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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마태오 12,46-50
자녀의 봉헌은 새장의 문을 열어주는 것
오늘은 성모님께서 성전에 봉헌된 날입니다. 전통에 따르면 성모님은 세 살 때 요아킴과 안나에 의해 성전에 봉헌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16세 정도로 추정되는 나이에 결혼하기 전까지 성전에서 살았습니다.
하.사.시.에 의하면 당시 메시아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난다는 예언을 바탕으로 다윗의 후손 여인들을 성전에서 교육하며 키웠다고 합니다.
이때 가장 예쁠 나이의 귀여운 딸을 성전에 봉헌해야 하는 늙은 요아킴과 안나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팔을 한쪽 잘라내는 것보다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유대인들의 전통은 아이들을 나의 것이 아닌 하느님 것으로 돌려드림으로써 주님의 도구로 사용되도록 허락해야만 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태어나고 길러져서 부모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은혜에 보답하려 하기에 부모가 놓아주지 않으면 새장에 갇힌 새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새장에서는 나는 법을 배울 수 없고 나는 법을 배울 수 없다면 큰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와한 비디오’에 ‘괴물 대신 쓰레기로 2층까지 꽉 찬 트레시 홈’이란 영상이 올라왔습니다.
주택가 한가운데 자리한 이층집이 온갖 쓰레기로 덮여 있는 것입니다.
주인 할머니 할아버지는 막내아들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자 아들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모으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아들은 병원에 실려 가면서도 꼭 필요한 것들은
치우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부모는 착하지만,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는 아이를 긍정하면서 본인들도 병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 성당에서는 이번 주 주일 교중미사에서 아이들 첫영성체와 견진성사를 동시에 진행합니다.
이때 특별 순서로 부모들이 자녀들을 제단에 봉헌하고 ‘요게벳의 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요게벳은 모세의 어머니입니다.
누구든 이 세상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려면
수많은 시련을 겪어야 합니다.
요게벳은 어쩔 수 없이 모세를 바구니에 넣어
나일강으로 떠내려 보냈습니다.
이것이 봉헌입니다.
바구니는 악어에게 먹힐 수도 있고 지나가는 배에 깔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파라오 공주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에서 자라며 더 넓은 지식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참 소명을 깨닫고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하는 하느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만약 요게벳이 아이를 자기 품에만 안고 있으려 했다면 어땠을까요?
하느님께도, 모세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해가 되었을 것입니다.
요게벳의 노래 가사를 살펴봅시다.
“작은 갈대 상자, 물이 새지 않도록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네.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녀의 두 눈엔 눈물이 흘러. 동그란 눈으로 엄마를 보고 있는 아이와 입을 맞추고, 상자를 덮고 강가에 띄우며 간절히 기도했겠지.
정처 없이 강물에 흔들흔들, 흘러 내려가는 그 상자를 보며, 눈을 감아도 보이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겠지.
너의 삶의 참 주인, 너의 참 부모이신 하느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맡긴다.
너의 삶의 참 주인, 너를 이끄시는 주, 하느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드린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녀의 두 눈엔 눈물이 흐르고 흘러.”
만약 이태석 신부님을 어머니가 말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태석 신부가 지금까지 쌓아 주님께 가져간 보화를 얻지 못하게 만드는 방해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태석 신부의 어머니는 이태석 신부를 진정으로 주님께 봉헌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에서도 상을 받는 일이 될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자녀에게 “너는 더 큰 세상으로 나갈 자격이 있다!”여야지, “우리가 있으니 우리 품 안에 있으면 안전해!”여서는 안 됩니다.
이는 자녀를 새 장 속의 새처럼 자신들 크기 안에 규정하는 일이지, 절대 자녀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이 세상이 아닌 천국에 살 수 있다는 자존감을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2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마태오 12,46-50
지극한 겸손과 순명으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옥좌가 되신 성모님!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천이요 정점인 성체성사의 아름다움과 가치, 중요성과 참된 의미를 잘 소개하는 영성서적이 출간되었습니다.
'성체성사의 일곱가지 비밀'(비니플린저, 성바오로, 구입: 02-944-8300, www.paolo.kr)입니다.
성체성사에 대한 정통 가톨릭 교회 교리는 물론 성체성사를 사랑했던 성인들의 가르침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성찬례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이다. 다른 여러 성사들은 성찬례와 연결되어 있고 성찬례를 지향하고 있다.
실제로,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교회의 모든 영적 선이 내포되어 있다.(교회헌장, 사제생활 교령)
모든 미사에 성모 마리아께서 모든 천사와 천상 궁정 전체와 함께 현존하십니다.
미사때 마다 저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광휘가 빛나며 천사들과 성인들이 영광 속에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오상의 성 비오 신부)
한번은 거룩한 영성체 뒤에 이러한 말이 들렸다. '너는 우리의 거처다.' 바로 그 순간, 나는 내 영혼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 거룩한 삼위께서 현존하심을 느꼈다.(성녀 파우스티나)
미사에 갈 때 우리는 천국에 가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상징이나 은유가 아니며, 우화나 비유도 아니다. 이것은 실제다.
우리는 미사에 갈 때 정말로 천국에 가는 것이다. 이는 음악의 수준이라든가 강론의 열정과는 상관없다.
우리가 참석하는 모든 미사에 해당하는 진실이다.
미사는, 정말로 각각의 모든 미사는 지상에 현존하는 천국이다.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을 맞는 우리에게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의 가르침은
얼마나 은혜로운지 모릅니다.
영성체를 위해 제대 가까이 나아가며 펼치는 우리의 손에 대한 설명인데...묵상해보니,
그 순간 표현되는 우리의 손 모양은 다름 아닌 성모님의 삶 그 자체입니다.
영성체 때 신자들은 두 손으로 옥좌를 만드는 동시에 십자가 형태를 만들어야 합니다.
너무도 곱고 너무도 심오한 이 상징적 행동이야말로 그분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의 두 손이 십자가를 형성하고, 이 십자가는 옥좌가 되어 왕께서 그 위에 앉습니다.
그러므로 펼쳐서 내민 손은 한 사람이 자신을 주님께 내어드리는 방식의 표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분을 향해 두 손을 펼쳐 보이면 그 두 손은 이 세상에서 그분 현존의 도구가 되고 그분 자비의 옥좌가 됩니다.
주님께 온전히 봉헌되신 성모님의 한평생은 마치 영성체 순간 우리가 펼친 손과도 같았습니다.
지극한 겸손과 순명의 덕으로 무장한 성모님의 일생은 지극히 거룩하신 구세주 그리스도의 옥좌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강론>
(2023. 11. 21. 화)(마태 12,46-50)
<예수님의 참 가족>
“예수님께서 아직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6-50)”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0-21).”
예수님의 친척들이 들었다는 ‘소문’은 율법학자들이 퍼뜨린 소문일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마르 3,22).”
여기서 ‘미쳤다.’ 라는 말은, ‘제 정신이 아니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마귀 들렸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어떻든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이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예수님을 집으로 데려가려고 했는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자 성모님을 모시고 다시 왔을 것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과 완전히 일치되어서 사신 분이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과 예수님을 잘 알고 계셨고, 그래서 아마도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직접 본 다음에, 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들을 직접 들은 다음에 잘 판단하라고 친척들을 타이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 믿는 사람들을 믿게 만드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을 안 믿는 형제들’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그래서 예수님의 형제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이곳을 떠나 유다로 가서, 하시는 일들을 제자들도 보게 하십시오.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남몰래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일들을 할 바에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십시오.’
사실 예수님의 형제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요한 7,2-5).”
그런 상황을 생각하면,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라는 말씀과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라는 말씀은, 일차적으로는 당신을 믿지 않는 형제들(친척들)을
겨냥해서 하신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라는 질문은, “어떻게 살아야 나의 참 가족이 될 수 있는가?”,
즉 “어떻게 사는 사람이 구원받는가?” 라는 뜻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해야 나의 참 가족이 될 수 있다.”, 즉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면서 사는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는 것과 구원을 받는 것은
‘같은 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일까?
‘하느님의 뜻’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입니다(마태 18,14; 요한 3,17).
그래서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곧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그 구원을 얻기를 희망하고,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구원받게 되고,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됩니다.
믿지 않고, 희망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서 허무하게 끝나게 됩니다.>
‘아버지의 뜻’이라는 말에서, ‘되찾은 아들의 비유’가 연상됩니다.
그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의 뜻은(바람은), 아들들이 모두 아버지의 집에서 기쁨과 행복을 누리면서 함께 사는 것입니다(루카 15,32).
그런데 ‘작은아들’의 경우에는 아버지의 뜻을 외면하고, 방종한 생활을 하기를 원해서 먼 고장으로 떠났습니다(루카 15,13).
그런데 그렇게 살다가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와서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고, 아버지가 베푼 잔치에 참석했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뜻을 제대로 실행하기 시작한 일입니다.
‘큰아들’의 경우에는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성실하게 일하긴 했지만, 그는 자신이 종처럼 노동만 한다고 생각해서 기쁨 없이 살고 있었습니다(루카 15,29).
그것은 겉으로만 아버지의 뜻을 실행한 것이어서,
제대로 실행한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큰아들은 아버지가 베푼 잔치에 참석하기를 거부했습니다(루카 15,28).
그것은 아버지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른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지금 ‘나에게’ 바라시는 것은,
‘내가’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과 생명을 얻으려고 내가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사는 것이고, 하느님께 큰 기쁨을 드리는 일입니다.
사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그 생활이 바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생활이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생활입니다.
그런 나를(우리를) 보시면서 하느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때, 나는(우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더욱 큰 기쁨을 얻게 됩니다.
바로 그 기쁨이 곧 하느님 나라의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