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잎의 여자1 / 오규원
- 언어는 추억에 걸려있는 18세기형 모자다.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잎의
맑음 그 한잎의 영혼
그 한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듯 보일 듯한 그 한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안가진 여자
눈물같은 여자 슬픔같은 여자
병신같은
여자 시집같은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한잎의 여자2 / 오규원
- 언어는 겨울날 서울 시가를 흔들며 가는 아내도 타지않는 전차다.
나는 사랑했네.
난장에서 삼천원 주고 바지를 사 입는 여자,
남대문 시장에서 자주 스웨터를 사는
여자,
보세가게를 찾아가 블라우스를 이천원에 사는 여자,
단이 터진 블라우스를 들고 속았다고 웃는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순대가 가끔 먹고 싶다는 여자,
라면이 먹고 싶다는 여자,
꿀빵이 먹고 싶다는 여자,
한달에 한두번은 극장에
가고 싶다는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손발이 찬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그리고 영혼에도 가끔 브래지어를 하는
여자
가을에는 스웨터를 자주 걸치는 여자,
추운날엔 팬티 스타킹을 신는 여자,
화가 나면 머리칼을 뎅강 자르는
여자,
팬티만은 백화점에서 사고 싶다는 여자,
쇼핑을 하면 그냥 행복하다는 여자,
실크스카프가 좋다는 여자,
영화를 보면
자주 우는 여자,
아이 하나는 꼭 낳고 싶다는 여자,
더러 멍청해지는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그러나 가끔은 한
잎 나뭇잎처럼
위험한 가지끝에 서서 햇볕을 받는 여자.
한잎의 여자 3 / 오 규원
- 언어는 신의 안방 문고리를 쥐고 흔드는 건방진 나의 폭력이다.
내 사랑하는 여자,
지금 창 밖에서 태양에 반짝이고 있네.
나는
커피를 마시며 그녀를 보네.
커피같은 여자, 그레뉼같은 여자,
모카골드 같은 여자,
창 밖의 모든 것은
반짝이며
뒤집히네, 뒤집히며 변하네,
그녀도 뒤집히며 엉덩이가 짝짝이 되네.
오른쪽 엉덩이가 큰 여자,
내일이면 왼쪽
엉덩이가
그렇게 될지도 모르는 여자,
봉투같은 여자.
그녀를 나는 사랑했네.
자주 책 속 그녀가
꽂아놓은
한잎 클로버 같은 여자,
잎이 세 개이기도 하고
네개이기도 한 여자.
내 사랑하는 여자, 지금 창 밖에
있네.
햇빛에는 반짝이는 여자,
비에는 젖거나 우산을 펴는 여자,
바람에는 눕는 여자,
누우면 돌처럼 깜깜한
여자,
창 밖의 모두는
태양 밑에 서서 있거나 앉아 있네.
그녀도 앉아 있네.
앉을 때는 두 다리를
하나처럼
붙이는 여자,
가랑이 사이로는 다른 우주와
우주의 별을 잘 보여 주지 않는 여자,
앉으면 앉은, 서먼 선 여자,
밖에
있으면 밖인,
안에 있으면 안인 여자,
그녀를 나는 사랑 했네.
물푸레 나무 한잎처럼 쬐그만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
오규원 (오규옥) 시인, 교수
생몰 : 1941년 12월 29일 ~ 2007년 2월 2일. 서울
출생지 : 경남 밀양시
데뷔 :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학력 : 동아대학교 법학
본명은 규옥(圭沃). 개념이나 사변과 대립되는,
사실과 현상을 통한 의미 구현으로서의 '날이미지'라는 시론을 주창하며
개념화되거나 사변화되기 이전의 현상에 대한 시학적 탐구를 추구한 시인이다.
부산중학교를 나와 1961년 부산사범학교를 졸업하였고,
1962년 동아대학교 법학과에 입학,
1968년 졸업했다.
1971~79년 태평양화학 홍보실에서 근무했으며
1981년 출판사를 운영하면서〈김춘수 선집〉·〈이상 전집〉을 내기도 했다.
1982년 부터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었다.
1965년 〈현대문학〉에 〈겨울 나그네〉로 시인 김현승에게 1회 추천,
1967년 〈우계(雨季)의 시〉로 2회 추천,
1968년 〈몇 개의 현상〉으로 완료 추천을 받아 등단하였다.
그는 시의 언어와 구조의 문제에 천착했다.
1971년 첫 시집 〈분명한 사건〉 출간 이후 인식과 관념을 언어로 구상화한 것이
초기시였다면, 중기시에는 시라는 형식의 무거움을 벗으려는 시도와 전통적
서정시로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체제에 대응하기 힘들다는 체제 비판적 시각에서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1987)와 같은 산문시, 해체시의 경향을 보였다.
1990년대 이후에는 사물을 인간의 관념에서 해방시키는 시, 관념으로 물들지 않은
날것으로서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로서의 시를 위한 '날(生)이미지'론을 주창하였다.
이는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1995),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1999),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2005) 등에서와 같이 시의
수사법으로서의 은유를 거부하고, 왜곡 없이 세계와 닿는 시각적 이미지와
세계에 대한 시인의 직관적 인식을 구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외의 작품에 시집 〈순례〉(1973), 〈사랑의 기교〉(1975),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1978),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1981),
〈희망 만들며 살기〉(1985), 〈하늘 아래의 생〉(1989), 〈사랑의 감옥〉(1991)과
유고시집 〈두두〉(2008)가 있다. 또한 시선집 〈한 잎의 여자〉(1998),
동시집 〈나무 속의 자동차〉(1995),
수필집 〈아름다운 것은 지상에 잠시만 머문다〉(1987) 등이 있고,
시론집 〈현실과 극기〉(1976), 〈언어와 삶〉(1983), 〈날이미지와 시〉(2005),
시 창작 이론집 〈현대시작법〉(1990) 등이 있다.
현대문학상(1982), 연암문학상(1989), 이산문학상(1995),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문화부문 (2003) 등을 수상했다.
그의 사후에 제자들이 '오규원 문학회'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