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 이야기
1
여행지에 가면
돌아오면서 항상 생각하는 것이 있다.
내가 여기 또 올
건가?
하는
것.
어떤 사람은 한
곳에 꽂혀,
가고 또 가긴
하지만 세상에 가야 할 곳이 많으니 한번 갔던 곳
에 다시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5년 전 친지와 둘이서 배낭 매고 라오스
북부-
가장 일반적인
코스인 비엔티엔,
방비엥,
루
앙프라방을
다녀오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내가 언제 여기에
다시 오려나.
이번에 최선생이
라오스 가자고 했을 때 북부 코스만 있었다면 사양했을 것이다.
그런데 항상
관심은 갔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던 라오스 남부의 여러 곳을 거쳐 북부로 가는
프로그램을 보고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루앙프라방이나 방비엥에도 지난 번 배
낭여행에서 갈 수
없었던 곳들이 코스에 들어 있으니 당연히 간다고 말하게 되었다.
그래서 생각보다
훨씬 일찍 두 번째의 라오스 여행을 하게 되었다.
첫날은 비엔티엔에
잠시 머물러 잠만 자고 이튿날 바로 팍쎄 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렇게 먼저 남부
쪽으로 내려가서 꽁로,
팍쎄,
볼라벤 고원지대인
팍쏭,
그리고
시판돈까지.
이렇게 남부 쪽을
구경하는 동안 우리나라 관광객은 단 한사람을 만났다.
시판돈(4000개의 섬이라는 뜻)의 돈뎃 섬에서 20대의 배낭객을 한사람 만나 아주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다시
팍쎄로 돌아와 비행기를 타고 루앙프라방으로 왔을 때,
우리가 만난 것은
한
떼의 한국
관광객이었다.
여행자의 거리
가까운 곳에 숙소가 있어,
짐을 풀고 바깥에
나갔더니 여기 저기 온통 한국
말이다.
우리나라인 듯
했다.
딸랏
믓(몽족 야시장)에 나가 보니 스치며 지나가는
사람들,
물건 고르는
사람들의 말은 전
부 한국말인 듯
했다.
아니 누구라도 말을
하겠지만 우리나라 말만 내 귀에 들어왔던 게지.
그렇게 우리말만
골라 들어 그런지 귀에 철썩 붙어 떨어지지 않는 한국말은 그 이후에도 계
속되었다.
루앙프라방에서,
방비엥에서,
그리고 돌아가기 전
비엔티엔에서.
한국말이 반갑지
않고 왠지 멀어지고 싶은 이 마음은 나의 이기심 때문인가?
나 역시
그들
과 같이 시끄러운
한국말을 쏟아내는 사람은 아닌가?
누군가 나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그런 마음을 떨치려 해도 ..
그것만은 아닌 그
무엇이 있
는 것
같았다.
루앙프라방에서 첫
밤을 자고 새벽에 탁밧하는 것을 보려고 나와 보았다.
5년 전 그 곳이다.
그 때 우리는
사이밧(찹쌀밥)을 한 통 사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꿇어 앉아
스님들에게 밥을 조금씩 떼 보시를 하였었다.
그런데 이번에 나와
보니 절 담장 밑
에
낮은 의자들이 죽
놓여져 있고 의자 위에는 어깨띠가,
그리고 앞에는
사이밧이 놓여져 있다.
여행사에서 미리
맞추어 확보해 둔 듯하다.
잠시 후 왁자지껄
소리와 함께 우루루 모여드는
한국사람,
그 중에서도
50대 이상의 경상도 남자 목소리는 새벽
공간을 장악했다.
“
멀 쪼매씩 띠 준단
말이고?
귀찮다.
나는 한방에 다
주뿔란다”
“와 저게(저기)
중들 온다
온다...”
이런 말들과 함께
퉁탕거리며 의자를 차지하고 앉았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고 그 자리를 떠나고 싶은 마음 밖에 없었다.
멀찌감치 서서
탁밧 행렬과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한편에는 라오스
사람들이 꿇어앉
은 채 공손히
절을 하고 스님이 발우 뚜껑을 열면 고개를 숙인 채 사이밧을 떼 넣었다.
스님들은 무심한
듯 지나쳐 가며 중간중간 빈 바구니에 받았던 밥을 떨어뜨려 넣기도 하고
조그만 그릇을
앞에 놓고 앉은 어린 소녀의 그릇에 밥을 넣으며 지나갔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나 마음보다는 재미가 앞선 구경꾼들이 많아졌지만 본래의 마음이 망가
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내 마음을 다듬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
없이 재미로
앉았다 하더라고
탁밧행사에 참여하고 나면 마음이 달라질 것이라는 희망도 함께 해 보았다.
그러다가 진정한 탁밧을
보게 되었다.
방비엥에 갔을 때 내내
비가 내렸다.
둘째 날
아침,
식사를 호텔에서 하지 않고
바깥에 나가
죽을 사 먹고 돌아오는 길
탁밧 행렬을 만났다.
세분의 스님이 우산을 쓰고
맨발로 앞 서 가던
우리
일행을
지나쳤다.
나는 순간 멈추어
섰다.
스님들이 지나가자 어느
집에서 아주머니가 나와 무릎을 꿇었고 또 젊은 청년이
길거리에 꿇어
앉았다.
사이밧을 스님의 발우에
넣어 드리자 스님들의 독경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공손히 무릎 꿇은
청년은 준비한 깨끗한 물을 바닥에 뿌렸다.
독경이 끝난 스님들이
가시고 나도 발길을 돌려 호텔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아직도 오실
스님들이 있는지 길 가에는 동네 사람들이 경건하게 앉아 있었다.
루앙프라방에서 우울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방비엥도 많이
변했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우리나라의 ‘꽃보다 청춘’이라는 방송이
한몫한 것은
명백하였다.
5년 전에도 한국간판들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더 심했다.
그런가하면
배낭여행족들이 찾아와
편하게 뒹굴대던
카페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여러 곳에 높은 빌딩과 호텔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호텔 짓기는 진행
중이었다.
이런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은 것들이라면 순박한 라오스의 미소라 할 수 있으리라.
자본의 침투가
라오스 사람들의 상혼을 일깨우고 그래서 좀은 변해가겠지만 본질적인 것들
이 바뀌리라
생각지 않는 것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그들의 신앙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가 하면 그와
함께 갖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본다.
우리가 복을
지음으로서 나도 언젠가는 복을 받는다는 생각.
그래서 나에게
행운이 생기면
그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누군가에게 베푸는,
이런 윤회적인
베품의 미덕이 그들
에게는
있다.
그래서 서두르지
않고 핍박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우리가 생각할 때
참으로 힘들어 보이는 삶의 모습이 정작 그들에게는 아무런 어려움도 아
닐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불쌍하게
생각하는 것은 금물인 듯하다.
어쩌면 각박한
속에 아웅다웅거리는 우리가 더 불쌍하고 불행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첫댓글 한번 가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