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아주 오래전 구입했던 제도판을 버렸다.
전공학과가 건축과였던 까닭에 어쩌면 자주 사용했을지도 모르는
휴대용 제도판.
버리는데도 비용과 약간의 발품이 소요된다는게 재미 있었다.
동사무소에서 노란 스티커를 몇천원에 구입한 후 눈에 달 띠는 부분에
부착하고 집 앞에 가져다 놓으면 끝이다.
제도판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나는 훌륭한 주인이 아니었을 듯 하다.
그는 자신의 받침자와 그 평평하고 잘 다듬어진 몸체 위에서
훌륭하고 깔끔한 건축물들의 설계도면이 그려졌어야 옳지만
그는 주인을 잘못 만난 까닭에..
작은방 구석에서 마치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빨간단추처럼
처박혀 있다가 결국에는 쓸슬하고 잔인할 만큼 선명한 –폐기-의 이름표를
부여받은 채로 내게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스스로에게 있어서 어느 정도의 부피와 질량을 차지하는
그 무엇인가를 버리는 데는 혹은 소멸시키는 데는
분명 다소간의 노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이 크고 복잡할수록
더 많은 비용과 노력이 필요했다.
어쩌면 그 노력이나 혹은 번거로움 아니면 고통을 감수할 자신이
없어서 어쩌면 너무 많은 것들을 방 한구석에 혹은 어딘가에
방치한 채로 나는 살아가는 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무척이나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하다.
모든 미련을 뒤로하고 나의 그 것 혹은 나만의 그 것을 버리는것조차
노력와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
조금은 안타까운 모습으로 다른 버려지는 것들과 함께 우두커니 놓여져 있는 그 제도판을 한참동안 바라보며,
또다시 내 안에 있을지도 모를 “대형폐기물 신고확인스티커” 를 부착해야 할 것들을 천천히 생각해 본다.
------구름철쭉------
그러니까 내가 제도판을 버린 바로 옆에는 그동안 내게 상당한 감동?을
선사했던 “철쭉”이 만발해 있었다.(원숭이는 그걸 구름철쭉 이라고 불렀다)
물론 아파트 관리인이 가끔 손질이야 해주겠지만 그건 정말이지
“구름” 이나 “솜사탕” 처럼 그곳에 피어 있었다.
그 중 으뜸은 단연코 흰색의 꽃들이었다.
볼 때마다 머리를 푹 묻고싶을 만큼 포근하게 피어있었는데.
(손오공이 타고다니던 구름같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들은 붕괴되어 있었다.
그동안 쏟아져 내린 비와 바람에 흉한 모습으로 일그러져 있었으며
그 아름다움이 깊었던 까닭으로 붕괴는 더더욱 처절했다.
절세의 미모를 자랑하던 여배우의 노년기처럼 철쭉은 붕괴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내년에 다시 부활 할 수 있지만
….은 그럴 수 없다.
지독히 아름다웠던 어떤것들의 붕괴는 평범한 것들의 그것보다
더욱 처절하고 안타깝다는 내용의 어떤 단편이 생각나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