39)은 축복의 ‘자아 확장’으로 나가지 못하고 ‘방어 책략’으로 어찌어찌 세상을 살아내려고 분투하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일 뿐이다. 이런 사람은 마침내 ‘자아실현’의 축복 되고 충만한 삶을 이루지 못하고 ‘허무와 공허’만이 가득한 인생의 종착지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열등감은 타인의 시선만을 강렬하게 느끼게 할 뿐 내 존재의 거룩함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게 한다. 열등감은 타인의 말과 행동에서 ‘행여 나를 어찌 보나?’ 하는 염려와 걱정만을 태산같이 만들어 나에게 강요한다. 행여 나를 무시하나 싶으면 즉각적인 방어적 태도로 분노가 폭발하면서 공격적인 사람이 되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가장 슬픈 일은 사랑하는 가족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이다. 열등감은 ‘나의 선한 의지’를 꺾어버린다. 반복되는 실망스러운 ‘충동적 반응’으로 ‘자신’을 포기하게 만든다. 열등감은 ‘감사하는 마음’마저도 꺾어버려 ‘불충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게 한다. ‘불충한’ 사람뿐일까? 열등감은 ‘소통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자신을 ‘고립’시켜버린다. 열등감이 있는 곳엔 ‘희망’도 ‘빛’도 없으며 ‘즐거움’도 ‘행복’도 없다. 죽음의 그림자만 길게 드리워진 열등감엔 생명이 없다.
어떤 이유로든, 어떤 형태의 열등감이든 우리가 이제 어른이라면 자신의 열등감에 책임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자신에게서 ‘열등감’이 있다고 인정할 수 있고 그런 자신을 수용할 수 있다면 우선 매우 잘한 일이다. 이것이 첫걸음이다. 다음엔 ‘이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고 자신에게 확신 있게 말해줘라. 죄책감이 방해할지라도 조금은 뻔뻔해져라! ‘내 잘못이 아니야!’라고 외쳐라! 그리고 내가 열등감을 느끼는 순간을 포착하라. 어떤 것에, 어떻게 열등감을 느끼는지, 쉽게 찾을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지나간 후에야 발견되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망하지 말고 사후에라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찾아내고 보면 보통 나의 지난 과거의 어느 순간과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리라. 그리고 어떻게 열등감이 만들어진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만약 이해하기 어렵다면 가까운 상담실을 찾아가서 자신의 열등감에 대한 정체를 확인하라. 이 열등감이 결코 나를 대신할 수 없다. 이 열등감으로는 예수님과 연결될 수 없다. 농이 살이 될 수 없듯이 열등감은 나의 자아를 왜곡시킬 뿐 결코 나의 일부가 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세례 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다. 세례 성사가 우리를 예수님과 이어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격이 예수님의 인격과 연결되어 우리의 삶이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되었다. 이것은 우리의 삶과 존재를 거룩하게 해주는 은혜로운 초대요, 우리 존재 가치에 대한 계시다. 우리는 진정 히브리 노예들처럼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다. 만약에 지금 자신이 어중이떠중이처럼 느껴진다면 무엇이 그렇게 느끼게 하는지 잘 살펴봐라. 자신의 삶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처럼 느껴진다면 아직 정체성을 구축하지 못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스스로 할 수도 있지만 도움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용기를 내어라. “얻어먹을 수만 있어도 은총입니다.”라고 했다.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얻어먹는 수치심’보다 ‘거룩한 초대’에 응할 수 있음이 내 삶에 더 본질이 아니겠는가?
첫댓글 우리의 삶과 존재를 거룩하게 해주는 은혜로운 초대에
응할수 있었으니 축복된 삶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