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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istoteles의 Philia
“다른 좋은 것을 다 가졌다 하더라도 친구가 없는 삶은 그 누구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通淸 Academia》, 2015, 9. 30.
아리스토텔레스는 友情을 다음 세 가지로 나눈다. 즐거움(pleasure)의 友情, 有益(utility)의 友情, 德(virtue)의 友情이 있다. 즐거움의 友情은 친구들이 함께 있을 때 취미나 어떤 공유로 인하여 즐거움을 느끼는 경우를 말한다. 이런 友情은 상대방한테서 재미를 느끼지 못할 때 사라지게 된다. 유익의 友情은 친구 관계에서 실제적인 이익을 기대한다. 서로 사업의 성공이나 정치적 동맹을 위해서 협력할 경우 해당한다. 즐거움의 友情과 유익의 友情은 모두 대가(代價)를 바라면서 시작하며, 자기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때는 더 이상 친구가 아니다. “유익”이나 “즐거움” 때문에 성립되는 우정은 “우연적”인 것으로, 이것은 “불완전한” 우정이다. 반면 德의 우정은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덕에 있어서 유사한 사람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가장 완전한 우정이다. 이들은 아무런 이유나 조건 없이 “그 자체로” 서로를 위해 좋은 것을 원한다. 이들의 친구관계는 지속적으로 유지된다, 우정을 다른 어떤 것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친구는 “그 자체”로 선택할 만한 것이다.
友情은 다음과 같은 요소를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첫째, 友情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를 위해서 그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거나 그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一 순수성(純粹性) 一 둘째, 友情은 친구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一方的이지 않고 상대편에서 그에 合當한 사랑을 받는 것이다. 一 상호성(相互性) 一 셋째, 友情은 이런 사실을 서로 알고 있어야 한다. 一 인지성(認知性) 一
우정의 특징 : 우정은 “함께 있음”을 별로 내켜하지 않을수록 약해진다. 이런 까닭에 젊은이는 쉽게 친구가 되지만 성미가 까다로운 사람이나 나이 든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이런 사람들도 피차간에 선의(善意)를 품을 수 있다. 그들도 서로 잘되기를 바라고 선을 위해서 협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구가 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들은 “함께 시간을 보내지도 않으며 서로에게 기쁨을 느끼지도 않기 때문”이다. 또한 대화를 나눌 수 없으면 많은 우정이 해체된다. 많은 사람들과 동시에 에로스적 사랑에 빠지는 일이 불가능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과 완전한 우정을 형성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우정은 본성상 한 사람을 향해 생겨나는 것으로 보이며, 또한 많은 사람이 동시에 동일한 사람의 마음에 드는 일이 쉽지 않으며 좋은 사람이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우정이 형성되지 위해서는 서로를 잘 알아야하고 오랫동안 함께 지내봐야 한다.
동등성이 깨어지는 경우 : 유년시절부터 시작 된 우정이 나중에 큰 차이를 보이게 되는 경우, 이들은 여전히 친구일 수 있는가? 죽마고우(竹馬故友)이지만, 이들은 더 이상 동일한 것에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않고 공통의 관심사도 없기에 함께 생활 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타인보다 친구에게 선행을 베풀어야 하는 것처럼, 한 때 친구였던 사람에게 예전의 우정을 생각해서 무엇인가 해 주어야 한다.
우정의 난점 : 우정에는 3가지 종류가−즐거움⋅유익(有益)⋅덕(德)− 있고 각각의 종류에 따라 쌍방이 “동등한 관계”인 경우도 있고, “우열의 관계”일 수도 있다. 동등한 친구는 그 동등성에 따라 사랑이나 그 밖의 모든 점에서 “서로 같아야” 한다. 반면 동등하지 않는 친구는 “우열의 비례”에 맞는 것을 갚아주어야 한다.
“불평”이나 “비난”은 오직 “유익”에 따른 우정에서 발생한다. “德”을 근거로 맺어진 친구들은 서로 상대의 행복을 염려하며, 서로 잘해 주려고 애를 쓰기 때문에 불평과 다툼이 존재하지 않는다. “즐거움”을 근거로 맺어진 친구들도 거의 불평은 나오지 않는다. 함께 지내는 것에서 기쁨을 느낀다면, 자신들이 열망했던 것이 양자에 동시에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면, 두 사람의 관계를 끝내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익”을 근거로 맺어진 친구들은 “불평”이 나오지 마련이다. 이 관계의 친구들은 이익을 목표로 서로를 이용하면서, 서로 서로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의 몫이 마땅히 가져야 할 몫보다 더 적다고 생각하고 상대를 비난한다. 불평은 주로 관계를 “맺을 때”와 “끝낼 때” “서로 같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다. 대부분 사람들은 고귀한 것을 바라지만, 실제로는 유익이 되는 일을 선택하기 때문에 불평이 나온다. 보상을 받을 생각 없이 호의를 베푸는 일은 “고귀”한 일이지만, 여러 혜택을 받는 일은 “유익”한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받은 것만큼 “기꺼이” 갚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이 받은 만큼 갚지 못하는 사람은 친구라고 보기 어렵다.
동등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우정 : 우월성에 기초한 우정에서도 “분쟁(分爭)”이 발생한다. 어느 쪽이나 상대방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 우월한 사람은 자신이 상대보다 더 우월하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가지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더 열등한 사람도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은 친구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궁핍한 사람이 더 많이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우월성”에 기초한 우정에는 동일한 것을 더 많이 나누어 가지는 것이 아니다. 더 우월한 사람은 더 많은 “명예”를 얻고, 궁핍한 사람은 더 많은 “이득”을 얻어야 한다. 덕과 선행(善行)에 맞는 선물은 명예이며, 궁핍에 맞는 도움은 이득이기 때문이다. 서로 동등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사귐에서는 더 많은 혜택을 받은 사람은 그 대신 명예를 돌려주어야 한다. 우정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으로써 갚지 않으면 안 된다. 우정은 가능한 것을 구하지 반드시 가치에 비례하는 것을 구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도 신들이나 부모가 베풀어 주는 은혜에 상응하는 가치 있는 것을 갚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정과 자기애 : 우정은 “자기애”(自己愛)에서 나온다. 왜냐하면 친구란 ①자기의 친구를 위하여 좋은 것 혹은 좋게 보이는 것을 원하며 행하는 사람 ②자기의 친구가 그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사람 ③함께 생활하며 취미가 같은 사람 ④슬픔과 기쁨을 함께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특성은 훌륭한 사람이 자기자신에 대해 가지는 태도에서 발견된다. 사실 훌륭한 사람은 자기자신과 같은 의견을 가지며 영혼 전체에 더불어 같은 것을 욕구한다. 따라서 그는 “자기자신에게” 좋은 것 그리고 좋다고 생각되는 것을 원하고 그리고 실제로 행한다. 그것은 바로 “자기자신을 위하여” 그렇게 한다. 한편으로 훌륭한 사람은 자기자신과 함께 지내는 일이 즐겁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기자신과 더불어” 기뻐하고 슬퍼한다. 그에게는 슬픔은 슬픈 것이고 기쁨은 기쁜 것으로 언제나 “同一”한 것이지, 때에 따라 바뀌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그는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훌륭한 사람은 이런 태도는 자기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듯 친구에 대해서도 가지고 있다. “친구는 또 다른 자기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독한 우정은 자기애와 유사(類似)하다.
다른 한편 못된 사람들은 자기자신과 있기를 피하고, 함께 시간을 보낼 사람들을 찾는다. 그는 혼자 있을 때, 좋지 못한 기억들이 생각나고, 또한 앞으로도 그런 종류의 일들이 예견하는데,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 그런 것들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못된 사람은 자기자신 속에 사랑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기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 그리고 그에게는 “영혼이 분열”되어 있어서 자신과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못됨을 온 힘을 다해 피하고, 훌륭해지도록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자기자신을 사랑할 수 있고 또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우정과 마음의 일치 : 마음의 일치(一致)는 단순히 의견의 일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이 일치”한다는 것은, 무엇이든 동일한 것을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것을 동일한 사람에게 맡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음의 일치는 훌륭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한다. 이들은 언제나 “동일한 기반” 위에 머무르기에, 자신과 마음의 일치를 이룰 뿐만 아니라 친구 간에도 서로 마음의 일치를 이룬다. 이들은 정의로운 것과 사회에 유익이 되는 것을 바라며 공통으로 이것을 추구한다. 이 바램은 “지속적”이다. 반면 못난 사람들은 “잠시 동안”만 서로 마음이 일치한다. 이들은 수고나 공적인 부조(扶助)에 있어서는 “더 적은 몫”을 가지면서도, 이익이 되는 것은 “더 많은 몫”을 가지려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은 정의로운 것을 하고 싶어 하지 않으면서도, 서로에게 그것을 “강요”한다. 결국 이들은 “분열” 될 수밖에 없다.
선행을 베푸는 것과 받는 것 : 선행을 베푸는 사람이 선행을 받는 사람을 사랑하는 정도는, 선행을 받는 사람이 베푸는 사람을 사랑하는 정도보다 더 크다. 다시 말해 선행 베푸는 사람이 받는 사람을 보다 더 사랑한다. 선행을 베푼 사람은 선행을 받는 사람이 지금 도움이 되지 않고, 앞으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을 사랑하고 아낀다. 그런데 사랑하는 일이나 “선행을 베푸는 일”은 행위에 있어서 “더 우월한” 사람에게 속하는 일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힘들게 이룩한 것을 더 사랑하는 법이다. 선행을 받는 것은 힘들지 않지만, 선행을 베푸는 일은 “노고(勞苦)”가 필요하다.
친구의 수 : 가능한 한 많은 친구가 필요한가? 친구는 “너무 많지도 아주 없지도 않는” 소수(小數)의 친구가 필요하다. 많은 사람과 함께 살고, 되갚는 것은 부담스런 일이고 또한 삶은 그것을 행하기에 충분히 길지 않다. 자신의 고유한 삶에 충분한 수보다 더 많은 친구는 고귀한 삶에 번거로우며 장애가 된다. 음식에 양념처럼, 사랑은 오직 한사람에게 향하는 것처럼, 돈독한 우정 또한 “소수”의 사람에게만 느낄 수 있다.
친구가 필요한 시기 : 친구는 “좋은 처지”에 있을 때 더 필요한가, 아니면 “곤경”에 처했을 때 더 필요한가? 우리는 두 경우 모두 친구를 찾게 된다. 곤경에 처했을 때는 “도움”을 필요로 하고, 좋은 처지에 있는 때는 “혜택”을 베풀어 줄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정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더 필요하지만, 좋은 처지에 있을 때 더 고귀하다.
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좋은 처지에 있을 때나 곤경에 처해 있을 때나 모두 “즐거운 일”이다. 친구가 곁에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불행을 당했을 때, 친구가 우리의 불행을 보고 괴로워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고통스런 일이다. 누구나 자신의 친구에게 고통의 원인이 되기를 꺼린다. 그래서 남자다운 사람은 친구가 자신과 함께 괴로워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우리가 좋은 처지에 있을 때, 기쁨을 나누기 위해 친구를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역경에 있을 때, 친구를 부르는 일은 주저해야 할 것이다. “불행은 나 하나로 충분하다”는 속담이 있다. “친구는 또 다른 자기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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