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일(雪日)
김남조
겨울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이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 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 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시집 『설일』, 1971)
[어휘풀이]
-이적진 : 이적지는, ‘이적지’는 ‘이제까지’의 방언
[작품해설]
이 시는 김남조의 제7시집 『설일』의 표제시로, 새해 벽두에 눈 내리는 풍경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을 여성 특유의 섬세한 언어적 감성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김남조는 초기에는 여성적인 섬세한 감각으로 인간 긍정과 넘치는 생명력을 표현하였으며, 후기에는 가톨릭적인 사랑과 윤리를 시적으로 승화시킨 작품을 주로 발표하였다. 그의 후기 시의 한 면모를 보여 주는 이 작품에는 삶에 대한 경건하고도 긍정적인 자세가 절대자에 대한 깊은 신뢰감을 바탕으로 하여 잘 나타나 있다.
눈 내리는 새해 아침, 바람에 흔들리는 겨울나무를 바라보며 삼라만상(參羅萬像) 어느 것도 혼자인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이 시는 출발한다. 혼자 서 있는 거처럼 보이는 겨울나무도 바람이 있음으로 하여 그 흔들림이 보이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바람도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의해 그 존재가 인식된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화자는, 어떠한 고난과 역경의 상황 속에서도 신앙적 믿음의 대상인 절대자가 자신과 함께 동행한다는 진리를 깨닫는다. 일반적으로 ‘바람’은 시련과 역경의 부정적 이미지이지만, 여기서는 ‘겨울나무’와 동반자적 관계의 의미로 사용되며, 보이지 않는 대상인 ‘바람’을 가시화(可視化)하기 위해 ‘머리채 긴 바람’으로 표혀된다. 또한 ‘나무와 바람’[구체적]⤑‘모두’[일반적]⤑‘나’[구체적]의 시상 전개로 하늘 아래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한편, 화자인 ‘나’에게로 초점을 옮긴다. ‘나무와 바람’에서 착안된 ‘함께 함’의 깨달음을 세상 모든 이로 일반화하였다가 화자인 ‘나’도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부각시키며 신앙적 경험의 목소리로 그 증거를 대고 있다. 이는 가장 고독한 순간이라 할지라도 절대자가 자신과 함께 하고 있다는 신뢰감에서 우러나오는 자기 고백이다.
이렇듯 아무리 고통스러운 삶일지라도 절대자가 항상 함께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화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삶의 고난이나 사랑의 역경마저도 절대자의 은총이요, 섭리 안에 있는 것으로 인식하기에 이른다. 그리고는 이와 같은 삶과 사랑에 대한 깊은 신앙적 이해를 통해 화자는 마침내 긍정적인 삶에 대한 다짐을 한다. 즉 지금까지 남과 다투며 살아온 왜곡된 삶의 모습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참아내는 순수한 삶으로 변모된 태도를 갖는 것이다. 다시말해, 화자는 인생이란 하늘이 베풀어 준, 분에 넘치는 축복의 잔치임을 알고 좀더 너른 아량과 이해심으로 인생을 누리며 살겠다고 다짐한다. 여기에서 ‘-살자’, ‘-누리자’와 같은 청유형 어미는 자신을 향한 다짐이자 독자에 대한 권유의 의미를 함께 지니며, 단순 표현인 ‘살자’에서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표현인 ‘누리자’로 그 의미가 심화 확대되고 있다. 이렇게 삶의 자세를 변모시킨 화자에게 눈은 이제 더 이상 단순한 눈이 아니라, ‘순수의 얼음 꽃’과 ‘승천한 눈물’이 다시 지상에 내려오는 것으로, 그것들은 모두 순수의 표상인 ‘눈물’을 의미한다. 결국 ‘백설’은 순수한 삶의 표상이자, 순수의 눈물에 대한 하늘의 응답, 즉 ‘함께 함’의 표상이 된다.
이 시의 짜임은 기,승,전,결의 4단 구성으로, 혼자가 아니라는 인식[기]⤑삶과 사랑에 대한 인식[승]⤑삶의 바람직한 자세[전]⤑새해 아침 눈을 맞는 마음[결]에 따라 시상이 전개되고 있다. 한편 이 시의 문체적 특성은 서술적 문체, 운율적 언어, 기독교적 어휘, 관조적 어조, 시각적 언어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이 시는 ‘무엇이- 어떠하다’라는 식의 서술적 문체를 통하여 이미지 위주의 시가 놓치기 쉬운 시적 의미를 충분히 담아내고 있을 뿐 아니라, 서술적 문체에 결여되기 쉬운 표현의 일상성 문제는 고도의 비유적 언어로 해결하고 있다. 또한 통사 구조와 음절 반복, 대구법과 ‘ㄹ’음 반복 등 다양한 방법으로 형성된 리듬감은 인생에 대한 관조적 이해와 반응이라는 의미적 요소를 더욱 잘 부각시키고 있다.
[작가소개]
김남조(金南祚)
1927년 대구 출생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1950년 『연합신문』에 시 「성숙(星宿)」, 「잔상」을 발표하여 등단
1953년 시집 『목숨』을 발간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 시작
1954년 숙명여자대학교 국문과 교수
1958년 자유문학가협회상 수상
1963년 오월문학상 수상
1975년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서울시문화상 및 한국시인협회 회장 역임.
시집 : 『목숨』(1953), 『나아드의 향유』(1955), 『나무와 바람』(1958), 『수정과 장미』(1959), 『정념의 기』(1960), 『풍림(楓林)의 음악』(1963), 『잠시, 그리고 영원히』(1965), 『겨울 바다』(1967), 『설일』(1971), 『영혼과 빵』(1973), 『동행』(1976), 『김남조시집』(1981), 『빛과 고요』(1982), 『김남조전집』(1983), 『너를 위하여』(1985), 『저무는 날에』(1985), 『고독보다 깊은 사랑』(1986), 『둘의 마음에 산울림이』(1986), 『문앞에 계신 손님』(1986), 『말하지 않은 말』(1986), 『겨울나무』(1987), 『문앞에 계신 손님』(1987), 『둘의 마음에 산울림이』(1987), 『바람세례』(1988), 『마음 안의 마음』(1988), 『깨어나소서 주여』(1989), 『그리움처럼 빛처럼』(1989), 『겨울꽃』(1990), 『믿음을 위하여』(1991), 『평안을 위하여』(1995), 『요람의 노래』(1996), 『외롭거든 나의 사랑이소서』(1997), 『너를 위하여』(1998), 『희망학습』(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