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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넉넉한 품같은 내고향 완도" |
▶시장님께서는 고금면 회룡리가 고향으로 완도중학교 제11회 졸업생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금도에서 완도중학교에 다니게 된 사연은? 중학시절 평범한 학생은 아니었을 것이란 인상이듭니다. 학창시절 기억을 떠올리며, 에피소드가 있으면 한 말씀해 주십시오. → 저는 고금면 회룡리에서 태어나서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고금도는 조선시대 전략요충지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수군본영을 설치하고 왜적을 섬멸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유서 깊은 곳입니다.
어렸을 때에는 이러한 내용들을 잘 알지 못했지만, 학교에서 우리 섬의 역사적인 유래를 공부하면서 점차 원대한 꿈과 호연지기를 키워나갔습니다. 제 모친께서는 제 고향 고금도 부녀자들이 그러하듯이 매우 성실하고 근면하신 분이셨습니다.
특히 자녀에게는 무척이나 자상한 분이셨는데 농사일을 거들고 집안일을 돌보는 바쁜 와중에서도 내 학업만은 빠뜨리지 않고 챙겨주셨습니다. 저는 4남 3녀 중 둘째였는데 집안일은 주로 형님차지였고 나는 일에서 벗어나 공부에만 몰두하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덕분에 고금초등학교에 다닐 때 학업성적은 1,2등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의 애정을 듬뿍 받았으며, 교실에서 수업을 할 때마다 칠판에 글씨 쓰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또 목청이 커서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일 때면 으레 구령을 도맡아 하곤 했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당시 나와 함께 삼총사를 결성하여 항상 어울려 다녔던 절친한 친구들이 있었는데 학교를 다녀오면 함께 소를 먹이러 들판으로 쏘다니기도 하고 바다에서 헤엄치면서 수영실력을 견주기도 했었습니다.
이 가운데 한 친구는 유명을 달리하였고 다른 친구는 고향면사무소에서 근무하다 퇴임해서 고향마을에 살고있습니다. 지금도 가끔 고향에 갈 때면 그 친구와 어렸을 적 고향이야기와 함께 세상사를 이야기 하곤 합니다.
내가 어렸을 당시 부친께서는 토지개량조합장 일을 맡아 보셨습니다. 그래서 가정형편이 다른 집보다는 유복한 편이었고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은 겪지 않았으나 모두가 어려운 시절이었으므로 우리 집도 사실은 비슷했었습니다.
그래서 안정된 수입과 함께 하얀 와이셔츠에 단정한 넥타이를 매고 공부를 가르치시는 선생님이 가장 부러웠고, 나중에 선생이 되어 안정된 직장을 갖는 것이 나의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박한 꿈은 거친 세파와 함께 접어두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현재 고향 모교에서 공부하는 후배들에게 격려의 한 말씀해 주십시오. → 완도중학교를 졸업하고 목포 문태고를 거쳐 조선대 법정대에 진학한 나는 캠퍼스의 낭만에 젖어들 여유도 없이 혼란스러운 정치상황에 휘말려 들었습니다. 한일굴욕외교 반대투쟁과 3선 개헌 반대투쟁 등 잇따른 학생운동에 참여하면서 수사정보기관의 탄압을 받았었습니다.
이후 젊은 나이에 신민당 선전부 차장이라는 직함으로 야당에 첫 발을 들여 놓은 이후 나의 인생항로는 실로 가시밭길의 연속이었었습니다. 민주통일당 노동국장, 인권국장을 지내면서 유신철폐, 긴급조치 해제 투쟁에 따라 1975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온갖 고문을 당한 끝에 구속되어 실형을 선고 받고 2년의 옥고를 치루기도 했었습니다.
또,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폭압 하에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줄기차게 펼쳐오는 과정에서 20여 차례에 걸쳐 연행과 연금, 투옥을 당했습니다. 신군부의 쿠테타가 일어났던 1980년에는 김대중 선생의 비서로서 김대중 선생을 수행하고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신군부 정권에 의해 8년간 정치활동을 금지 당했다가 4년 만에 해금되는 고난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혹독한 고초를 겪는 과정에서도 결코 저의 선택을 후회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유신정권의 폭압속에서 고초를 겪을 때마다 머나 먼 남쪽 고향 앞 바다의 그리운 정경들을 떠올리면서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고 인고의 설움을 안으로 삼켜나갔었습니다.
숱한 역경 속에서도 한 치도 비굴하지 않았으며, 무릎을 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겠다는 심정으로 오로지 민주화의 외길만을 선택. 걸어왔습니다. 결국 고향은 나에게 있어서 고통을 극복하고 오늘이 있게 한 어머니의 따뜻한 가슴이요 어두운 뱃길을 밝히는 희망의 등대였습니다.
지난 30여 성상의 정치여정을 돌이켜 볼 때 어렸을 적부터 고금도 앞 바다를 바라보면서 가슴속에 품어왔던 꿈을 모두 이루지는 못했지만, 이제까지 내 자신에 대하여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기 때문에 한 치의 후회도 없습니다.
그래서 나의 좌우명은 ‘성실하고 의롭게 살자’이며 ‘참고 기다리며 화내지 말고 비굴하지 말자’를 가훈으로 정하고 실천해 오고 있습니다. 좌우명과 가훈은 내가 살아온 인생역정과 궤를 같이 한다고 생각 합니다. 사랑하는 고향 후배여러분께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 21세기는 첨단지식정보화 사회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살고 있는 완도는 서울로부터 제주도 다음으로 먼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시간으로 지구촌 구석구석에 대한 소식을 TV로, 인터넷으로 접하고 있습니다. 거리와는 관계없이 지구촌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전문가 시대입니다. 세계의 대부호인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게이츠나 노벨상을 수상한 정치가나 과학자, 스포츠계의 스타 등 유명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찾아보면 항상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자기 분야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전문지식을 갈고 닦은 자들입니다.
지금 미국 프로골프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우리 고장 출신 최경주 선수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도 오늘이 있기까지는 손금이 닳아 없어지도록 지독한 연습벌레였다고 합니다.
후배여러분! 학교에서는 학기가 구분되어 있고 방학이란 제도가 있지만 인생은 학기처럼 구분되어 있지도 않고 방학이란 것은 아예 있지도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어렵고 힘들더라도 참고 인내하며 원대한 꿈을 갖고 미래를 위해 차근차근 한 발씩 한 발씩 내딛으며 여러분의 꿈은 현실이 될 것입니다.
▶국회의원에 당선하고 상임위로 산업자원위원회를 배정받아 폭로만 하는 야당의원으로 각인되어 가깝고 먼 지인들의 걱정이 많았으나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알차게 위원의 소임을 다해 민주화 투쟁의 경력을 더해 정치적 능력까지 인정받았다고 알고 있다. 당시 어떤 비결이 있었나? →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광주 북구 갑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리고 국회 상공자원위 간사, 예산결산특별위원, 국회경쟁력강화특별위원을 거치면서 초선의원으로서 왕성한 의정활동을 하였습니다.
또한. 민주당 사무부총장, 5·18특별위원회 위원을 거쳤으며,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주역으로 당무위원, 수석사무부총장, 광주광역시지부장을 역임하면서 민주정당으로서의 기틀을 잡는데 기여하였습니다.
이후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92.7%라는 전국최고 특표율로 당선되었으며, 1997년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는 범야권 대통령후보단일화 추진위원회 간사를 맡아 헌정사상 최초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정권교체를 이룬 1998년에는 집권여당의 제2정책조정위원장, 경제대책위원장을 역임하면서 탁월한 정책조정능력을 발휘하여 우리나라가 IMF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 창당추진위원회 추진위원, 총재특보, 당무위원 등을 맡아 새정치국민회의가 민주화된 전국정당으로 거듭나도록 하는데 기여하였으며, 제16대 총선에 당선하였습니다. 또 2002년에는 지역 국회의원의 추대로 새천년민주당 광주광역시장 후보로 출마, 민선 3기에 이어 민선4기 시장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이러한 길을 걷기까지는 야당시절 김대중 선생님의 비서를 지내면서 터득한 정치, 경제 등의 풍부한 경험과 지식이 기본이 되었으며, 이제까지 내 자신에 대하여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오로지 남은 욕심이 있다면 평생을 민주화의 길을 걸어온 정치인,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사심 없이 지방자치와 호남발전을 위해 헌신해 온 정치인으로 기억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광주광역시의 발전방향에 대한 기본 구상은? → 우리 시는 2010년까지 1등 광주 건설의 기반을 확고히 구축하는 1등 광주건설 5개년계획을 수립하여 실천해 오고 있습니다. 본 계획에서는 지역경제를 일으킬 가장 핵심이 되는 산업인프라 구축을 위해 자동차·디지털가전·광산업 등 3대 주력산업과 첨단부품소재·디자인·신재생에너지·문화콘텐츠 산업 등 4대 전략산업, FTTH·LED밸리·BIT융합기술·나노기술·정밀금형산업 등 5대 신기술응용산업을 육성하고 있으며 이러한 첨단산업의 육성의 성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 지난해 수출액이 91억불을 기록하여 전국 광역시 중 1위를 차지하였고 2006산업정책대상과 글로벌 비즈니스 경영대상도 수상했습니다.
또한, 집중적인 산업육성정책은 국내외 투자가의 활발한 투자로 이어져 지난해 동안 105개 기업과 2,976억원의 투자유치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우리 시는 지역산업을 지속적으로 육성시켜 부자광주로 도약해 나간다는 방침아래 지역산업이 살아야 일자리가 늘어나고 일자리가 늘어야 시민이 산다는 점을 깊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2010년까지 13만 4천개의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3대 주력산업의 고도화, 4대전략산업의 성장기반 마련, 5대 신기술산업의 중점육성과 더불어 차세대를 대비한 생활가전로봇·전자금융·항공우주산업 등 신성장동력산업을 추가로 발굴하여 튼튼한 지역산업의 구조를 만드는 로드맵을 마련해 나가고 있습니다.
기업하기 좋은 광주 만들기를 위해 첨단산단 일원을 R&D특구 지정을 추진하면서 국립종합과학관 건립도 차질 없이 추진하며 기업을 유치할 공장용지 200만평(평동 51, 첨단2단지 62, 하남 80)을 추가로 조성하여 안정적인 산업용지를 확대 공급하고 있습니다.
중소기업에 자금·기술·마케팅 등을 지원하여 기업의 불편사항을 신속히 해결해 주는 한편, 산업평화 분위기를 조성하고 지역 제품사주기 운동을 전개하여 광주에 투자한 기업은 반드시 성공 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나아가 광주가 세계 속의 도시로 확고히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국제회의도시 지정과 컨벤션뷰로 설립을 추진하고, 2008년 한상대회, 2010년 유네스코 예술교육 세계대회, 2013년 동아시아경기대회 등 굵직한 세계대회를 유치해 내겠습니다.
또한, 교육·복지·환경 등에 대한 투자를 대폭 늘려 시민들의 행복지수를 한 차원 더 높여 나가고, 공동혁신도시 건설과 초광역적 도시기반시설 구축으로 인구 200만 이상의 신 광주 메트로폴리탄 시대를 열어가는 토대를 닦겠습니다.
▶광주전남발전연구원의 갈라서기처럼 광주·전남의 공동 정책 개발은 쉽지 않은 것 같다. 광주전남의 화합·상생발전을 위해 광주·전남인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우리 시와 전남은 항상 한 뿌리이자 공동운명체임을 인식하고 협력과 상생행정을 해오고 있습니다. 지난해는 양 시·도가 광역행정협의회를 통해 영산강고대문화권 공동개발, 수도권 규제완화 공동대응, 여수 엑스포 개최 지원 등 14건의 협력행정을 해오고 있으며, 전국 최초의 공동혁신도시를 전남 나주에 건설토록 하였고 양 지역의 교류를 촉진하기 위해 장성, 나주, 담양, 화순 등을 잇는 제3순환도로 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등 양 지역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해오고 있습니다.
광주전남발전연구원 분리는 전남도청이 무안으로 이전하는 등 전남도의 발전 추세가 확장되고 이를 지원할 연구원의 기능을 확대하기 위한 방안이며 양 지역이 각기 장점을 모아 경쟁력 있는 특화된 지역 발전을 이루는 데 큰 계기가 될 것입니다.
앞으로도 양 지역은 21세기 맑고 청정한 자연환경과 더불어 잘 사는 부자 광주, 전남 건설을 위해 협조체계를 유지하고 상생 발전하는 노력을 계속 해 나갈 것입니다. 시·도민 여러분도 양 시도의 발전을 위해 각종 정책에 대해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광주광역시와 완도의 상호 발전방안에 대해 고민해 보신 적 있는지?
우리 시와 완도를 연결하는 고속도로가 현재 나주 금천부터 남창까지 설계 중에 있기 때문에 이를 광주까지 연장해주도록 중앙 정부에 계속해서 건의하고 있습니다. 노선이 연장되면 광주~공동혁신도시~완도를 잇는 고속도로가 확보되어 완도와의 교류가 더욱 활발해 질 것으로 전망되고 완도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수산물 등이 광주지역에 공급되고 관광, 레저 등 모든 산업분야에서 직접 교류가 확대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향에 있는 완도군민께 한마디 하신다면? 고향은 오늘 나를 있게 한 모태이며 내 삶 그 자체이며 고향을 떠나 살고 있어도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며 한번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고향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고향은 포근하게 감싸주는 어머니의 넉넉한 품처럼 항상 내 곁에 있습니다. 특히 삶의 무게에 짓눌리거나 고난을 겪을 때 더욱 가깝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완도는 맑은 공기와 탁 트인 바다, 크고 작은 섬,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자연환경을 보유하고 있으며 미역, 김, 멸치, 전복, 생선 등 해산물의 보고입니다. 보길도. 청산도를 비롯한 천혜의 섬과 겨울철에도 따스한 기온을 유지하고 있어 사계절 스포츠 전지훈련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또 여러 가지 설화와 전설이 풍부하고 해상왕 장보고와 고산 윤선도 유적지 등 역사적인 인물과 문화 유적이 많은 유서 깊은 곳입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고향의 선후배님 여러분! 이렇듯 완도는 해산물이 풍성하고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문화유적이 많은 지역으로 먹고, 보고, 쉬는 웰빙 나들이 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어 관광객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완도에 오시는 관광객이 또다시 찾아올 수 있도록 친절한 군민의식, 깨끗한 먹을거리, 품격 높은 상거래 등을 통하여 지역이미지 홍보와 지역발전을 위해 모두 동참해 주신다면 완도의 미래는 아주 밝다고 생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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