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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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니체시오 혹은 니즈에르,(NICETIUS)
축일 : 4월 2일
뚜르의 성 그레고리오의 큰삼촌인
성 니체시오는 부르군디 가문에서 태어났다.
사제가 된 뒤에도 그는 홀로된 어머니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효성으로 어머니를 공경했다고 한다.
그는 이땅에서 태어난 모든 어린이들은 누구나
시편을 읽고 쓸 줄 알아야 한다고 역설했고,
또 하인들과 노동하는 사람들도 이를 실천하도록
적극 계몽하고 도와주었다고 한다.
그는 국왕의 방문을 받고 리용의 주교로 발탁될
정도로 성덕이 높았던 것이다. 특히 그는
부정한 악령을 쫓아내는 구마력으로 명성이 높았고,
교회 음악을 개선하여 교회마다 적극 사용토록
한 것은 큰 공로로 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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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레오폴드,(Leopold)가이체
축일 : 4월 2일
레오폴드는 '강한 백성'이란 뜻이다.
뻬루지아의 가이체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요한이란 이름으로 세례 받고,
인근 사제의 도움으로 교육을 받았으며,
18세 되던 해인 1751년에 치보똘자에서
프란치스꼬회에 입회하여 레오폴드라는
수도명을 받았다.1757년에 사제가 된 뒤부터
그는 주로 사순절 순회설교를 담당했는데,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토마스 코리와
성 레오나르도 포르 모리스의 영향을 크게 받은
그는 선교사와 설교자들이 은퇴한 뒤에
머무를 수도원을 지으려고 하였으나, 난관이
너무도 많아서 지체하다가, 결국에는
스뽈레또 교외인 몬떼 루꼬 언덕 위에 자신의
소망을 이룩할 수 있었다. 1808년, 나폴레옹의
침략시에 그는 77세의 고령으로 투옥되었고,
나폴레옹의 실각과 더불어 몬떼 루꼬로 돌아왔으나,
몇 달 후에 선종하니, 그의 나이는 8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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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마리아 (Mary of Egypt)
축일 : 4월 2일
마리아는 히브리어 Myriam에서 유래된 말로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여자'란 뜻이다.
통회자, 은수자. 4세기경에 임종. 젊은
테오도시우스의 통치때, 팔레스티나에는
한 집에서만 43년동안 살았고, 하느님만 섬기는
거룩한 조시모라는 수도자가 있었다.
그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요르단으로 향하였으나,
자신은 자기 수도원과 20일 간의 거리나 떨어져
있음을 알고는 기도시간이 되어 시편을 외우고
있었다. 이때 그는 "조시모 신부님, 나는 여자입니다.
당신의 겉옷을 던지면 나를 볼 수 있습니다."
하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이 소리의 주인공이
곧 이집트의 마리아이다. 그녀는 이집트 여성인데,
17년 동안이나 거리의 여성으로 살아왔지만,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28세때, 신비스런 방법으로
그녀는 예루살렘으로 성 십자가 축일을 지내려 가는
일단의 무리들과 합류하게 되었는데, 여행을 하는
도중에 자기의 악습을 고치지 못하고 열심한
순례자들을 타락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드디어 예루살렘에 당도하여 성당에 들어가려 하니,
뒤에서 누가 잡아당기는 듯하여 들어가지 못하고,
한쪽 구석에 서 있다가, 처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크게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윽고, 눈을 들어
마리아 상을 바라보니, 그 성모님께서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고 한다. 그제서야 그녀는 밝은 마음으로
성당으로 갔고, 깊히 통회하니, "너는 요르단으로 가서
여생을 지내라."고 명하여 이렇게 사막에 산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요르단 사막에서 47년 동안이나 사람 한사람
구경못하고 살았다. 조시모는 그녀를 위해
성체를 영해주고, 그녀가 약속한 두 번째 지점에서
만나기로 하고 갔으나, 그녀는 이미 운명하고 있었다.
"조시모 신부님, 가련한 마리아를 장사지내 주십시오."
하며 숨을 거둔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자기의 모든
형제들에게 이야기해주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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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피아노(apphian)
성녀 테오도시아(theodosia)
축일 : 4월 2일
성 아피아노는 리치아 출신으로
페니키아의 베리투스 학교를 다니던 중에
크리스챤으로 개종하였다. 그후 19세 때에
체사레아로 이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 지방 총독이 모든 주민들은 신전에 희생을
바치라는 포고령을 내려 거창한 예식이
시작되었는데, 그는 아무런 성의 없이 그저
형식적으로 행동을 취하여 문제가 되었다.
감독관은 무조건 그를 발길로 찬 뒤 지하감옥에
넣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심문이 시작될 때,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오"하고 신앙고백을 하였다.
그들은 아피아노의 발을 기름에 튀기는 형을
가한뒤, 신전 앞으로 끌고 갔지만,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오직 한 천주이신
그리스도께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리하여 그는
바다에 던져져서 순교하였다.
이즈음, 티르 출신인 성녀 테오도시아는
체사레아의 성녀라고 불리웠는데, 그녀는
죽음을 앞둔 죄수들을 찾아가서 하느님을 잊지 말고
신앙을 고백하라고 타이르거나 그들을 위로하며
동분서주하였다. 이윽고, 그녀 역시 크리스챤임이
발각되어 창으로 옆구리가 찔리고
가슴이 도려지는 형벌을 받은 후 바다에
던져지는 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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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페인(John Payne)
축일 : 4월 2일
프터스버그 태생인 그는 열렬한
프로테스탄트 가정에서 자랐으나,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두에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1574년에 도착하였다.
그후 서품되자마자 즉시 영국 선교길에 올라
에셀스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매우 정열적으로
사목활동을 하였는데, 1년도 채 못되어서
그가 몰래 살던 주인 페트르 부인과 함께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그느 쳄스포드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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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치스코 은수자(1416-1507)
축일 : 4월 2일
프란치스코는 '프랑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파올라의 프란치스코는 관상 생활의 고독을
깊이 사랑했으며 '하느님의 집에서 가장
작은 자'가 되기만을 바란 사람이다.
그렇지만 교회가 그에게 활동적으로 세상에
봉사하기를 청했을 때, 그는 기적의 일꾼이
되었으며 국가의 진로 결정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부모와 함께 로마와 아시시를 순례한 후
파올라 근처의 해안에 있는 한적한 동굴에서
관상적인 은수자로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는 20세가 되기도 전에 그의 생활 방식을
본받고자 찾아 온 첫 제자를 받아들였다.
17년이 지난 후에 제자들의 수가 많아지자
그는 정식 공동체를 위한 규칙을 제정하고
교회의 인준을 청하였다. 이것이 바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은수회'의 설립이며
1474년에 교황청의 인준을 받았다.
1492년에 프란치스코는 자기 공동체의 명칭을
'작은 형제회'로 바꾸었는데, 이것은 자기
회원들이 하느님의 집에서 작은 자(minimi)로
알려지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겸손은 프란치스코가 일생 동안 그러했던 것처럼
형제들의 신분 증명이 되어야 했다.
프란치스코는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청빈, 정결,
순명의 서원 이외에 사순절의 금육을 계속
지키라는 네번째 규율을 덧붙였다. 그는
영적 성장을 위해서는 과감한 절제가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관상적인 은수자가 되는 것이
자기의 바람이었지만 하는님께서는 자기를
사도직 생활에 부르고 계심을 믿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 백성에게 봉사하기 위해
기적과 예언의 은사와 같은 자기가 받은
선물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옹호자인
프란치스코는 왕과 왕족들에게 직선적인
충고를 하여 나폴리의 페르디난도 왕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교황 식스토 4세의 요구에 따라 프란치스코는
파리에 가서 프랑스 왕 루이 11세를 도와
죽음을 잘 준비하도록 했다.(이야기 참조)
왕에게 봉사하고 있는 동안 프란치스코는
국가 정책을 진로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그는 프랑스와 영국 왕실 간의 결혼을
주선함으로써 평화를 회복하게 했고,
루이 11세에게 논쟁의 대상이 된 땅의 일부를
스페인에 되돌려 주도록 설득함으로써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 화평을 이루는 데에도
협력하였다. 프란치스코는 프랑스 궁전에 머물던
1507년 4월 2일 성금요일에 세상을 떠났고
죽은 지 12년이 지난 1519년에 시성되었다.
설명 : 파올라의 프란치스코의 생애는
지나치게 활동적인 세계에 대하여 담담하게
말한다. 그는 활동적인 일에 부름을 받은
관상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기도와 일 사이의
긴장을 예민하게 느껴야 했다. 그렇지만
프란치스코의 일생에서 그것은 생산적인
긴장이었다.
왜냐하면그는 국제 관계에 뛰어들게 된
자신의 업무에서 관상 생활의 열매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도와 절제의 견고한 기초 위에서
교회의 부르심 앞에 매우 진지하고
휼륭한 응답을 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 세상에 나가서 일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집에서
가장 작은 자인 자신을 통하여 일하시는
그리스도였던 것이다.
이야기 : 프랑스의 왕 루이 11세는 중풍에
시달리면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왕은 이탈리아에 있는 프란치스코에게
사람을 보내 그와 그의 수도원을 돕겠다는
많은 약속을 하며 프랑스에 와서 자기를 고쳐
달라고 청했다. 프란치스코는 자기를 가라고
명령할 수 있는 교황에게 왕이 직접 부탁할 때까지
거절했다.
루이 11세는 프란치스코에게 무릎을 꿇고
자기를 고쳐 달라고 간청하자 프란치스코는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고,
그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니 만큼 다만 그를 위해
기도할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 뒤로 성인은 여러 차례 왕과 만났다.
프란치스코는 비록 배우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그의 말에 지혜가
넘쳐 그를 통해 성령이 말씀하신다는 것을
확신했다고 증언했다. 기도와 표양으로 그는
왕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왕은 그의 팔에 안겨
평안히 운명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