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항구에는 건조업자들이 배에서 오징어를 대량으로 사서, 건조 공장에서 인부들을 동원해서 말리는 방식이었는데, 이곳 묵호항은 다른 방식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이곳 묵호항 주변은 전부 산지이어서 넓은 공터가 없어서 대량으로 말릴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자동차에 실어 멀리 넓은 터를 얻어 말리수도 있었겠지만, 시간이 걸리고 그리고 냉장 냉동 시설이 부족한 화물차로서는 역부족이었던 셈이다.
그 방법은 오로지 하나, 누군가가 오징어를 배에서 사면, 그것을 여러 사람들이 나누어 각자가 말리고 누군가가 말린 오징어를 모아서 유통시키는 일이었다.
오징어를 가장 말리기 좋은 곳은 바람이 잘 불고 날씨가 서늘한 높은 산지가 제격이었다.
그래서, 이곳 묵호항 산동네 사람들은 오징어를 말리게 된 것이다.
묵호항 마른 오징어 값의 비밀이 여기서 탄생하는 것이다.
같은 오징어 값이라 해도 묵호항 오징어 값은 여느 동해안 항구의 오징어 값과는 엄청난 차이가 숨어 있다.
지금은 오징어가 조금 잡혀 입찰이라도 하지만, 과거에는 수협에 어선 한 척당 수수료만 주고 업자들이 배에 넘처나는 오징어를 통째로 사들여, 그 자리에서 약간의 이익을 붙혀서 건조장이 있는 집집마다 나누어주었다.
그러면, 대기하고 있던 지게꾼과 리어카꾼들이 오징어를 싣고 이고 지고 각각의 건조장으로 향하는 것이다.
다행히 낮고 길이 잇는 곳은 리어카로 이동을 하고, 높고 사람이 겨우 들어가 갈 수 있는 곳은 지게꾼들의 차지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지게꾼들이 오징어를 지고 한 번 올라 갔다 오면서 받는 돈은 4000원이었다.
그때 공무원 초임 월급이 9000원이었으니 대단한 돈벌이였다.
어판장에 나갔다가 금신호 소식을 들었다.
“금신호, 도망갔데.......돈이 없으면 배 세워놓고 놀지...뭐하러 사채 써가며 배에다가 손을 대......”
“그럼, 놀리면 베트남 얘들 월급은 어떻게 줘? 너무 안잡혀.....오징어 씨를 말렸나봐......”
“중국놈들이 다 끌어갔나, 아님 남쪽으로 벌써 내려갔나....몰라....”
“요즘, 기름값이나 싸서 다행이지.....우리도 죽을 맛이다.”
북한이 수수료를 받고 중국 어선에게 동해 바다 어업권을 주었는데, 그게 화근이 된 거 같다.
중국어선은 우리 배들 처럼 낚시로 잡는 게 아니라, 저인망 어선 두척이 쌍끌이로 밑바닥부터 끌어 당기기 때문에 오징어 뿐만 아니라 다른 어족까지 씨를 말리는 것이다.
뉴스에는 서해와 남해의 중국어선 횡포만 떠들지 동해안은 관심도 없는 모양이다.
오징어와 명태는 강원도 동해안 어항의 주 어종 이었는데, 명태는 벌써 사라지고 없고, 이제 오징어 마저 명태의 뒤를 따를 모양이다.
오징어 때문에 이곳 묵호항에도 전국에서 돈을 벌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묵호항 어판장 뒤의 동문산 자락에 무허가 집을 짓고 살았다. 묵호항 뒤에 산이 있고 그곳에 사람들이 집을 지었다는 것과 오징어와는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묵호항 주변은 온통 산지다. 지금 동해시 구 도심이 되는 묵호진동 발한동 부곡동도 자세히 살펴보면 과거에는 전부 산이었다.
일제 강점기 강원도에서 생산되는 석탄을 일본으로 싣고 가기 위해 철도를 건설하고, 묵호항을 만들었다.
그때는 묵호라는 곳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 산지에 불과했다. 명주군의 작은 촌락에 불과했다. 그곳에 항구가 생기고 일본인들이 오징어 잡이를 하는 것을 보고 배워서 일본인들이 물러간 다음에 본격적으로 오징어를 잡게 된 것이다.
과거, 오징어는 강원도 동해안 어느 항구에서나 넘쳐나는 흔한 생선이었다. 너무나 많이 잡혀서 미처 처리를 못할 지경이었다. 지금이야 냉동 시설이 발달하여 생물로 급냉을 하기도 하지만, 과거에는 무지막지하게 잡혀오는 오징어를 처리하는 방법은 말리는 수 밖에 없었다.
현재, 이곳 묵호항 산동네를 유심히 살펴보면, 묵호항 주변 낮은 곳에는 지역 사람 토박이들이거나, 과거 선주들이었거나, 선원들이 살고 있고,
높은 곳 일수록 멀리서 온 타향인들이 대부분이다.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묵호항에 왔다가, 선원도 되지 못하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징어를 말리거나 운반하는 거 밖에 없었다.
지게꾼들은 조를 짜서 배 한척을 맡아서 각각의 건조장으로 오징어를 운반하면, 배를 가르는 동네 여자들이 몰려들고 세척하고, 남자들은 여자들이 할복한 오징어를 건조대에 널고, 또 다른 여자들은 햇볕을 잘 받게 하기 위해 잘게 가른 대나무 침으로 오징어를 넓게 펼치고, 며칠 후 오징어가 마르면 포장을 하고, 각자의 건조장에서 포장된 오징어를 또 짊어지고 산 아래 대기하고 있던 유통 상인들에게 마른 오징어를 전달하게 되는 것이다.
얼마 후,용달차가 보급되고 사문재를 넘기 전에 해맞이 길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묵호항에서 오징어를 싣고 발한 삼거리를 지나 부곡동 건조장으로 가기도 하고, 사문재 못가서 창호초등하고 뒤편 산길로 싣고 가서 산 위에 부려놓으면 여자들이 함지에 이고 내려오거나 지게꾼들의 힘을 빌리게 되었다.
이 지점에서 묵호항 마른 오징어 값과 다른 항구의 오징어 값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동해에서 나는 오징어를 해풍에 말린 것이니 값도 별반 차이가 없을터인데 무슨 분석이 필요하느냐고 의아해 하겠지만, 맑스 형님의 자본론이라도 읽어 본 풍월로 한 마디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왜냐하면 이 사실을 맑스 형님이 알았다면 자신이 쓴 책을 내동댕이쳤을 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다.
또 한가지, 썩어빠진 자본주의를 벗어나는 길은 플로레타리아 혁명으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대해서도 딴지를 걸고 싶기도 하다.
맑스나 레닌이나 모택동이나 호지민이나 체게바라나 , 그 어떠한 위대한 사회주의자들이 놓치고 간 것을 이곳 묵호항 산동네에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나 민주주의를 오로지 정치적 시선으로 권력의 분배나 독점만을 바라본 학자들에 대해서도 반기를 들고 싶기 때문이다.
경제학이라는 것이 성장과 독점과 분배와 그래서 보호무역과 자유무역으로 갈팡질팡하고 여전히 19세기의 유럽에서의 혼란기와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공황과 인프레이션의 위험성에서는 한걸음도 벗어날 수 없는 이유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본론에서 맑스 형님은 기가 막힌 한 가지 사실을 이야기했다. 상품의 가격은 자본가의 이윤과 노동자의 임금의 합이라는 것.
지금 생각하면 별거 아닐수 있지만 그 당시 형님이 살던 시절에는 대규모 공장에서 대량으로 상품을 생산하는 것도 신기했지만, 노동자가 돈을 받고 일을 한다는 것도 더욱 생소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인류에게는 사람의 노동이 돈으로 환산되는 일이 한번도 없었다.
자신의 노동이 상품 가격의 한 단위로 존재하는, 이른 바 플로레타리아의 탄생이었다.
영국의 플로레타리아는 16세기부터 시골 영주의 장원에서 도망쳐나왔거나 내쫒겨진 농노들이었다.
그들은 거지떼가 되어 전국을 떠돌다가 여러 사회문제를 일으켰고, 그래서 영국의 왕은 구민법 빈민법으로 그들을 관리하다가,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노동자가 필요하자 급기야는 그들이 공장으로 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더 많은 이윤을 보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지급되는 임금은 최저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했다.
산업혁명 당시 런던의 곳곳은 거지떼 같은 노동자들의 더러운 천막으로 가득찼다고 한다.
그래서 영국 정부는 스피넘랜드법이라는 것을 만들어냈는데, 이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한국의 근로장려금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최저 생계비에 못 미치는 노동자의 임금을 정부가 보조해주는 제도 인데, 결국은 이제도에 의해 영국은 커다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자본가들은 보조금을 의식해 임금을 낮춘 결과 노동의욕과 생산성이 낮아졌다. 세 부담이 높아진 사람들은 일도 하고 세금도 내느니, 차라리 극빈층으로 떨어지는 편이 나았다.
스피넘랜드법은 1833년 신빈민법으로 사라졌지만, 정부의 간섭이 시장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자유시장을 중요시 하는 고전판 경제학자들이 등장하는 발단이 되었다.
이른 바, 현재 지구상의 모든 나라의 딜레마가 된 분배와 성장과 복지에 대한 담론은 스피넘랜드법이 시초가 되었다.
묵호항 마른 오징어의 가격에는 이윤이 붙어 있지 않다.
물론, 묵호항 마른 오징어가 탄생되는 과저의 협업과 분업 각각의 노동이 상품 가격으로 환산되어지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배에서 약간의 수수료를 주고 자신이 말릴 만큼의 생물 오징어를 산 건조장 주인은 자본가가 아니다.
그는 다른 항구의 건조업자 처럼 대규모의 공장을 차리고 노동자를 고용해서 임금을 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 역시 마른 오징어 작업에 참여했던 여느 노동자처럼 그들의 일부일 뿐이다. 그 역시 마른 오징어 협업이나 분업 단계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가 받는 이윤은 자신의 마당에 건조대를 설치하고 오징어가 마를 때까지 관리하는 노동의 댓가이다.
어차피 마른 오징어의 가격은 각 항구마다 비슷한 가격으로 정해져 있다. 다만, 여느 항구와는 다르게 묵호항 마른 오징어 가격에는 각각의 노동들이 질서정연하게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운반하고 가르고 세척하고 널고 말리고 포장하고 다시 산 아래로 운반하는 각각의 노동은 전부 산동네 마을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 각각의 노동들은 확실하고 정당한 절차를 걸쳐 적당하게 분배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자율적으로 분업을 했다가 협업을 했다가 능동적으로 그들의 노동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전국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이곳 묵호항으로 오게 된 것은, 마치 영국의 시골 장원에서 쫒겨나 거지떼가 되어 결국은 산업혁명의 플로레타리가 된 점은 비슷하지만, 여기에는 엄청난 차이점이 숨어 있다.
바로 자율성과 타율성이다. 꽤 괜찮고 현대 국가들까지 비슷하게 흉내내고 있는 스피넘랜드법이 실패한 이유는 바로 타율성이다.
그래서 국가의 간섭이 시장을 망친다는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을 길러낸 것이다. 그것이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에 대한 끊없는 갈등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결국에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일으켰고, 현재 그에 대한 갈등은 여전하다.
얼마전 자본주의 탄생의 나라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쩌면 이 갈등은 또 한번의 전쟁으로 파국을 맡을지도 모르겠다.
국가의 간섭(세금과 복지)은 타율성을 만들고 자유로운 시장은 빈부의 격차를 만들고, 이런 풀리지 않는 딜레마는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영원한 숙제일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 보면, 자유시장 역시 국가에 의해 주도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두 차례의 전쟁에서 유럽 각국에서 보여준 사실 만으로도 충분하다.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자유시장 역시 어쩌면 인간을 가장 타락시키는 시스템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묵호항 산동네 사람들이 마른 오징어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받은 돈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 스스로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마른 오징어 가격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누구라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은 그들의 고향에서 떠나 왔지만, 이곳 묵호항 산동에서 무허가 둥지를 틀고 동네 사람들과 같이 일하고 이야기 하고 술 마시고 놀고 있다.
이것이야 말로 완벽한 공동체가 아니고 무엇인가.
현재도 세계 곳곳에 거대한 자본주의 시스템 사이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 존재하는 수 많은 경제 공동체와 협동조합이 있지만, 그것 역시 자율성에서는 완벽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묵호항 산동네의 공동체는 전국에 몰려든 가난한 사람들이 만든 가장 완벽한 자율 공동체이다.
그 공동체를 만드는 어떠한 서류도 없고 간부도 없고 회의도 없다. 인위적인 공동체의 그러한 것들을 대신하는 것은 오로지 현장작업을 통한 임기 응변 뿐이다.
전국에서 몰려든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택한 그들의 주거지가 이런 멋진 공동체를 탄생시킬 줄은 그들도 몰랐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이 덤으로 얻은 것이 또 하나 있다. 파노라마 처럼 이어지는 동해바다의 아름다운 풍경과 산과 바다의 깨끗한 공기가 그것이다.
그들은 비록 현재, 자식새끼들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 보내고 가진 것이라고는 무허가 하름한 집 한 채 뿐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국가와 자본은 그들에게 아픔을 주었지만, 그들은 어떤 불만도 가지지 않고 묵묵히 이겨내어 어디에도 간섭 받지 않는 아름다운 해맞이 마을 공동체를 이루어냈다.
동문산 자락의 건조장에서 바람에 날려 만국기처럼 나풀대었던 오징어가 기억난다.
오징어가 적게 잡혀 말릴 것도 없는 것이 큰일이다. 다행한 것은 과거 마른 오징어 작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전부 노인들이 되어, 오징어가 많이 잡혀도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