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正月)
김 난 석
정월(正月)을 맞아 나는 만 한 살이 된다.
세상에 태어난 지는 이미 오래지만
큰 것의 아기, 새 생명이 태어남에 할아비가 되었으니
할아버지 나이로 그리 말해보는 것이다.
자연의 이치라는 게 하나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새 생명을 탄생시킬 수 없는 법인데
이처럼 두 세대의 새 생명을 보고도 목숨 부지하고 있으니
그건 한없는 신의 은총에 다름 아니다.
아기를 옆에 뉘고 나도 함께 나란히 누워 자는 시늉을 한다.
양미간을 바르르 떨고 입술을 실룩이더니
이젠 두 손을 스르르 놓으며 꿈나라에 들었나 보다..
새근새근.....
새근새근.....
저 숨소리, 저 여리고도 평화스런 숨소리를 보거나 듣고
맨 처음 누가 “새근새근”이라 했을까?
새근거린다는 건 분이 치밀거나 배가 불러
숨을 가쁘게 쉴 때 하는 말이다.
새근덕거린다는 건 새근거리고 할딱거릴 때 하는 말이요
새근발딱거린다는 건 숨이 차서
잇따라 새근거리며 할딱거릴 때 쓰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새근새근이란
아기가 곤히 잠들어 조용히 숨을 쉴 때 하는 말이지만
어른이 되어 심신이 어지럽혀진 때에도 쓰이고 있으니
아기와 나는 동상이몽(同床異夢)을 하고 있는 셈이겠다.
새근새근.....
색은색은.....
불가(佛家)에선 색(色)을 오온(五蘊) 중의 하나로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라 한다.
색계(色界)는 삼계(三界) 중 하나로서
욕계처럼 탐욕은 없으나 아직 색법을 벗어나지 못한 세계요
무색계는 모든 색신 육체 물질의 속박을 벗어나
심신(心神)만이 존재하는 정신적인 사유의 세계로,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食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사천(四天)이 있다 한다.
새근새근.....
색은색은.....
아기는 잠들고 나는 옆에 누워 자는 시늉을 할 뿐이니
아기는 새근새근 한다 하고
나는 색은? 색은? 하며 중얼거린다고나 할까?
비상비비상처는 삼계제천(三界諸天)의 절정에 있는 하늘로,
극히 적은 마음의 상념이 있을 뿐인
무상에 가까운 선정의 경지에 있는 세계를 말한다 한다.
새근새근.....
색은색은.....
아기가 잠들자 나도 따라 잠에 들어
극히 적은 마음의 상념 상태에 들고자 하나
눈꺼풀에 가려진 눈동자는 수면 위의 나뭇잎처럼
한시도 쉴 틈 없이 흔들릴 뿐이니
또 색은? 색은? 하고 머리를 조아리기 시작하게 된다.
색은색은.....
색은색은.....
눈은 눈이기에 보려 들고 귀는 귀이기에 들으려 들며
코는 코이기에 맡으려 들고
혀는 혀이기에 한없이 핥으려 든다.
욕망의 총체인 몸은 이런 의지의 표상이므로
거기에 비극의 원천이 있다는
어느 철인의 말이 스치고 지나간다.(쇼펜하우어)
색은색은.....
색은색은.....
색계는 아직 색법을 벗어나지 못한 경계이니
눈, 귀, 코, 혀, 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그것은 색이나 형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 현상으로서의 세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뜻한다는 것이니
몸은 비록 내 몸일망정 다독이고
또 다독여야 함도 깨우치게 된다.
끊어지면 추락할 연(緣) 줄을 잡고
용쓰다 용쓰다 배도 등도 말라붙은
핏기 없는 하얀 삭신아
한 발도 떼지 못한 채
묵은 인연 끊어내려는 처연한 몸짓
탯줄은 싸늘한 쇠심줄이어서 더욱 슬프구나
목이 빠져라 얼굴 쳐들고
허공을 헤집는 한없는 갈증
갈개발 버둥거리며 애태울 뿐이지만
닿으면 쏟뜨리고 닿으면 쏟뜨리고
속은 다 뒤집어내어
차라리 대숲 속 새벽바람이듯 서늘타
날아라 날아라, 한 번 더 날아라
그래도 널 바라보매
후련한 가슴이어서 좋아라. / 졸시 ‘연' 전문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랄 때
겨울철이 되면 얼음을 지치는 외에
방패연 가오리연 등을 만들어 들판에 나가 띄우다가
정월 보름이 되면 연의 등판에
'家口某生身厄消滅
(집안 아무개 무슨 생의 액운을 날려 보내소서)’
라 써넣고
해질 무렵이면 연 줄을 끊어 멀리 날려 보내곤 했다.
새근새근.....
색은? 색은?.....
이제 한 돌인 아기가 색을 알 수 없듯이
덩달아 한 돌이 된 난들 색을 안다 할 수 없으니
이놈 잠에서 깨어나면 한강둔치에 데리고 나가
함께 연놀이 구경이나 해야겠다.(정해년 대보름에)
계묘년 정월을 맞아 나는 만 한 살이 된다.
인생은 80부터라니 그리 말해보는 것이다.
새해를 시작하는 말로 연초(年初)라 하면
서양에서 유래된 양력의 새해 첫 무렵을 생각하게 된다.
허나 정초(正初)라 할 땐 우리네 것을 생각하게 된다.
세월의 한 마디를 끊어 이름을 달리 붙일 양이면
자연의 순환원리에서 본 따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다.
그렇다면 서양냄새가 나는 연초 보다야
정초가 더 자연스럽지 아니한가.
양력은 서양문화의 군더더기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7월과 8월은 각각 율리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일이 들어있는 달이라서 31일로 정했다는 것이고
로마어로 7,8,9,10 이라는
September, October, November, December 를
9월, 10월, 11월, 12월로 정했다는 것이니
그 다음에 오는 1월은 의미 없는 달이면서
의미 없는 첫날이 들게 마련이다.
기독교의 부활절조차
춘분 다음의 보름 뒤의 첫 일요일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정했다니
양력은 서양문화의 독자적인 것도 아니려니와
동양의 자연 순환원리를 일부 빌려 쓰고 있는 형편이다.
이와 달리 음력은 해와 달의 운행주기에 따라
달과 날을 정하고 있으니
자연의 순환원리에 얼마나 순응한 것이랴.
그래서 정오의 그림자가 가장 긴 날이 동지요
가장 짧은 날이 하지이며
동지 뒤의 가장 큰 달이 떠오르는
정월보름이 들어있는 달이 정월이요
그 첫 시작일이 정초인 설날인 것이다.
오늘은 그 설날도 보름이 지난 계묘년 정월대보름이다.
어린것들과 함께 보름맞이 해보려 했지만
뿔뿔이 흩어져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젠 새근거리던 소리도 식식거리던 소리도 없이
사위가 조용하기만 하다.
그러면 또 정적(靜寂)을 배겨내지 못해
소음 속으로 찾아들게 되느니
그래서 가까운 절집인 봉은사에 찾아들었다.
부처님을 배알 한다는 건 헛말이고
봉오리 벙그는 홍매화를 맞으러 간 것이니
혼나도 한참 혼나기나 할 것 같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앞으론 무얼 보내고 떨쳐내야 할까?
새근거리던 것들도 다 자라
제멋대로 식식거리며 나댈 뿐이니
종잡을 수 없이 맴도는 괜한 노여움은 무엇이더냐?
떨쳐 버리자, 떨쳐 버리자.
그저 작아지는 몸에 충실한 삶이어라.
달 뜬다
달뜨지 마라
달이 이운다
달집 탄다
환호하지 마라
다비(茶毘)다
달아달아
밝은 달아
해님 빛 빚내 쓰는 달아./졸시 ‘정월 대보름’ 전문
2023. 2. 6. 계묘년 정월대보름을 지나며
삭제된 댓글 입니다.
고맙습니다.
습관이란 제하의 글도 잘 읽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생각과 느낌,보는 눈이 남다른 것 같아요.
생명이라는 것,
참 신비입니다.
그림이지만
차한잔 드리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이거 뇌물 아니지요?
호감의 뜻이겠지요.
하트가 이뻐서 그냥 감상이나 해야겠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