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현재설법노사나
보신불報身佛
우리 중생들은 직접 보거나 들어야 믿습니다. 그래서 법신불을 깨닫지 못한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마음으로 나투신 부처님이 바로 보신불입니다. 보신불을 노사나불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보신을 인격화한 말입니다.
보신報身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진여당체眞如當體인 법신이 형태를 취하여 나타난 몸입니다. 보살이 원願을 세우고 무량한 시간을 두고 온갖 수행을 한 결과 무궁무진한 공덕과 과보로 부처님의 몸을 나타내기에 보신불報身佛이라 합니다. 보신이란 법신을 인因으로 삼아 그 과보[報]로 나타난 몸[身]이란 뜻으로 끝없는 복덕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법신불을 청정법신비로자나불이라 하여 ‘청정’이란 수식어가 붙듯 보신불은 원만보신노사나불圓滿報身盧舍那佛이라 합니다. 여기서 ‘원만’이란 오랜 세월에 걸쳐 수행한 결과 모든 것이 진리와 하나 되어 만덕萬德이 갖춰져 온갖 것을 성취했다는 뜻입니다. 지혜와 복덕을 다 갖추신 부처님이지요. 진여당체의 참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속성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보신불의 대표격으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있습니다. 법장비구가 48원願을 세우고 무량한 세월동안 수행하여 아미타불이 되었습니다. 시작도 끝도 없이 우주 그대로 영원불변한 진리인 비로자나불을 인으로 하여 법락法樂을 수용하도록 원을 세워 그 행의 과보로 나타난 부처님이시니 시작이 있는 것입니다. 처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처음에 원을 세우고 열심히 수행하여 부처가 되었으니 바로 법장비구가 아미타불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시작은 있되 끝은 없습니다. 앞의 종경 스님의 게송 중 ‘보화비진료망연’, 보신과 화신은 참이 아닌 인연으로 인함이라는 말이 설명됩니다.
비로자나불과 노사나불은 보통 범부중생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비로자나불은 형상도 없으며 생명력으로 온 우주에 가득하신 영원불멸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만 ‘아! 생명력으로 가득하신 부처님이 늘 나와 함께 계신다.’라고 믿고 느낄 뿐입니다. 그나마 노사나불은 중생계에 조금 더 가깝게 내려와 있긴 하지만 보통 사람 눈에는 안보이고 초지 이상의 보살이라야 볼 수 있습니다.
보살의 경지에서는 온 우주 법계에 존재하는 일체 모든 것을 자유자재로 볼 수 있다고 했는데 그러한 보살의 경지도 첫 단계인 초지初地, 혹은 일지一地부터 십지十地까지 단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보신인 노사나 부처님은 우리 중생을 위해서 지금도 법문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신수양이 부족한 사람은 노사나불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노사나불이 들려주는 법문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바로 초지 이상에 오른 보살에게 법락을 수용시키는 부처님의 몸이므로 수용신受用身이라고도 합니다. 즉, 법신을 인으로 삼아 법락을 수용하게 하는 원과 행의 과보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溪聲便是廣長舌 계성변시광장설
山色豈非淸淨身 산색기비청정신
夜來八萬四千偈 야래팔만사천게
他日如何擧似人 타일여하거사인
저 쏟아지는 계곡의 물소리가 부처님의 음성인데
산색이 어찌 부처님의 몸이 아니던가.
지난밤 팔만 사천 법문을 들었는데
이 소식을 누구에게 들어서 보일까.
소동파가 깨치고 난 뒤에 쓴 오도송悟道頌입니다. 시냇물소리가 늘 법문을 하고 저 산천 그대로가 바로 부처님 몸인 것을……. 그것을 볼 줄 알고, 들을 줄 아는 사람은 이미 초지보살의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산천과 그러한 자연의 법에서 나오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을 듣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수행력이 부족하여 초지 이상의 보살이 못 되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부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위하여 법문하고 계신다는 것이며, 그 법문하는 당체當體가 바로 노사나불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내가 눈을 바로 뜨고 보면 온갖 것들이 모두 나를 위해서 장엄되어지고, 온갖 것들이 모두 나를 위해서 법문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조성된 부처님은 모두 보신불
최근 우리절(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 대웅전 3층 법당에 특별히 부처님 두 분을 모셨습니다. 한 부처님은 개금改金한 석불石佛이고 또 다른 한 분은 1940년 무렵 일제 때 대추나무로 조성된 관세음보살님입니다.
이 귀한 부처님들을 고물상에서 모셔왔습니다. 눈을 뜨지 않고, 마음을 열지 않은 사람들은 부처님을 봐도 부처님으로 생각을 못 합니다. 아무리 몸을 장엄하고 직접 장광설을 해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눈이 밝은 사람만이 보고 들을 수 있지요.
지금도 노사나불께서 법문을 하시는 중인데 그 법문을 듣고 못 듣는 것은 자기의 책임이지 노사나불 책임이 아닙니다. 부지런히 수행 정진을 해서 초지 이상의 보살이 되어야 그 법락을 누릴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아는 사람만이 압니다.
원과 행의 과보로 나타난 부처님이 바로 노사나불, 보신불이라 했습니다. 조성된 부처님도 결국에는 보신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단 조성되었으므로 처음이 있는 것이지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마음으로 나투신 것뿐, 그 부처님의 영원불변의 성품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부처님이지요. 그래서 이 만들어진 부처님들, 조성된 부처님들도 다 보신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상 조성 자체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불국정토를 만들겠다는 의지이고 그를 위해 원력을 가지고 조성하였을 것이며 조성된 부처님을 통해 많은 중생이 이익을 얻고, 행복해지기를 발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원을 담아 부처님 한 분을 조성하기까지는 수년이 걸릴 수도, 또 한평생을 다 바치는 일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이 없으면 부처님을 조성할 수가 없습니다. 원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부처님이 노사나불이므로 조성된 부처님이 모두 보신불에 속한다는 말입니다.
비로자나불은 기운으로만 느낄 뿐 마치 허공과 같아 우리 같은 범부중생은 허공에 대고 예경하고 기도하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 원을 갖고 작용력으로 나투신 분이 바로 노사나불, 조성된 부처님이기에 지극정성 예경하고 기도하면 바로 청정법신과 그 원력의 힘과 에너지를 입게 되어 지극히 청정한 내 본 마음자리를 찾아가게 되며, 점점 노사나불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海上衆營內外家 해상중영내외가
往來相續機隨波 왕래상속기수파
마음의 바다 가운데서 안팎의 집안을 다스리는데
왔다갔다 상속하여 얼마나 많은 파도를 일으켰던가.
‘마음의 바다 가운데서 안팎의 집안을 다스린다.’라는 말은 중생계와 보살계의 세계를 왔다갔다한다, 아무 걸림 없이 드나든다는 말입니다. ‘왔다갔다 상속하여 얼마나 많은 파도를 일으켰던가.’ 바다를 보고 바다라고 해도 알지 못합니다. 파도가 일어야만이 그제야 바다인 줄 압니다. 바다에서 파도를 일으키는 것, 깨닫게 해주려고 중생심과 보살심을 종횡무진하는 묘한 작용력으로 계신 분이 바로 보신불입니다.
다시 말하면 만들어진 부처님, 조성된 부처님도 보신불입니다. 조성되었기에 시작은 있되 부처님 성품을 간직한 영원한 부처님으로 끝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부처님을 보고 우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눈이 어두운 사람입니다. 부처의 눈이라야 부처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이지요. 현재 설법하고 계시는 노사나불, 보신불을 바로 볼 줄 아는 안목을 넓히려면 원과 행을 세워야 하고 수행이 뒷받침되어야만 합니다.
부처님 세계로 들어가는 비밀번호
보살이 원을 세우고 무량한 시간을 두고 온갖 수행을 한 결과 진리와 하나가 되었다 했는데 우리가 수행한다는 것은 부처님 세계로 들어가려고 잊어버린 비밀번호를 알아내서 입력하는 것과 같습니다.
비밀번호를 잘 사용할 줄 알아야 현대인이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요즘은 아파트나 주택에 열쇠 대신 비밀번호를 많이 사용하고 있지요? 은행에서 돈을 찾을 때도 비밀번호를 사용합니다. 인터넷에서 카페 활동을 하기 위해서 로그인을 할 때도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사이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비밀번호를 알지 못하면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비밀번호 없이는 현대의 디지털 문화를 따라갈 수 없듯 부처님 세계에 들기 위해 이 비밀번호를 알아내어 잘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면 불자들이 부처님을 만나고 부처님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는 비밀번호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기도요, 참선할 때 드는 화두가 바로 그것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을 지극정성으로 부르면 그것이 비밀번호가 되어 부처님 세계에 들어가게 되고, 참선할 때 화두를 잘 챙겨서 화두를 깨치면 그것이 비밀번호가 되어 해탈의 세계,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마음을 좀 더 높은 곳에 두어야 합니다. 그것을 상향심上向心이라 합니다. 내 마음을 부처님의 세계에 두고 예경하면서, 부처님을 닮으려는 노력을 통해 무조건 그 비밀번호를 알아내야 합니다.
불평불만만 자꾸 늘어놓아서 될 일이 아닙니다. 자기 인격을 닦고 수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제일 방해되는 것이 불평불만입니다.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은지?
어느 절의 행자원에 행자가 새로 들어왔는데 원주 스님이 보기에 영 마뜩찮아 한 가지 제안을 하였습니다.
“행자님, 절대 말하지 말고 묵언하세요. 한 달에 한 번은 말할 기회를 주겠습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습니다.
“할 말이 있거든 하세요.”
“침대가 아니라서 자는 것이 불편합니다.”
행자는 자나깨나 ‘침대가 있었으면 좋을 텐데, 왜 절에 침대가 없지?’ 하는 생각뿐이었던 것입니다. 절에는 옛날부터 침대가 없습니다.
원주 스님이 듣고,
“아 그래요? 한 달 후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그리고 다시 묵언을 하도록 시켰습니다. 다시 한 달이 지났습니다.
“할 얘기가 있습니까?”
“스님, 왜 나물반찬만 주십니까?”
절에서는 나물만 먹는 게 당연한데도, 염불도 하고 울력도 해야 하는데 도끼나물(고기)도 안 먹고 하려니 힘들어 못 살겠다 이 말이겠지요. 그러자 이번에도 원주 스님은 대화를 간단히 끝냈습니다.
“아, 그래요?”
그리고 또 한 달이 지나갔습니다. 행자가 들어온 지 벌써 석 달째 되었습니다.
“행자님 뭐 다른 이야기 할 것이 있습니까? 있으면 해 보십시오.”
“침대도 없지, 도끼나물 달라 해도 안 주시지 저는 가렵니다.”
수행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사람이 절에 있는 내내 불평불만으로 꽉 차 있었던 것입니다. 예전부터 오는 사람 안 말리고 가는 사람 안 잡는 것이 절집입니다. 여전히 원주 스님의 대답은 간단명료했습니다.
“그러세요.”
‘나는 어떤가, 나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 신도님들도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참선하고 싶으면 참선하고, 기도하고 싶으면 기도하고, 봉사하고 싶으면 봉사하고, 문화를 즐기려면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이런 여건 좋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불평만하는 불평꾼은 아닌지 한 번쯤은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만약 앞에 말한 행자처럼 불평불만이 가득하다면 공부는 끝입니다.
언덕에 선 나무가 아래로 굽어져 있으면 그 나무는 언젠가는 아래로 넘어지고 맙니다. 언덕에 선 나무라도 해를 향해 잎들이 움직이면 스스로 양분을 만들어 힘 있는 나무로 성장하여 절대 아래로 넘어지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좀 힘들더라도 부처님을 향해서 버티고 있어야 합니다. 늘 위를 향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상향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절에 다니면서 절에 대한 불평불만, 스님에 대한 불평불만과 불신, 그런 부정적인 에너지를 갖고 있어서는 관세음보살을 천만번 외운다 하더라도 진실한 비밀번호를 얻어낼 수가 없습니다. 내가 화두를 잡고 있다 하더라도 그 선지식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진실한 비밀번호는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긍정적인 믿음과 순일純一한 마음으로 나아갈 때만이 비밀번호를 알 수 있으며, 적어도 여기서 말하는 초지 이상의 보살이 되어서 노사나불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