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공원에 앉았다.
온유는 말이 없었다.
다애 역시 마땅히 해야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온유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렸는데,
침묵이 너무 무거워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은 먼저 입을 열었다.
“야, 오늘 일은 정말 고맙다.”
“언제까지 그럴래?”
온유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어? 뭐가?”
“너, 언제까지 그렇게 싸움을 하고 다닐 거야? 이번에는 조용히 넘어갔지만,
학교에 걸리기라도 하면 퇴학이야. 백재고에서 퇴학당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잖아.“
다애는 반박할 수 없었다.
다른 녀석의 말이라면 어떻게든 한 마디 해보겠는데, 유독 온유에게는 약했다.
다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넌 미술을 하겠다고 진로를 바꿨어. 아직 미술 분야에서 상을 받아본 적도 없어.
이 상태로 백재고에서 퇴학을 당하게 되면 너는 바닥으로 떨어질 거야.
그 때 가서 다시 체육으로 바꿀 거야? 그렇게 쉽게 네 진로를 바꿀 건 아니잖아.“
“그래, 그렇긴 하지.”
“그러니까 앞으로는 행동을 조심해. 자기 관리를 잘하는 것도 중요해.”
“그런데 너무 떽떽거리지 좀 마라.”
무거워진 분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다애가 간신히 한 마디 했다.
“떽떽거리다니……. 네가 걱정이 돼서 그러는 거야.”
“하하하하. 친구. 자네가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자네는 지애의 남친이지, 내 남친이 아니라네.
자네가 신경을 써줘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지애야.“
다애의 장난스러운 어조를 듣던 온유의 표정이 변했다.
온유는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는 다애의 손을 꽉 잡고 다애를 똑바로 응시했다.
평소의 온유와는 다른 뜨거운 눈빛이었기에 다애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시선이 칼날처럼 다애의 가슴에 박혔다.
“넌……. 내가 어떤 마음으로 지애랑 사귀는지 알기는 하는 거냐?”
온유의 질문에 다애는 당황했다.
온유가 무슨 의도로 이런 걸 묻는 건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떤 마음이라니……. 당연히 사랑하니까 사귀는 거 아냐?”
온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괴로운 낯빛이었기에 다애는 가슴이 아팠다.
어째서 온유가 이런 표정을 짓는 걸까?
제대로 고민을 해볼 틈도 주지 않고 온유는 다애를 꽉 끌어안았다.
온유의 향기가 질식할 정도로 진하게 느껴졌다.
심장이, 그리고 시간이 멈췄다.
호흡하는 것을 잊을 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다애는 잠시 움직이지 못하고 온유의 품에 안겨 있었다.
어째서 온유가 자신을 끌어안은 건지 생각할 정신조차 없었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온유의 품이 너무나 따뜻해서, 그리고 너무나 기뻐서 다애는 그대로 안겨
온유를 느꼈다.
온유의 숨결이 다애의 귓가에 닿았다.
숨결이 닿았을 뿐인데도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하아……. 다애야. 다애야.”
간절한 온유의 음성.
사막에서 물을 찾아 헤매는 길 잃은 방랑자보다 더욱 갈급한 음성이었다.
멈췄던 시간이 흐르자 멈췄던 심장 역시 뛰기 시작했다.
폭발할 듯한 심장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다애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힘을 빼고 온유의 품에 안겨 있었는데,
불현듯 지애의 얼굴이 떠올랐다.
언제나 다애의 편이 되어주는 지애.
그러자 갑자기 이성이 돌아왔다.
다애는 온유를 밀치고 벌떡 일어났다.
온유가 다애를 올려다봤다.
온유의 젖은 눈동자를 보는 순간 다시 이성이 마비될 것 같았지만
주먹을 꽉 쥐며 가까스로 이성을 유지했다.
심장이 쿵, 쿵, 쿵 나직하게 울렸다.
손가락 끝까지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네가…….”
다애가 쥐어짜내듯 말했다.
“네가……. 네가 내 좋은 친구 놈인 건 알겠거든? 그런데 말이야, 네놈이 이런 식으로 날
끌어안으면 안 되지. 아무리 그래도 난 기집애고 넌 사내새끼잖아. 안 그래?
우리가 이러는 모습을 지애가 보면 어떨 것 같냐? 앙?“
온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글픈 눈으로 다애를 응시했을 뿐이다.
다애는 마른침을 꿀꺽꿀꺽 삼켰다.
폐가 부푼 느낌이 들었다.
어째서 온유는 저런 눈빛을 하고 있는 걸까?
다애는 자꾸만 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지애한테…….”
온통 일그러진 얼굴로 온유를 노려보며 간신히 단어들을 쥐어짜냈다.
“지애한테 상처주지 마. 이렇게 아무 여자나 끌어안아서 지애를 괴롭게 만들지 말라고! 알겠어?
걔는 내 소중한 동생이야. 아무리 너라도 내 동생을 울리면 가만 안 둬. 알겠냐고, 이온유!“
온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빌어먹을!”
콰앙-
다애의 발이 온유의 바로 옆자리를 세게 걷어찼다.
온유가 앉아있던 벤치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콰앙- 콰앙-
몇 번이나 더 걷어찬 다애가 온유를 노려봤다.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네가 이런 식으로 아무 기집애나 끌어안는 놈인 줄은 몰랐다. 꼴도 보기 싫어, 이 개쉐야!”
계속 온유의 슬픈 눈을 응시했다가는 그 검고 검은 눈동자 안으로 빨려 들어가
다시는 헤어 나오지 못할 거라는 예감에 다애는 휙 돌아섰다.
돌아서서 온유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온유의 시선은 아프도록 등에 닿았다.
온유의 눈길이 다애의 등을 쓰다듬고 찔러댔다.
다애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온유를 털어버리려는 듯 몸을 한 번 흔들고는 빠르게 걸어갔다.
다애가 시야 밖으로 벗어난지 한참이 흐른 후에도 온유는 그곳을 응시했다.
마치 아직도 다애가 보인다는 듯.
다애의 향기마저 사라질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온유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의 허무한 미소였다.
온유는 눈을 감고 벤치에 등을 기댔다.
차갑고 딱딱한 감촉이 등에 느껴졌다.
“좋은 친구라고? 그래?”
온유의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목소리는 비릿했다.
흡사 피비린내와 같았다.
“아무 기집애라고? 그래?”
온유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그래…….”
도망치듯 온유를 벗어났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걷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기숙사 방이었다.
다애는 무너지듯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평소에는 아늑했던 방이 다애를 밀어내는 듯 느껴졌다.
다애는 침대 이불을 꽉 쥐고 앉아 이를 악물었다.
아직까지도 떨림이 멎지 않았다.
온몸에 온유의 체온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온유의 체취가, 그리고 온유의 느낌이 다애에게서 지워지지 않았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처럼 다애의 몸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여전히 온유의 품에 안긴 듯한 느낌이었다.
다애는 눈을 감았다.
‘지애야, 미안하다.’
소중한 동생의 남자친구.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애는 온유가 좋았다.
‘오늘 밤만……. 이 몇 시간 동안만 온유를 느낄게. 미안하다.’
가원은 침대에 앉아 미친 듯이 트라이앵글을 쳤다.
뎅뎅뎅-
트라이앵글이 공기 중에 파동을 만들어냈다.
아무리 쳐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친한 친구가 좋아해온 여자.
태환은 방해하지 않겠다며 가원을 달랬다.
자신이 치졸함이 부끄러웠다.
다애를 손에 넣은 것도 아니면서 마치 제 것인 양 행동했다.
그런데도 태환은 비웃지 않았다.
지금껏 자신이 이토록 무능력하고 옹졸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빌어먹을! 이 빌어먹을 놈의 최가원. 진짜 죽어버려라, 너 같은 건.”
가원은 기숙사 앞에서 다애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다애가 일하는 걸 도와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애는 이제 알바에 많이 익숙해져서 딱히 도와줘야 할 필요는 없었지만
도와준다는 명목 하에 같이 있고 싶었다.
기다린지 20분쯤 지났을 때, 여자 기숙사에서 나오는 다애가 보였다.
“최가원, 너 왜 여기에 있냐?”
가원을 발견한 다애가 물었다.
“그냥……. 오늘 집에 가서 가져와야 할 게 있어서 나왔는데 네가 나오는 게 보이길래.”
“그래? 그럼 같이 가면 되겠네. 어차피 넌 약해서 혼자 다니면 안 되잖아. 내가 지켜줄게.”
“응, 그래.”
가원이 속으로 웃었다.
다애가 지켜준다는 말을 할 때마다 가원은 무척 기뻤다.
어제의 처참한 기분 따위는 조금도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요새 날씨 많이 따뜻해졌다. 밤에 좀 쌀쌀하기는 해도……. 낮에 너무 더워. 그치?”
“그러게.”
“곧 중간고사인데……. 오전 수업 공부는 했냐?”
“그럭저럭.”
“그러냐? 난 공부랑은 취미가 없어서.”
“그러다 잘린다.”
“걱정 마, 인마. 잘리더라도 너 한 명 책임질 능력은 있으니까.”
“…….”
가원은 잠깐 다애를 쳐다봤다.
다애는 평소처럼 장난기 있는 표정으로 걷는 중이었다.
사실은 묻고 싶었다.
온유가 왜 그렇게 좋은 건지, 왜 항상 온유만을 쳐다보는 건지, 대체 온유가 다애에게 해준 것이 무엇인지.
그런 것들을 알고 싶었다.
다애가 온유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면, 자기도 그대로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그걸 묻는 순간, 다애를 좋아하는 자신의 마음이 변질될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바쁜 시간이 지나가고 다애와 가원은 한숨 돌리기 위해 카운터 뒤의 의자에 앉았다.
다애가 가방에서 연습장과 연필을 꺼냈다.
가원이 준 4B연필이었다.
그걸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이유는 가원이 4B연필 구석에 작은 표시를 해뒀기 때문이다.
자신이 준 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다애를 볼 때마다 흐뭇함을 느끼기 위해서.
이번에도 역시 가원은 흐뭇했다.
“연필 깎아야 하는데……. 귀찮아서 깎지 않고 네가 준 연필들 다 돌려서 썼거든.
그랬더니 멀쩡한 게 이거 하나 남았네.“
“연필들을 가져왔냐?”
“응, 가지고 다니기는 하는데…….”
“이리줘 봐. 내가 깎아줄게.”
“너 4B연필 깎을 줄도 아냐?”
“우리 친척 형이 깎을 때 도와줬었거든.”
사실은 거짓말이다.
다애에게 미술 도구를 선물해주면서 처음으로 깎아봤다.
처음에는 잘 깎이지 않아서 네 개의 연필을 몽당연필로 만든 후에야 능숙해졌다.
이제는 전문가 이상으로 잘 깎을 자신이 있었다.
“능력도 좋다, 너는.”
다애가 필통을 건네주며 씩 웃었다.
그 웃음을 보는 게 좋아서 얼마나 노력하는지 다애는 모르리라.
가원이 4B연필을 깎는 동안, 다애는 옆에서 그림을 그렸다.
종이 위를 달리는 연필의 사각거리는 소리와 연습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열심히 그리네.”
“몰랐는데 그림을 그린다는 거 정말 매력적인 거더라.
잘 그리고 못 그리고를 떠나서, 하얀 종이 위에 나의 느낌과 나의 생각이 그대로 담기는 거잖아.
그건 온몸이 전율할 정도로 짜릿한 일이야.“
“그러냐.”
“응, 정말 대단해. 이런 느낌을 몰랐다니…….”
가원은 다애의 열정이 좋았다.
다애는 무엇을 하던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노력했다.
그림뿐만이 아니었다.
전에 농구를 할 때의 다애의 모습이 그토록 아름다워 보였던 이유는,
다애가 자신의 모든 신경을 그것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다애가 싸움을 할 때, 보는 사람의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신명나는 이유는
오로지 그것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중간고사 작품은 생각했냐?”
다애의 질문에 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애가 말했다.
“인마. 고개만 끄덕이지 말고 대답을 해, 대답을. 사내녀석이 멀쩡한 입을 놔두고 왜 고개만 끄덕여?
왜 제대로 말을 못해? 나 중간고사 작품 생각했다, 멋진 작품이 될 거다, 말하면 되잖아!“
“그렇게까지 흥분할 일이냐?”
“부러워서 질투하는 중이다.”
“뭐가 부러운데?”
“중간고사 작품 생각했다면서? 난 아직 뭘 내야할지 생각을 못했거든.
그래서 너처럼 벌써부터 작품 구상을 끝낸 놈이 부럽고도 부럽다. 어쩐지 괴롭혀주고 싶어져.“
“그럼 좀 더 적극적으로 괴롭혀 봐.”
“내가 적극적으로 괴롭히면 넌 살아남기 힘들 텐데.”
다애가 키득거리며 장난스레 말했다.
“아아, 정말 뭘 그려야 할지 모르겠다. 가슴을 후려치는 무언가가 없어.”
“후려쳐야 되냐?”
“응. 후려치지 않으면 안 돼.”
“후려쳐줄까?”
“하하하하.”
다애가 손을 저었다.
“네가 때리는 걸로는 아프지도 않아. 약해빠진 녀석이…….”
“모르지, 혹시 맞으면 아플지도.”
“아니, 아니. 절대로 그럴 일은 없지. 이 김다애님을 무시하지 않는 게 좋아.”
“자, 다 깎았다.”
가원이 다애에게 필통을 건네줬다.
적당한 길이로 잘 깎인 4B연필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칭찬을 기대하는 듯한 가원의 눈빛에 다애가 손을 뻗어 가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그래. 잘 깎았다. 너의 실력은 세계 최고야. 앞으로도 내 연필은 네가 깎아줘.”
“돌아오는 것도 없이 노동력을 갈취하는 거냐?”
‘머리 쓰다듬어주는 걸로도 충분해.’라고 생각하며 가원이 투덜댔다.
“흐음……. 그럴 수는 없지. 난 악덕 고용주는 아니거든. 너에게 이걸 주지.”
다애가 연습장을 한 장 부욱 찢어서 가원에게 내밀었다.
연습장에는 가원의 옆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연필을 깎는데 열중한 가원의 모습.
가원은 거울로 볼 때보다 훨씬 더 멋있다고 생각했다.
“뭐냐, 이게. 이런 대충 그린 그림 따위를 주면서 늘 연필을 깎아달라고?
뭐, 하는 수 없지. 난 관대한 남자니까 연필은 내가 깎아주지.
그런데 이게 뭐냐? 내가 이따위로 생겼냐? 코는 왜 이래? 내 코는 이렇게 낮지 않아.
눈도 너무 작고……. 여러모로 넌 미숙해. 좀 더 잘 그려봐라.“
가원은 기숙사에 돌아갈 때까지 그림을 가지고 투덜댔다.
하지만 다애가 먼저 기숙사로 들어간 후에 후다닥 밖으로 달려 나가 가장 좋은 액자를 구입했다.
그리고 액자 안에 다애가 그려준 그림을 끼워놓고 자신의 방에서 가장 잘 보이는 자리,
책상 바로 앞에 액자를 걸어 놨다.
침대에 앉아 흐뭇하게 그림을 보며 가원은 중얼거렸다.
“아아, 정말 잘 그렸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미술실의 불이 켜져 있었다.
미술실 가장자리에서는 혜선이 혼자 남아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던 혜선은 잠시 붓을 멈추고 시계를 확인했다.
한 시간쯤 후면 다애가 알바를 끝내고 기숙사로 돌아올 시간이다.
혜선은 자기가 그린 그림을 천천히 살펴봤다.
아직 밑그림에 간단한 색을 입혔을 뿐이지만 혜선의 눈에는 최고로 보였다.
이번 중간고사에서 1등을 할 자신이 있었다.
“아니, 1등이 아니지. 2등일 거야.”
혜선이 중얼거렸다.
혜선은 다애가 가진 재능에 대해 뼛속 깊이 실감했다.
세호가 어째서 다애를 그토록 아끼는지 이해가 될만큼 다애의 실력은 대단했다.
자신이 선생의 입장이었더라도 다애 같은 학생에게 더 관심을 가졌으리라.
수업 중에 다애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면 혜선마저도 다애의 붓 끝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붓은 마치 살아있는 듯 보였다.
다애는 주위의 모든 것을, 세상을 붓 하나에 끌어 모았다.
세상에 펼쳐진 생명과 힘이 모조리 다애의 가느다란 붓 끝에 실렸다.
혜선은 어릴 적부터 그림을 그려왔지만 다애처럼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본 적은 없었다.
다애는 천재였다.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다애를 따라잡기는 힘들 것이다.
“그래도 뭐, 이 정도면 어디야.”
혜선은 더 열심히 연습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자신이 천재는 아니지만 노력을 하면 어느 정도 천재에 가까워질 수는 있지 않을까?
다시 붓을 드는데 드르륵- 미술실 문이 열렸다.
혜선은 간이 튀어나올 만큼 놀랐다.
이 시간에 미술실에 들어올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휙 돌아봤더니 지애가 서 있었다.
“어머, 혜선아. 아직도 그림 그리고 있었어?”
“응.”
지애는 다애의 동생이지만, 혜선은 지애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딱딱하게 대답했다.
지애가 웃으며 혜선의 옆으로 다가왔다.
“중간고사에 낼 작품 그리는 거야?”
“응. 넌 다 그렸어?”
“응, 다 그렸지. 중학교 때부터 꼭 그리고 싶은 그림이 있었거든.”
“그래.”
“그림은 잘 그려져?”
“그냥 그렇지, 뭐.”
“네가 요새 우리 언니랑 많이 친하게 지내고 그래서 참 고마워.”
“고마울 거 없어. 다애는 내가 아니었어도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을 테니까.
아니, 내가 없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차갑게 말하지 마.”
지애가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그림 참 잘 그렸다.”
“그래?”
“응, 정말 잘 그렸어. 넌 얼굴도 예쁘고 그림도 잘 그리고 키도 크고……. 정말 부러워.
나도 너처럼 키가 컸으면 좋겠어.“
“좋을 것도 없어. 그리고 너도 충분히 예쁘잖아?”
“헤헤. 너한테 칭찬 들으니까 되게 기분 좋네. 난 네가 우리 학교에서 가장 예쁘다고 생각했거든.”
“그래?”
혜선은 어깨를 으쓱했다.
얼굴의 생김새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사실, 이 예쁘장한 얼굴을 망가뜨리고 싶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기숙사에서 혼자 있을 때는 뭐해?”
“고양이랑 놀아.”
“고양이? 너 고양이 키워?”
지애의 질문에 혜선은 아차 싶었다.
백재고 기숙사에서 애완동물을 기르는 건 허용되어 있었기에 누가 알아도 상관없었지만
지애에게 자신의 생활에 대해 떠벌리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지애가 빨리 가버렸으면 하는 생각에 대충 대답을 하다가 실수를 했다.
“응, 그냥…….”
“와아! 나 고양이 굉장히 좋아해!”
지애가 활짝 웃으며 환호했다.
“보들보들하고 애교도 많잖아. 정말 좋아. 어떤 종류야? 무슨 색이야? 애교 많아? 뚱뚱해?”
지애가 신나서 질문을 하자 혜선도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애완동물을 키우는 주인들 중에 자기 애완동물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좋아한다고 하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혜선도 마찬가지였기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태도로 지애의 질문에 대답했다.
한동안 두 사람은 고양이의 사랑스러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아, 진짜 좋겠다. 나도 고양이 한 마리 키우고 싶어. 강아지도 괜찮고…….
키우면 기숙사에서 잘 때 안 무섭지?“
“응, 안 무서워. 내 베개 옆에서 같이 자니까.”
“창문 열어놓으면 도망치지 않아?”
“걔는 게을러서 안 도망쳐. 집이 가장 편하다는 걸 알거든.”
“똑똑하네. 나도 똑똑한 애 키워보고 싶어.”
혜선이 일어났다.
“어? 어디가?”
“물통 좀 비우려고. 붓도 씻어야 하고…….”
“같이 가줄까? 혼자 가면 무섭지?”
“아니, 괜찮아. 먼저 들어가 봐. 씻을 게 많아서 오래 걸릴 거야.”
“그래, 알겠어. 그럼 이따 조심해서 들어가. 무서우면 전화해.”
지애와 혜선은 미술실 앞에서 헤어졌다.
몇 걸음 걸어가던 지애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혜선이 복도 끝의 화장실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지애는 핸드폰을 꺼냈다.
“다애 언니? 어디야? 아, 그래? 그럼 얼른 미술실로 와봐. 급하게 할 얘기가 있어.”
하나님을 빽으로 세상과 맞짱 뜬다...by백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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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소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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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장 스케치북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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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5.02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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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밌음 ㄷㄷ 우왕굳
뜨어 지애가무슨짓을할려고-_-
왠지 지애 믿음이 안가..
지애가 제일 무섭습니다ㅠ
지애가 뭔일을 또 벌리려는듯 하네요 ㅠ0ㅠ
저런애가 젤루 무셔
지애왠지 짜증나는애....
지애ㄷㄷㄷ
지애야...나대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