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네이버 카페 삼국지 도원결의 프리님이 번역하셔서 작성하신 글을 가져왔습니다.
신
진수(陳壽) 등이 상주하여 말씀드립니다. 신이 이전에 저작랑으로 있을 때 시중 영중서감 제북후 순욱,
중서령 관내후 화교가 상주하여 저로 하여금 예전 촉나라 승상 제갈량의 옛일을 정리하도록 했습니다.
제갈량은 위태로운 나라를 보좌하고 요충지에 의지해 굴복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그의 어록이 보존되어 유실되지 않았으니, 이는 실로 대진(大晉)의 광명이고 지극한 은덕으로 자고이래로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중복되는 것은 제외시키고 서로 유사한 내용끼리 분류하여 모두 24편으로 만들었는데 각
편의 이름은 앞에 적은 것과 같습니다.
제갈량은
어려서 빼어난 재주와 영웅의 그릇이었고 키가 8척에 용모가 매우 뛰어나 그 당시 사람들이 뛰어난
인물로 여겼습니다. 한말, 전란을 만나 숙부 제갈현을 따라
난리를 피해 형주로 갔는데 직접 농사지으며 문달(聞達: 명성이 알려져 등용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때 좌장군 유비가 제갈량이 특별한 재능을 갖춘 인물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초려를
세 번 방문했습니다. 제갈량은 유비의 영우다운 자태와 기개에 깊이 감동을 받아 흉금을 열고 성심으로
서로 두터운 정을 맺게 되었습니다.
위 무제(조조)가 형주를 남정할 때
유종이 주를 바치고 투항했으므로 유비는 세력을 잃고 병력이 적어 송곳 하나 꽂을 땅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제갈량은 그때 27세였는데 기책을 세워 직접 손권에게 사자로 가서 오에게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손권은 이전부터 유비를 존경했었고 또 제갈량의 특별한 재능과 고아함을 보고는 그를 매우
존중하여 병사 3만 명을 파견하여 유비를 도왔습니다.
유비는 무제와 교전하여 위나라 군을 대파하고 유리한 형세를 타고 승리하여 강남을 모두 평정했습니다.
후에 유비는 또 서쪽으로 익주를 점령했습니다. 익주가 평정되자 제갈량을 군사장군으로 임명했고 유비가 황제를 칭할 때는 제갈량을 승상, 녹상서사로 임명했습니다. 유비가 죽고 지위를 이은 유선이 어리고
유약했으므로 크고 작은 모든 정무를 제갈량이 전담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밖으로는 동오와 동맹을 맺고
안으로는 남월을 평정하고 법을 세우고 제도를 시행했으며 군사를 정비하고 기계와 기술을 연구하고 가르침을 엄명하게 폈고 상벌이 공정하여 악은
반드시 징계하고 선은 반드시 표창하고 간사한 관원을 용납하지 않으니 사람들은 스스로 힘쓰게 되니 길에 떨어진 물건이 있어도 줍지 않고 강하다고
해서 약자를 괴롭히지 않으니 사회기풍이 숙연해졌습니다.
당시에
제갈량이 품은 뜻은, 나아가서는 용이
질주하고(龍驤) 호랑이가 노려보는 것(虎視)처럼 사해를 통일하는 것이었고,
물러나서는 변경을 타 넘어 천하를 뒤흔드는 것이었습니다. 또 자신이 죽은 후에는 중원을
도모하고 위나라에 대항할 이가 없으리라 생각했기에 용병을 그치지않고 여러 번 무력을 과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제갈량은 군을 통솔하는데는(治戎: 군대통솔 혹은 전쟁준비)
뛰어났으나
기묘한 꾀(奇謀)는 부족하고 장수로서의 지략보다는 백성을
다스리는데 더 뛰어났습니다. 그와 대적한 사람 중엔 걸출한 인물도 있고 병력도 모자랐고 공격과 수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여러해 동안 계속 출병했으나 이기지 못했습니다.
예전에 소하는
한신을 추천했고 관중은 왕자
성보를 천거했는데 모두 자신을 헤아려 볼 때 모든 장점을 다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갈량은
정치에 능숙하여 관중과 소하에 필적하지만 당시의 장수 중에 성보나 한신 같은 이가 없었기 때문에 공업이 늦어지고 대의를 이룰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천명이 돌아가는 바가 정해져 있으므로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 다툴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청룡 2년 (234), 제갈량은 병력을 이끌고 무공(武功)으로 출전해 병사들을 나누어 둔전을 하도록 하여 오랫동안
주둔할 기지를 만들었습니다. 그 해 가을, 병으로 죽었고
일반백성들이 그를 말로써 그를 기렸는데, 지금까지 양주와 익주의 백성들이 제갈량에 대해서 말을 하고
아직도 귀에 생생하니 비록 [시경-감당 편]에서 소백을 노래하고 정나라 사람들이 자산(공손교, 형정을 주조해 중국최초로 성문법을 반포한 춘추시대 정나라 정치가)을
노래했다고 하지만 그것들은 먼 과거의 비유에 불과합니다. 맹가(맹자)가 말하기를,
“편안케 해줄 목적으로 사람을 부리면 비록 수고로워도 원망하지 않고 사는 길을 위해 죽이면 죽더라도 죽이는 사람에게 화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는 옳은 말입니다!
의논하는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은 제갈량의 문장이 아름답지 않고 꼼꼼함이 지나치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어리석은 신이 생각하기에 고요(요 임금 때
명신)는 위대한 현인이고 주공은 성인인데 [상서](=서경)을
살펴보면 고요의 계책은 간결하고 품위가 있는데 주공의 말씀은 번잡하고 상세합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고요는 순,우와 함께 담소한 것이고 주공은
신하들과 맹세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제갈량의 경우는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말을 한 것이므로 그 문장이
심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과 유언은 모두 경사종물(經事綜物)하고 공정하고 성실한 마음이 그의 문장속에 나타나니 그의
뜻을 알기에 충분하며 지금에도 유익한 점이 있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옛 성인을 본받으려 애쓰시고 호탕하여 꺼리시는 바가 없기에 비록 적국의
비방하는 말이 극히 방자하여도 바꾸거나 감추지 않으셨고 이로써 대통지도(大通之道)를 밝히셨습니다. 삼가 필사하여 저작국에 주었습니다. 신 진수는 실로 두렵고 불안하여 폐하께 머리를 조아리고 조아립니다.
죽을 죄를 저질렀습니다. 태시(泰始) 10년(274) 2월
1일 계사(癸巳), 평양후 상(相) 신 진수가 상주합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퍼온 글입니다.
삼국지 관련된 글을 찾다보니 이런 글을 발견하게 되었네요. 저도 진수가 제갈량에 관한 상소문을 사마염에게 올렸다고만 들었지 그 내용은 실제 무엇인지 몰랐거든요. 근데 이 글을 보고나서 제갈량이라는 사람에 대해 다시금 감탄하게된거 같네요. 진수는 삼국지 정사를 편찬하면서 위나라 정통론을 앞세워 촉과 오에 대해 박한 평가를 내린 경우가 많은데 특히 촉에 대해서는 진수 개인적으로도 나쁜 감정이 많았을겁니다. 진수의 아버지(항간에는 진식이 진수의 아버지라는 말이 있지만 진식이 죽은지 3년후에 진수가 태어나며 진식과 진수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입니다.)가 가정전투에 패한 마속의 목을 벨때 죄가 연루되어 머리가 깍이는 곤형을 당하며 환관 황호에게 벼슬에서 좇겨나기도 했으니 말이죠.(그러기에 정사가 역사서로서의 가치가 좀 떨어진다는 말도 있습니다. 개인감정이 아무래도 들어갈수 밖에 없고 저렇게 상소문을 쓸 정도로 외부의 압박이 있는걸 보면요.)
그런데 이 글을 쓴 사람이 진수가 맞을까 싶을정도로 제갈량에 대해 좋은 평가를 넘어 찬양을 합니다. 진수가 정사 제갈량집을 쓰고 나서 적국 재상이었던 사람에게 이러한 평가를 내린게 얼마나 두려웠으면 사마염에게 이러한 상소를 올렸을까요. 물론 여기서 가장 논쟁이 되는 부분이 잘 알려져있는 기묘한 꾀가 부족하다는 평인데 그 평 또한 다른 능력에 비해서 조금 부족하다는 거지 군략에 대해 매우 모자르다고 하지 않습니다. 진수는 여기서 대적한 사람 중에 걸출한 인물(아무래도 진의 선제인 사마의를 얘기하는거겠죠. 아마 사마의의 능력을 드높이기 위해 이 말을 쓴거 같습니다.)도 있고 병력도 모자르고 공격과 수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기질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건 '제갈량의 능력이 부족한거보다는 당시 상황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라는거 같습니다. 뒤이어 제갈량이 정치에 비해 다소 군략이 떨어지기때문에 이를 보충할만한 한신이나 성보와 같은 사람이 촉에 없었기 때문에 대의를 이룰 수 없었고 그것 또한 촉에 처해진 환경(인재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거 또한 제갈량도 사람인지라 완전무결한 사람이 아니지만 촉이 대의를 이루지 못한게 제갈량만의 책임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겁니다. 이 부분에서 제갈량을 소하나 관중에 필적하는 정치가라는 표현을 보면 진수가 당대 최고의 정치가라고 평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솔직히 저도 연의는 많이 읽어봤지 정사는 읽어본적이 없어서 정사 기준으로서의 인물평에 대해 뭐라할 처지는 못됩니다. 하지만 인터넷으로나마 정사에 대해 조금씩 접하면서 연의와 이러한 내용들이 다른 부분이 있구나는 점을 많이 느낍니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이 제갈량에 대한 삼국지 정사의 일부분의 내용을 가지고서 '제갈량은 그냥 유능한 정치가, 연의와 같이 흔히 게임에서 말하는 지력100의 군략이 뛰어난 인재로 보긴 힘들다.'이라고 단정 짓는 사람이 있는거 같습니다.
제갈량이 가후처럼 뛰어난(제가 가후를 가장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 비유를 했습니다.ㅎ)모사보단 유능한 정치가. 하지만 그 앞에 수식어가 붙어야할 거 같습니다.
'다른 재능도 매우 뛰어난 다재다능한 정치가'
p.s 쓰고 다시 읽어보니 제가 표현하려는게 중구난방으로 쓰인거 같아 죄송합니다..ㅎ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첫댓글 걍 짱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 합니다.
와룡 봉추중 봉추가 한신역할을 했을듯 싶은데 너무 일찍 갔죠ㅠㅠ 서촉얻어주고 만약 살아서 관우랑 형주를 지켰다면 어땠을지. ..ㅜ
괜히 제갈량이 중국역사에 남는 최고의 명재상이 아니죠. 당대에 멸망시킨 나라의 재상을 찬양하다가 황제에게 죽을 죄를 지었다고 표문을 올릴정도면 그당시부터 보통이 아니었단게 아닐까 싶네요
연의의 신격화가 아니더라도 제갈공명은 충분히 어마어마한 인물입니다.
연의보다 어떤 면은 더 말이 안되죠 다섯배도 더 되는 국력을 가진 나라를 상대로 싸우면서 지속적으로 공세를 펼쳤고 그러면서도 국력이 쇠하기는 커녕 나라가 제일 풍요했으니 이게 말이 안됩니다
저 삼국지 도원 까페 가입하고 있는데 거기서도 왠만한 사람들 제갈량은 오히려 삼국지 게임상으로는 지력 100 정치력 100 둘다 줘야 한다고 할 정도죠...
진수는 원래가 촉한 사람으로 촉한에 특별히 나쁜 감정이 있지는 않습니다. 위를 정통으로 내세운건 당연하죠. 그 당시가 위를 계승한 진나라의 세상이었으니까요. 꼭 그런 정치적 이유를 떠나서 국력도 압도적이었구요. 진수가 편찬한 촉서는 분량이 적은데 촉한의 기록 수준이 위, 오에 비해 형편없이 떨어졌기 때문이죠. 위서와 오서 모두 편찬에 참고할만한 대본이 되는 기록들이 이미 상당히 있었던 반면 촉서는 거의 맨땅헤딩으로 편찬했습니다. 그나마 진수가 촉한 사람이니까 여기저기 자료를 긁어모아 어찌어찌 편찬한거지 만약 위나라 사람이 촉서를
편찬했음 지금보다도 훨씬 기록이 부실하고 질도 떨어졌을겁니다. 진수는 나름 성심껏 촉서를 정리했고 계한보신찬이란 다른 책까지 편입하여 기록의 부실함을 최소화하려 애썼죠. 특히 제갈량을 몹시 존경해 제갈량전 편찬에 심혈을 기울였구요. 다만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과는 사이가 나빠 사사롭게 폄하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허나 그 외에 부친이 받은 형벌이나 황호한테 쫓겨났단 이유로 촉한에 감정을 지녀 고의적으로 폄하한 부분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그럴수도 있겠네요. 전 단순히 인과적인 관계에서만 생각해서 감정이 들어갔을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제가 잘 몰라서 그런데 진수의 개인적인 감정이 별로 안들어갔다는 내용을 알 수 있을까요? 순수하게 궁금해서 여쭤봅니다.ㅎㅎ) 근데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럴일은 없겠지만) 촉이 통일하거나 제갈량이 위에 있었더라면 평가가 어떻게 달라졌을지도 궁금하네요. 물론 무의미한 역사적 가정이지만요. 진수가 얼마나 더 소름끼치는 칭찬을 했을지 모르겠네요. ㄷㄷㄷ
개인적인 감정이 들어갔다고 후대 사가들에개 비판받는 부분은 제갈첨 기사 뿐입니다. 나머지는 비교적 객관적으로 서술했고요. 촉서의 문제점은 편향이 아니라 양적 부실입니다. 기초자료가 부족해 입전되어야 할 인물들이 상당수 입전되지 못했죠. 근데 그건 진수의 잘못은 아니고 나름 진수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오히려 폄하한 건 오나라라고 볼 수 있는데 위나라 황제들은 황제칭호를, 촉나라 황제에겐 그나마 제후급 칭호를 써줬지만(선주전, 후주전) 오나라 황제들은 걍 손권전, 손량전... 이렇게 이름을 걍 갖다부쳤죠. 즉 위>촉>오 순으로 서열을
매긴거나 다름없죠. 진수의 삼국지가 기록의 부실함으로 비판도 받지만 기본적으로 관찬이 아닌 사찬인데다가 (국고 지원 없이 개인적으로 편찬함) 그 시대 여러 다른 사서들중에선 가장 나았기에 정사로 채택된거죠. 게다가 나중에 배송지가 엄청나게 주석을 달아준 덕분에 단점인 기록부실도 많이 보완되구요. 문장의 수준도 높아 사기, 한서, 후한서와 더불어 가장 널리 읽히고 인정받는 사서입니다. 삼국지 이후의 사서들은 노골적으로 정치적 색채를 띄며 승자의 기록임을 과시하는 바람에 사서로서의 가치와 수준이 떨어지는게 대다수입니다. 흔히들 진수
삼국지가 위나라를 정통으로 내세워 승자의 기록이니 뭐니 하면서 비난하지만 그 후대 여러 관찬사서들, 그리고 사서라고 부르기 민망한 남북조 시대 북조의 사서들에 비하면 새발의 피도 못됩니다.
연의,정사 할거 없이 제갈량은 그냥 먼치킨 최고의 인물입니다...괜히 당나라 때부터 무성왕 제사에 역대와 당대 최고의 명장와 제후를 같이 배향하는데 제갈량은 악의,손무,장량과 한번도 빠지지 않고 언급된 인물이죠...중국 역대 왕조들이 최고로 뽑는 인물인데 누구도 펌하할수 없죠...
연의의 제갈량은 신급으로 나오지만 정사의 제갈량은 우주대괴수 급입니다. 나라를 개인의 능력으로 커버친 괴물이에요.
진수는 촉에 악감이 없다고 봅니다. 상당히 객관적으로 기술했죠. 제갈양에 대해선 극찬을 했구요. 제걀양이 군사적으로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건 분명한 사실이죠.
근데 한편으로 만약 제갈량이 위나라를 이겼으면 그건 인간이 아니고 신 이라고 생각할수 밖에 없죠...국력 자체가 쉽게 대딩하고 초딩 싸움인데 어떻게 초딩이 대딩을 이길수 있을가요...오히려 지금와서 제갈량을 더 높이 평가하는 이유 중 하나가 초딩 수준의 국력가지고 대딩에게 버티고 어떻게든 이겨보려고 했던 그의 능력이죠..당시 촉나라는 설령 한신,백기,이목,악의,손무 같은 군사적으로 뛰어난 명장이 와도 어떻게 할수 없는 실정이죠...
제갈량이 지휘한 촉군은 끝내 사마의가 지휘한 위군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위나라 전체 병력을 상대해서 뜻을 이루지 못한게 아니라 처음엔 조진, 그리고 조진 이후 사마의 휘하의 병력만 상대해서도 이기지 못했죠. 위의 국력이 촉보다 월등했던건 분명하지만, 제갈량의 병력과 사마의 병력은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촉은 위만 공격하면 됐지만 위는 오와 촉과 북방 유목민족을 모두 신경써야 했기에 촉전선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지 못했죠. 연의는 제걀량을 띠우기 위해 사마의의 병력이 제갈양보다 훨씬 많았다고 기술하고 잇지만 실제로는 북벌과정에서 촉군과 위군의 규모는 때에 따라 촉이 많은 적도 있었고 위가 많은 적도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