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화(鳳仙花)
一歲上妹鳳花摘-한 살위 옆집 누나 봉선화 꽃잎 따서
入鹽搗碎藥指包-소금 넣고 찧어서 손가락에 매어주던
七月庭園發鳳仙-7월의 정원에 봉선화가 피었다
手爪染色昔日妹-손톱에 물들여주던 옛 누나는
比我一上健康吧-나보다 한 살 위니까 건강하겠지
爲活憑藉忘慕念-살기위한 핑계로 그리움도 잊어
乘車四時近故鄕-차타면 4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고향
閉眼彼岸遠那邊-눈감으면 피안(彼岸)의 언덕처럼 먼 저쪽 !
농월(弄月)
여름(7월)을 타는 늙은 촌놈(村漢) !
사람들은 보통 “봄을 탄다” 혹은 “가을을 탄다”는 말을 쓴다.
봄철에 입맛이 없어지거나 몸이 나른해지고 얼굴도 해쓱해지는 현상이다.
가을에 단풍이 물들고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 감정이 센티(sentimental)하여 쓸쓸한
감상(感傷)에 젖는다.
이런 감정들이 모두 봄, 가을을 탄다고 표현하는 이것들이다.
서양에도 봄을 탄다는 말이 있는지 영어사전에 아래의 문장이 있다.
suffer from spring fever, get peevish in spring.
봄철 열병을 앓다, 봄이 되면 소심해진다.
그런데 필자는 여름을 탄다.
7월 8월에 피는 봉선화(鳳仙花)와 맨드라미(鷄冠花)를 보면 마음이 짠하다.
돌아가신 어머님께서는 맨드라미가 피면 색깔이 고운꽃잎을 따서 그늘에 잘
말려 두었다가 찬바람이 날 무렵 가을이 시작되면 굴(牡蠣)이 나온다.
싱싱한 굴로 굴젓을 담글 때 맨드라미 꽃잎을 같이 넣으면 굴젓색갈이 맨드라미
색을 띄면서 아주 맛이 있다.
※굴-굴을 한자로 모려(牡蠣)·석화(石花) 등으로 표기한다.
굴껍질은 한약재로 남자의 몽정(夢精), 여성 생식기 질환 대하(帶下)에 사용한다.
굴의 한자 표기 말과 설명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전어지. 자산어보. 등에 있다.
결혼 후 아내에게 그 말을 하였더니 아내가 어머님께 굴젖담그는 방법을 배워
해마다 굴젓을 담가먹었다.
지금은 아내가 옆에 없기 때문에 맨드라미 굴젓을 먹을 수 없다.
마트에서 굴젓을 사먹으면 되지만 오히려 마음만 상할 뿐이다.
필자가 어린 시절 살던 고향집은 이웃 간에 울도 담도 없었다.
옆집에 음식장사는 이웃이 있었다.
필자보다 한 살 위의 누나, 한 살아래 남자, 두 살아래 여자아이---
이렇게 네 명은 형제처럼 잘 지냈다.
그 시절 어린이들은 놀이가 별로 없었다.
한 살위 이웃 누나는 7월 봉선화 꽃이 피면 우리들을 모아 놓고 꽃을 따서 꽃잎에
소금을 조금 넣고 몽돌로 꼭꼭 찧어 새끼손가락과 약지(藥指)에 붙이고 헝겊으로
돌돌싼뒤 실로 꼭꼭 묶어 주었다.
내일 아침에 풀어 !
조금 지나면 실로 묶어 피가 안 통하는지, 봉선화꽃잎 때문인지 손가락이
상당히 아프다.
아파도 참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하룻밤을 지내고 풀어보면 손톱과 손가락 살에 봉숭아물이 붉게 물들어있다
이것이 약 일주일 지나면 살에 배인 붉은 색은 빠지고 손톱에 봉선화 꽃잎의
붉은 색이 예쁘게 물들여있다.
이보다 더 예쁜 매니큐어(manicure)가 있을까
그 시절에는 초등학교 중학교남학생도 손톱에 봉선화 물을 들였다.
봉선화 자료를 찾아보면 서양에서도
“아프리카봉선화(Impatiens walleriana)”라는 기록이 있다.
탐험가인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1813~1873)이 동료인 영국의 선교사이며
노예제도 폐지 운동가인 호레이스 월러(Horace Waller1833~1896)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봉선화 꽃물을 손톱에 물들인 역사적 배경은 고려 25대 충렬왕(忠烈王)과
몽골제국 원(元)나라의 황제 쿠빌라이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고려 26대
충선왕(忠宣王. 1275~1325)의 설화에서부터 시작된다.
충선왕이 몽골에서 생활하던 중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가야금을 타고 있는 한 소녀
손가락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다음날 궁궐 궁녀를 조사하였더니 고려에서 온 한 소녀가 손가락을 모두 싸매고 있었다.
바로 봉선화 꽃물을 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설화에서 유일하게 고려의 소녀 혼자 봉선화 꽃물을 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한반도의 전통이 몽골과 원나라로 전해진 것을 의미한다.
한반도 문헌에서 봉선화에 대한 기록은 1241년 고려 문인 이규보(李奎報)가 펴낸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봉선화가 “봉상화(鳳翔花)”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다.
7월 하순이면 오색으로 꽃이 피어 비바람이 불어도 열매가 자라 씨가 터져나는
봉선화를 “봉상화(鳳翔花)”라 하였다.
“봉상화(鳳翔花)”는 봉황(鳳凰)이 날갯짓 모습을 형상화한 이름이다.
봉상화(鳳翔花)는 조선조 전기의 문신 서거정(徐居正)의 “봉상화(鳳翔花)”이름의
시(詩)에 잘 나타나 있다.
봉상화(鳳翔花)
花開無數映雕蘭-많은 꽃 피어 난간을 비추니
五色分明翥鳳鸞-오색 분명하게 나는 봉황(鳳凰)과 금조(琴鳥)
帶露七香尤可愛-이슬 두른 7월 향기 더욱 사랑스러워
折來閑挿膽甁看-꺾어와 한가히 꽃병에서 바라보네
서거정(徐居正)
봉선화의 꽃물을 손톱에 물들이는 이야기가 우리나라 문헌에 구체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조선 중기의 문신 소세양(蘇世讓)이 펴낸 양곡집(陽谷集)에
전해지는 시(詩) 봉선화(鳳仙花)다.
봉선화(鳳仙花)
夭嬌柔枝帶雨斜-가냘프고 어여쁜 가지 비 맞아 기울더니
薰風開遍女仙家-훈풍에 미인의 집 봉선화가 활짝 피었네!
纖纖指甲須紅染-가늘은 손가락 여린 손톱에 붉은 물들이려
共把金盆夜搗花-고운 질그릇에 밤새 꽃을 찧고 있구나!
소세양(蘇世讓)
※소세양(蘇世讓)-조선조 명종(明宗)때의 문신으로 명기(名技) 황진이의 스승이자
연인(戀人)으로 전하고 있다.
당시 손톱에 물을 들이기 위해 봉선화 꽃잎을 따서 이를 밤새워 찧고 있었던 것은
우리의 전해 내려오는 전통이었음을 노래하고 있다.
많은 문인과 시인들의 봉선화에 대한 시(詩)나 산문(散文)이 있지만 여기서는
지면(紙面)관계로 생략한다.
특히 조선 중기의 천재적인 여류시인으로 홍길동의 저자 허균의 누이 허난설헌의
시집이 조선이 아닌 중국과 일본에서 출판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여자가 좋지 않게 여겼는데 허난설헌이 죽은 뒤에 중국에서
시집이 출판되었다고 한다)
허난설헌(許蘭雪軒) 시집에 실린
“손가락에 봉선화 물을 들이며(染指鳳仙花歌)”라는 칠언시는 중국과 일본에서
시쳇(時體)말로 “공전(空前)의 히트”를 쳤다고 전한다.
시(詩)내용이 길지만 너무 아름다워 전체를 소개한다.
손가락에 봉선화 물을 들이며(染指鳳仙花歌)
金盆夕露凝紅房-금빛 화분에 저녁 이슬 내려 붉은 꽃송이에 엉겼고
佳人十指纖纖長-미인의 열손가락 가늘고 길구나.
竹碾搗出捲菘葉-큰 절구에 찧어서 배춧잎으로 둘둘 말아
燈前勤護雙鳴璫-등불 앞에서 양쪽 귀걸이 울리도록 칭칭 동이네.
粧樓曉起簾初捲-누각에서 새벽에 일어나 주렴을 걷고 보니
喜看火星抛鏡面-작은 불꽃 거울에 던져진 것 보이니 반가 워라.
拾草疑飛紅蛺蝶-풀잎 뜯을 때는 붉은 나비 나는 것 같고
彈箏驚落桃花片-아쟁 켤 때는 복숭아 꽃잎이 떨어진 것 같구나.
徐勻粉頰整羅鬟-토닥토닥 뺨에 분 바르고 쪽 진 머리 다듬으니
湘竹臨江淚血斑-상강의 대나무 피눈물 얼룩인 듯.
時把彩毫描却月-때때로 눈썹붓 잡고 초승달 그리다보면
只疑紅雨過春山-붉은 꽃비가 봄산을 지나는 것 같네.
허난설헌(許蘭雪軒)
봉선화 역사가 깊고 내용도 풍부하여 읽기가 너무 길어 지루하겠지만
꼭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조선조 후기 여항문학(閭巷文學)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사람인
규장각서리(奎章閣書吏) 김덕형(金德亨)이 꽃 그림에 열정을 바쳐 100여 종의
우리 꽃을 사실대로 그려낸 “백화보(百花譜)”라는 화첩을 만들어 판각하여
책으로 보급하였다.
그 서문(序文)을 18세기 후반기의 대표적인 조선 실학자인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가 썼다.
박제가는 서출(庶出)이었으므로 높은 학문이 있었지만 출세를 못했다.
박제가(朴齊家)는 추사 김정희의 스승이기도 하다
※여항문학(閭巷文學)-조선 선조(宣祖) 이후, 중인,서얼,서리,평민과 같은
여항(閭巷人)인 출신 문인들이 이룬 문학.
박제가는 백화보(百花譜)에 대한 서문(序文)에서
“사람이 벽(癖)이 없으면 그 사람은 버림받은 자이다”.
※벽(癖)-버릇 습관(習慣)
라는 열정적인 천착(穿鑿)의 “벽(癖)에 대한 언급에서
김덕형(金德亨)이 온종일 꽃을 주시하였던 생활상과 재능을 설명하면서
백화보(百花譜)를 그린 그는 꽃의 역사에 가장 위대한 인물로 기록될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이 백화보(百花譜)에 봉선화 이름을 누가 지어 냈으며 꽃물로 손톱을 물들이던
풍습을 예찬한 가사기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천착(穿鑿)-풀이 구멍을 뚫듯 내용을 파고들어 알려고 하거나 연구함
이렇게 귀중한 “백화보(百花譜)”는 안타깝게도 그 실물 책이 오늘날 전해져
오지 않는다.
안타까운 사실은 화가 김덕형의 그림은 당대의 가장 인기가 있었던 꽃 그림으로
이를 다투어 소장하려 했다는 기록은 많지만, 단 한 점도 그의 작품이
전해지지 않은 것은 큰 의문이여 아쉬움이라고 고미술계는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조선민족의 전설로만 전하는 김덕형(金德亨)의 “백화보(百花譜)”는 많은
이야기를 말로 전하고 있다.
이는 일본의 역사학자인 키노시타 모쿠타로우(木下杢太郎1885~1945)가
조선의 미술에 심취하여 많은 자료를 모으고 연구를 하면서 알게 된 것이라 한다.
키노시타 모쿠타로우(木下杢太郎)교수는 1943년부터 다양한 꽃을 그려내면서
일본 최초로 일본식 “백화보(百花譜)”를 펴냈다.
학계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중시하여 민족의 전설로 남아버린 화가 김덕형(金德亨)의
“백화보(百花譜)”에 대한 연관성을 살피고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중 중요한 것은
일본의 역사에는 봉선화 꽃물을 손톱에 물들이는 풍습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오랜 역사를 가진 일본의 오키나와(沖繩) 일대에서 번영하였던
고대 왕국 유구국(琉球國)에는 봉선화 꽃물을 손톱에 물들이는 풍습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유구국(琉球國대마도)-일본 오키나와현에 있었던 왕국의 이름
유구국(琉球國대마도)은 조선과 중국의 역사와 많은 연관성을 가진 왕국이다.
유구국은 예로부터 중국과 우리나라에 중계무역을 하였던 나라로
삼국으로 나뉘었던 왕국이 1429년 통일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에도시대(江戶時代)에 강력한 세력이었던 “사쓰마 번(薩摩藩)”의
침공을 시작으로 1879년 멸망되어 오늘날의 오키나와로 강제 합병한 것이다.
일본은 이러한 유구국(오키나와)에 담긴 이야기를 바탕으로 유구국과 일본은
그 뿌리가 같다는 논리를 앞세워 1921년 해군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상륙비(上陸碑)를 세웠다.
이후 오키나와(유구국-대마도)는 1945년 9월 일본의 2차 대전 항복 이후 미국의
통제에 들어가 있다가 1972년 일본에 반환되었다.
이러한 유구국(대마도)은 역사적으로 우리와 연관된 많은 이야기를 가진 영토로
2차 대전 종전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유구국(琉球國오키나와)의 독립을
주장하였던 곳이다.
이런 역사의 오키나와(유구국)의 전통 민요에 “봉선화(てぃんさぐぬ花)”민요가 있다.
일본어로 봉선화는 호우셍까(ホウセンカ-鳳仙花)이지만
오키나와(琉球國)의 말에서 전해진
오키나와 어의 봉선화는 “틴사구누하나(てぃんさぐぬ花)”이다.
오키나와 민요 봉선화(てぃんさぐぬ花)는 다음과 같이 봉선화 꽃물을
손톱에 물들이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봉선화(てぃんさぐぬ 花) 오키나와 민요
-봉선화 꽃은 손톱에 물들이고(爪先に染みてぃ)-
-부모님의 말씀은 가슴에 물들이세요(親のゆし事や 肝に染みり)-
이와 같은 오키나와 민요 봉선화(てぃんさぐぬ花)는 많은 의미의 연구 과제를
남기고 있는 노랫말이다.
이는 일본 본토의 풍습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봉선화 꽃물을 손톱에 물들이는
풍습을 가지고 있는 오키나와의 전신 유구국(琉球國)과 한국(조선)의 긴밀한
역사적 관계를 살피게 한다.
유구국 봉선와 민요 전체적인 가사에 담고 있는 내용이 부모에 대한 효도를
중시한 유교적인 가르침을 바탕으로 삼고 있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일본 본토나 유구국(琉球國오키나와)에는 유교(儒敎)사상이 없다.
이는 유구국(琉球國오키나와)이 조선에 오랫동안 조공을 보낸 조선의 속국(屬國)
이었음을 증명하는 역사적인 여러 기록과 함께
봉선화 꽃물을 손톱에 물들이는 풍습이 우리나라에서 전해진 사실이 유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에서 2차 대전 종전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유구국(琉球國)의 독립을
주장하였던 내용은 큰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것이다.
역시 이승만은 세계적인 정치가답다.
봉선화 꽃잎을 손톱에 물들이는 소박한 민속의 풍습이 단순한 감성의 역사가 아닌
민족의 슬기로운 지혜의 흔적임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
오늘날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역학 속에서 강대국 중국과 일본을 상대하여 대한민국이
헤쳐 나가야 할 역사적 과제의 현실에서 훼손 될 수 없는 역사의 진실이
손톱에 물들이는 소박한 풍속의 봉선화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입으로만 죽창가를 부르고 입으로만 반친일 정치에 이용할 것이 아니라
연약한 꽃잎하나가 일본에 한국의 문화를 심어놓은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