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7월25일.깊은 밤.
홍콩의 오홍채가 글자 그대로 홍콩의 정취를 만끽할
즈음,서울의 윤정님은 여전히 심연의 나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지금껏 체험해 보지 못한 이상한
감정이었다. 자포자기가 되어 그녀의 상념 속에서 동수의 기억을
지우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동수의 환영은 더욱 찰거머리처럼
그녀의 의식을 온통 지배하고 있었다.
__우리,애들은 얼마나 낳을까?
__동수씨가 말해 봐요.
__한 타스만 낳을까?
__어머머,끔찍해.
__정님이 닮은 예쁜 딸 하나만 있음 좋겠다.
__딸 낳았다고 구박 주려구?
__아냐,난 딸이 더 좋아. 단,정님이를 꼭 닮아야 한다는
조건부이지만.
끝없이 이어지던 그녀의 상념이 문득 깨어졌다.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이 그녀의 환영을 쫓아버린 것이다. 이 시간에
누굴까? 정님은 조심스럽게 수화기를 들었다.
"정님씨,홍콩의 오홍챕니다."
"어머,오선생님."
"한 가지 알려드릴 일이 있어서 전화드렸습니다. 박동수씨의
실종에 홍콩의 조방이 관련되어 있는 것 같아요."
"네?"
"틀림없을 겁니다."
"조방이라니? 그게 뭐예요?"
"홍콩의 폭력조직이죠. 음식점이나 술집,댄스홀 주변에서
기생하는 폭력조직입니다. 영업주나 종업원들을 보호해 주고
얼정거리면서 푼돈을 뜯어먹는 무리들이죠."
"아,유흥가에 있다는 폭력배들하고 비슷한....."
"바로 그런 무리입니다. 홍콩에는 이런 폭력조직이 일고 여덟
개가 있는데,조방은 그중의 하나예요. 그런데 여기 폭력조직은
국경을 무대로 밀수도 공공연히 하나 봅니다."
"그런데 동수씨의 실종과 조방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다는
거죠?"
"서울에서 살해되었다는 진충부라는 홍콩 사람 말입니다."
"그 사람은 실제 인물이 아니라 여권을 분실한
피해자라잖아요."
"그건 숍니다."
"네?"
"진충부가 쇼를 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단 얘깁니다."
"그럼?"
"진충부란 친구가 바로 조방의 주요 간부래요."
"그건 어떻게 알아내셨어요."
"저희들한테 든든한 후원자가 있지 안씁니까?"
"후원자가요?"
"마담 매화 말입니다."
"아....."
"정님씨,조금만 더 기다려 보십시오. 제가 멋지게 한 건
해치울지도 모르니까요."
"안 돼요. 오선생님,위험한 일은 하지 마세요. 혼자서 그런
폭력조직과 맞선다는 건....."
"염려 마십시오. 제게도 생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벌써 공작을
개시 했으니까요."
"하지만....."
"어쨌든 버스는 출발했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참,제가 홍콩에 다시 갈지도 모르겠어요."
"아니,왜요?"
"아무래도.....제가 직접 동수씨를 찾아야 할까봐요."
"별로 반갑지 않은 소식인데요?"
"네?"
"정님씨까지 위험을 자초하실 필요는 없잖습니까."
"전 꼭 갈 거예요."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그리고 생각이 고쳐지면 제게
연락 주십시오."
"벌써 결정했어요. 전 반드시 갈 거예요."
"알겠습니다. 오실 때 연락 주십시오."
오홍채는 내심 내키지 않는 듯한 말투로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리면서 정님은 갑자기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서울.7월26일.오전.
김석기는 벌써 한 시간째 한강변에서 사건현장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수사가 잘 풀리지 않을 때 현장을 다시
확인하는 것은 수사의 ABC다. 이 신조를 철저히 지키는
김석기였다.
그러나 이번 사건만큼은 이 법칙도 잘 적용되지 않는
듯싶었다. 오늘로써 벌써 두 번째 현장답사를 하고 있었건만
걸려드는 건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강둑 저편에서 강반장이 털레털레 걸어왔다. 그의 걸어오는
폼으로 보아 그도 별무소득인 듯싶었다.
"뭣 좀 찾아내셨습니까?"
"글쎄....."
"여기선 더 나을 게 없을 것 같은데요."
"자네 쪽은 어때?"
"마찬가집니다."
"음....."
김석기는 고개를 들어 멀리 한강을 내려다보았다. 한동안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자니까 허망한 기분이 조금은
가시는 듯 싶었다.
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결과에 의하면 변사체는 상반신의 앞쪽
배부위와 뒤쪽의 등에 혈액의 친하현상으로 인한 사반이 골고루
나타나 있었다.
그런데 상반부 안쪽의 사반은 맛사지를 한 결과 깨끗이
지워졌고,뒤쪽의 사반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것은 변사체가 죽은
지 30분 후에 뒤집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피살자가
살해당한지 30분 후에 사건현장으로 이동되었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그래서 김석기는 사체유기 현장인 한강변을 중심으로 30분
내에 도착할 수 있는 범위에 둥근원을 그리고 이 지역을 살해
가능지역으로 보고 광범위한 광역수사를 펼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수사는 여전히 지지부진을 면치 못했고,골육지책으로
초보단계의 현장답사만을 계속 벌이고 있는 김석기였다.
김석기가 강반장을 대동하고 다시 수사반으로 돌아왔을 때
뜻밖의 손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계장실의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윤정님이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
"어이구,귀한 손님이 오셨구먼."
"수사는 잘 되어 가나요?"
"허허.....아픈 데를 찌르는 군."
김석기는 너털웃음으로 얼버무리며 대답을 대신했다.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정님양이?"
"네."
그녀는 활짝 웃으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허허.....우리도 고전하고 있는데 정님양이 무슨 재주로?"
김석기는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곰도 뒹구는 재주가 있다는 거 모르세요?"
"음?"
김석기는 허를 찔린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까지 농담하러 온 것 같지는 않은데?"
"네,도움이 될까 해서 왔어요."
"그럼 어디 한번 들어볼까? 우리한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는지."
김석기는 정색을 하며 그녀와 마주 앉았다. 정님은 빙그레
웃었다.
"홍콩의 조방이라는 폭력조직에 대해서 알고 계세요?"
"알지."
"어느 정도루요?"
"귀동냥이나 한 거지. 조방의 조직원들은 각기 이름 중에 새
이름이 하나씩 들어 있다더군. 다른 조직과 자기 조직을
구분하기 위해서라던가?"
"그리구요?"
"일전에는 우리나라까지 건너와서 한바탕 칼부림한 적도
있었지."
"그래요. 그 조방이 이번 사건에 관련돼 있는 것 같아요."
"아니? 정님양이 그걸 어떻게?"
"계장님도 알고 계셨어요?"
"대충 짐작만 하고 있는 중이지. 확증이 없으니까. 예전의
렉소호텔의 칼부림 사건이 조방의 소행이었는데 이번 사건과
아주 유사하거든."
"놀랐어요,계장님. 과연 경찰이 다르긴 다르군요."
"허허.....정님양한테서 공치사를 들으니 쑥스러운데? 근데 그
소린 어디서 들었어?"
"이래봬도 저한테도 정보망이 있다구요."
"허허.....그래?"
김석기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제법 수사관 흉내를
내는 그녀의 모습이 깜찍하고 귀여웠다.
"진충부라는 사람은 조방의 주요 간부래요. 그리고 여권을
분실했다는 것도 쇼일 가능성이 높구요."
"저런,그게 정말인가?"
그는 깜짝 놀라는 시늉을 지어 보였다.
"네,믿을 수 있는 소식통이에요."
"허허,정님양을 다시 봐야겠는걸. 우리 수사관으로 특채를
해도 되겠어."
정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실래요? 그럼,제가 진짜 큰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도 몰라요."
"이거 구미가 당기는데?"
"저희 아빠를 만나서 설득을 좀 해주세요."
"어떻게?"
"제가 홍콩으로 갈 수 있도록 말예요."
"뭐?"
김석기는 놀란 얼굴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