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의 종말과 독일 현대회화 · 박정기---
잭슨 폴록의 추상표현주의에 이르러 회화의 존재론적 물음이 제기되면서 모더니즘 회화는 종말에 이르게 된다. 이 시기 독일의 젊은 화가들은 모더니즘 회화의 이상주의적인 추상세계에 억눌려 있던 감성을 해방시키고자 포스트아방가르드 회화로의 전환을 시도했다. 신표현주의로 불리는 화가 그룹과 리히터와 폴케 등 실험적 화가들이 모더니즘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노력하면서, 1980년대 독일 회화는 새로운 융성기를 맞는다. 그러나 필자는 독일 회화, 나아가 회화 일반이 이 시기 이후 새로운 발전은 없다고 본다.
1950년대 말과 1960년대에 독일의 많은 젊은 화가가 당시에 이미 인습적인 것으로 굳어져 버린 모더니즘의 신(新)아방가르드(Neo-avantgarde) 회화에 등을 돌리고, ‘회화의 종말(das Ende der Malerei)’을 고지(告知)했다. 모더니즘 회화가 열정적으로 추구한 것들, 즉 기하학적 추상과 추상표현주의에서의 새로운 가시성과 새로운 현실의 발견, 이전에 알려지지 않은 세계를 열어 보이는 것으로서의 미적 체험, 그리고 회화에 대한 존재론적 내지 형이상학적인 요구는 젊은 화가들에게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에 따라 그들은 모더니즘의 신아방가르드 회화의 종말과 함께 아방가르드 회화 일반이 종말을 맞았으며, 새로운 회화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회화의 종말은 회화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아방가르드 회화로부터 새로운 포스트아방가르드(Post-avantgarde) 회화로 전환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방가르드 회화에서 포스트아방가르드로 이환하는 데 있어 독일의 젊은 화가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1921∼1986)다. 그는 미술의 개념을 아방가르드의 협소한 미적, 이상주의적 추상의 한계를 넘어 현실의 전체 경험의 공간으로 확대함으로써 이러한 전환을 이끈 가장 중요한 선구자가 되었다. 또한 그는 1970년대에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함으로써 이른바 현대 세계미술계에서 ‘독일미술’의 국제적 위상을 확립했으며, 그 결과 향후 독일 포스트아방가르드 회화가 중요한 국제적 현대미술 운동의 하나로 발전하는 데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독일 포스트아방가르드 회화의 발전
요셉 보이스의 영향 아래 먼저 1960∼1970년대에 독일 포스트아방가르드 회화의 길을 닦은 선구자로서는 게오르그 바젤리츠(Georg Baselitz, 1938∼ )와 마르쿠스 뤼퍼츠(Markus L웤retz, 1941∼ ), 외르그 임멘도르프(J쉜g Immendorf, 1945∼ ), 펭크(A.R. Penck, 1939∼ , 그리고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 1945∼ )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흔히 ‘신표현주의(Neo-expression!ism) 화가’로 불리지만, 이것은 주로 독일미술이 곧 표현주의라는 일반적인 관념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이들의 회화가 갖는 의미는 오히려 모더니즘의 신아방가르드 회화의 미학로부터 이탈하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림의 모티프를 거꾸로 그리는 화가로 알려진 바젤리츠의 경우, 그는 이러한 기법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시각의 범형 (範型)을 방해한다. 그의 그림은 회화적인 행동(Aktion)의 장소로서 화가의 감정이 그대로 실려 있다는 점에서 모더니즘의 회화세계를 벗어난다. 그는 스스로 “그림은 자율적이고 통제된 감성적 대상이다. 그것은 그 자체 외에 어느 것과도 관계가 없으며, 따라서 세계의 한 부분으로 보아야 하고, 세계에 관한 텍스트나 논평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독일의 한 비평가는 이런 관점에서 그의 회화의 미학을 ‘단절의 미학 (?sthetik der Br웘e)’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뤼퍼츠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바젤리츠의 관점과 일치한다. 그의 회화에서도 각각의 특별한 그림의 모티프는 그 어떤 내재적인 의미를 갖지 않으며, 다만 회화의 행위를 위한 기회를 제공할 뿐이다. 보이스의 제자인 임멘도르프의 회화도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표현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격렬한 정치 참여작가로 출발하여 노동자 계급의 삶과 반(反)베트남전 등 반미적인 테마를 주로 다루었으며, 후에는 이탈리아의 현대화가 레나토 구투소(Renato Guttuso)의 대작 〈카페 그레코(Caf?Greco)〉를 모델로 한 〈카페 도이칠란트(Caf?Deutschland)〉 연작을 통해 동서독의 분단현실을 묘사하는 등, 모더니즘의 신아방가르드 회화의 미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추상세계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회화세계를 확립한다.
그러나 이들보다 신표현주의 작가로 가장 많이 오해된 화가는 안젤름 키퍼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회화는 양식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전혀 비표현주의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가 그리는 풍경은 20세기의 대표적인 표현주의 화가인 에밀 놀데(Emil Nolde)나 슈미트 로틀루프(Karl Schmidt-Rottluff),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등의 경우처럼 원초적인 자연의 힘을 표출하거나 그것을 신비화하지 않는다. 그가 그리는 땅은 불타 버린 땅으로서 세계 종말의 비애를 드러낼 뿐이다. 그가 그리는 신화들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현재도, 과거도, 미래도 없는 것이며, 키퍼는 그것들을 독일의 역사에 의해 의식적으로 악용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은 그가 한때 배운 바 있는 보이스에 못지않게 깊고 복합적인 역사이해를 바탕으로 한, 매우 독일적인 ‘사변적 회화(Denkbilder)’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른바 ‘신표현주의 화가’로 불리는 이 화가 그룹과 달리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1932∼ )와 지그마르 폴케(Sigmar Polke, 1941∼ )는 포스트아방가르드 회화의 발전에 더욱 직접적이고 큰 영향을 끼친다. 리히터는 특히 초기에 모더니즘의 신아방가르드 회화가 추구한 미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추상세계를 파괴하고 해체한다는 목표를 세웠으며, 이러한 목표 아래 사진을 이용한 독특한 작품을 제작한다. 그는 여기서 사진의 현실을 독립적이고도 객관적인 현실의 한 조각으로 파악한 것이다. 리히터는 그 후에도 다양한 회화적 실험을 통해 ‘회화의 종말 이후의 회화’의 가능성을 계속 탐구했다.
폴케 역시 리히터와 비슷하게 좀처럼 만족할 줄 모르는 실험적 화가로서 그의 회화에 온갖 매체를 모두 사용하지만, 그의 회화는 특히 현실의 전체 경험을 포괄한다는 점에서 보이스와 같은 유니버설(universal)한 면모를 보인다. 두 차례나 베니스비엔날레 총감독을 지낸 전시기획자 하랄트 제만(Harald Szemann)에 따르면, “폴케는 유니버설하다. 혁명적이면서 온유하며, 잔인하고 환상적이면서 매우 인간적이다. 그는 미술관과 화랑의 화가이면서 미술관과 화랑을 경멸한다.” 그러나 폴케의 현실에 대한 태도는 아이러니(Ironie)로 여과된 것이라는 점에서 보이스의 그것과 다르다. 그는 이러한 태도에 의해 현실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경험하며, 따라서 그의 현실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모든 것이 뒤섞이고 연결되어 있어 포착하기 어렵다. 그의 회화에는 아름다운 것과 충격적인 것, 선과 악 등이 서로 융합되어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그는 그 시대 미술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의 한 사람이자, 1980년대 포스트아방가르드 회화의 가장 중요한 선구자의 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포스트아방가르드 회화는 198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발전하면서 그 본질적인 특징을 완전히 드러낸다. 이러한 특징 가운데 가장 우선적이고 현저하게 나타난 것은, 모더니즘 회화의 미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추상세계에 억눌려 있던 감성의 해방이다. 그리고 그 결과 회화에는 번득이는 자유로운 감성과 함께 그림을 그리는 즐거움이 넘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독일의 회화는 새로운 융성기를 맞는다. 실제로 이 시기에 전세계적으로 독일만큼 재능 있는 화가를 많이 배출한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다.
회화에서 이러한 감성의 복귀는 우선 모더니즘 회화 이전의 구상회화로 회귀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포스트아방가르드 화가들은 구상회화의 전승된 형식이 교의적(敎義的)이고 편협한 아방가르드 회화보다 더 자유로운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들은 또한 회화에서 고급미술과 저급미술의 위계질서적인 구조를 파괴하고 과감하게 대중문화의 화상 형식을 채용했다. 이것은, 그때까지 일반적으로 경멸받아 온 대중문화의 화상 형식이, 폐쇄적이고 화상이 없는 폐쇄적인 아방가르드 회화의 형성물보다 감정내용을 싣는 데 더 나은 것이 될 수 있다는 관점에 입각한 것이었다. 이 밖에도 이들은 리히터와 폴케 등의 예를 따라 그들의 회화에서 사진과 영화, 비디오 등 여러 매체를 실험함으로써 모더니즘의 한계를 넘어서는 시도를 했다.
1980년에 열린 쾰른시(市)의 화가그룹 ‘뮐하임의 자유(M웘lheimer Freiheit)’(뮐하임은 쾰른의 한 지역)의 전시회는 이러한 포스트아방가르드 회화의 특징을 대부분 보여 준 것이다. 이 그룹의 화가들은 특히 그룹 이름의 ‘자유’가 시사하듯이 그들의 작품을 통해 감성의 해방과 함께 직접적인 신체경험에 대한 본능적 욕구를 거리낌없이 표출하였고, 이에 따라 그들의 회화에서는 거의 방종에 가까운 신체성이 두드러졌다. 교미와 자위행위, 대변보기, 목조르기, 구역질, 때리기, 고문하기, 목자르기 등이 이들 작품의 주된 모티프를 이루고 있었고, 이에 따라 형상들도 왜곡되어 뒤틀리고 단편화된 것들로서 대부분 잔혹한 모습이다.
이들 ‘뮐하임의 자유’ 그룹에서 특히 주목받은 화가는 요셉 보이스의 제자이자 지그마르 폴케에게 영향을 받은 발터 단(Walter Dahn, 1954∼)이다. 그는 이 전시회 이후에도 모든 전통적인 회화적 가치의 전도와 회화 형식의 철저한 풍자를 추구하면서, 같은 그룹멤버로서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안출해 낸 체코 출신의 이리 게오르크 도쿠필(Jiri Georg Dokoupil, 1954∼ )과 함께 1990년대 중반까지 포스트아방가르드 회화를 대표하는 존재로서 활동한다.
한편 같은해인 1980년 라이너 페팅(Rainer Fetting, 1949∼ )은 살로메(Salom?1954∼ ), 헬무트 미덴도르프(Helmut Middendorf, 1953∼ ), 베른트 침머(Bernd Zimmer, 1948∼ ) 등과 함께 베를린에 화랑을 설립하는데, 여기서 ‘새로운 미개인(Neue Wilden)’ 그룹이 생겨난다. 페팅은 이후 반 고흐와 프랜시스 베이컨과 연결하는 한편 록음악의 엑스터시적인 리듬을 그의 회화에 도입하는 방향으로 포스트아방가르드 회화를 발전시킨다. 그러나 그는 같은 경향을 보인 미덴도르프보다 차분하게 그의 형상에 감성적이고 에로틱한 아우라를 부여하며, 미국의 비평가 도널드 커스핏(Donald Kuspit)으로부터 그의 회화는 “놀랍게도 강제성 없는 순수한 감성을 보여 준다”는 평을 받는다.
마르틴 키펜베르거(Martin Kippenberger, 1953∼1997)와 알버트 욀렌(Albert Oehlen, 1954∼ ), 베르너 뷔트너(Werner B웪tner, 1954∼ ), 그리고 카를 호르스트 회디케(Karl Horst H쉊icke, 1938∼ )도 긴밀한 협동작업을 통해 1980년대 포스트아방가르드 회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 키펜베르거는 인간 존재를 둘러싼 허위의 가상을 폭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심술궂은 시선(b쉝er Blick)’의 화가로 불리기도 했지만, 그의 회화는 본질적으로 계몽적인 구상을 지닌 것으로서, 그런 한에서 아직 모더니즘적이고 아방가르드적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것이었다. 또 비교적 늦게 회화를 시작한 욀렌은 보이스의 강력한 영향을 간직한 폴케의 제자로서 니체의 철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했으며, 그의 회화에서 극단적인 아이러니를 표출했다. 그는 미술의 본질을 이루는 ‘가상(Schein)’은 삶의 오물을 은폐하는 것이라고 봤으며, 이런 관점에서 뷔트너와 함께 일상적인 삶의 불결함을 드러내기 위해 주로 탁하고 불결한 색채의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이러한 ‘불결함’을 통해 모더니즘 회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생명력을 그의 회화에 부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1980년대에 융성을 보인 독일의 ‘회화의 종말 이후의 회화’, 즉 포스트아방가르드 회화는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 새로이 발전하지 못하고 1980년대 단계에 머무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사태 발전은 주로 전자매체의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포스트아방가르드 회화뿐만 아니라 회화 일반의 모든 규칙이 힘을 상실하고, 그 결과 필연적으로 그 어떤 회화의 이론도 보편타당성을 요구하기 어렵게 된 데서 기인하는 듯이 보인다. 이에 따라 1990년대의 회화에서 우리는 전세계적으로 그 어떤 주도적인 경향도, 그 어떤 표준적인 그룹의 활동도, 그리고 그 어떤 대화가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미술은 각 시대에 반응하는 것, 시대의 문제와 현안에 반응하는 것이며, 무시간적인 미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된다. ■
-- 출처 <월간미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