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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후손들 이야기
(창 5: 1 - 6: 8)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라는 제 5장의 서문형식은 창세기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에서 "천지의 대략이 이러하니라"(2:4)는 서문에 이어 두번째로 나타나고 있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새로운 이야기가 5:32에서 마친다고 생각하나,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가 나타나는 6:9 바로 앞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Cassuto). 사실 5:32은 이 이야기의 끝으로 보기에는 미흡하다.
왜냐하면 5장의 이야기는 족장들이 얼마나 살았는지만 말해주고 별 내용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6:8)는 좋은 마무리를 해준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창세기의 저자가 하나님의 심판의 불가피성을 말씀하면서도 늘 끝에 가서는 하나님의 구원사의 새로운 계획을 늘 말하면서 마치는 것과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아담의 후손들 이야기(5:1-6:8)는 (1) 아담의 10대 손들(5:1-32), (2)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빗나간 결혼(6:1-4) 그리고 (3) 홍수 전야(6:5-8)의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아담의 10대 손들(5:1-32)
1) 서문(5:1-3)
이 서문은 독자들로 하여금 창세기 첫 장의 천지창조(1:1-2:3) 중 남녀의 창조(1:26-27)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첫 인간 창조에서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으며, 이제 아담이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는다." 또한 이 서문은 출생과 작명의 패턴을 따라, 4장 마지막 부분(25-26)과 이어진다. 첫 부모가 자기 아들들의 이름을 지은 것 같이, 5장의 서문에서는 하나님이 아담의 이름을 짓고, 아담은 그의 아들 셋의 이름을 짓는다. 나아가 마치 하나님이 아버지처럼 아담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은 것 같이, 아담은 "자기 모양대로 아들을 낳는다." 이리하여 아담은 셋의 아버지이며, 셋은 에노쉬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이들 모두의 아버지가 되신다. 이후의 창세기에 나오는 족보들을 보면, (1)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며(10장), (2) 하나님은 특히 아브라함과 그의 씨의 아버지이다(11장).
또한 창세기의 저자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축복하시는 주제로 돌아간다(1:28; 5:2). 마치 아비가 자식을 돌보며 축복하듯이(창 9:26-27; 27:27; 48:15; 49:29), 하나님께서 계속 인류를 돌보시며 아담에게 주신 첫 복을 다음 세대로 넘겨 주신다(1:28; 5:1; 9:1; 12:3; 24:11). 마치 하나님은 인자하신 아버지처럼, 자신의 모든 복을 후손에게 넘겨주신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며 온 땅에 충만하고 자신의 뜻을 이루시려던 원래의 계획은 인간의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씨(3:15), 아브라함의 씨(12:3), "유다 지파의 사자" (49:8-12; 계 5:5-13)를 통해 이어져 간다. 바로 이 기초 위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를 통하여 "우리를 복 주시고" (엡 1:3), "우리를 그의 양자로 삼으시고" (1:5), 우리로 "기업을 얻게 하시며"(1:11), 우리로 그를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한다(롬 8:15)고 말한다.
2) 족보의 구조
가인과 라멕의 교만과 폭력의 족보가 끝나고 이제 셋을 통한 새로운 족보가 시작된다. 이들 중 10명의 유명한 사람들은 아래와 같다 (5:1-32)
대 성경본문 이 름 대 성경본문 이 름
1 5:1-5 아담 6 5:18-20 야렛
2 5:6-8 셋 7 5:21-24 에녹
3 5:9-11 에노스 8 5:25-27 두셀라
4 5:12-14 게난 9 5:28-31 라멕
5 5:15-17 마할랄렐 10 5:32 노아
먼저 아담에서 셋을 통해 흐르는 족보는 바로 앞 장에 나타난 가인의 족보와 그 이름에 있어서 유사성이 많다. 즉 (1) 가인(4:17)과 게난(5:12), (2) 이랏(4:18)과 야렛(5:18), (3) 므후야엘(4:18)과 마할랄렐(5:12), (4) 므드사엘(4:18)과 므두셀라(5:21)는 발음이 비슷하다. 또한 가인의 후예에도 에녹(4:17)과 라멕(4:18)이 있듯이 셋의 후예에도 에녹(5:21)과 라멕(5:28)이 있다. 그러나 이름이 비슷하거나 같다고 같은 인생을 사는 것 같지 않다. 이들은 전혀 다른 역사를 만들고 있다.
3) 족보의 수사학적 메시지
위에 나타나는 족보는 대단히 선별적이며 일정한 패턴을 따라 체계적으로 주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틀과 그 변화를 통해 저자는 수사학적으로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먼저 저자는 족장들을 아래와 같은 형식으로 소개해 간다.
(1) A는 X세에 B를 낳았다.
(2) A는 B를 낳은 후 Y년을 살며 자녀들을 낳았다.
(3) A는 X+Y세를 살고 죽었다.
이런 틀에서 보면 저자는 다음과 같은 강조를 하고 있다.
(1) "그가 죽었더라"
5장에 있는 족보는 11:1-26에 있는 셈의 족보와 형식에 있어서 거의 일치한다. 하나의 차이가 있다면, 5장에서는 각 사람을 소개하고 "그가 죽었더라"는 구를 지루할 정도로 첨가해 간다. 왜 저자는 이 족장들의 죽음을 강조해야 되었을까?
아무리 오래 살아도, 아무리 훌륭하게 살아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말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진다(3:19).
(2)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 가시므로 있지 아니하였더라"
모든 사람들이 죽어가는 가운데, 에녹에 대한 소개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다"는 독특한 말씀이 나타난다(24절). 즉, 저자는 에녹의 예외를 강조하기 위해 각 족장의 죽음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에녹은 "죽음"이란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왜 에녹은 예외였을까? 저자는 반복하여,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22, 24절)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동행하다"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그는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말한다(6:9).
즉 에녹은 죽음의 저주 속에서 생명을 찾은 자요 아담의 운명을 벗어난 자의 예증이다. 아담과 그 후손의 죽음에 대한 선언은 최종적이 아님을 에녹을 통해 저자는 발견하고 있다. 즉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면" 생명나무에로의 길이 열려 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여" 그 길을 찾았다. 저자는 이 주제를 17장에서 다시 다룬다. "내 앞에 행하고 온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너와 세우리라"(17:1-2).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생명에로의 길이다. 모세는 광야에 있는 백성들에게 "내가 생명과 축복, 죽음과 멸망을 너희 앞에 둔다" (신 30:15-16)고 말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법칙 몇 개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시내산에서 준 율법과 더 나은 미래의 길을 바라보고 있다(신 30:5-16). 에녹(5:22), 노아(6:9), 아브라함(15:6)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따라 산 자들이다.
(3) 노아
가인계의 라멕(창 4:23-24)과 달리 셋의 후손 라멕(5:28-31)은 세상에 임하는 저주를 느낀다. 경건한 라멕은 그러나 위로의 때를 사모하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이 이 저주로부터 구원을 가져올 것을 바라본다.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5:29).
셋 가문의 역사를 도표로 볼 때, 그 절정은 노아에게 있으며 이 이야기는 결국 다음에 나올 홍수 심판을 향해 이야기가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앞에 있는 가인의 족보(4장)와 여기 있는 셋의 족보(5장)는 첫 타락(3장)과 홍수 심판(6:9 이하) 사이에 들어와 "타락과 심판"의 관계를 설정해 줄 뿐 아니라, 이 심판의 파국으로 치닫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주님의 구원 역사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즉, 5장의 족보는 홍수 이야기를 제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짜여졌다. 홍수 이야기는 두개의 족보 사이에 주어지고 있다(5:32; 9:28, 29). 노아는 수고로이 일하는 인간들에게 위로를 줄 것이다(5:29).
8:21을 보면, 노아가 가져오는 위로는 방주 안에서 인류를 보전하는 것일 뿐 아니라, 홍수 후에 제사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노아는 미래에 인류를 파멸시키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게 하며 새로운 인류를 이루어 가는 조상이 된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빗나간 관계(6:1-4)
인류의 역사에서 첫 파국으로 기억되고 있는 홍수 이야기(6:9-9:29)로 들어가기 직전에, 창세기의 저자는 이중적인 렌즈로 아담의 후손들을 비추고 있다. 그는 먼저 5장에서 길고 긴 생애를 살았던 아담 후손들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번성하나 "사람의 딸들"에게 빠지며, "거인"(네필림)이요 "용사"이나 연약한 "육체"가 되어 버리는 모습을 간략하게 비추고(6:1-4), 이어 그들의 내면적인 악을 들추어 내며 이에 대한 하나님의 고통스러운 반응(6:5-8)을 짤막하게 묘사하고 있다(6:5-8).
창세기의 큰 흐름에서 보면 6:1-8은 5:1-32로 이어져야 한다. 그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로, 5:1의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6:8까지 이어진다. 이 단락에서 노아는 아담의 10대 손으로 새로운 인류의 희망으로 태어나, 결혼하고 자녀를 낳는다(5:29-32). 이어 그는 온 인류가 타락한 가운데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 소개된다(6:8). 둘째로, 6:9은 "노아의 사적이 이러하니라"로 시작하여, 홍수와 연관된 노아의 독자적인 세계는 6:9부터 시작된다.
셋째로, 6:1은 5장에서 지나가며 언급된 "딸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들은 5장의 족보에서 별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이들이 시선을 끌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라는 6:1은 5:1-32에 기록된 아담 후손들의 모든 생육과 번식의 과정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5:1-6:8은 홍수 직전의 옛 세상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이 부분은 아담의 창조로부터 그의 후손이 "크게 번성한 것"(6:1)과 역설적으로 그들의 번성이 "죄의 번성"으로 변질되며(6:5), 결과적으로 노아의 가정을 제외한 그들의 모든 후손이 멸망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으로 마치고 있다(6:7).
이리하여 5:1-6:8은 두개의 태고사 사건, 즉 창조와 홍수를 10명의 족장의 족보로 연결시키고 있다. 창세기의 시간표에서 보면, 이 장은 세계사 중에서 가장 긴 시간을 담고 있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사람 노아를 제외하고는 이 장은 이야기를 간명하게 전개한다.
따라서 창세기 6:1-8은 아담 자손의 계보 이야기에 대한 좋은 요약일 뿐 아니라, 홍수 이야기의 서론적인 배경으로서 좋은 고리를 맺어주고 있다. 즉, 이 단락은 문학적으로 볼 때 앞 뒤를 다 잇는 이중기능(double-duty)을 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형식은 창세기에서 계속 나타나고 있다(2:1-3은 1:1-31을 요약한다. 창 10:31-32, 11:27-32, 출 1:7을 보라). 이리하여 창세기의 저자는 아담과 하와의 실락원 후, 가인성 이야기(4:1-26)와 셋을 통한 구원의 새로운 세대 이야기(5:1-32)를 마치고, 노아와 홍수 이야기(6:9-9:29)로 들어가기 직전에, 홍수 전야의 세계를 잠깐 비추어주며 홍수 심판의 불가피성을 말해주고 있다(6:1-8).
홍수 전야의 세상은 가인으로부터 시작된 형제 살해와 라멕으로부터 시작된 일부다처주의와 무절제한 폭력이 도시문화의 발달 속에서 더욱 가속화 되며 하나님의 심판을 불가피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비록 한 평생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이 있었고(5:23),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던 셋 계통의 라멕(5:28)이 있었지만, 이들의 경건한 삶의 모범은 그 당시 세상의 부패를 막기에 충분한 빛과 소금이 되지 못했다. 이리하여 세상은 최종적인 파국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1)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6:1-2)
"이 단락은 오경에서 가장 모호한 본문"이라고 하는 카수토의 말처럼(291쪽), 여러가지 어려운 난제들을 담고 있다. 먼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 것"이 아담 후손들의 일상 생활로 나타나며, 이들을 통해 "장사들"(네필림)이 태어나고, 궁극적으로 홍수 심판의 직접적 원인으로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여러가지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1) 천사들로 보는 견해(70인역, 에녹 1서, 주빌리, 쿰란, 필로, 카수토)
고대의 해석자들은 이들의 결혼과 장사들의 탄생과 홍수 심판 사이에 밀접한 연관성을 찾으며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들"로 보았다. 유대 문헌 중 외경 에녹서는 이 절을 천사들의 타락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늘의 아들들인 천사들은 그들을 보고 탐하였으며 서로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사람들의 자식들에게서 우리를 위해 아내를 취하고 그들로 우리들을 위해 자식을 낳게 하자.' 이리하여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아내들을 취하고, 각자가 자기를 위해 여자들을 취하였다. 그들은 그들 안에 들어가기 시작하였으며 그들과 난잡한 관계를 가졌다. 그들은 그들에게 마술과 주술을 가르쳤으며 뿌리와 나무를 자르는 법을 가르쳤다. 그들은 잉태하여 거대한 거인들을 낳았으며 그들의 키는 3000규빗(약 1500미터)이나 되었다. 이들은 인간의 수고를 다 삼켰으며, 사람들은 자신을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 여자들은 거인들을 낳았으며, 이로 인하여 온 땅은 피와 불법으로 가득차게 되었다"(에녹 1서 6:2-7:7; 9:9)
"하나님의 천사들은 그들이 보기에 아름다운 것을 알았다. 이리하여 그들(천사들)은 그들이 선택한(인간 여자들)과 결혼하였다. 그들은 아이들을 낳았고 이들은 장사들이었다. 땅에 악이 증가하였다. 사람으로부터 가축, 동물들, 새들과 지면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부패하였고, 그들에게 정해진 길에서 벗어났다. 그들은 서로 삼키기 시작하였고 악이 땅에 넘쳤다"(주빌리 5:1-5 참조).
사실 천사들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려진 곳은 성경에 많다(시 29:1; 89:7; 욥 1:6; 2:1 등). 그러나 이들을 천사들로 보기 어려운 점들이 많이 있다.
① 구약성경에서 천사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 "아들"은 신체적인 후손을 가리키지 않으며 "한 그룹의 일원"이란 뜻으로 사용된다. 마치 "선지자들의 아들들"이 "선지자 그룹의 일원"이란 뜻과 같다. ② 천사들은 성생활을 하지 않는다(마 22:30). ③ 나아가 타락한 천사들의 잘못 때문에 모든 인간이 홍수로 모두 죽음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다.
④ 뒤따르는 4절에 따르면, 이들의 후손들은 "네필림"으로 불려지는데, 이들은 출애굽 당시 가나안 땅에 살았던 장대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민 13:32-33). 이들은 사람의 후손이기 때문에 창세기 6장에서 "신적인 존재를 통해 낳은 반신반인적인 존재"로 볼 필요가 없다.
어떤 학자들은 신약성경 중 베드로전서 3:19-20에서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는 말씀이 "천사들의 타락"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용하지만, 본문은 해석하기 너무 까다로우며 확고한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또한 베드로후서 2:4에서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역시 "타락한 천사들" 설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 구절은 "창세기 3장에 있는 인간의 타락 이전에 있는 천사들의 반역으로 보인다"(영블라드 81).
(2) "셋의 후예들"로 보는 견해(존 머레이; 영블라드 82-83)
존 머레이를 비롯한 많은 복음주의 학자들은 여기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의 후예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아들들"인 셋의 후예와 "사람의 딸들"인 가인의 후예 사이에 성행하였던 종교적인 통혼이 홍수 심판의 근거가 되었다고 한다. "인간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결혼을 생각할 때, 셋의 후예들은 그들의 믿음과 경건의 유산을 뒤로 하였다. 그들은 아내가 될 만한 사람을 찾을 때, '이 여인이 내 가정을 경건한 가르침의 장소로 만들 것인가?'를 묻지 않고 '그녀가 아름다운가?'를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 던졌다"(Davies 74).
이 해석은 앞뒤의 문맥과 어울릴 뿐 아니라(창 5:1-32; 6:9 이하), 신자와 불신자의 결혼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는 점에서 신학적으로도 의미심장하다(신 32:5; 시 73:15; 사 43:6; 호 1:10; 눅 3:38 등). 따라서 여기의 "하나님 아들들"은 "경건한 자들"이며 그들이 "하나님의 딸들"과 결혼하지 않고(사 43:6), "사람의 딸들"과 결혼했기 때문에 타락한 결혼으로 보게 된다(영블라드 82쪽).
그러나 이 해석에 따르면 6:1의 "사람"과 2절의 "사람"이 각각 "일반적인 총칭으로서의 사람"(1절)과 "가인"(2절)으로 달리 해석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아들들"을 이런 제한된 의미로 사용하기 힘들고, 또한 이들의 결혼에서 태어난 자들이 "네필림"과 "용사들"이 되었다는 점을 설명하기 어렵다.
(3) "고대의 통치자들"로 보는 견해(Kline; 김이곤)
세번째로 여기의 "신의 아들들"은 홍수 직전에 세상을 다스렸던 통치자들로 보는 해석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여 독재정치를 하여 세상을 어지럽혔으며, 또한 자신의 무절제한 성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기들이 보기에 아름다운 여자들을 다 취했다. 이들의 난잡한 생활이 폭력을 수반하였기 때문에 "강포가 땅에 가득하였다"고 한다(6:13).
고대의 통치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부를 수 있는 근거는, 첫째로 그들이 원래 "신의 아들"로 불려졌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가나안 문헌에 케렛왕은 '엘의 아들'[bn il]로 불려진다). 즉 창세기 저자는 "소위 하나님의 아들"로 불려지는 왕들과 제후들이 호색과 폭력에 빠졌다고 말하고 있다. 옛날의 저자들은 우리처럼 인용표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는 바로 지도자를 가리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시편 82편에서도 세상의 통치자들과 재판장들을 "신의 아들들"이라고 부른다.
둘째로, "자기가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다"는 말 자체가 그들의 권세를 드러내어 준다(라멕도 일부다처와 폭력을 행사하였다. 창 4:23-24)". 하나님의 아들들은 보통 사람 위에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군림하는, 더 우수하고 더 강한 자들, 제왕이나 그것에 준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표상하는 용어였다"(김이곤 51).
이상의 세가지 해석은 각각 장점과 단점을 갖고 있으므로, 이들 중 어느 해석이 원문에 가장 가까운지 알 수 없다. 사실 고대의 본문에 대해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입장을 가지는 것은 늘 위험하다. 그렇지만 세 해석 모두 이 본문이 홍수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결혼의 주제를 다룬다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하다(창 2:24에서와 같이).
홍수 전야 시대의 사람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tob)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다"(laqach)에서 저자는 "여성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을 문제 삼고 있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는 마치 에덴 동산에서 이브의 죄와 같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ra'a)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좋은(tob)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취하여(laqach)"(창 3:6).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들도 육신적인 관능을 따라 탐욕에 빠지며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들의 범죄가 구체적으로 기록되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의 결혼에 뭔가 얼룩진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특히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라는 표현 속에 일부다처와 성적인 범죄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그들의 결혼은 "둘이 합하여 하나를 이루는" 하나님의 원래의 의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온갖 방탕과 호색과 난잡함을 추구하는 애정행각이었다. 존 머레이에 따르면, "성적인 악에 몰입되는 것은 어떤 형태이든지 다른 방향, 특히 폭력으로 점화되는 욕망의 불꽃이 된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서 인간 사회의 근본이 가정에 있는 것을 생각하면, "역기능적인 가정"에서 결국 "역기능적 인간"이 만들어지며 "역기능적 사회"가 만들어질 수 밖에 없음을 예측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본 훼퍼에 따르면, "무절제한 성욕은 다른 인격을 피조물로서 파괴한다. 그것은 자신의 피조성을 박탈하고 파괴하며 자신의 한계를 부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파괴 중 가장 심각한 것이다. 이것은 타락을 미친듯이 가속화하는 것이며 멸망의 지점까지 자신을 주장하는 것이다."
2) 떠나시는 하나님의 신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 하시니라"(3절)에서는 단어 하나 하나 마다 논쟁이 되고 있을 정도로 해석이 어렵다.
먼저 여기에서 "나의 신"이 등장하는 것이 갑작스럽게 느껴지지만, 이미 하나님의 신은 천지창조에서 "수면을 운행하시는" 모습으로 등장하였다(창 1:2). 워필드(B.B. Warfield, 1895)에 따르면, "하나님의 신은 구약의 최초부터 만물의 존재와 존속의 원리이시며, 모든 움직임과 질서, 그리고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성의 원인으로 나타난다"(윤영탁 번역, 1985:110).
하나님의 신은 천지창조에서 혼돈과 공허에서 질서를 만드시는 분일 뿐만 아니라, 인간과 동물 창조에서 생명력을 주시는 분으로 나타났다.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에서 "생기"는 성령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 창조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이 이미 암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생기, 혹은 생명의 호홉"(nishmat hayim)은 주님께서 친히 주신 것이며, 인간 속에 원래부터 있었던 내재적인 호홉이 아니다. 이 "바람" 혹은 "호홉"은 주님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며 주님께서 자신의 "생기"를 불어 넣음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생령"(nepesh haya), 즉 "살아있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나의 신"은 단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the life-giving power of God, Wenham, 141) 정도가 아니라 창세기에서 아직 뚜렷하게 신학적으로 자리를 잡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신이신 "성령"을 가리킨다("내 영"이란 표현은 에스겔 37:14에 다시 나타난다).
주님은 이제 자신의 신을 거두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들이 원래의 창조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자율성에 빠져 온갖 죄를 탐닉하였기 때문에 주님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라"고 선언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세계를 헝클어뜨리는 자들이 활기 넘치게 살 수 있도록 하시는 자신의 생명을 주시는 영을 끊임없이 그리고 영원히 허락하시지 않을 것이다"(브루거만 72). 이리하여 사람들에게는 성령의 감동과 감화가 약화되었으며, 죄의 충동은 더욱 심화되었다.
3) 육체가 된 인간
하나님의 신이 떠나시면, 인간들은 "육체가 된다." 구약성경에서 "육체"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살과 몸"을 가리킨다. "육체"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를 뜻하나, 은유적으로 "죄성과 부패성"을 뜻한다. 인간은 무능하며 약한 존재일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부패한 존재이다. 따라서 "육체"는 연약한 인간존재로서 약함과 죄성과 부패성을 함께 가리킨다. 성령의 지속적인 감동과 감화 없이, 인간의 정신은 썩고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욥 34:14-15; 창 2:7; 3:19; 사 40:7).
4) 은혜의 유예기간과 짧아지는 인간의 수명으로서의 120년
"그러나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 하시니라"는 장차 인간의 수명이 120년이 될 것인지 혹은 하나님의 심판선언으로부터 집행까지 유예기간이 120년이 될 것인지 명백하지 않다. 창세기 6:3의 인접 문맥을 살펴보면 앞으로는 인간의 수명이 120년 밖에 안될 것을 선언하는 것 같으나, 창세기 3-11장의 넓은 맥락을 살펴보면 노아는 950년을 살며 그의 손자인 아르박삿은 438년을, 그의 증손자인 셀라는 433년을, 그의 고손자인 에벨은 464년을 살았기 때문에 설득력을 잃는 것처럼 보인다.
고대의 해석자들은 120년을 은혜의 유예기간에 대한 경고로 보았다. 70인역의 번역자는 "내 영이 이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거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로 해석하며 홍수 직전 세대의 장사들에게 남은 회개의 시간으로 보았다. 탈굼에서도 "이 악한 세대는 내 앞에 영원히 견디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되며 그들의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니라. 나는 그들에게 그들이 회개하는지 120년의 기간을 주리라"고 한다(탈굼 옹켈로스 창 6:3). 랍비 이스마엘도 같은 방식으로 해석한다. "주께서는 홍수세대로 회개하도록 120년을 연장해 주셨나이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내 영이 사람에게 거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였기 때문입니다"(Kugel 113).
이런 입장은 초대교회의 교부들에게도 나타난다. 제롬에 따르면, "그들이 회개할 수 있는 기간은 120년이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잘못 믿듯이 인간 수명이 120년으로 줄어들 것이라는 뜻은 아니며 한 특정한 세대에게 심판날까지 120년이 주어졌다는 것이다"(Kugel 112에서 인용됨). 어거스틴 역시 같은 입장을 가졌다. "여기에 예언된 120년은 멸망할 사람들의 수명을 가리킨다. 이 기간이 지나면, 그들은 홍수로 멸망할 것이다"(상동). 이 입장은 루터와 칼빈으로 이어지고 있다(벧전 3:20 참조).
그러나 먼저 6:3 뿐만 아니라 6:1-4 전체가 단지 홍수 세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온 인류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인간의 수명을 단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연합 배후에는 수명을 늘리고 안전한 인생을 찾으려는 욕구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의 부정적이고 적극적인 부분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즉 사람이 월권행위를 한 그 범위 안으로 되돌려지며 그의 수명은 단축된다"(Childs; Kraus 376에서 인용됨).
또한 이 구절은 창세기 3:22, "그들이 영생할까 하노라"의 구문과 유사하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영생"의 기회가 박탈된 것처럼, 범죄한 인간들의 수명은 이제 "120년이 될 것이다."
물론 우리가 여기에서 두 의견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오경의 저자는 후일에 이 기간이 인간의 수명을 가리키는 기간이 될 것으로 이해한 것 같다. 홍수 이후 시대에는 수명이 갑자기 떨어지며 120세를 사는 사람들이 드물어진다. 물론 아브라함은 175세, 이삭은 180세, 야곱은 147세를 살지만, 이후 요셉은 110년(창 50:26), 모세는 120년(신 34:7), 여호수아는 110년(수 24:29), 오직 아론만이 123년을 산다(민 33:39). 이리하여 저자는 인간 수명이 장차 120년으로 줄어들게 된다는 주님의 선언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바라본 것 같다. 마치 에덴의 저주가 점차적으로 이루어질 같다(3:16-19). 따라서 앞에서 오랫동안 산 사람들은 예외적이며, 홍수 후에는 사람의 수명이 점점 짧아질 것이다(11:10-26).
홍수 전야의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탄식과 새로운 희망(6:5-8)
홍수 직전에 죄의 깊은 먹구름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 창세기의 저자는 이 상황을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로 묘사하고 있다(6:5). 이 점에 대해 영블라드가 멋있게 묘사하였다. "그 악한 촉수가 한 개인의 삶의 모든 모퉁이와 틈에 미치고 있으며, 그 어느 누구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83쪽). 앞 소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처럼, 하나님은 인간들의 악함을 보신다. 그들이 "보고" 행동을 취하는 것처럼, 주님도 "보시고"(5절), "느끼시고"(6절), 그리고 "결단을 내리신다"(7절).
1) 깊고 깊은 인간의 죄성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다"는 직역하자면, "사람의 죄악은 세상에 가득 찼다"가 된다(ki rabba ra'at ha'adam ba'arets). 창세기의 큰 맥락에서 보면, 하나님은 인간들을 만드시고 그들로 온 세상을 "채우라"(rebu)고 말씀하셨는데 인간들은 오히려 "죄악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인간의 죄는 점점 자라가며 온 세상을 채운다. 하나님은 온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길 원하셨는데, 슬프게도 이 세상은 인간들의 범죄로 가득 차고 있다. 죄가 보편화되고, 국제화되고 세계화되어 간다.
또한 죄가 사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을 지배하고 있다. 죄는 "생각"에서부터 시작된다. 인간의 타락은 의지에서 시작되지만, 그 근본은 "지성"에 있다. 우리는 죄를 항상 행위의 관점에서 보지만, 오히려 죄는 우리의 "생각"에서 출발하고 있다. 인간의 지성은 부패하여 하나님과 자신과 세상에 대해 왜곡된 관점을 가진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계획"(yetser)에 있다. 이 단어는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yetser)를 상기시킨다(창 2:7). 하나님은 토기장이처럼 인간을 만드셨다. 이제 인간이 자기 생각을 스스로 만들어 낸다. "하나님이 원래 인간을 만들었을 때에는 아름다웠는데, 이제 인간이 만드는 것은 혐오스럽다"(Hamilton 273)." 여기의 계획은 단순한 "상상이나, 욕망"이 아니라, "생각의 근본"(yetsira)이다(카수토 I:303). 인간이 죄인인 것은 그의 행동이 악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마음에서 만들고 있는 모든 생각이 악한 데 있다. 즉, 인간 생각의 방향 뿐 아니라 성향이 모두 악하며 항상 악하다. 우리는 잠깐동안 악한 생각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늘 악한 생각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 구절은 구약 성경에서 인간의 전적 부패를 가장 잘 증거해 주고 있다. 우리의 내면적인 생각의 모든 경향들이 항상 오직 악하게만 작용하고 있다. 창세기 8:21로 가면,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고 말한다. 우리의 원죄는 아담과 하와로 시작되었지만, 우리 모두가 이 원죄에 동참하고 있으며, 우리가 태어나자 마자 죄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후에 시편 51편의 시인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고 고백한다(5절).
이 점에 대해 틸리케가 잘 말하였다. "항상 인간이 프로메테우스처럼 그렇게 공공연하게 그리고 의도적으로 하나님에게 대적한다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사람들이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불끈 쥐는 일은 사실상 매우 드물다.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무신론자나 반기독교인인 양 행세할 이유가 없다. 얼마든지 그는 비밀스럽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238쪽).
2) 하나님의 후회와 근심(6:6)
이리하여 하나님은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신다"(창 6:6). 여기에서 "한탄하다"는 일차적으로 "후회하다"는 뜻이다(표준새번역).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는 데 있어서 계산을 잘못하여 불량품을 만들었음을 후회하시는 모습이다. 창세기 저자는 이렇게 강열한 신인동감적 표현을 통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상처받은 하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근심하다"는 "마음 아파하다"(표준새번역)로 제시된다. 여기에는 "아픔"이 강조되고 있다. 같은 표현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반역하던 시대에게 적용되고 있다(시 78:40-41). 그들은 성령을 근심케 한 자들이었다(사 63:10). 하나님은 추상적인 원리나 우주의 힘 정도가 아니라, 근심하시는 인격이시다. 하나님의 근심과 후회는 인간들이 길을 돌이킬 때, 자신도 예고하신 심판을 돌려 복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심을 말해준다.
후회하시고 근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천지창조의 과정에 나타난 주님의 모습과 아주 대조적이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만드시는 것 마다 "보시니 좋았더라"고 한다. 창조의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께서 보시니 심히 좋았더라"고 하였다. 온 세상을 아름답고 조화있게 만드신 후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사 자신의 뜻을 이루시길 원하셨던 하나님은 이제 깊은 근심과 후회에 빠진다. 인간의 죄가 가져오는 슬픔과 고통은 인간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도 느낀다.
주님은 오늘날에도 우리의 악한 동기와 행동을 보시고 탄식하신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다"(시 14:2). 그렇지만, 판결은 노아시대의 것과 동일하다.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3).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아담의 타락 후에 인간들은 자기 보기에 좋은 것을 찾게 되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보실 때, 좋은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죄의 암이 우리 안에 다 퍼지며 우리 존재의 핵심을 치고 있다"(영블라드 84).
3) 우주적인 심판을 결심하시는 하나님(6: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6:7). 인간의 선택이 되돌아 올 수 없는 지점에 이르자, 주님은 결정적인 최후의 심판을 내리시기로 결심하신다.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는 홍수 심판을 바라보고 있다. "쓸다"는 물로 쓸어버리는 모습이다. 이 단어는 후에 모세가 자신의 이름을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제하소서"라는 간청에서 사용되었다(출 32:32-33). 마치 "책에 기록된 글(이름)을 물로 씻어 없애 달라"는 것 같다(Hamilton 275). 간음한 것으로 여겨진 여인을 심문하는 데 있어서, 제사장은 "저주의 말을 두루마리에 써서 그 글자를 그 쓴 물에 빨아 넣는다"(민 5:23). 이렇게 되면 저주가 그 물 안으로 들어가 마시는 사람에게 임하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주님은 자신이 "창조한 사람을 물로 쓸어 버리겠다"고 선언하신다.
그러나 단지 "사람들"만 제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있는 "육축, 기는 것, 새"는 동물 왕국을 세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뿐 아니라 짐승 즉, 모든 생물들"을 가리킨다(Hamilton 277).
왜 사람들이 범죄하였는데 무고한 짐승들까지 심판을 받는가? 왜냐하면, 죄와 악이 인간을 통해 온 세상에 퍼졌기 때문에, 심판도 범세계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동물들이 심판을 받는 것은 그들이 범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인간과 뗄 수 없이 친밀한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창 1:28; 2:18-20; Scullion 63). 즉, 의가 넘치는 온 우주가 기뻐하고, 죄가 창궐하며 온 우주가 신음하게 된다.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는 여기에서 두 번 반복되고 있다(6:6, 7).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대로 지은 인간들에 대해 깊이 실망하시고 한탄하신다. 틸리케는 "후회하시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하나님이며 또한 파산지경에 이른 그의 작품(역사)을 대홍수로 없애 버리려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라고 묻는다. 사실 선지자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라고 말했다(삼상 15:29; 민 23:19 참조). 이것은 단지 신인 동감적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주님은 인간의 범죄에 대해 깊은 상처를 받으시고 심판을 결심하신다. 그러나 틸리케는 좀 더 깊이 보고 있다. "전 우주의 모든 피조물들에 그 나름대로의 자리를 마련해 주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죄를 범했다고 해서 무죄한 나무들과 꽃들, 동물들을 멸절시키려고 하니 이게 웬말인가? 우리는 여기에서 골고다 즉 하나님께서 고통을 당하시고 무기력하고 '신과 같지 않은' 것처럼 보였던 골고다에서의 이상한 파멸에 대한 서곡을 보지 않는가?"라며 답한다.
4)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6:8).
"아담의 계보가 이러하니라"는 시작(5:1)은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6:8)로서 아름답게 마치고 있다. 이 이야기 사이에 온갖 인간들의 죽음과 타락과 폭력 이야기들을 열거하면서 저자는 주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의 이야기로 마무리를 하고 있다. 여기의 "은혜"는 창세기에서 처음 등장하는 단어이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가 새로운 인류의 희망인 노아에게 임하며 노아는 남은 자가 되고 새 인류를 준비하는 자가 된다.
바로 앞 절에서 하나님은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nacham)"고 말씀하셨는 데(6:6),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이 아들이 우리를 안위하리라(nacham; 5:29)는 약속을 이루고 있다. 노아는 사람들 뿐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위로와 기쁨을 가져올 것이다.
홍수 직전에 온 세상은 성적인 탐닉과 폭력으로 물들어 있었지만,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는다." 노아가 그 어둔 세상에서 빛이 된 것은 전적으로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죄로 물든 세상과 그 안에서 은혜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노아의 모습은 그리스도인의 역설적인 삶을 잘 보여준다. 우리도 "사람의 죄악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인" 이 세상을 살지만(창 6:5),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고 있다. 성경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를 동시에 증거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부패성과 죄를 이길 것이다.
5) 명상
이후에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노아에 대해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라고 평하고 있다(벧후 2:5). 어떤 점에서 노아는 "의를 전파하는 자"였는가?에 대해 유대 문헌들과 기독교 문헌들에는 그가 회개하라는 말씀을 증거하였다고 한다.
"하나님 자신이 하늘에서 그에게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다. '노아야, 담대하라. 그리고 모든 백성들로 구원을 받도록 회개를 선포하라. 그들은 수치를 모르는 영을 가진 자들이므로 만약 그들이 듣지 않으면, 내가 온 인류를 대홍수로 멸하리라…' [그 때 노아는] 모든 백성들에게 호소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신실에 취하고 발광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여, 여러분들이 행한 일은 하나님의 시선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시빌린 신탁 1:127-31; 149-51; Kugel 115).
"그러나 노아는 [그의 동시대 사람들의] 행동을 못마땅해 하였으며 그들의 의도가 밉살스러운 것을 보고, 그들로 하여금 더 나은 사고방식을 가지며 행실을 바꾸도록 설득하였다"(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73). "노아는 회개를 외쳤고, 믿은 자는 구원을 얻었다"(클레멘트 1서 7:6; Kugel 115). "[노아는 회고하기를] 나는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홍수가 오느니라'고 끊임없이 외쳤다. 그러나 듣는 자가 없었다"(바울의 계시록 50; Kugel 115).
아담의 후손들 이야기(창5:1-6:8)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라는 제 5장의 서문형식은 창세기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에서 "천지의 대략이 이러하니라"(2:4)는 서문에 이어 두번째로 나타나고 있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새로운 이야기가 5:32에서 마친다고 생각하나,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가 나타나는 6:9 바로 앞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Cassuto). 사실 5:32은 이 이야기의 끝으로 보기에는 미흡하다.
왜냐하면 5장의 이야기는 족장들이 얼마나 살았는지만 말해주고 별 내용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6:8)는 좋은 마무리를 해준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창세기의 저자가 하나님의 심판의 불가피성을 말씀하면서도 늘 끝에 가서는 하나님의 구원사의 새로운 계획을 늘 말하면서 마치는 것과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아담의 후손들 이야기(5:1-6:8)는 (1) 아담의 10대 손들(5:1-32), (2)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빗나간 결혼(6:1-4) 그리고 (3) 홍수 전야(6:5-8)의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아담의 10대 손들(5:1-32)
1) 서문(5:1-3)
이 서문은 독자들로 하여금 창세기 첫 장의 천지창조(1:1-2:3) 중 남녀의 창조(1:26-27)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첫 인간 창조에서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으며, 이제 아담이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는다." 또한 이 서문은 출생과 작명의 패턴을 따라, 4장 마지막 부분(25-26)과 이어진다. 첫 부모가 자기 아들들의 이름을 지은 것 같이, 5장의 서문에서는 하나님이 아담의 이름을 짓고, 아담은 그의 아들 셋의 이름을 짓는다. 나아가 마치 하나님이 아버지처럼 아담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은 것 같이, 아담은 "자기 모양대로 아들을 낳는다." 이리하여 아담은 셋의 아버지이며, 셋은 에노쉬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이들 모두의 아버지가 되신다. 이후의 창세기에 나오는 족보들을 보면, (1)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며(10장), (2) 하나님은 특히 아브라함과 그의 씨의 아버지이다(11장).
또한 창세기의 저자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축복하시는 주제로 돌아간다(1:28; 5:2). 마치 아비가 자식을 돌보며 축복하듯이(창 9:26-27; 27:27; 48:15; 49:29), 하나님께서 계속 인류를 돌보시며 아담에게 주신 첫 복을 다음 세대로 넘겨 주신다(1:28; 5:1; 9:1; 12:3; 24:11). 마치 하나님은 인자하신 아버지처럼, 자신의 모든 복을 후손에게 넘겨주신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며 온 땅에 충만하고 자신의 뜻을 이루시려던 원래의 계획은 인간의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씨(3:15), 아브라함의 씨(12:3), "유다 지파의 사자" (49:8-12; 계 5:5-13)를 통해 이어져 간다. 바로 이 기초 위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를 통하여 "우리를 복 주시고" (엡 1:3), "우리를 그의 양자로 삼으시고" (1:5), 우리로 "기업을 얻게 하시며"(1:11), 우리로 그를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한다(롬 8:15)고 말한다.
2) 족보의 구조
가인과 라멕의 교만과 폭력의 족보가 끝나고 이제 셋을 통한 새로운 족보가 시작된다. 이들 중 10명의 유명한 사람들은 아래와 같다 (5:1-32)
대 성경본문 이 름 대 성경본문 이 름
1 5:1-5 아담 6 5:18-20 야렛
2 5:6-8 셋 7 5:21-24 에녹
3 5:9-11 에노스 8 5:25-27 두셀라
4 5:12-14 게난 9 5:28-31 라멕
5 5:15-17 마할랄렐 10 5:32 노아
먼저 아담에서 셋을 통해 흐르는 족보는 바로 앞 장에 나타난 가인의 족보와 그 이름에 있어서 유사성이 많다. 즉 (1) 가인(4:17)과 게난(5:12), (2) 이랏(4:18)과 야렛(5:18), (3) 므후야엘(4:18)과 마할랄렐(5:12), (4) 므드사엘(4:18)과 므두셀라(5:21)는 발음이 비슷하다. 또한 가인의 후예에도 에녹(4:17)과 라멕(4:18)이 있듯이 셋의 후예에도 에녹(5:21)과 라멕(5:28)이 있다. 그러나 이름이 비슷하거나 같다고 같은 인생을 사는 것 같지 않다. 이들은 전혀 다른 역사를 만들고 있다.
3) 족보의 수사학적 메시지
위에 나타나는 족보는 대단히 선별적이며 일정한 패턴을 따라 체계적으로 주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틀과 그 변화를 통해 저자는 수사학적으로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먼저 저자는 족장들을 아래와 같은 형식으로 소개해 간다.
(1) A는 X세에 B를 낳았다.
(2) A는 B를 낳은 후 Y년을 살며 자녀들을 낳았다.
(3) A는 X+Y세를 살고 죽었다.
이런 틀에서 보면 저자는 다음과 같은 강조를 하고 있다.
(1) "그가 죽었더라"
5장에 있는 족보는 11:1-26에 있는 셈의 족보와 형식에 있어서 거의 일치한다. 하나의 차이가 있다면, 5장에서는 각 사람을 소개하고 "그가 죽었더라"는 구를 지루할 정도로 첨가해 간다. 왜 저자는 이 족장들의 죽음을 강조해야 되었을까?
아무리 오래 살아도, 아무리 훌륭하게 살아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말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진다(3:19).
(2)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 가시므로 있지 아니하였더라"
모든 사람들이 죽어가는 가운데, 에녹에 대한 소개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다"는 독특한 말씀이 나타난다(24절). 즉, 저자는 에녹의 예외를 강조하기 위해 각 족장의 죽음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에녹은 "죽음"이란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왜 에녹은 예외였을까? 저자는 반복하여,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22, 24절)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동행하다"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그는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말한다(6:9).
즉 에녹은 죽음의 저주 속에서 생명을 찾은 자요 아담의 운명을 벗어난 자의 예증이다. 아담과 그 후손의 죽음에 대한 선언은 최종적이 아님을 에녹을 통해 저자는 발견하고 있다. 즉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면" 생명나무에로의 길이 열려 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여" 그 길을 찾았다. 저자는 이 주제를 17장에서 다시 다룬다. "내 앞에 행하고 온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너와 세우리라"(17:1-2).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생명에로의 길이다. 모세는 광야에 있는 백성들에게 "내가 생명과 축복, 죽음과 멸망을 너희 앞에 둔다" (신 30:15-16)고 말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법칙 몇 개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시내산에서 준 율법과 더 나은 미래의 길을 바라보고 있다(신 30:5-16). 에녹(5:22), 노아(6:9), 아브라함(15:6)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따라 산 자들이다.
(3) 노아
가인계의 라멕(창 4:23-24)과 달리 셋의 후손 라멕(5:28-31)은 세상에 임하는 저주를 느낀다. 경건한 라멕은 그러나 위로의 때를 사모하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이 이 저주로부터 구원을 가져올 것을 바라본다.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5:29).
셋 가문의 역사를 도표로 볼 때, 그 절정은 노아에게 있으며 이 이야기는 결국 다음에 나올 홍수 심판을 향해 이야기가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앞에 있는 가인의 족보(4장)와 여기 있는 셋의 족보(5장)는 첫 타락(3장)과 홍수 심판(6:9 이하) 사이에 들어와 "타락과 심판"의 관계를 설정해 줄 뿐 아니라, 이 심판의 파국으로 치닫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주님의 구원 역사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즉, 5장의 족보는 홍수 이야기를 제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짜여졌다. 홍수 이야기는 두개의 족보 사이에 주어지고 있다(5:32; 9:28, 29). 노아는 수고로이 일하는 인간들에게 위로를 줄 것이다(5:29).
8:21을 보면, 노아가 가져오는 위로는 방주 안에서 인류를 보전하는 것일 뿐 아니라, 홍수 후에 제사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노아는 미래에 인류를 파멸시키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게 하며 새로운 인류를 이루어 가는 조상이 된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빗나간 관계(6:1-4)
인류의 역사에서 첫 파국으로 기억되고 있는 홍수 이야기(6:9-9:29)로 들어가기 직전에, 창세기의 저자는 이중적인 렌즈로 아담의 후손들을 비추고 있다. 그는 먼저 5장에서 길고 긴 생애를 살았던 아담 후손들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번성하나 "사람의 딸들"에게 빠지며, "거인"(네필림)이요 "용사"이나 연약한 "육체"가 되어 버리는 모습을 간략하게 비추고(6:1-4), 이어 그들의 내면적인 악을 들추어 내며 이에 대한 하나님의 고통스러운 반응(6:5-8)을 짤막하게 묘사하고 있다(6:5-8).
창세기의 큰 흐름에서 보면 6:1-8은 5:1-32로 이어져야 한다. 그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로, 5:1의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6:8까지 이어진다. 이 단락에서 노아는 아담의 10대 손으로 새로운 인류의 희망으로 태어나, 결혼하고 자녀를 낳는다(5:29-32). 이어 그는 온 인류가 타락한 가운데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 소개된다(6:8). 둘째로, 6:9은 "노아의 사적이 이러하니라"로 시작하여, 홍수와 연관된 노아의 독자적인 세계는 6:9부터 시작된다.
셋째로, 6:1은 5장에서 지나가며 언급된 "딸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들은 5장의 족보에서 별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이들이 시선을 끌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라는 6:1은 5:1-32에 기록된 아담 후손들의 모든 생육과 번식의 과정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5:1-6:8은 홍수 직전의 옛 세상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이 부분은 아담의 창조로부터 그의 후손이 "크게 번성한 것"(6:1)과 역설적으로 그들의 번성이 "죄의 번성"으로 변질되며(6:5), 결과적으로 노아의 가정을 제외한 그들의 모든 후손이 멸망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으로 마치고 있다(6:7).
이리하여 5:1-6:8은 두개의 태고사 사건, 즉 창조와 홍수를 10명의 족장의 족보로 연결시키고 있다. 창세기의 시간표에서 보면, 이 장은 세계사 중에서 가장 긴 시간을 담고 있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사람 노아를 제외하고는 이 장은 이야기를 간명하게 전개한다.
따라서 창세기 6:1-8은 아담 자손의 계보 이야기에 대한 좋은 요약일 뿐 아니라, 홍수 이야기의 서론적인 배경으로서 좋은 고리를 맺어주고 있다. 즉, 이 단락은 문학적으로 볼 때 앞 뒤를 다 잇는 이중기능(double-duty)을 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형식은 창세기에서 계속 나타나고 있다(2:1-3은 1:1-31을 요약한다. 창 10:31-32, 11:27-32, 출 1:7을 보라). 이리하여 창세기의 저자는 아담과 하와의 실락원 후, 가인성 이야기(4:1-26)와 셋을 통한 구원의 새로운 세대 이야기(5:1-32)를 마치고, 노아와 홍수 이야기(6:9-9:29)로 들어가기 직전에, 홍수 전야의 세계를 잠깐 비추어주며 홍수 심판의 불가피성을 말해주고 있다(6:1-8).
홍수 전야의 세상은 가인으로부터 시작된 형제 살해와 라멕으로부터 시작된 일부다처주의와 무절제한 폭력이 도시문화의 발달 속에서 더욱 가속화 되며 하나님의 심판을 불가피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비록 한 평생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이 있었고(5:23),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던 셋 계통의 라멕(5:28)이 있었지만, 이들의 경건한 삶의 모범은 그 당시 세상의 부패를 막기에 충분한 빛과 소금이 되지 못했다. 이리하여 세상은 최종적인 파국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1)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6:1-2)
"이 단락은 오경에서 가장 모호한 본문"이라고 하는 카수토의 말처럼(291쪽), 여러가지 어려운 난제들을 담고 있다. 먼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 것"이 아담 후손들의 일상 생활로 나타나며, 이들을 통해 "장사들"(네필림)이 태어나고, 궁극적으로 홍수 심판의 직접적 원인으로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여러가지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1) 천사들로 보는 견해(70인역, 에녹 1서, 주빌리, 쿰란, 필로, 카수토)
고대의 해석자들은 이들의 결혼과 장사들의 탄생과 홍수 심판 사이에 밀접한 연관성을 찾으며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들"로 보았다. 유대 문헌 중 외경 에녹서는 이 절을 천사들의 타락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늘의 아들들인 천사들은 그들을 보고 탐하였으며 서로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사람들의 자식들에게서 우리를 위해 아내를 취하고 그들로 우리들을 위해 자식을 낳게 하자.' 이리하여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아내들을 취하고, 각자가 자기를 위해 여자들을 취하였다. 그들은 그들 안에 들어가기 시작하였으며 그들과 난잡한 관계를 가졌다. 그들은 그들에게 마술과 주술을 가르쳤으며 뿌리와 나무를 자르는 법을 가르쳤다. 그들은 잉태하여 거대한 거인들을 낳았으며 그들의 키는 3000규빗(약 1500미터)이나 되었다. 이들은 인간의 수고를 다 삼켰으며, 사람들은 자신을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 여자들은 거인들을 낳았으며, 이로 인하여 온 땅은 피와 불법으로 가득차게 되었다"(에녹 1서 6:2-7:7; 9:9)
"하나님의 천사들은 그들이 보기에 아름다운 것을 알았다. 이리하여 그들(천사들)은 그들이 선택한(인간 여자들)과 결혼하였다. 그들은 아이들을 낳았고 이들은 장사들이었다. 땅에 악이 증가하였다. 사람으로부터 가축, 동물들, 새들과 지면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부패하였고, 그들에게 정해진 길에서 벗어났다. 그들은 서로 삼키기 시작하였고 악이 땅에 넘쳤다"(주빌리 5:1-5 참조).
사실 천사들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려진 곳은 성경에 많다(시 29:1; 89:7; 욥 1:6; 2:1 등). 그러나 이들을 천사들로 보기 어려운 점들이 많이 있다.
① 구약성경에서 천사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 "아들"은 신체적인 후손을 가리키지 않으며 "한 그룹의 일원"이란 뜻으로 사용된다. 마치 "선지자들의 아들들"이 "선지자 그룹의 일원"이란 뜻과 같다. ② 천사들은 성생활을 하지 않는다(마 22:30). ③ 나아가 타락한 천사들의 잘못 때문에 모든 인간이 홍수로 모두 죽음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다.
④ 뒤따르는 4절에 따르면, 이들의 후손들은 "네필림"으로 불려지는데, 이들은 출애굽 당시 가나안 땅에 살았던 장대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민 13:32-33). 이들은 사람의 후손이기 때문에 창세기 6장에서 "신적인 존재를 통해 낳은 반신반인적인 존재"로 볼 필요가 없다.
어떤 학자들은 신약성경 중 베드로전서 3:19-20에서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는 말씀이 "천사들의 타락"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용하지만, 본문은 해석하기 너무 까다로우며 확고한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또한 베드로후서 2:4에서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역시 "타락한 천사들" 설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 구절은 "창세기 3장에 있는 인간의 타락 이전에 있는 천사들의 반역으로 보인다"(영블라드 81).
(2) "셋의 후예들"로 보는 견해(존 머레이; 영블라드 82-83)
존 머레이를 비롯한 많은 복음주의 학자들은 여기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의 후예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아들들"인 셋의 후예와 "사람의 딸들"인 가인의 후예 사이에 성행하였던 종교적인 통혼이 홍수 심판의 근거가 되었다고 한다. "인간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결혼을 생각할 때, 셋의 후예들은 그들의 믿음과 경건의 유산을 뒤로 하였다. 그들은 아내가 될 만한 사람을 찾을 때, '이 여인이 내 가정을 경건한 가르침의 장소로 만들 것인가?'를 묻지 않고 '그녀가 아름다운가?'를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 던졌다"(Davies 74).
이 해석은 앞뒤의 문맥과 어울릴 뿐 아니라(창 5:1-32; 6:9 이하), 신자와 불신자의 결혼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는 점에서 신학적으로도 의미심장하다(신 32:5; 시 73:15; 사 43:6; 호 1:10; 눅 3:38 등). 따라서 여기의 "하나님 아들들"은 "경건한 자들"이며 그들이 "하나님의 딸들"과 결혼하지 않고(사 43:6), "사람의 딸들"과 결혼했기 때문에 타락한 결혼으로 보게 된다(영블라드 82쪽).
그러나 이 해석에 따르면 6:1의 "사람"과 2절의 "사람"이 각각 "일반적인 총칭으로서의 사람"(1절)과 "가인"(2절)으로 달리 해석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아들들"을 이런 제한된 의미로 사용하기 힘들고, 또한 이들의 결혼에서 태어난 자들이 "네필림"과 "용사들"이 되었다는 점을 설명하기 어렵다.
(3) "고대의 통치자들"로 보는 견해(Kline; 김이곤)
세번째로 여기의 "신의 아들들"은 홍수 직전에 세상을 다스렸던 통치자들로 보는 해석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여 독재정치를 하여 세상을 어지럽혔으며, 또한 자신의 무절제한 성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기들이 보기에 아름다운 여자들을 다 취했다. 이들의 난잡한 생활이 폭력을 수반하였기 때문에 "강포가 땅에 가득하였다"고 한다(6:13).
고대의 통치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부를 수 있는 근거는, 첫째로 그들이 원래 "신의 아들"로 불려졌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가나안 문헌에 케렛왕은 '엘의 아들'[bn il]로 불려진다). 즉 창세기 저자는 "소위 하나님의 아들"로 불려지는 왕들과 제후들이 호색과 폭력에 빠졌다고 말하고 있다. 옛날의 저자들은 우리처럼 인용표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는 바로 지도자를 가리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시편 82편에서도 세상의 통치자들과 재판장들을 "신의 아들들"이라고 부른다.
둘째로, "자기가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다"는 말 자체가 그들의 권세를 드러내어 준다(라멕도 일부다처와 폭력을 행사하였다. 창 4:23-24)". 하나님의 아들들은 보통 사람 위에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군림하는, 더 우수하고 더 강한 자들, 제왕이나 그것에 준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표상하는 용어였다"(김이곤 51).
이상의 세가지 해석은 각각 장점과 단점을 갖고 있으므로, 이들 중 어느 해석이 원문에 가장 가까운지 알 수 없다. 사실 고대의 본문에 대해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입장을 가지는 것은 늘 위험하다. 그렇지만 세 해석 모두 이 본문이 홍수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결혼의 주제를 다룬다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하다(창 2:24에서와 같이).
홍수 전야 시대의 사람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tob)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다"(laqach)에서 저자는 "여성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을 문제 삼고 있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는 마치 에덴 동산에서 이브의 죄와 같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ra'a)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좋은(tob)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취하여(laqach)"(창 3:6).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들도 육신적인 관능을 따라 탐욕에 빠지며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들의 범죄가 구체적으로 기록되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의 결혼에 뭔가 얼룩진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특히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라는 표현 속에 일부다처와 성적인 범죄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그들의 결혼은 "둘이 합하여 하나를 이루는" 하나님의 원래의 의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온갖 방탕과 호색과 난잡함을 추구하는 애정행각이었다. 존 머레이에 따르면, "성적인 악에 몰입되는 것은 어떤 형태이든지 다른 방향, 특히 폭력으로 점화되는 욕망의 불꽃이 된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서 인간 사회의 근본이 가정에 있는 것을 생각하면, "역기능적인 가정"에서 결국 "역기능적 인간"이 만들어지며 "역기능적 사회"가 만들어질 수 밖에 없음을 예측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본 훼퍼에 따르면, "무절제한 성욕은 다른 인격을 피조물로서 파괴한다. 그것은 자신의 피조성을 박탈하고 파괴하며 자신의 한계를 부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파괴 중 가장 심각한 것이다. 이것은 타락을 미친듯이 가속화하는 것이며 멸망의 지점까지 자신을 주장하는 것이다."
2) 떠나시는 하나님의 신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 하시니라"(3절)에서는 단어 하나 하나 마다 논쟁이 되고 있을 정도로 해석이 어렵다.
먼저 여기에서 "나의 신"이 등장하는 것이 갑작스럽게 느껴지지만, 이미 하나님의 신은 천지창조에서 "수면을 운행하시는" 모습으로 등장하였다(창 1:2). 워필드(B.B. Warfield, 1895)에 따르면, "하나님의 신은 구약의 최초부터 만물의 존재와 존속의 원리이시며, 모든 움직임과 질서, 그리고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성의 원인으로 나타난다"(윤영탁 번역, 1985:110).
하나님의 신은 천지창조에서 혼돈과 공허에서 질서를 만드시는 분일 뿐만 아니라, 인간과 동물 창조에서 생명력을 주시는 분으로 나타났다.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에서 "생기"는 성령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 창조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이 이미 암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생기, 혹은 생명의 호홉"(nishmat hayim)은 주님께서 친히 주신 것이며, 인간 속에 원래부터 있었던 내재적인 호홉이 아니다. 이 "바람" 혹은 "호홉"은 주님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며 주님께서 자신의 "생기"를 불어 넣음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생령"(nepesh haya), 즉 "살아있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나의 신"은 단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the life-giving power of God, Wenham, 141) 정도가 아니라 창세기에서 아직 뚜렷하게 신학적으로 자리를 잡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신이신 "성령"을 가리킨다("내 영"이란 표현은 에스겔 37:14에 다시 나타난다).
주님은 이제 자신의 신을 거두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들이 원래의 창조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자율성에 빠져 온갖 죄를 탐닉하였기 때문에 주님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라"고 선언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세계를 헝클어뜨리는 자들이 활기 넘치게 살 수 있도록 하시는 자신의 생명을 주시는 영을 끊임없이 그리고 영원히 허락하시지 않을 것이다"(브루거만 72). 이리하여 사람들에게는 성령의 감동과 감화가 약화되었으며, 죄의 충동은 더욱 심화되었다.
3) 육체가 된 인간
하나님의 신이 떠나시면, 인간들은 "육체가 된다." 구약성경에서 "육체"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살과 몸"을 가리킨다. "육체"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를 뜻하나, 은유적으로 "죄성과 부패성"을 뜻한다. 인간은 무능하며 약한 존재일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부패한 존재이다. 따라서 "육체"는 연약한 인간존재로서 약함과 죄성과 부패성을 함께 가리킨다. 성령의 지속적인 감동과 감화 없이, 인간의 정신은 썩고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욥 34:14-15; 창 2:7; 3:19; 사 40:7).
4) 은혜의 유예기간과 짧아지는 인간의 수명으로서의 120년
"그러나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 하시니라"는 장차 인간의 수명이 120년이 될 것인지 혹은 하나님의 심판선언으로부터 집행까지 유예기간이 120년이 될 것인지 명백하지 않다. 창세기 6:3의 인접 문맥을 살펴보면 앞으로는 인간의 수명이 120년 밖에 안될 것을 선언하는 것 같으나, 창세기 3-11장의 넓은 맥락을 살펴보면 노아는 950년을 살며 그의 손자인 아르박삿은 438년을, 그의 증손자인 셀라는 433년을, 그의 고손자인 에벨은 464년을 살았기 때문에 설득력을 잃는 것처럼 보인다.
고대의 해석자들은 120년을 은혜의 유예기간에 대한 경고로 보았다. 70인역의 번역자는 "내 영이 이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거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로 해석하며 홍수 직전 세대의 장사들에게 남은 회개의 시간으로 보았다. 탈굼에서도 "이 악한 세대는 내 앞에 영원히 견디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되며 그들의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니라. 나는 그들에게 그들이 회개하는지 120년의 기간을 주리라"고 한다(탈굼 옹켈로스 창 6:3). 랍비 이스마엘도 같은 방식으로 해석한다. "주께서는 홍수세대로 회개하도록 120년을 연장해 주셨나이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내 영이 사람에게 거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였기 때문입니다"(Kugel 113).
이런 입장은 초대교회의 교부들에게도 나타난다. 제롬에 따르면, "그들이 회개할 수 있는 기간은 120년이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잘못 믿듯이 인간 수명이 120년으로 줄어들 것이라는 뜻은 아니며 한 특정한 세대에게 심판날까지 120년이 주어졌다는 것이다"(Kugel 112에서 인용됨). 어거스틴 역시 같은 입장을 가졌다. "여기에 예언된 120년은 멸망할 사람들의 수명을 가리킨다. 이 기간이 지나면, 그들은 홍수로 멸망할 것이다"(상동). 이 입장은 루터와 칼빈으로 이어지고 있다(벧전 3:20 참조).
그러나 먼저 6:3 뿐만 아니라 6:1-4 전체가 단지 홍수 세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온 인류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인간의 수명을 단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연합 배후에는 수명을 늘리고 안전한 인생을 찾으려는 욕구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의 부정적이고 적극적인 부분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즉 사람이 월권행위를 한 그 범위 안으로 되돌려지며 그의 수명은 단축된다"(Childs; Kraus 376에서 인용됨).
또한 이 구절은 창세기 3:22, "그들이 영생할까 하노라"의 구문과 유사하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영생"의 기회가 박탈된 것처럼, 범죄한 인간들의 수명은 이제 "120년이 될 것이다."
물론 우리가 여기에서 두 의견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오경의 저자는 후일에 이 기간이 인간의 수명을 가리키는 기간이 될 것으로 이해한 것 같다. 홍수 이후 시대에는 수명이 갑자기 떨어지며 120세를 사는 사람들이 드물어진다. 물론 아브라함은 175세, 이삭은 180세, 야곱은 147세를 살지만, 이후 요셉은 110년(창 50:26), 모세는 120년(신 34:7), 여호수아는 110년(수 24:29), 오직 아론만이 123년을 산다(민 33:39). 이리하여 저자는 인간 수명이 장차 120년으로 줄어들게 된다는 주님의 선언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바라본 것 같다. 마치 에덴의 저주가 점차적으로 이루어질 같다(3:16-19). 따라서 앞에서 오랫동안 산 사람들은 예외적이며, 홍수 후에는 사람의 수명이 점점 짧아질 것이다(11:10-26).
홍수 전야의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탄식과 새로운 희망(6:5-8)
홍수 직전에 죄의 깊은 먹구름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 창세기의 저자는 이 상황을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로 묘사하고 있다(6:5). 이 점에 대해 영블라드가 멋있게 묘사하였다. "그 악한 촉수가 한 개인의 삶의 모든 모퉁이와 틈에 미치고 있으며, 그 어느 누구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83쪽). 앞 소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처럼, 하나님은 인간들의 악함을 보신다. 그들이 "보고" 행동을 취하는 것처럼, 주님도 "보시고"(5절), "느끼시고"(6절), 그리고 "결단을 내리신다"(7절).
1) 깊고 깊은 인간의 죄성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다"는 직역하자면, "사람의 죄악은 세상에 가득 찼다"가 된다(ki rabba ra'at ha'adam ba'arets). 창세기의 큰 맥락에서 보면, 하나님은 인간들을 만드시고 그들로 온 세상을 "채우라"(rebu)고 말씀하셨는데 인간들은 오히려 "죄악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인간의 죄는 점점 자라가며 온 세상을 채운다. 하나님은 온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길 원하셨는데, 슬프게도 이 세상은 인간들의 범죄로 가득 차고 있다. 죄가 보편화되고, 국제화되고 세계화되어 간다.
또한 죄가 사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을 지배하고 있다. 죄는 "생각"에서부터 시작된다. 인간의 타락은 의지에서 시작되지만, 그 근본은 "지성"에 있다. 우리는 죄를 항상 행위의 관점에서 보지만, 오히려 죄는 우리의 "생각"에서 출발하고 있다. 인간의 지성은 부패하여 하나님과 자신과 세상에 대해 왜곡된 관점을 가진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계획"(yetser)에 있다. 이 단어는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yetser)를 상기시킨다(창 2:7). 하나님은 토기장이처럼 인간을 만드셨다. 이제 인간이 자기 생각을 스스로 만들어 낸다. "하나님이 원래 인간을 만들었을 때에는 아름다웠는데, 이제 인간이 만드는 것은 혐오스럽다"(Hamilton 273)." 여기의 계획은 단순한 "상상이나, 욕망"이 아니라, "생각의 근본"(yetsira)이다(카수토 I:303). 인간이 죄인인 것은 그의 행동이 악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마음에서 만들고 있는 모든 생각이 악한 데 있다. 즉, 인간 생각의 방향 뿐 아니라 성향이 모두 악하며 항상 악하다. 우리는 잠깐동안 악한 생각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늘 악한 생각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 구절은 구약 성경에서 인간의 전적 부패를 가장 잘 증거해 주고 있다. 우리의 내면적인 생각의 모든 경향들이 항상 오직 악하게만 작용하고 있다. 창세기 8:21로 가면,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고 말한다. 우리의 원죄는 아담과 하와로 시작되었지만, 우리 모두가 이 원죄에 동참하고 있으며, 우리가 태어나자 마자 죄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후에 시편 51편의 시인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고 고백한다(5절).
이 점에 대해 틸리케가 잘 말하였다. "항상 인간이 프로메테우스처럼 그렇게 공공연하게 그리고 의도적으로 하나님에게 대적한다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사람들이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불끈 쥐는 일은 사실상 매우 드물다.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무신론자나 반기독교인인 양 행세할 이유가 없다. 얼마든지 그는 비밀스럽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238쪽).
2) 하나님의 후회와 근심(6:6)
이리하여 하나님은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신다"(창 6:6). 여기에서 "한탄하다"는 일차적으로 "후회하다"는 뜻이다(표준새번역).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는 데 있어서 계산을 잘못하여 불량품을 만들었음을 후회하시는 모습이다. 창세기 저자는 이렇게 강열한 신인동감적 표현을 통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상처받은 하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근심하다"는 "마음 아파하다"(표준새번역)로 제시된다. 여기에는 "아픔"이 강조되고 있다. 같은 표현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반역하던 시대에게 적용되고 있다(시 78:40-41). 그들은 성령을 근심케 한 자들이었다(사 63:10). 하나님은 추상적인 원리나 우주의 힘 정도가 아니라, 근심하시는 인격이시다. 하나님의 근심과 후회는 인간들이 길을 돌이킬 때, 자신도 예고하신 심판을 돌려 복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심을 말해준다.
후회하시고 근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천지창조의 과정에 나타난 주님의 모습과 아주 대조적이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만드시는 것 마다 "보시니 좋았더라"고 한다. 창조의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께서 보시니 심히 좋았더라"고 하였다. 온 세상을 아름답고 조화있게 만드신 후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사 자신의 뜻을 이루시길 원하셨던 하나님은 이제 깊은 근심과 후회에 빠진다. 인간의 죄가 가져오는 슬픔과 고통은 인간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도 느낀다.
주님은 오늘날에도 우리의 악한 동기와 행동을 보시고 탄식하신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다"(시 14:2). 그렇지만, 판결은 노아시대의 것과 동일하다.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3).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아담의 타락 후에 인간들은 자기 보기에 좋은 것을 찾게 되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보실 때, 좋은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죄의 암이 우리 안에 다 퍼지며 우리 존재의 핵심을 치고 있다"(영블라드 84).
3) 우주적인 심판을 결심하시는 하나님(6: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6:7). 인간의 선택이 되돌아 올 수 없는 지점에 이르자, 주님은 결정적인 최후의 심판을 내리시기로 결심하신다.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는 홍수 심판을 바라보고 있다. "쓸다"는 물로 쓸어버리는 모습이다. 이 단어는 후에 모세가 자신의 이름을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제하소서"라는 간청에서 사용되었다(출 32:32-33). 마치 "책에 기록된 글(이름)을 물로 씻어 없애 달라"는 것 같다(Hamilton 275). 간음한 것으로 여겨진 여인을 심문하는 데 있어서, 제사장은 "저주의 말을 두루마리에 써서 그 글자를 그 쓴 물에 빨아 넣는다"(민 5:23). 이렇게 되면 저주가 그 물 안으로 들어가 마시는 사람에게 임하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주님은 자신이 "창조한 사람을 물로 쓸어 버리겠다"고 선언하신다.
그러나 단지 "사람들"만 제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있는 "육축, 기는 것, 새"는 동물 왕국을 세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뿐 아니라 짐승 즉, 모든 생물들"을 가리킨다(Hamilton 277).
왜 사람들이 범죄하였는데 무고한 짐승들까지 심판을 받는가? 왜냐하면, 죄와 악이 인간을 통해 온 세상에 퍼졌기 때문에, 심판도 범세계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동물들이 심판을 받는 것은 그들이 범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인간과 뗄 수 없이 친밀한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창 1:28; 2:18-20; Scullion 63). 즉, 의가 넘치는 온 우주가 기뻐하고, 죄가 창궐하며 온 우주가 신음하게 된다.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는 여기에서 두 번 반복되고 있다(6:6, 7).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대로 지은 인간들에 대해 깊이 실망하시고 한탄하신다. 틸리케는 "후회하시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하나님이며 또한 파산지경에 이른 그의 작품(역사)을 대홍수로 없애 버리려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라고 묻는다. 사실 선지자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라고 말했다(삼상 15:29; 민 23:19 참조). 이것은 단지 신인 동감적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주님은 인간의 범죄에 대해 깊은 상처를 받으시고 심판을 결심하신다. 그러나 틸리케는 좀 더 깊이 보고 있다. "전 우주의 모든 피조물들에 그 나름대로의 자리를 마련해 주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죄를 범했다고 해서 무죄한 나무들과 꽃들, 동물들을 멸절시키려고 하니 이게 웬말인가? 우리는 여기에서 골고다 즉 하나님께서 고통을 당하시고 무기력하고 '신과 같지 않은' 것처럼 보였던 골고다에서의 이상한 파멸에 대한 서곡을 보지 않는가?"라며 답한다.
4)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6:8).
"아담의 계보가 이러하니라"는 시작(5:1)은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6:8)로서 아름답게 마치고 있다. 이 이야기 사이에 온갖 인간들의 죽음과 타락과 폭력 이야기들을 열거하면서 저자는 주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의 이야기로 마무리를 하고 있다. 여기의 "은혜"는 창세기에서 처음 등장하는 단어이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가 새로운 인류의 희망인 노아에게 임하며 노아는 남은 자가 되고 새 인류를 준비하는 자가 된다.
바로 앞 절에서 하나님은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nacham)"고 말씀하셨는 데(6:6),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이 아들이 우리를 안위하리라(nacham; 5:29)는 약속을 이루고 있다. 노아는 사람들 뿐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위로와 기쁨을 가져올 것이다.
홍수 직전에 온 세상은 성적인 탐닉과 폭력으로 물들어 있었지만,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는다." 노아가 그 어둔 세상에서 빛이 된 것은 전적으로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죄로 물든 세상과 그 안에서 은혜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노아의 모습은 그리스도인의 역설적인 삶을 잘 보여준다. 우리도 "사람의 죄악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인" 이 세상을 살지만(창 6:5),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고 있다. 성경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를 동시에 증거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부패성과 죄를 이길 것이다.
5) 명상
이후에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노아에 대해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라고 평하고 있다(벧후 2:5). 어떤 점에서 노아는 "의를 전파하는 자"였는가?에 대해 유대 문헌들과 기독교 문헌들에는 그가 회개하라는 말씀을 증거하였다고 한다.
"하나님 자신이 하늘에서 그에게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다. '노아야, 담대하라. 그리고 모든 백성들로 구원을 받도록 회개를 선포하라. 그들은 수치를 모르는 영을 가진 자들이므로 만약 그들이 듣지 않으면, 내가 온 인류를 대홍수로 멸하리라…' [그 때 노아는] 모든 백성들에게 호소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신실에 취하고 발광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여, 여러분들이 행한 일은 하나님의 시선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시빌린 신탁 1:127-31; 149-51; Kugel 115).
"그러나 노아는 [그의 동시대 사람들의] 행동을 못마땅해 하였으며 그들의 의도가 밉살스러운 것을 보고, 그들로 하여금 더 나은 사고방식을 가지며 행실을 바꾸도록 설득하였다"(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73). "노아는 회개를 외쳤고, 믿은 자는 구원을 얻었다"(클레멘트 1서 7:6; Kugel 115). "[노아는 회고하기를] 나는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홍수가 오느니라'고 끊임없이 외쳤다. 그러나 듣는 자가 없었다"(바울의 계시록 50; Kugel 115).
아담의 후손들 이야기(창5:1-6:8)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라는 제 5장의 서문형식은 창세기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에서 "천지의 대략이 이러하니라"(2:4)는 서문에 이어 두번째로 나타나고 있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새로운 이야기가 5:32에서 마친다고 생각하나,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가 나타나는 6:9 바로 앞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Cassuto). 사실 5:32은 이 이야기의 끝으로 보기에는 미흡하다.
왜냐하면 5장의 이야기는 족장들이 얼마나 살았는지만 말해주고 별 내용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6:8)는 좋은 마무리를 해준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창세기의 저자가 하나님의 심판의 불가피성을 말씀하면서도 늘 끝에 가서는 하나님의 구원사의 새로운 계획을 늘 말하면서 마치는 것과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아담의 후손들 이야기(5:1-6:8)는 (1) 아담의 10대 손들(5:1-32), (2)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빗나간 결혼(6:1-4) 그리고 (3) 홍수 전야(6:5-8)의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아담의 10대 손들(5:1-32)
1) 서문(5:1-3)
이 서문은 독자들로 하여금 창세기 첫 장의 천지창조(1:1-2:3) 중 남녀의 창조(1:26-27)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첫 인간 창조에서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으며, 이제 아담이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는다." 또한 이 서문은 출생과 작명의 패턴을 따라, 4장 마지막 부분(25-26)과 이어진다. 첫 부모가 자기 아들들의 이름을 지은 것 같이, 5장의 서문에서는 하나님이 아담의 이름을 짓고, 아담은 그의 아들 셋의 이름을 짓는다. 나아가 마치 하나님이 아버지처럼 아담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은 것 같이, 아담은 "자기 모양대로 아들을 낳는다." 이리하여 아담은 셋의 아버지이며, 셋은 에노쉬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이들 모두의 아버지가 되신다. 이후의 창세기에 나오는 족보들을 보면, (1)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며(10장), (2) 하나님은 특히 아브라함과 그의 씨의 아버지이다(11장).
또한 창세기의 저자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축복하시는 주제로 돌아간다(1:28; 5:2). 마치 아비가 자식을 돌보며 축복하듯이(창 9:26-27; 27:27; 48:15; 49:29), 하나님께서 계속 인류를 돌보시며 아담에게 주신 첫 복을 다음 세대로 넘겨 주신다(1:28; 5:1; 9:1; 12:3; 24:11). 마치 하나님은 인자하신 아버지처럼, 자신의 모든 복을 후손에게 넘겨주신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며 온 땅에 충만하고 자신의 뜻을 이루시려던 원래의 계획은 인간의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씨(3:15), 아브라함의 씨(12:3), "유다 지파의 사자" (49:8-12; 계 5:5-13)를 통해 이어져 간다. 바로 이 기초 위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를 통하여 "우리를 복 주시고" (엡 1:3), "우리를 그의 양자로 삼으시고" (1:5), 우리로 "기업을 얻게 하시며"(1:11), 우리로 그를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한다(롬 8:15)고 말한다.
2) 족보의 구조
가인과 라멕의 교만과 폭력의 족보가 끝나고 이제 셋을 통한 새로운 족보가 시작된다. 이들 중 10명의 유명한 사람들은 아래와 같다 (5:1-32)
대 성경본문 이 름 대 성경본문 이 름
1 5:1-5 아담 6 5:18-20 야렛
2 5:6-8 셋 7 5:21-24 에녹
3 5:9-11 에노스 8 5:25-27 두셀라
4 5:12-14 게난 9 5:28-31 라멕
5 5:15-17 마할랄렐 10 5:32 노아
먼저 아담에서 셋을 통해 흐르는 족보는 바로 앞 장에 나타난 가인의 족보와 그 이름에 있어서 유사성이 많다. 즉 (1) 가인(4:17)과 게난(5:12), (2) 이랏(4:18)과 야렛(5:18), (3) 므후야엘(4:18)과 마할랄렐(5:12), (4) 므드사엘(4:18)과 므두셀라(5:21)는 발음이 비슷하다. 또한 가인의 후예에도 에녹(4:17)과 라멕(4:18)이 있듯이 셋의 후예에도 에녹(5:21)과 라멕(5:28)이 있다. 그러나 이름이 비슷하거나 같다고 같은 인생을 사는 것 같지 않다. 이들은 전혀 다른 역사를 만들고 있다.
3) 족보의 수사학적 메시지
위에 나타나는 족보는 대단히 선별적이며 일정한 패턴을 따라 체계적으로 주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틀과 그 변화를 통해 저자는 수사학적으로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먼저 저자는 족장들을 아래와 같은 형식으로 소개해 간다.
(1) A는 X세에 B를 낳았다.
(2) A는 B를 낳은 후 Y년을 살며 자녀들을 낳았다.
(3) A는 X+Y세를 살고 죽었다.
이런 틀에서 보면 저자는 다음과 같은 강조를 하고 있다.
(1) "그가 죽었더라"
5장에 있는 족보는 11:1-26에 있는 셈의 족보와 형식에 있어서 거의 일치한다. 하나의 차이가 있다면, 5장에서는 각 사람을 소개하고 "그가 죽었더라"는 구를 지루할 정도로 첨가해 간다. 왜 저자는 이 족장들의 죽음을 강조해야 되었을까?
아무리 오래 살아도, 아무리 훌륭하게 살아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말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진다(3:19).
(2)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 가시므로 있지 아니하였더라"
모든 사람들이 죽어가는 가운데, 에녹에 대한 소개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다"는 독특한 말씀이 나타난다(24절). 즉, 저자는 에녹의 예외를 강조하기 위해 각 족장의 죽음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에녹은 "죽음"이란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왜 에녹은 예외였을까? 저자는 반복하여,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22, 24절)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동행하다"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그는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말한다(6:9).
즉 에녹은 죽음의 저주 속에서 생명을 찾은 자요 아담의 운명을 벗어난 자의 예증이다. 아담과 그 후손의 죽음에 대한 선언은 최종적이 아님을 에녹을 통해 저자는 발견하고 있다. 즉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면" 생명나무에로의 길이 열려 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여" 그 길을 찾았다. 저자는 이 주제를 17장에서 다시 다룬다. "내 앞에 행하고 온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너와 세우리라"(17:1-2).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생명에로의 길이다. 모세는 광야에 있는 백성들에게 "내가 생명과 축복, 죽음과 멸망을 너희 앞에 둔다" (신 30:15-16)고 말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법칙 몇 개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시내산에서 준 율법과 더 나은 미래의 길을 바라보고 있다(신 30:5-16). 에녹(5:22), 노아(6:9), 아브라함(15:6)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따라 산 자들이다.
(3) 노아
가인계의 라멕(창 4:23-24)과 달리 셋의 후손 라멕(5:28-31)은 세상에 임하는 저주를 느낀다. 경건한 라멕은 그러나 위로의 때를 사모하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이 이 저주로부터 구원을 가져올 것을 바라본다.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5:29).
셋 가문의 역사를 도표로 볼 때, 그 절정은 노아에게 있으며 이 이야기는 결국 다음에 나올 홍수 심판을 향해 이야기가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앞에 있는 가인의 족보(4장)와 여기 있는 셋의 족보(5장)는 첫 타락(3장)과 홍수 심판(6:9 이하) 사이에 들어와 "타락과 심판"의 관계를 설정해 줄 뿐 아니라, 이 심판의 파국으로 치닫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주님의 구원 역사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즉, 5장의 족보는 홍수 이야기를 제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짜여졌다. 홍수 이야기는 두개의 족보 사이에 주어지고 있다(5:32; 9:28, 29). 노아는 수고로이 일하는 인간들에게 위로를 줄 것이다(5:29).
8:21을 보면, 노아가 가져오는 위로는 방주 안에서 인류를 보전하는 것일 뿐 아니라, 홍수 후에 제사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노아는 미래에 인류를 파멸시키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게 하며 새로운 인류를 이루어 가는 조상이 된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빗나간 관계(6:1-4)
인류의 역사에서 첫 파국으로 기억되고 있는 홍수 이야기(6:9-9:29)로 들어가기 직전에, 창세기의 저자는 이중적인 렌즈로 아담의 후손들을 비추고 있다. 그는 먼저 5장에서 길고 긴 생애를 살았던 아담 후손들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번성하나 "사람의 딸들"에게 빠지며, "거인"(네필림)이요 "용사"이나 연약한 "육체"가 되어 버리는 모습을 간략하게 비추고(6:1-4), 이어 그들의 내면적인 악을 들추어 내며 이에 대한 하나님의 고통스러운 반응(6:5-8)을 짤막하게 묘사하고 있다(6:5-8).
창세기의 큰 흐름에서 보면 6:1-8은 5:1-32로 이어져야 한다. 그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로, 5:1의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6:8까지 이어진다. 이 단락에서 노아는 아담의 10대 손으로 새로운 인류의 희망으로 태어나, 결혼하고 자녀를 낳는다(5:29-32). 이어 그는 온 인류가 타락한 가운데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 소개된다(6:8). 둘째로, 6:9은 "노아의 사적이 이러하니라"로 시작하여, 홍수와 연관된 노아의 독자적인 세계는 6:9부터 시작된다.
셋째로, 6:1은 5장에서 지나가며 언급된 "딸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들은 5장의 족보에서 별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이들이 시선을 끌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라는 6:1은 5:1-32에 기록된 아담 후손들의 모든 생육과 번식의 과정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5:1-6:8은 홍수 직전의 옛 세상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이 부분은 아담의 창조로부터 그의 후손이 "크게 번성한 것"(6:1)과 역설적으로 그들의 번성이 "죄의 번성"으로 변질되며(6:5), 결과적으로 노아의 가정을 제외한 그들의 모든 후손이 멸망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으로 마치고 있다(6:7).
이리하여 5:1-6:8은 두개의 태고사 사건, 즉 창조와 홍수를 10명의 족장의 족보로 연결시키고 있다. 창세기의 시간표에서 보면, 이 장은 세계사 중에서 가장 긴 시간을 담고 있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사람 노아를 제외하고는 이 장은 이야기를 간명하게 전개한다.
따라서 창세기 6:1-8은 아담 자손의 계보 이야기에 대한 좋은 요약일 뿐 아니라, 홍수 이야기의 서론적인 배경으로서 좋은 고리를 맺어주고 있다. 즉, 이 단락은 문학적으로 볼 때 앞 뒤를 다 잇는 이중기능(double-duty)을 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형식은 창세기에서 계속 나타나고 있다(2:1-3은 1:1-31을 요약한다. 창 10:31-32, 11:27-32, 출 1:7을 보라). 이리하여 창세기의 저자는 아담과 하와의 실락원 후, 가인성 이야기(4:1-26)와 셋을 통한 구원의 새로운 세대 이야기(5:1-32)를 마치고, 노아와 홍수 이야기(6:9-9:29)로 들어가기 직전에, 홍수 전야의 세계를 잠깐 비추어주며 홍수 심판의 불가피성을 말해주고 있다(6:1-8).
홍수 전야의 세상은 가인으로부터 시작된 형제 살해와 라멕으로부터 시작된 일부다처주의와 무절제한 폭력이 도시문화의 발달 속에서 더욱 가속화 되며 하나님의 심판을 불가피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비록 한 평생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이 있었고(5:23),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던 셋 계통의 라멕(5:28)이 있었지만, 이들의 경건한 삶의 모범은 그 당시 세상의 부패를 막기에 충분한 빛과 소금이 되지 못했다. 이리하여 세상은 최종적인 파국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1)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6:1-2)
"이 단락은 오경에서 가장 모호한 본문"이라고 하는 카수토의 말처럼(291쪽), 여러가지 어려운 난제들을 담고 있다. 먼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 것"이 아담 후손들의 일상 생활로 나타나며, 이들을 통해 "장사들"(네필림)이 태어나고, 궁극적으로 홍수 심판의 직접적 원인으로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여러가지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1) 천사들로 보는 견해(70인역, 에녹 1서, 주빌리, 쿰란, 필로, 카수토)
고대의 해석자들은 이들의 결혼과 장사들의 탄생과 홍수 심판 사이에 밀접한 연관성을 찾으며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들"로 보았다. 유대 문헌 중 외경 에녹서는 이 절을 천사들의 타락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늘의 아들들인 천사들은 그들을 보고 탐하였으며 서로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사람들의 자식들에게서 우리를 위해 아내를 취하고 그들로 우리들을 위해 자식을 낳게 하자.' 이리하여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아내들을 취하고, 각자가 자기를 위해 여자들을 취하였다. 그들은 그들 안에 들어가기 시작하였으며 그들과 난잡한 관계를 가졌다. 그들은 그들에게 마술과 주술을 가르쳤으며 뿌리와 나무를 자르는 법을 가르쳤다. 그들은 잉태하여 거대한 거인들을 낳았으며 그들의 키는 3000규빗(약 1500미터)이나 되었다. 이들은 인간의 수고를 다 삼켰으며, 사람들은 자신을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 여자들은 거인들을 낳았으며, 이로 인하여 온 땅은 피와 불법으로 가득차게 되었다"(에녹 1서 6:2-7:7; 9:9)
"하나님의 천사들은 그들이 보기에 아름다운 것을 알았다. 이리하여 그들(천사들)은 그들이 선택한(인간 여자들)과 결혼하였다. 그들은 아이들을 낳았고 이들은 장사들이었다. 땅에 악이 증가하였다. 사람으로부터 가축, 동물들, 새들과 지면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부패하였고, 그들에게 정해진 길에서 벗어났다. 그들은 서로 삼키기 시작하였고 악이 땅에 넘쳤다"(주빌리 5:1-5 참조).
사실 천사들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려진 곳은 성경에 많다(시 29:1; 89:7; 욥 1:6; 2:1 등). 그러나 이들을 천사들로 보기 어려운 점들이 많이 있다.
① 구약성경에서 천사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 "아들"은 신체적인 후손을 가리키지 않으며 "한 그룹의 일원"이란 뜻으로 사용된다. 마치 "선지자들의 아들들"이 "선지자 그룹의 일원"이란 뜻과 같다. ② 천사들은 성생활을 하지 않는다(마 22:30). ③ 나아가 타락한 천사들의 잘못 때문에 모든 인간이 홍수로 모두 죽음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다.
④ 뒤따르는 4절에 따르면, 이들의 후손들은 "네필림"으로 불려지는데, 이들은 출애굽 당시 가나안 땅에 살았던 장대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민 13:32-33). 이들은 사람의 후손이기 때문에 창세기 6장에서 "신적인 존재를 통해 낳은 반신반인적인 존재"로 볼 필요가 없다.
어떤 학자들은 신약성경 중 베드로전서 3:19-20에서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는 말씀이 "천사들의 타락"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용하지만, 본문은 해석하기 너무 까다로우며 확고한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또한 베드로후서 2:4에서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역시 "타락한 천사들" 설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 구절은 "창세기 3장에 있는 인간의 타락 이전에 있는 천사들의 반역으로 보인다"(영블라드 81).
(2) "셋의 후예들"로 보는 견해(존 머레이; 영블라드 82-83)
존 머레이를 비롯한 많은 복음주의 학자들은 여기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의 후예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아들들"인 셋의 후예와 "사람의 딸들"인 가인의 후예 사이에 성행하였던 종교적인 통혼이 홍수 심판의 근거가 되었다고 한다. "인간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결혼을 생각할 때, 셋의 후예들은 그들의 믿음과 경건의 유산을 뒤로 하였다. 그들은 아내가 될 만한 사람을 찾을 때, '이 여인이 내 가정을 경건한 가르침의 장소로 만들 것인가?'를 묻지 않고 '그녀가 아름다운가?'를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 던졌다"(Davies 74).
이 해석은 앞뒤의 문맥과 어울릴 뿐 아니라(창 5:1-32; 6:9 이하), 신자와 불신자의 결혼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는 점에서 신학적으로도 의미심장하다(신 32:5; 시 73:15; 사 43:6; 호 1:10; 눅 3:38 등). 따라서 여기의 "하나님 아들들"은 "경건한 자들"이며 그들이 "하나님의 딸들"과 결혼하지 않고(사 43:6), "사람의 딸들"과 결혼했기 때문에 타락한 결혼으로 보게 된다(영블라드 82쪽).
그러나 이 해석에 따르면 6:1의 "사람"과 2절의 "사람"이 각각 "일반적인 총칭으로서의 사람"(1절)과 "가인"(2절)으로 달리 해석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아들들"을 이런 제한된 의미로 사용하기 힘들고, 또한 이들의 결혼에서 태어난 자들이 "네필림"과 "용사들"이 되었다는 점을 설명하기 어렵다.
(3) "고대의 통치자들"로 보는 견해(Kline; 김이곤)
세번째로 여기의 "신의 아들들"은 홍수 직전에 세상을 다스렸던 통치자들로 보는 해석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여 독재정치를 하여 세상을 어지럽혔으며, 또한 자신의 무절제한 성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기들이 보기에 아름다운 여자들을 다 취했다. 이들의 난잡한 생활이 폭력을 수반하였기 때문에 "강포가 땅에 가득하였다"고 한다(6:13).
고대의 통치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부를 수 있는 근거는, 첫째로 그들이 원래 "신의 아들"로 불려졌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가나안 문헌에 케렛왕은 '엘의 아들'[bn il]로 불려진다). 즉 창세기 저자는 "소위 하나님의 아들"로 불려지는 왕들과 제후들이 호색과 폭력에 빠졌다고 말하고 있다. 옛날의 저자들은 우리처럼 인용표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는 바로 지도자를 가리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시편 82편에서도 세상의 통치자들과 재판장들을 "신의 아들들"이라고 부른다.
둘째로, "자기가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다"는 말 자체가 그들의 권세를 드러내어 준다(라멕도 일부다처와 폭력을 행사하였다. 창 4:23-24)". 하나님의 아들들은 보통 사람 위에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군림하는, 더 우수하고 더 강한 자들, 제왕이나 그것에 준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표상하는 용어였다"(김이곤 51).
이상의 세가지 해석은 각각 장점과 단점을 갖고 있으므로, 이들 중 어느 해석이 원문에 가장 가까운지 알 수 없다. 사실 고대의 본문에 대해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입장을 가지는 것은 늘 위험하다. 그렇지만 세 해석 모두 이 본문이 홍수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결혼의 주제를 다룬다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하다(창 2:24에서와 같이).
홍수 전야 시대의 사람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tob)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다"(laqach)에서 저자는 "여성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을 문제 삼고 있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는 마치 에덴 동산에서 이브의 죄와 같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ra'a)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좋은(tob)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취하여(laqach)"(창 3:6).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들도 육신적인 관능을 따라 탐욕에 빠지며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들의 범죄가 구체적으로 기록되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의 결혼에 뭔가 얼룩진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특히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라는 표현 속에 일부다처와 성적인 범죄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그들의 결혼은 "둘이 합하여 하나를 이루는" 하나님의 원래의 의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온갖 방탕과 호색과 난잡함을 추구하는 애정행각이었다. 존 머레이에 따르면, "성적인 악에 몰입되는 것은 어떤 형태이든지 다른 방향, 특히 폭력으로 점화되는 욕망의 불꽃이 된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서 인간 사회의 근본이 가정에 있는 것을 생각하면, "역기능적인 가정"에서 결국 "역기능적 인간"이 만들어지며 "역기능적 사회"가 만들어질 수 밖에 없음을 예측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본 훼퍼에 따르면, "무절제한 성욕은 다른 인격을 피조물로서 파괴한다. 그것은 자신의 피조성을 박탈하고 파괴하며 자신의 한계를 부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파괴 중 가장 심각한 것이다. 이것은 타락을 미친듯이 가속화하는 것이며 멸망의 지점까지 자신을 주장하는 것이다."
2) 떠나시는 하나님의 신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 하시니라"(3절)에서는 단어 하나 하나 마다 논쟁이 되고 있을 정도로 해석이 어렵다.
먼저 여기에서 "나의 신"이 등장하는 것이 갑작스럽게 느껴지지만, 이미 하나님의 신은 천지창조에서 "수면을 운행하시는" 모습으로 등장하였다(창 1:2). 워필드(B.B. Warfield, 1895)에 따르면, "하나님의 신은 구약의 최초부터 만물의 존재와 존속의 원리이시며, 모든 움직임과 질서, 그리고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성의 원인으로 나타난다"(윤영탁 번역, 1985:110).
하나님의 신은 천지창조에서 혼돈과 공허에서 질서를 만드시는 분일 뿐만 아니라, 인간과 동물 창조에서 생명력을 주시는 분으로 나타났다.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에서 "생기"는 성령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 창조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이 이미 암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생기, 혹은 생명의 호홉"(nishmat hayim)은 주님께서 친히 주신 것이며, 인간 속에 원래부터 있었던 내재적인 호홉이 아니다. 이 "바람" 혹은 "호홉"은 주님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며 주님께서 자신의 "생기"를 불어 넣음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생령"(nepesh haya), 즉 "살아있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나의 신"은 단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the life-giving power of God, Wenham, 141) 정도가 아니라 창세기에서 아직 뚜렷하게 신학적으로 자리를 잡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신이신 "성령"을 가리킨다("내 영"이란 표현은 에스겔 37:14에 다시 나타난다).
주님은 이제 자신의 신을 거두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들이 원래의 창조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자율성에 빠져 온갖 죄를 탐닉하였기 때문에 주님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라"고 선언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세계를 헝클어뜨리는 자들이 활기 넘치게 살 수 있도록 하시는 자신의 생명을 주시는 영을 끊임없이 그리고 영원히 허락하시지 않을 것이다"(브루거만 72). 이리하여 사람들에게는 성령의 감동과 감화가 약화되었으며, 죄의 충동은 더욱 심화되었다.
3) 육체가 된 인간
하나님의 신이 떠나시면, 인간들은 "육체가 된다." 구약성경에서 "육체"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살과 몸"을 가리킨다. "육체"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를 뜻하나, 은유적으로 "죄성과 부패성"을 뜻한다. 인간은 무능하며 약한 존재일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부패한 존재이다. 따라서 "육체"는 연약한 인간존재로서 약함과 죄성과 부패성을 함께 가리킨다. 성령의 지속적인 감동과 감화 없이, 인간의 정신은 썩고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욥 34:14-15; 창 2:7; 3:19; 사 40:7).
4) 은혜의 유예기간과 짧아지는 인간의 수명으로서의 120년
"그러나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 하시니라"는 장차 인간의 수명이 120년이 될 것인지 혹은 하나님의 심판선언으로부터 집행까지 유예기간이 120년이 될 것인지 명백하지 않다. 창세기 6:3의 인접 문맥을 살펴보면 앞으로는 인간의 수명이 120년 밖에 안될 것을 선언하는 것 같으나, 창세기 3-11장의 넓은 맥락을 살펴보면 노아는 950년을 살며 그의 손자인 아르박삿은 438년을, 그의 증손자인 셀라는 433년을, 그의 고손자인 에벨은 464년을 살았기 때문에 설득력을 잃는 것처럼 보인다.
고대의 해석자들은 120년을 은혜의 유예기간에 대한 경고로 보았다. 70인역의 번역자는 "내 영이 이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거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로 해석하며 홍수 직전 세대의 장사들에게 남은 회개의 시간으로 보았다. 탈굼에서도 "이 악한 세대는 내 앞에 영원히 견디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되며 그들의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니라. 나는 그들에게 그들이 회개하는지 120년의 기간을 주리라"고 한다(탈굼 옹켈로스 창 6:3). 랍비 이스마엘도 같은 방식으로 해석한다. "주께서는 홍수세대로 회개하도록 120년을 연장해 주셨나이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내 영이 사람에게 거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였기 때문입니다"(Kugel 113).
이런 입장은 초대교회의 교부들에게도 나타난다. 제롬에 따르면, "그들이 회개할 수 있는 기간은 120년이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잘못 믿듯이 인간 수명이 120년으로 줄어들 것이라는 뜻은 아니며 한 특정한 세대에게 심판날까지 120년이 주어졌다는 것이다"(Kugel 112에서 인용됨). 어거스틴 역시 같은 입장을 가졌다. "여기에 예언된 120년은 멸망할 사람들의 수명을 가리킨다. 이 기간이 지나면, 그들은 홍수로 멸망할 것이다"(상동). 이 입장은 루터와 칼빈으로 이어지고 있다(벧전 3:20 참조).
그러나 먼저 6:3 뿐만 아니라 6:1-4 전체가 단지 홍수 세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온 인류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인간의 수명을 단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연합 배후에는 수명을 늘리고 안전한 인생을 찾으려는 욕구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의 부정적이고 적극적인 부분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즉 사람이 월권행위를 한 그 범위 안으로 되돌려지며 그의 수명은 단축된다"(Childs; Kraus 376에서 인용됨).
또한 이 구절은 창세기 3:22, "그들이 영생할까 하노라"의 구문과 유사하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영생"의 기회가 박탈된 것처럼, 범죄한 인간들의 수명은 이제 "120년이 될 것이다."
물론 우리가 여기에서 두 의견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오경의 저자는 후일에 이 기간이 인간의 수명을 가리키는 기간이 될 것으로 이해한 것 같다. 홍수 이후 시대에는 수명이 갑자기 떨어지며 120세를 사는 사람들이 드물어진다. 물론 아브라함은 175세, 이삭은 180세, 야곱은 147세를 살지만, 이후 요셉은 110년(창 50:26), 모세는 120년(신 34:7), 여호수아는 110년(수 24:29), 오직 아론만이 123년을 산다(민 33:39). 이리하여 저자는 인간 수명이 장차 120년으로 줄어들게 된다는 주님의 선언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바라본 것 같다. 마치 에덴의 저주가 점차적으로 이루어질 같다(3:16-19). 따라서 앞에서 오랫동안 산 사람들은 예외적이며, 홍수 후에는 사람의 수명이 점점 짧아질 것이다(11:10-26).
홍수 전야의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탄식과 새로운 희망(6:5-8)
홍수 직전에 죄의 깊은 먹구름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 창세기의 저자는 이 상황을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로 묘사하고 있다(6:5). 이 점에 대해 영블라드가 멋있게 묘사하였다. "그 악한 촉수가 한 개인의 삶의 모든 모퉁이와 틈에 미치고 있으며, 그 어느 누구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83쪽). 앞 소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처럼, 하나님은 인간들의 악함을 보신다. 그들이 "보고" 행동을 취하는 것처럼, 주님도 "보시고"(5절), "느끼시고"(6절), 그리고 "결단을 내리신다"(7절).
1) 깊고 깊은 인간의 죄성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다"는 직역하자면, "사람의 죄악은 세상에 가득 찼다"가 된다(ki rabba ra'at ha'adam ba'arets). 창세기의 큰 맥락에서 보면, 하나님은 인간들을 만드시고 그들로 온 세상을 "채우라"(rebu)고 말씀하셨는데 인간들은 오히려 "죄악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인간의 죄는 점점 자라가며 온 세상을 채운다. 하나님은 온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길 원하셨는데, 슬프게도 이 세상은 인간들의 범죄로 가득 차고 있다. 죄가 보편화되고, 국제화되고 세계화되어 간다.
또한 죄가 사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을 지배하고 있다. 죄는 "생각"에서부터 시작된다. 인간의 타락은 의지에서 시작되지만, 그 근본은 "지성"에 있다. 우리는 죄를 항상 행위의 관점에서 보지만, 오히려 죄는 우리의 "생각"에서 출발하고 있다. 인간의 지성은 부패하여 하나님과 자신과 세상에 대해 왜곡된 관점을 가진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계획"(yetser)에 있다. 이 단어는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yetser)를 상기시킨다(창 2:7). 하나님은 토기장이처럼 인간을 만드셨다. 이제 인간이 자기 생각을 스스로 만들어 낸다. "하나님이 원래 인간을 만들었을 때에는 아름다웠는데, 이제 인간이 만드는 것은 혐오스럽다"(Hamilton 273)." 여기의 계획은 단순한 "상상이나, 욕망"이 아니라, "생각의 근본"(yetsira)이다(카수토 I:303). 인간이 죄인인 것은 그의 행동이 악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마음에서 만들고 있는 모든 생각이 악한 데 있다. 즉, 인간 생각의 방향 뿐 아니라 성향이 모두 악하며 항상 악하다. 우리는 잠깐동안 악한 생각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늘 악한 생각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 구절은 구약 성경에서 인간의 전적 부패를 가장 잘 증거해 주고 있다. 우리의 내면적인 생각의 모든 경향들이 항상 오직 악하게만 작용하고 있다. 창세기 8:21로 가면,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고 말한다. 우리의 원죄는 아담과 하와로 시작되었지만, 우리 모두가 이 원죄에 동참하고 있으며, 우리가 태어나자 마자 죄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후에 시편 51편의 시인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고 고백한다(5절).
이 점에 대해 틸리케가 잘 말하였다. "항상 인간이 프로메테우스처럼 그렇게 공공연하게 그리고 의도적으로 하나님에게 대적한다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사람들이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불끈 쥐는 일은 사실상 매우 드물다.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무신론자나 반기독교인인 양 행세할 이유가 없다. 얼마든지 그는 비밀스럽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238쪽).
2) 하나님의 후회와 근심(6:6)
이리하여 하나님은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신다"(창 6:6). 여기에서 "한탄하다"는 일차적으로 "후회하다"는 뜻이다(표준새번역).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는 데 있어서 계산을 잘못하여 불량품을 만들었음을 후회하시는 모습이다. 창세기 저자는 이렇게 강열한 신인동감적 표현을 통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상처받은 하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근심하다"는 "마음 아파하다"(표준새번역)로 제시된다. 여기에는 "아픔"이 강조되고 있다. 같은 표현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반역하던 시대에게 적용되고 있다(시 78:40-41). 그들은 성령을 근심케 한 자들이었다(사 63:10). 하나님은 추상적인 원리나 우주의 힘 정도가 아니라, 근심하시는 인격이시다. 하나님의 근심과 후회는 인간들이 길을 돌이킬 때, 자신도 예고하신 심판을 돌려 복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심을 말해준다.
후회하시고 근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천지창조의 과정에 나타난 주님의 모습과 아주 대조적이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만드시는 것 마다 "보시니 좋았더라"고 한다. 창조의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께서 보시니 심히 좋았더라"고 하였다. 온 세상을 아름답고 조화있게 만드신 후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사 자신의 뜻을 이루시길 원하셨던 하나님은 이제 깊은 근심과 후회에 빠진다. 인간의 죄가 가져오는 슬픔과 고통은 인간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도 느낀다.
주님은 오늘날에도 우리의 악한 동기와 행동을 보시고 탄식하신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다"(시 14:2). 그렇지만, 판결은 노아시대의 것과 동일하다.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3).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아담의 타락 후에 인간들은 자기 보기에 좋은 것을 찾게 되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보실 때, 좋은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죄의 암이 우리 안에 다 퍼지며 우리 존재의 핵심을 치고 있다"(영블라드 84).
3) 우주적인 심판을 결심하시는 하나님(6: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6:7). 인간의 선택이 되돌아 올 수 없는 지점에 이르자, 주님은 결정적인 최후의 심판을 내리시기로 결심하신다.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는 홍수 심판을 바라보고 있다. "쓸다"는 물로 쓸어버리는 모습이다. 이 단어는 후에 모세가 자신의 이름을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제하소서"라는 간청에서 사용되었다(출 32:32-33). 마치 "책에 기록된 글(이름)을 물로 씻어 없애 달라"는 것 같다(Hamilton 275). 간음한 것으로 여겨진 여인을 심문하는 데 있어서, 제사장은 "저주의 말을 두루마리에 써서 그 글자를 그 쓴 물에 빨아 넣는다"(민 5:23). 이렇게 되면 저주가 그 물 안으로 들어가 마시는 사람에게 임하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주님은 자신이 "창조한 사람을 물로 쓸어 버리겠다"고 선언하신다.
그러나 단지 "사람들"만 제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있는 "육축, 기는 것, 새"는 동물 왕국을 세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뿐 아니라 짐승 즉, 모든 생물들"을 가리킨다(Hamilton 277).
왜 사람들이 범죄하였는데 무고한 짐승들까지 심판을 받는가? 왜냐하면, 죄와 악이 인간을 통해 온 세상에 퍼졌기 때문에, 심판도 범세계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동물들이 심판을 받는 것은 그들이 범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인간과 뗄 수 없이 친밀한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창 1:28; 2:18-20; Scullion 63). 즉, 의가 넘치는 온 우주가 기뻐하고, 죄가 창궐하며 온 우주가 신음하게 된다.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는 여기에서 두 번 반복되고 있다(6:6, 7).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대로 지은 인간들에 대해 깊이 실망하시고 한탄하신다. 틸리케는 "후회하시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하나님이며 또한 파산지경에 이른 그의 작품(역사)을 대홍수로 없애 버리려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라고 묻는다. 사실 선지자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라고 말했다(삼상 15:29; 민 23:19 참조). 이것은 단지 신인 동감적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주님은 인간의 범죄에 대해 깊은 상처를 받으시고 심판을 결심하신다. 그러나 틸리케는 좀 더 깊이 보고 있다. "전 우주의 모든 피조물들에 그 나름대로의 자리를 마련해 주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죄를 범했다고 해서 무죄한 나무들과 꽃들, 동물들을 멸절시키려고 하니 이게 웬말인가? 우리는 여기에서 골고다 즉 하나님께서 고통을 당하시고 무기력하고 '신과 같지 않은' 것처럼 보였던 골고다에서의 이상한 파멸에 대한 서곡을 보지 않는가?"라며 답한다.
4)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6:8).
"아담의 계보가 이러하니라"는 시작(5:1)은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6:8)로서 아름답게 마치고 있다. 이 이야기 사이에 온갖 인간들의 죽음과 타락과 폭력 이야기들을 열거하면서 저자는 주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의 이야기로 마무리를 하고 있다. 여기의 "은혜"는 창세기에서 처음 등장하는 단어이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가 새로운 인류의 희망인 노아에게 임하며 노아는 남은 자가 되고 새 인류를 준비하는 자가 된다.
바로 앞 절에서 하나님은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nacham)"고 말씀하셨는 데(6:6),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이 아들이 우리를 안위하리라(nacham; 5:29)는 약속을 이루고 있다. 노아는 사람들 뿐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위로와 기쁨을 가져올 것이다.
홍수 직전에 온 세상은 성적인 탐닉과 폭력으로 물들어 있었지만,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는다." 노아가 그 어둔 세상에서 빛이 된 것은 전적으로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죄로 물든 세상과 그 안에서 은혜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노아의 모습은 그리스도인의 역설적인 삶을 잘 보여준다. 우리도 "사람의 죄악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인" 이 세상을 살지만(창 6:5),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고 있다. 성경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를 동시에 증거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부패성과 죄를 이길 것이다.
5) 명상
이후에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노아에 대해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라고 평하고 있다(벧후 2:5). 어떤 점에서 노아는 "의를 전파하는 자"였는가?에 대해 유대 문헌들과 기독교 문헌들에는 그가 회개하라는 말씀을 증거하였다고 한다.
"하나님 자신이 하늘에서 그에게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다. '노아야, 담대하라. 그리고 모든 백성들로 구원을 받도록 회개를 선포하라. 그들은 수치를 모르는 영을 가진 자들이므로 만약 그들이 듣지 않으면, 내가 온 인류를 대홍수로 멸하리라…' [그 때 노아는] 모든 백성들에게 호소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신실에 취하고 발광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여, 여러분들이 행한 일은 하나님의 시선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시빌린 신탁 1:127-31; 149-51; Kugel 115).
"그러나 노아는 [그의 동시대 사람들의] 행동을 못마땅해 하였으며 그들의 의도가 밉살스러운 것을 보고, 그들로 하여금 더 나은 사고방식을 가지며 행실을 바꾸도록 설득하였다"(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73). "노아는 회개를 외쳤고, 믿은 자는 구원을 얻었다"(클레멘트 1서 7:6; Kugel 115). "[노아는 회고하기를] 나는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홍수가 오느니라'고 끊임없이 외쳤다. 그러나 듣는 자가 없었다"(바울의 계시록 50; Kugel 115).
김정우
총신대 신대원 교수
한국신학정보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