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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고조선,부여,발해 등 고대사토론방 (토론글) 백제의 인구 (추가)
SHaw 추천 0 조회 432 07.03.01 13:09 댓글 33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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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03.01 22:38

    첫댓글 당나라가 백제의 인구를 과대평가 혹은 과장할 만한 이유가 있었을까요?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무엇때문이었을까요?

  • 07.03.02 00:59

    생산량에 맞추어 추론하셨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생각해 볼 변수는 많아보이는군요. 조선이 농법이 발달했다고 생산량이 더 많았을까요? 기계화 이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소라고 볼 수 있겠죠. 기술이 발달하여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증가해도 능률적으로 더 많은 토지를 경작할 수 없다면? 조선은 아시다시피 소가 굉장히 귀햇습니다. 심지어 소를 이용할 수 없었던 경작지도 많았다고 합니다. 반면 고구려의 경우 소는 굉장히 흔했죠. 김용만선생님 글을 보시면 조선의 군자곡이 세종때 20만석, 문종때 10만석 정도임에 반해 고구려는 요동성에만 50만석을 비축했습니다.

  • 07.03.02 01:02

    도량형 가운데 미곡의 표준량은 세종때나 고려 문종에서 후기 신라에 이르기까지 표준량이 같았다. 1석은 15두로 고구려척과 동일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고대에는 식량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수단도 훨씬 다양했고 조선에 비해 국제무역도 활발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고구려와 백제를 비교하면 어떨까요.

  • 07.03.02 01:10

    백제 또한 국제무역이 매우 활발한 국가로서 부족한 식량은 외부를 통해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백제생산량이 조선보다 높을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인구는 더 적을수 밖에 없다는 것은 기록상의 76만호를 뒤집을 만큼의 설득력은 없어보입니다.

  • 07.03.02 01:13

    간혹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백제인구를 잡는 경우가 있는데 마찬가지로 삼국유사에는 경주인구가 18만호가까이 기록하고 있지요? 개인적인 생각으로 삼국유사의 사료로서의 정확성을 삼국사기나 구당서신당서 등과 동일시 할 순 없다고 봅니다.

  • 작성자 07.03.02 01:43

    제가 사용한 단위는 현대 단위로 환산한 것입니다. 斗는 약 1/3 말 정도 됩니다. 홍경래난때 관군이 사용한 곡물은 6만석이 넘었는데, 군대 규모는 고구려에 비할바가 못되지요. 요동성을 거점으로 본격적인 농성을 할 생각이었다면 50만석을 비축하는 것이 그렇게 이상하지 않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조선시대의 군곡 비축량은 적었습니다만, 시기적으로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 세종대와 문종대에 벌써 두배씩 차이가 나는 것을 보면, 군곡 비축량은 생산량에 정비례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상황과 임전 태세에 관련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 작성자 07.03.02 01:50

    고구려에 소가 많았다고 해서 (충격적으로 많았다는 생각은 안 듭니다만...) 백제에도 마찬가지로 많았으리라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역시 그렇게 되면 왜 후대에는 별로 없었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거든요. 호서와 호남은 농업 환경에 유리한 곳이며, 일찍부터 한반도의 농업 기술을 선도하던 곳이었습니다. 기술적으로 퇴보했다고 보기는 무리일 것입니다.

  • 작성자 07.03.02 01:54

    최근에 백제 화장실 유적이 발굴되었고, 백제인들은 주로 채식을 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만, 자세한 연구는 기다려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지금으로서는 백제인의 식사량이나 영양 상태, 섭취하는 식품 내역이 다른 시대와 비교해서 크게 달랐다고 보기는 힘들것 같습니다. 백제를 식량 수입국으로 볼 근거도 없는 것으로 압니다. 자연스러움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며 76만호를 맞추기 위해 너무 많은 가정을 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정기님 말씀대로, 76만호가 과장이라면 왜 그런 과장이 나왔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 다음 순서일 것입니다.

  • 07.03.02 04:06

    SHaw 님, 참고로 고려말에서 조선초에는 원이나 명에 말과 소가 계속 공물로 바쳐졌습니다. 말의 경우 그 때문에 만 단위로 육성되던 기병이 수천단위로 철폐되었고 소도 그 수가 대단히 줄어 소가 끌어야 할 멍에를 사람이 끌고 있다는 기록이 있는 걸 얼핏 들었습니다.

  • 07.03.02 08:32

    무엇이 원칙이겠습니까. 우선은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 원칙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기록과 상충되는 예외적인 문제가 있다면 예외를 주장하는 자가 원칙을 뒤집을 만한 근거를 제시해야죠. 생산력에 따른 인구제한은 예외적인 사안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원칙을 뒤집을 만큼의 근거로서 납득할 수 있느냐인데...님이 제시한 근거로는 부충분하다는 생각인 것입니다. 소의 양...충격적으로 많았다고 봅니다.

  • 07.03.02 08:36

    본래 북방은 소가 많은 지역입니다. 출처는 당장에 기억자지 않지만 고작 3개부락에 소10만두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고구려도 마찬가지로 흔하디 흔했져. 수레도 마차가 아닌 우차가 사용되었고 식용으로도 사용될 정도로요..평양성함락당시 당나라가 끌고간 소만 수천마리였습니다. 평양이 포위되어 있었고 당이 본국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가능한 수량을 생각해 본다면 수천마리도 엄청난 수죠.

  • 07.03.02 08:40

    그리고 고구려는 우경이 이미 2세기에 시작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다른 부가적인 제 생각들은 모두 원칙적인 측면에서 생각한 것이니...제 생각으론 SHaw님의 입장은 원칙과 예외가 뒤바뀐 상태에서 '역사는 진보한다'는 고정관념이 너무 지배적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작성자 07.03.02 11:21

    3개부락 10만두와 평양성 수천두는 좀 일관성이 없어보이는 숫자이기는 합니다. 비례식을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고구려에 소가 많았음은 확실한 사실이겠지요. 하지만 백제의 경우도 같다고 할 수야 없을 것입니다. 백제인의 식생활에 대한 연구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군요. 백제 인구에 관한 기사는 평백제비와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모두 다르고(삼국유사가 다른 것들과 동떨어진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만), 판적을 조사했을 것으로 보이는 당이 이 지역을 끝내 관할하지 못했다는데서 확정적인 기준이 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 작성자 07.03.02 11:26

    고정관념이라고 하시면 할 말이 없습니다만, 지구의 다른 지역의 인구는 대규모로 증가하지 않거나 희소한 편이었는데 호서-호남 지역에만 400만명 가까이 들끓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역사적 보편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사가 그렇게 특이한 역사라고는 보지 않으며, 이것이 제가 받아들이는 원칙입니다. 기록으로 남아있는 기사는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느냐를 보여주는 것이며, 역시 중대한 기준이지만 순위는 방금 말한 것 보다 한단계 낮게 칩니다.

  • 작성자 07.03.02 11:39

    역시 비례식 쓰면 시비의 대상이 되는 일일 것이고, 백제의 사회에서 귀족들의 역할이 어느 정도였고 이들이 왕실의 사업에 어느 정도로 순종했는지 모를 일이지만- 삼국 항쟁기에 백제와 신라는 비슷한 군사 규모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인구나 경제력 같은 국가 규모 면에 있어 어느정도 비등하다는 의미가 아닐런지요?

  • 07.03.03 00:33

    다른 지역과 비교해 보자면, 촉의 인구는 성도와 한중에 밀집되어 있었는데 산악지형인 좁은 공간에 100만에 가까운 인구를 보유했습니다. 한나라 요동1개군에서는 30만에 가까운 인구수를, 공손씨가 장악했을 때에는 50만에 가까운 인구수가 있었습니다. 의자왕 당시 백제는 신라를 압도하고 있었다고 봄이 맞고, 신라여왕이 백제의 국력을 자국의 5배로 판단하고 있던 점, 그리고 보다 넓은 경작지를 소유한 점 등을 생각해 볼 때에 76만호가 들끓고 있을 정도의 수치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당이 조사를 제대로 못했다면 본래 인구수에 미치지 못할지언정, 심각하게 초과하여 기록함은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 07.03.03 00:35

    SHaw님 말씀처럼 생활사에 대한 연구가 광범위하게 이뤄지지 않은 이상 속단하긴 힘들다는 것은 인정합니다만, 조선과 고려때에는 이랬으니까 거기에 맞춰서 줄여나가는 논리방식은 좀더 여러가지 변수를 고려해야 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 작성자 07.03.03 01:06

    평백제비에는 620만이라는 수치까지 나왔으니, 당시 상황이 꼭 어땠는지 속단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위, 오, 촉의 인구는 당시 상황상 지나치게 과소평가 되었을 것입니다. 한나라가 인구조사를 했을 때는 나름대로 사실에 가까웠을테지요. 또한 의자왕보다 한, 두세대 전만 해도 신라가 약간 우위에 있는 모습이었는데 의자왕때는 백제가 주도권을 잡은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인구에 있어 확정적인 변화가 있었다기보다는, 체제와 내정을 재정비했기 때문이 아닐런지요.

  • 07.03.03 04:46

    생산력에 관한 부분에 있어 shaw 님께서는 전라와 충청 일대의 경지면적을 근거로 드셨는데 모자란 식량 수급은 외부 지역에서 충당하는 예는 많습니다. 이를테면 서기전 8세기부터 번성해온 그리스가 전통적으로 모자라는 식량은 이집트의 밀을 수입해서 인구 증가폭이 커진 것과 영국이 인클로져 운동을 통해 곡물생산량이 떨어지자 신대륙이나 유럽의 영농국가들에게서 식량을 수입하는 경우가 있죠. 백제의 경우 개로왕 사후에 일본 열도, 그 중에서도 백제와 가까운 구주가 배후기지로 개발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일본열도에는 야마토 정권이 있었지만 일본열도를 강력한 중앙집권 지배가 확립되지 않았다는 걸 감안해야합니다.

  • 07.03.03 08:12

    구주가 개발된 것이 백제의 생산성에 크게 향상되었다면(그랬을 리도 없겠지만), 일본은 왜 고려와의 무역에서 식량을 수입했을까요? 지금 우리와 미국처럼 FTA같은 협약같은게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까요?

  • 작성자 07.03.03 11:53

    흠... 당시 일본 자체의 인구 증가도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생각되고, 백제인들을 먹여살릴 ㅡㅡ;; 여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

  • 07.03.03 14:54

    400년대와 고려시대 즈음에는 아무래도 상황이 같을 수가 없지요. 삼국시대 당시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이주자가 계속 이주하는 것을 보면 경지면적에 여유가 있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그리고 식량 수입에 관해서는 꼭 일본열도만 대상이 되라는 법은 없습니다. 남조 국가들과 교역을 해서 대량으로 식량수입을 할 개연성도 있구요. 때문에 경지 면적 때문에 백제의 호구가 생각보다는 적고 그 때문에 원정병력 역시 보낼 수 없을 정도로 군대가 빈약하다는 설명은 무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 07.03.03 18:15

    개연성 가지고 학문하시나?

  • 07.03.03 15:01

    또한 이 토론과는 상관없지만 토지 소유 관계가 어떻는가에 따라 경지면적에 상관없이 부양 인원의 차이가 결정됩니다. 농노제나 노예제의 경우 영주나 노예 주인은 이들이 먹고 살수 있는 최소한의 양을 제외하고 잉여생산물로서 식량부족지역에 팔아먹을 수가 있습니다. 농업 분화가 이뤄지지 않은 단계의 자영농의 경우는 자신이 먹을 분량을 생산하고 남는 잉여분을 팔지만 이 경우 식사량이 상대적으로 넉넉하기 때문에 잉여분도 적고 상대적으로 집약농업도 아니라서 단위면적당 생산량 차이가 발생합니다. 때문에 경지면적을 갖고(그것도 추정에 의거한) 부양인원을 계산 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 실제와 차이를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작성자 07.03.03 17:13

    백제가 유럽식 농노제나 노예제 사회는 아니었지요. 1000년의 시간을 뛰어넘는것과 오버지만 유럽하고 비교하는것도 오버네요. 개연성이 있다고 해서 다 가능한건 아니죠. "북위도 바다로 군대를 보낼 개연성은 있으니까"

  • 작성자 07.03.03 18:14

    또한 남조와 무역을 하려면 결국에는 황해 횡단 항로를 사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까지 경쟁력 있는 사업은 아니었을 것 같군요. 면적상 조선시대 생산력과 비등했다고 해도 부양가능한 인구보다 100만명 이상 초과하는데, 그걸 충족시키려면 연간 1천 800만말 이상을 수입해야 하고, 100석들이 대형선으로 쳐도 1만 8천척이 왕복해야 합니다. 1500년전의 황해에서 이런 일이 버젓이 일어났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 작성자 07.03.03 18:14

    물론 연구가 진행되어, 백제의 생산력이 조선시대보다 낮지 않고 오히려 높았다는 결론이 나게 되면 저는 제 주장을 미련없이 철회할 것입니다.

  • 07.03.03 23:39

    shaw님, 역사란 학문은 결국 기록을 원칙으로 연구하는 것입니다. 비록 삼국유사와 평제비에 다른 기록이 있지만 대다수 사서는 76만호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76만호를 원칙으로 예외를 입증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원칙을 뒤집을 만한 예외적인 사유의 충분한 근거가 제시되지 않는 이상 76만호는 정설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백제가 조선과 비교하는 방법으로 생산력에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다른 수단을 통해서도 충분히 공급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이상 님이 말씀하시는 예외는 원칙을 뒤집을 충분한 근거를 제시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 07.03.03 23:40

    백제생산력이 조선보다 높았다는 결론이 나올때 님의 주장을 철회할게 아니라 백제생산력이 한계가 있었음이 밝혀졌을 때에 76만호설이 철회되어야 논리적으로 맞습니다.

  • 작성자 07.03.04 03:43

    76만호 기록은 구당서에서 시작되어 다른 책에도 수록된 것으로 압니다, 다수결로 정할 문제까지는 아니겠지요. 개인적으로는 백제가 대량의 곡물 무역을 했을것 같지는 않지만, 이것 역시 믿을만한 연구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 07.03.04 08:25

    백제가 유럽식 농노제나 노예제 사회라고 하진 않았습니다. '이 토론과 상관 없지만'이라는 단서를 앞에 붙였지요. 단지 백제의 토지 소유관게나 생산방식의 양상이 어떠했는지 아직까지 명확한 연구결과가 나오지 않았고 토지 소유관계에 따라 식량수급은 얼마든지 변동이 가능하다라는 얘기를 하기 위해 농노제와 노예제를 말했던 겁니다. 동양권에서는 농노제까지는 아니더라도 장원을 경영하는 대토지를 소유자가 가복을 통해 경작하거나(노예로 해석하거나 혹은 신분상 노예라고 보지 않는 해석이 난무하지만) 외부 빈농에게 소작을 주고 막대한 소작료를 받아먹는 식의 토지소유관계도 있었지요.

  • 07.03.04 08:21

    부족한 식량 수급을 남조에서만 동원한다고 한 적이 없을텐데요. 저는 경로는 다양할 수 있고 남조는 그 중 하나였다고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남조와 교역할 공우는 황해 횡단항로가 아니라 황해 사단항로입니다. (둘의 차이는 구분하실거라 생각하지만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오해없으시라는 의미에서 사족을 답니다.) 그리고 shaw님의 대체적인 사관은 역사는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한다는 진보사관에 가깝다고 생각되는데 맞는지요? 하지만 기술, 의식의 발전은 시기가 지날 수록 발전하는게 아니라 경우에 따라 얼마든지 퇴보도 하고 단절 되는 예는 많습니다. 백제가 조선보다 항해술, 조선술이 떨어질 것이라는 것이라고 생각되진 않습니다.

  • 작성자 07.03.04 13:00

    음, 저는 "일본에 식량이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고 전제했으니까요. 백제와 조선이 1천년이나 떨어져 있으니 그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일괄적으로 "발전" 이라는 한 마디로 뭉뚱그려 생각할 수야 없겠습니다만, 제 기본적인 입장은 말씀하신대로 일종의 "진보사관" 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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