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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한 성도의 진실한 간구(시편 145:17~20) 2024년 8월 11일 주일연합예배
설교: 김성현 감독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행사에 은혜로우시도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저는 자기의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저희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다 보호하시고 악인은 다 멸하시리로다(시편 145:17~20)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의 갖고 있는 가장 강력한 의지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의 기도입니다. 기도로 꼭 무엇을 이루어서가 아니라,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축복하시고 또 영원한 주의 나라로 이끄시는 가장 중요한 그와의 연결선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세상에서의 호흡과 마찬가지입니다. 숨을 쉬지 않아도 바로 숨이 끊어지진 않습니다. 다만, 불과 2~3분이 지나면 더이상 자기의 생명을 지킬 수 없이 위태하게 되듯, 기도가 그런 것입니다. 생명이신 하나님과 우리가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장치입니다.
그렇다면 기도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고 도와주시는 것인가? 아닙니다. 기도하는 그 행위자체 때문이 아니라, 기도로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연결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그 시간이 실질적으로 하나님과 내가 함께하는 시간이고, 하나님과 함께 걷는, 하나님과 사귀는, 하나님께 진심으로 나의 모든 것을 맡기는 시간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 삶은 하나님과 우리를 누구도 끊을 수 없는 연결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사태를 통해 보면, 지난 세월, 많은 오해를 가지고 신앙생활 해 왔기 때문에 기도의 진정한 기능이 우리에게서 올바르게 활용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할수록 더 진실해지고, 하나님과의 실질적인 관계가 더 가까워집니다. 기도는 우리의 어떤 종교적 깊이를 두텁게 하는 식으로 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속은 없고 겉만 성숙해 가는 식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기도하면 할수록 그 모습이 노련해질 뿐, 그 사람이 진짜 신앙이 있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너무나 확실히 드러났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만남을 갖는 신자의 특권입니다. 구약시대 때부터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와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종교성을 나타내는 것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종교성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와의 호흡, 대화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만남인 것이고, 참 하나님께 나를 의탁하는 방법이고, 참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시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어떻게 하느냐?’가 우리에게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진실한 성도의 진실한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하고, 그 사람과 하나님은 진짜 사귐을 갖게 됩니다.
종교성으로 우리가 백 시간, 천 시간을 기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나쁩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는 상태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알지 못하는 신을 향해 주문을 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받으실 것이라고, 주위를 보니까 그렇게 되는 거 같다’고 해서 예수를 처음 믿을 때부터 그렇게 기도했다가 그런 모습으로 여러 해가 가고 몇 십 년이 되면 안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수백 시간 하는 것보다 한시간 내 하나님께 진정으로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과 나는 하나님과의 연결 없이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의 산 인도자가 아니시라면 내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를 방어할 장치가 아무것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진실한 마음으로 나를 드리지 않으면, 오늘 나를 보호하고 내일까지 견인해가시는 분이 나에게 없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 심령이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드려진 자라면 오늘의 안전이 보장되고 내일로 견인하시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확실합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과 온전한 연결 없이 기도를 계속 진행해 갑니다. 자기는 매일 기도하고, 또 매일 모임에 참석하고, 참석했으니까 안심합니다. 물론 그런 데 참석하는 것과 안 하는 것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연결이 없는 상태에서 그런 것은 겉모양일 뿐,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상달되지 않는 기도가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런 것이 오히려 우리를 더 나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사태를 일으킨 주요 인물들 중에는 기도를 찐하고 멋지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동안 그는 그냥 주문을 외웠던 것 같습니다. “뭘 해주세요. 뭘 해주세요. 내게 돈이 좀 더 나오게 해주시고, 돈이 조금 더 나오게 해주시고, 다음 달엔 돈이 좀 더 나오게 하시고, 우리 뭐가 잘 되게 하시고…” 아무에게도 도달하지 않는 기도입니다. 일단 이 사람은 기도를 받을 수 없는 상태일 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모든 사람이 이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 자기 마음이 열렸어야 합니다. 자기의 진실함이 진실하신 하나님과 통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함이 없으니까, 참된 모습이 없으니까, 사태 때 신앙이 싹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지 않았습니까? 배운 것들, 믿음의 훈련을 한 것들이 순간에 싹 없어졌습니다. 속임이 완전히 뒤엎었습니다.
제가 이 속임이라는 것을 굉장히 경계를 합니다마는, 속임이라는 것이 사태 전부터도 우리 교회를 이미 많이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 하나님을 기만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원로님에게 가서 사탕발림으로 이간을 해서 자기의 사적, 물질적 욕심을 취하려는 자들이 여럿이 있었습니다. 또 진정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는 사태 가운데 기회를 엿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런 한 사람 지나가면 한 사람 또 나타나고, 계속 연거푸 그런 자들이 나오는데, 신기한 일입니다.
저도 인간 세계에 태어나 이렇게 부끄러운 모습들, 충격적인 모습들을 많이 보게 돼서 신기합니다. 인간 세계가 신기합니다. 이렇게 말하니 마치 저는 인간이 아닌 것 같기도 한데, 저도 여기 들어왔다 가는 자이니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여러분의 인간 삶의 경험은 어떻습니까? 저도 보면서 신기합니다. 진짜 악하고 악한데, 겉으로는 빛나고 선한 천사의 모습이 따로 없습니다. 훌륭한 사람, 지위가 있는 사람, 우리가 알고 있는 성락교회 출신의 무슨 지도자, 지나간 사람들이 다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한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그 성읍을 멸하지 마십시오. 거기 의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면서 처음에는 의인 50명만 있으면 명하지 말아달라 하였다, 45명 만 있으면, 40명만 있으면, 하면서 의인의 수가 쭉 내려갔던 일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우리 중의 의인이 나올 것을 기대하기 보다는, 의인이 하나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과연 내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하나님 은혜로 살 수 있는지, 나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게 하고 있는지를 고민해야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사태 가운데 나름대로 싸웠습니다. 나름대로 너무 힘들고 너무 피곤한데, 여러분은 상상을 못 합니다. 나중에 가서 상상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가면 제가 좀 설명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태가 나니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삼습니다. ‘나의 교회의 위기는 나의 기회다!’ 정말 보니까 교회를 지킬 사람이 없더라고요. 다들 저마다의 이유로 여기 있는 것뿐이었습니다.
앞으로 무슨 말을 가지고 와서 저에게 그 정당성을 주장해도 저는 속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와서 멋진 말로 해명을 하고, ‘이런 것 봤는데 왜 그렇게 하시냐’고 해도 내 앞에서는 싸울 생각을 마세요. 저는 이 문제 대해서 하나님의 눈을 대변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아신다 그랬습니다[1]. 이런 사람이 돼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사람들은 모르더라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아닌지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얘는 날 별로 사랑하지 않는데.’ 하신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물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라도 하나님을 모시고, “나, 하나님 믿습니다. 나는 크리스찬입니다. 난 부처나 다른 신을 믿지 않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정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지만 보이는 내 사랑하는 사람보다 더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장에도 예수께서 ‘사람의 속이 믿을 만한 것이 없구나.’ 하고서, 비록 무리들 중에는 상대적으로 더 진실한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사람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았습니다[2]. 그러나 우리는 너무 악화된 이 상태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맡겨져 있고, 많은 사람들이 더러운 손을 대고 그랬습니다.
우리도 한번 옷을 싹 갈아입어야 합니다. 옷을 싹 벗고 새 옷을 입어야 됩니다. 어떻게 해야 될지 대단히 고민이 됩니다. 누가 또 사회의 정서를 갖고 와서 “우리가 이렇게 됐으니, 교회가 앞으로 이렇게 되는 게 정당하지 않소?” 하는 소리가 나오고 그럴 것입니다. 그런 미래가 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견뎌낼까? 걱정입니다. 고운 소리, 옳은 소리를 갖고 나올 것입니다. 이 사태로 교회를 망치게 한 사람도 제일 고운 소리를 내곤 했습니다.
주님은 겉으로는 옳게 하면서 그 마음은 완악한 사람들을 보시고 탄식하셨습니다. 그가 회당에서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는 걸 보고 사람들은 그가 못 고치길 바랬고, 그가 고치시자 마땅치 않게 여겼습니다[3]. 예수께서 인간이 하지 못하는 놀라운 이적을 나타내도 그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 데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어떻게 예수를 해칠까?’만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그들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완악하고 또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제일 더럽다고 했습니다[4]. 무슨 균을 먹어서, 상한 음식을 먹어서, 또 제삿상에 올랐던 것을 먹어서 더러워지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게 아니라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가장 더럽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 대해서 경계하십니다. ‘너는 어디 있냐? 너는 나를 사랑하냐?’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가망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다 출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제한된 점이 많고, 아픈 점, 회복될 점이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죄인 된 또 자기 과거의 모습들을 후회하고, 또 이런 연약한 점을 인정을 하고 이제는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축복을 받고 살겠다.’ 결심을 하고 행하기 시작하면, 누가 보든 안 보든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은 그를 아시고, 기독교라는 우리의 신앙은 진짜 살아있는 영원한 생명의 힘으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만 드리고 기독교인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하나님을 기만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을 속이는 것으로 수년간 신앙생활 해 왔다면 무슨 희망이 있느냔 말입니다. 하나님과 사귈 수 없는 자는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신다고 생각한다면, 교회 일이 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 생각한다면, 내 그리스도, 내 구주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교회로부터 뭘 뽑아 먹고, 교회를 이용하고, 교회와 감독을 이용해서 사업을 하려고 달려드는 거짓말쟁이들이 없을 것입니다. 저와 같이 일하는 그 어떤 동역자들도 ‘교회를 통해 우려먹어야지.’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난 여기서 내 모든 땀을 빼고, 눈물을 빼고, 내 피를 쏟아서 주의 교회를 돕겠다. 남은 모르더라도 하나님이 아시면 나는 행복하다.’ 우리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진실로 다가가서 하나님을 만난 경험들이 많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랫동안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교회는 교회가 돼야 됩니다. 저는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흘리신 그의 죽음이 살려 놓은 하늘과 땅의 최고의 이적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아도 나는 하늘에 속한 자다! 어떤 자가 천국 갈지 말지 고민하느니 차라리 ‘나는 하나님의 나라에 보장된 자다.’라는 보장을 굳게 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자기를 인치셔서 이미 보장이 된 자여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됩니다. 하나님께 진실하면 됩니다. 내가 의를 얻고, 거룩하게 돼야 된다는 조건은 필요 없는 것입니다. 어디 절대무오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세상에 부자들 곁에 서면 왠지 부러운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우와 부럽다. 나도 저렇게 했으면. 나도 저런 거 타고 다녔으면. 나도 저런 거 입고 다녔으면… 와 나도 저렇게 살았으면…’ 하지만 그 사람이나 이 사람이나 사실 다 똑같습니다. 외국 같은 경우 사람의 높이가 좀 다르게 보이기도 합니다. 어느 나라는 대대로 사회적 계급이 있습니다. 그런 자들을 보면 진짜 근사해 보입니다. 대대로 무슨 공작이니 후작이니 작위가 있습니다. 근데 우리나라에는 그런 계급이 없습니다. 모두가 평등한 시민입니다. 그런 걸 다 떠나서, 인간이 다 똑같습니다. 부자든 누구든 조금 있으면 그런 인생도 싹 지나갑니다. 부자가 쓰는 방이 좀 크고 집이 커도 그도 그냥 사람이고, 다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연결된다는 사람, 하나님이 알아주신다는 사람, 이보다 더 위대한 계급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하늘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시민, 하늘 나라의 시민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많이 훈련을 하고, 이제 사태를 종결함으로써 옛 시대에 속한 것들에서 빨리 벗어나기 원합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교회가 안전한 장치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가장 고민되는 문제입니다. ‘조심해야 되겠다. 내가 조금만 한눈 팔면 원수들이 사람들을 압도해서 그 더러운 손을 내미는구나.’ 마치 영화에서 나오는 좀비들 같습니다. 좀비들이 다가올 때 너무 징그럽지 않습니까?
우리는 다 회개해서 하나님 앞에 사랑스럽고, 하나님께서 참으로 “내가 너를 위해 피 흘린 것이 기쁘도다! 너는 은혜 받기에 합당하다.” 이렇게 여겨주시는 사람들 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할 때에 중언부언이라도 하는 것이 “하나님 미워! 하나님 싫어!” 하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그러지 말고, “내 하나님,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 저를 오늘 용서해 주십시오. 내 이 미련하고 부족한 것 때문에 또 내가 이렇게 무너집니다. 그러나 하나님, 날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제발 나를 용서해 주시고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내게 힘을 주시고, 내일 또 달려갈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오늘 당신을 의지하고 있사오니, 나에게 하나님의 긍휼로 봐주시고, 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인도로 승리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인도로 후회가 없는 오늘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과 사귀는 여러분 되시길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진실함으로 하나님께 다가가는 여러분 되시길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자, 우리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기도할 때에 내가 하나님 앞에 정말 원하는 것은 내 마음이 진실하여서 하나님 앞에는 기만함 없이 진실한 모습으로 그에게 나타내져서 그가 용납하실 수 있게 되길 원합니다. 주여, 나의 마음을 도와주시고, 내 심령을 도와주시고, 내 삶을 도와주시고, 내 모든 것을 주장하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간구합시다. 다 같이 합심하여 기도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 들은 우리 성도들 다 도와주시고, 우리의 간구가 정말로 진실한 마음으로 드릴 수 있는 것들이 되기 원합니다. 듣지 않으신 분에게 외치는, 서로 마음이 통하지 않는 무모하고 무감각한 기도가 아닌, 일방적인 외침이 아닌, 우리 하나님과의 진실한 사귐이 될 수 있는, 진실한 간구를 드릴 수 있는 우리 성도들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난날에 우리가 여러 가지 예를 보았던 바와 같이, 잘못된 우리의 신앙, 잘못된 우리의 간구, 잘못된 우리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입장, 우리의 위치를 다 고치게 하여주셔서, 오직 진실한 하나님 속에 자기의 영원한 생명을 의탁할 수 있도록 우리의 심령을 고쳐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녹취: 성락교회 성락선교센터
[1]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고전 8:3)
[2]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요 2:23~25)
[3]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막 3:1~6)
[4]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 15:17~20)
[출처] 20240811 진실한 성도의 진실한 간구(시편 145:17~20) 성락교회 주일연합 김성현감독|작성자 이기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