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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3. 묵상글 ( 연중 제1주간 화요일. - 영적인 권위, - 하느님 중심의 섬김의 삶 .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직 / 05:44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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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3. 연중 제1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1.13 05:39
- 영적인 권위
공생활을 시작하며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나 행위가
당대 종교 지도자들보다 그 가르침에 권위가 있다고 사람들이 놀랍니다.
그러고 보니 권위가 있는 것은 좋은 것이고,
저도 제 말과 행위에 권위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편 생각하는데
권위가 있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세속적인 것이 아닐까 또한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런 것일 겁니다.
내가 칭찬과 존경을 받고,
사람들이 내게 머릴 숙이고 복종하길 바라기 때문이라면 세속적이고,
공평무사하고 공동선을 위한 거라면 분명 세속적인 것은 아니겠지요.
사실 목적 자체가 이렇게 세속적이면 권위는 그것으로 사라지고,
권위는 그 무엇이든 자기를 초월한 것일 때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는 거기에 자기가 하나도 없기에 권위가 있습니다.
그뿐이 아니라 그 권위가 성령의 권위이기에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악령이나 더러운 영을 굴복시킬 수 있는 것은 성령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분야의 권위자들이 있지요.
예를 들어 심장이나 간 이식 수술의 권위자가 있지만
아무리 권위자여도 그들에게는 영들이 굴복하지 않고 오직 성령에게만 굴복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에게 이런 영적인 권위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의 놀람을 통해 이렇게 전합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지금도 육신의 병보다 마음의 병이나 정신과 영혼의 병을 앓는 사람이 많습니다.
마음이나 정신의 병은 심리학이나 신경정신과 권위자가 고칠 수 있겠지만
영적인 병은 영적인 권위자만 고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꼭 악령 추방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간혹 그런 썩어빠진 정신을 가지고 어떻게 살려느냐! 나무라기도 합니다.
우리도 신자라고 하면서 이런 세속적인 정신으로 가득할 때
우리 안에서 이런 세속적이고 더러운 정신을 추방하려면 프란치스코의 가르침 따라
기도와 헌신의 정신을 차림으로써 우리 안에 성령을 모셔 들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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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3.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섬김의 삶
참 권위의 힘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하느님은 멀리서 세상을 보지 않는다.”
엊그제 주님 세례 축일시 레오 교황의 강론중 한말씀입니다. 늘 함께 계신 하느님이시기에 아주 가까이서 우리를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삶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교황청에 속한 직원들의 아기들 20명에게 세례를 주면서 교황의 강론중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예수님이 이제 삶의 의미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미 이런 세례 전통은 1981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으로부터 시작됐으니 45년 역사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바로 교황의 이런 <하느님 중심의 섬김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권위의 힘, 권위있는 삶입니다. 갑자기 떠오른, 언젠가 인용했던 어느 형제가 부인에게 남겼다는 임종어가 세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1.미안하다, 2.고맙다, 3.사랑한다.”
이 세 말마디에 마음의 앙금은 눈녹듯 사라지고 죽은 남편을 더욱 사랑하게 됐다는 고백입니다. 이런 임종어를 남긴 형제님 필시 하느님 중심의 섬김의 삶에 충실했음이 분명합니다. 이런 진솔한 고백이 신뢰와 더불어 권위를 보장해 줍니다. 세상을 떠나면서 이웃들에게 또 하느님에게 고백할 말마디는 이 셋뿐일 것입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하느님 중심의 섬김의 삶; 참 권위의 힘”입니다. 권위주의는 나쁘지만 살아있는 권위는 인간 삶의 필수입니다. 사람이 신뢰의 상실로 권위가 추락하면 신뢰도 권위도 회복 불능입니다. 크든 작든 신뢰와 권위를 잃으면 자신은 물론 공동체도 무너지고 위태해집니다. 권위는 무엇입니까? 아주 오래전 신학교 희랍어 시간에 들은 권위란 뜻을 잊지 못합니다.
“엑스 오우시아(ex-ousia)”, 바로 존재로부터 나온 권위라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 존재의 중심으로부터 나온 권위라는 것입니다. 이런 참된 권위는 재물이나 명예, 지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섬김의 삶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이래야 권위는 힘을 지니게 됩니다.
우리에게 참 권위의 중심은 예수님입니다. 이런 참 권위의 중심이 없으면 개인도 공동체도 곧 무질서로 무너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런 예수님의 참 권위를 알아 본 카파르나움의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몹시 놀랍니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말그대로 이런 권위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참 권위는 악령 추방에서 절정에 도달합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본 더러운 영, 악령에 대해 예수님은 권위있는 명령으로 그를 제압합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은 다음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갑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놀라 고백합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예수님의 참 권위가, 참 권위의 힘이 악령을 쫓아낸 것입니다.
진정 권위의 힘, 권위있는 삶을 원하십니까? 답은 하나 예수님처럼 하느님 중심의 섬김의 삶에 지극히 충실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하느님 중심의 섬김의 삶에서 저절로 형성되는 권위의 힘, 권위있는 삶이요, 누구나 승복하는 참 권위입니다. 그러니 섬김의 모범이신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믿고 사랑하면서 주님과의 일치가 깊어질 때 주님을 닮아 참 섬김의 삶, 참 권위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도 엘카나의 아내 한나가 불안에서 벗어나 중심을 잡고 안정을 찾는데 엘리 사제의 섬김의 권위가 큰 역할을 합니다. 한나의 기도가 응답되어 엘리가 권위있게 섬김의 역할을 훌륭히 해냄으로 한나도 안정과 평화를 찾습니다.
“안심하고 돌아가시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당신이 드린 청을 들어주실 것이오.”
“나리께서 당신 여종을 너그럽게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역시 한나의 겸손하고도 한결같은 기도를 통해 그녀가 하느님 중심의 섬김의 삶에 지극히 충실했음을 봅니다. 오늘 미사중 화답송은 그대로 한나가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찬미가입니다. 그 어머니 한나에 그 아들 사무엘입니다. 때가 되자 한나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자, 한나는 “내가 청을 드려 얻었다.”하면서,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하니, 이런 한나 어머니의 하느님 중심의 삶도 장차 사무엘의 기도와 섬김, 권위의 삶에 깊은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선생은 많으나 스승은 없고, 노인은 많으나 어른은 없는 시대라고 개탄합니다. 사람들은 날로 신뢰와 권위를 잃어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작 회복하여 지켜내야 할 하느님 중심의 섬김의 삶이요 권위있는 삶입니다. 바로 이런 <섬김의 권위>의 빛나는 모범이 예수님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삶의 중심인 예수님을 닮아 하느님 중심의 섬김의 삶, 권위있는 삶을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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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3. 연중 제1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친밀한 기원의 이야기!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지금 여기 살아 있음 자체가 하느님께서 주신 말로 다할 수 없는 은총임을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한처음에
친밀한 기원의 이야기
2026년 1월 12일 월요일
브라이언 맥라렌은 우주와 그 안의 모든 피조물이 창조된 기적을 묵상합니다:
첫 번째이자 가장 큰 놀라움—실로 기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은—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의 첫 장과 오늘날 과학의 깊은 사유는 일치합니다. 모든 것은 태초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공간과 시간, 에너지와 물질, 중력과 빛이 터져 나오고, 피어나고, 폭발하며 존재로 들어왔습니다. 창세기의 이야기에 비추어 말하자면, 이 우주의 가능성이 현실로 흘러넘친 것은 창조의 성령이신 하느님께서 처음으로 기쁨의 초대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있어라!’ 그리고 그 응답으로 무엇이 일어났습니까? 빛. 시간. 공간. 물질. 움직임. 바다. 돌. 물고기. 참새. 당신. 나. 지금 여기 살아 있음이라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은총과 특권을 누리며….
창세기는 "시초" 혹은 "시작"을 뜻합니다. 그것은 깊고 다층적인 시와 고대의 장대한 이야기들을 통해 말합니다. 창세기의 시와 이야기는 오늘 우리가 더욱 충만하게 살아가도록 돕는 깊은 진리를 드러냅니다. 그것들은 우주가 곧 하느님의 자기 표현, 하느님의 말씀 행위임을 담대히 선포합니다. 이는 곧 모든 것이 언제나 본질적으로 거룩하고, 영적이며, 가치 있고, 의미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중요합니다.
창세기를 통해 우리는 선함과 서로 연결되어 있음의 이야기를 만나게 됩니다:
창세기는 우주가 선하다고 말합니다—너무나 중요한 진리라서 노래의 주제처럼 반복됩니다…. 모든 강과 언덕과 골짜기와 숲은 선합니다. 피부도 선하고, 뼈도 선합니다. 사랑하고 먹고 숨 쉬고 태어나고 나이 들어가는 모든 과정이 선합니다, 선합니다, 선합니다. 모든 것이 선합니다. 생명은 선합니다.
창세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히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창조가 하나의 아름답고 통합된 전체로 함께 고려되고 누려지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시는 긴 창조 과정 끝에 드러나는 "매우 좋음(very goodness: '참 좋다!')"을 묘사합니다. 모든 부분이, 우리를 포함하여, 하나로 조화롭게 함께 작동할 때 그 전체는 참으로 선합니다. 그 조화로운 전체가 너무나 선하기에 창조주께서는 마치 하루를 쉬시며 그것을 즐기십니다. 그 안식의 날은 우리에게 존재의 목적이 돈이나 권력, 명예나 안전 같은 것에 있지 않음을 알려줍니다. 오히려 창조의 선함과 아름다움, 살아 있음에 참여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 우리는 창조의 일부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보통의 흙에서 빚어졌습니다. 창세기는 '흙(dust)'이라 하고, 천문학자들은 '별의 티끌(stardust)'이라 말합니다. 그 흙은 수박과 곡식과 사과와 땅콩이 되고, 그것들이 음식이 되어, 다시 우리 몸이 됩니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과 함께 우리는 생명의 숨(breath of life)을 나누며, 탄생과 죽음, 번식과 순환과 새로움의 동일한 리듬에 참여합니다. 우리와 모든 생명은 창조 이야기의 일부이며, 생명의 나무의 서로 다른 가지들입니다. 그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과 연결되고 관계 맺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하느님을 부분적으로 정의하는 좋은 방식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모든 것과 연결되고 관계 맺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최근 브라이언 맥라렌의 묵상(meditation)을 읽었습니다. 그는 ‘하나된 지구’에 대한 꿈을 나누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읽으며 저는 에덴 동산이 단지 작은 비밀스러운 장소가 아니라, 사실은 우리 ‘어머니 지구’ 전체가 처음 창조될 때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은 수많은 세월 동안 인간의 발자취가 남긴 결과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더 많은 ‘꿈꾸는 이들’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David R.
References
Brian D. McLaren, We Make the Road by Walking: A Year-Long Quest for Spiritual Formation, Reorientation, and Activation (Jericho Books, 2014), 3, 5–6, 7–8.]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Sergey Kvint, untitled (detail), 2023,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숲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한 줄기 푸른 새싹은, 창조주께서 심어주신 땅의 생성적 상상력이 고요히 들려주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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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세상의 악과 어둠을 몰아내시는 주님이 '나'와 함께하십니다. 영원히~~~
"땅은 문자 그대로 지옥이었다." 예수님 시대 사람들은 악령의 존재를 그렇게 묘사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공기가 악령으로 가득 차 있다고 믿었고, 그들이 사람 안으로 들어가면 육체적·정신적 질병을 일으킨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미생물에 대해 말하는 것과 비슷하게 들리지만, 당시의 악령은 인격적이고 사악하며 악의적인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회당은 가르침의 장소였고, 성전과 달리 음악도 제사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율법을 강론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 실제로 무언가를 하셨습니다. 곧, 당시 사람들이 믿었던 공기 중의 마귀가 사람들에게 들어가 질병을 일켰을 때 그 마귀를 쫓아내심으로써 고통받는 이들의 마음과 몸을 치유하시고, 그들의 힘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율법 강론이 아니라 구원의 표징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구마 행위는 단순한 치유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했음을 드러내는 표징이었던 것입니다.
회당에서의 가르침은 율법 중심이었지만, 예수님은 말씀과 행위가 일치하는 메시아로서,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실제적인 치유와 구원을 선포하셨던 것이고요....
우리가 매일 미사 때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을 외치는데, 이 희망의 외침이 바로 이미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했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세상에는 죄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요?! 혹시 우리가 이렇게 말로는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그 현실을 참으로 믿고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은 아닌지 성찰해 볼 일입니다.
때로는 설교자가 끊임없는 규칙 인용과 비난으로 사람들을 위축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시면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납니다. 복음서에 "그분은 권위 있는 이처럼 말씀하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권위(authority)"라는 말은 단순히 어떤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씀과 행동의 근원이 바로 그분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처럼 단순히 인용하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분은 말씀 자체이신 로고스(Word)로서, 스스로 권위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세상의 죄와 악을 몰아내시는 분이시라는 말이지요. 악이 힘을 쓸 수 없도록 당신 사랑의 말씀을 기운으로 내품고 계신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다른 사람들, 특히 예언자들의 말씀을 인용하였다고 하는데, 이런 행위가 우리가 전례나 미사 성제를 드릴 때 하는 행위와 뭐가 다를까요?!
우리는 정말로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이심을 확고한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이며 이 말을 하고 있는가요?! 만일 우리가 이렇게 확고한 믿음 안에서 이 말을 할 수 있다면 그 말씀은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사랑과 빛의 힘으로 미움과 어둠을 몰아내시는 예수님께서 해 주시는 말씀일 것이고, 우리에게서 그런 미움과 어둠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할 것입니다. 아마 하루 아침에 이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정신은 이미 이런 확고한 믿음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엘 골드 스미스(Joel Goldsmith)라는 사람은 기도라는 것이 우리가 사용하는 말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반복하여 행하는 의식(儀式)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강조하여 말합니다. 그는 이런 오해가 기도의 시작점에서부터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할 때 우리는 이미 굉장한 허위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하느님이 다른 어떤 곳에 계시다면, 만일 하느님이 저 멀리 있는 하늘 나라에서 사람들을 모으시기 위해, 또 우리의 청원하는 말에 의해 움직이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시다면, 영적인 삶의 근본적이 토대가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하느님은 어느 곳에도 계시는 분도 아니고, 모든 것을 아시는 분도 아니며, 사랑으로 전능하신 분도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느님은 그저 인간보다 힘센 어떤 존재일 뿐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계시해 주신 하느님도 아니고 신비주의자들이 존재 깊숙하게 경험한 하느님도 아닙니다! 더구나 특별히 엘리야에게 속삭임으로 그의 내면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도 아니고 우리 내면에,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느님 나라의 하느님도 아닌 것입니다. 아닙니다! 참된 하느님은 하나의 현존이시고, 하나의 생명이시며, 하나의 의식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불러야만 오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존재의 본질 그 자체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시는 생명 그 자체이시고, 우리 존재를 다스리시는 지성이시며, 우리 존재와 생명과 사랑에 힘을 불어넣어 주시는 사랑 자체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악마에게 명한 말씀이 바로 예수님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사람들은 그분을 보고 놀랐던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다고 그들은 증언한 것이지요. 권위(Authoritas)는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 자신 안에 있는 그 무엇으로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힘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현존이고 하느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도 분명하게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실 때나 38년이나 벳자다 연못가에 누워있던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요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신 그 말씀이 바로 예수님 안에도 또 그 병자들 안에도 영원히 현존하시는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진심으로 의식하고 인식하기 전까지는 우리의 기도는 그저 영적인 갈망 정도로만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조엘은 말합니다! 우리에게 하느님의 현존이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와 일치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말하자면 그는 외부에 계신 하느님께 간청하거나 매달리는 기도가 아니라, 이미 내 안에 내재하시는 하느님의 의식과 본질에서 흘러나오는 기도를 하라고 권고합니다. 즉 하느님을 멀리 떨어진 존재로 보지 말고, 내 안에 늘 함께하는 신성의 흐름을 통해 기도하라는 영적 통찰력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엘이 말하는 바는 "하느님께 기도하지 말고, 하느님 안에서 기도하라!"는 말과도 같은 뜻으로 알아들으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외워서 인용하는 데 능했지만, 참된 지혜는 없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그분의 말씀과 행위는 성령의 권능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성령으로 가득 찼던 분이십니다. 달리 말해 그분과 성령님은 하나로 일치도이어 있었던 것입니다. 성모님도요!... 그리고 우리도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분께 강하게 끌렸던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바로 이 성령 안에서, 우리 내면 깊숙한 우리 존재의 본질 즉 하느님 안에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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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2.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행적은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일’이었고, 그것은 일해서는 안 되는 ‘안식일’에 벌이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첫 번째 행적은 ‘안식일 법’을 어기는 사고를 친 사건이었습니다.
<복음>은 먼저,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복음 선포를 시작하시고 네 제자들을 부르신 다음, 가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음을 전해줍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습니다.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마르 1,22). 그런데 회당에 있던 ‘더러운 영에 들린 이’가 소리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그러자 악마는 그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구체적으로 증거 하는 이 ‘첫 번째 행적’으로 ‘악마의 혀 놀림을 중지시키는 일’과 ‘악마에 사로잡힌 이에게서 악마를 쫓아내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사실, 인간은 악마의 혀에 속아 범죄 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악의 지배 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첫 번째 행적’은 하와를 속였던 악마의 그 혀 놀림을 중지시키고, ‘본래로 돌려놓는 일’에 해당합니다. 곧 악마의 지배로부터 인간에게 자유를 되찾아 주는 ‘구원의 표징’이요, ‘구원의 시작’을 알려줍니다.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께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라고 밝히지만, 그것은 단순히 예수님 신원에 대한 정보를 안다는 것이지 신앙고백은 아닌 것입다. 오히려 그들의 ‘앎’은 예수님께서 드러내시고자 하는 결정적인 때가 오기까지는 제지당하게 되고, ‘메시아 비밀사상’에 가두어지게 됩니다.
사실, 악마를 쫓아내는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 구마자들도 그러한 일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구마와는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 1,27)
그렇습니다. 놀라웠던 것은 ‘악마가 추방된 사건’이라기보다 그분의 “권위”였습니다. 다름 아닌 바로 ‘말씀이 이루어지는 권위’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놀라워했던 것은 그분의 ‘권위 있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구마치유는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드러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직접 스스로 명령으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실 뿐, 다른 누구의 이름에 의탁하지 않으심으로써 당신이 바로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우리도 당신의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힘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우리를 교란시키고 분열시키는 온갖 거짓의 혀 놀림이 멈추게 되고, 어둠을 몰아내주시기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르 1,24)
주님!
진리를 알게 하소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자 되게 하소서.
진리를 따르며 받드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진리로 거룩하게 하시고 새로 나게 하소서.
관계 맺는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이 빛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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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2.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12월 9일과 11일에 ‘대림 특강’이 있었습니다. 지난봄에 부탁했는데 신부님이 갑자기 한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신부님은 약속이 있었기에 기꺼이 달라스까지 오셨습니다. 부모님이 모두 아프신데도 신부님은 와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대림’의 의미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대림은 기다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부님은 라틴어 ‘Adventus’의 뜻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Ad’는 접두사로 향한다는 뜻입니다. ‘Venire’는 ‘온다. 또는 간다.’라는 동사입니다. 그래서 대림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온다는 의미이고,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에게 간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동방박사는 별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왔습니다. 목동은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드렸습니다. 대림은 단순히 기다린다는 수동적인 의미가 아니라 ‘찾아간다’라는 능동적인 의미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주님을 찾아 나서지 않는다면 매일 주님이 찾아오셔도 대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주님을 찾아 나선다면 매일의 삶이 대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대림(Adventus)이라는 말에서 영어 ‘Adventure(모험)’가 나왔다고 합니다. 내가 의욕이 넘치고, 희망을 찾아 나선다면 나는 대림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은총에 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한문으로 은총(恩寵)은 임금님이 집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오는 것이 바로 은총이라고 하겠습니다. 임금님이 누군가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은 임금님의 마음입니다. 마찬가지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오는 것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기에, 내가 공로를 세웠기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오신 것도 우리가 공로를 세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죄를 지었어도, 비록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멀리했어도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나의 공로와 나의 업적으로 은총이 주어진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자칫 하느님과 거래하는 관계가 됩니다. 우리는 모두 은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은총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주변의 이웃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 ‘나도 성당에 가고 싶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은총을 받은 사람답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 같은 사람도 성당 다니냐?’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은총을 받은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비슷해 보여도 순서가 달랐습니다. 은총이 먼저 있으니, 그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과 공로와 업적을 쌓았으니, 은총을 받는 것은 분명 다른 것입니다.
강의를 통해서 ‘대림과 은총’의 의미를 새롭게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권위’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예전에 함께 지내던 주교님께서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이럴 때 어떤 결정을 내리셨을까?” 주교님 선택의 기준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사제직의 권위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예수님을 따름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께 대한 순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치워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의 권위는 십자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겸손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사제직이 순명을 만나면, 사제직이 십자가를 만나면, 사제직이 겸손을 만나면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권위가 생겨납니다. 예수님은 전 생애를 걸쳐서 봉사와 희생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기까지 순명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새로운 권위였습니다. 그 권위 위에서 부활의 꽃이 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권위가 우리 안에도 머물러, 우리의 말과 행동 속에서 드러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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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3. 연중 제1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마르 1,21–28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사람들은 “권위 있는 가르침”에 놀랍니다.
그분의 말씀은 지식을 더하는 말이 아니라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설득이 아니라 변화이며,
명령이 아니라 해방이다.”
더러운 영이 떠나가자
사람은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돌아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가?
그리고 주님의 말씀이 그 자리를 차지하도록
비워 둘 용기가 있는가?
아낌 주간의 복음은 분명합니다.
주님의 권위는 억압이 아니라
해방의 권위이며,
비움은 상실이 아니라
회복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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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3. 연중 제1주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생활묵상 : 새신부님에게 바람이 있다면...... (부제 : 부디 강론에 목숨을 거는 신부님이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
어제 주일에는 집을 나가면서 어느 성당을 갈까 고민을 하다가 그냥 가까운 이웃에 있는 성당을 갔습니다. 사실 오랜만에 그곳에 인사도 드릴 자매님( 전마산교구 성체조배회장님)도 계시고 해서 그렇습니다. 이왕이면 말입니다. 그분은 평소 저를 대할 때 연배도 저보다 훨씬 많으시고 또 큰이모뻘 정도 되시는데도 아주 정중하게 말씀하나 하나도 예의를 다하고 행동 하나 하나에도 예의를 다해 주십니다. 제가 송구할 따름입니다. 초등학교 교사 출신이라서 사회적인 신분 때문에 그런 것인가 하고도 생각을 해봤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제 주위에 초등학교뿐만 아니라 다수의 교사 출신의 신자를 보면 다 그런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일반 평범한 신자보다도 행동이 떨어지는 신자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분을 평가할 입장은 아니지만 이분에 대해 설명을 하고자 한다면 이런 느낌을 받습니다. 회장님이 교사 출신이기 때문에 마치 노블리스 오빌리지 같은 개념입니다. 신분에 맞는 행동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게 몸에 배어 있어서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도 하지만 또 한 가지는 제 직업이 물론 사교육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선생이었다는 사실도 한몫하는 것 같았습니다. 예전에는 사회적인 인식에서는 사교육 선생이 조금 공교육 선생보다는 못하다는 인식은 있지만 저는 그런 면에서 전혀 꿀리지 않았습니다. 애들이 증명을 해 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간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 되지 않는데 애들이 저한테 해 주는 이야기를 들으면 비록 사교육을 하는 선생이었지만 뿌듯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생락하겠습니다. 일반 선생님을 비하하는 것 같아서 이렇게 표현하면 대충 이해하실 것입니다.
저의 이런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이끌기 위한 전초전입니다. 사실 어제 미사를 마치고 영성체 때 미사에 오신 걸 발견하고 성당 마당에서 기다렸다가 인사를 드리고 가려고 했는데 다른 일 때문에 나오시지 않아 그만 인사를 드리지 못하고 왔습니다. 문자로 인사를 대신했습니다. 답장이 길게 왔습니다. 첫마디가 손을 한번 잡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였습니다. 이분은 항상 뵈면 저한테는 악수를 권합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보통의 경우에 신자들 사이에 그것도 자매님께 인사를 하면 그냥 서로 목례 정도 가볍게 인사를 하는 게 다반사인데 이분은 항상 손을 내밀어 주십니다. 저또한 감사한 일입니다.
어제 이 본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사실 이 본당은 예전에 제가 영세를 받기 전에 약 4년 전에 이 본당에서 교리를 받은 적이 있었고 또 최초로 그때 이 본당에서 패션오브크라이스트를 봤습니다. 그때 교리를 해 주신 신부님이 보좌신부였는데 몇년 전에 오전에 제가 다닌 본당에 낮 미사에 오셔서 저를 기억하시지 못할 줄 알았는데 세월도 세월이고 또 그것도 예비자 교리 때 잠시 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성체 때 놀랍게도 기억을 하시는 것입니다. 약간 배경을 설명을 하다 보니 삼천포로 흐른 느낌입니다. 여러 번 이 본당 신부님 강론을 들었는데 백이면 백 다 좋은 강론이라고 할 수 없는데 거의 95는 아주 좋은 강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 평이면 이건 아주 극찬에 가까운 극찬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전에도 이분에 대한 언급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분의 강론은 일단 내용 면에서도 깊이가 있습니다.
깊이 있는 강론 원고를 작성한다고 해서 그 원고대로 단순히 읽는다고 다 강론 내용이 우리의 심부에 잘 들어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도 사실 재능에 가깝다고 하는 달란트가 있어야 합니다. 이 신부님은 일단 그런 호소력과 전달력이 아주 훌륭합니다. 이건 말로 표현하기가 힘듭니다. 물론 제가 표현을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긴 하지만 그 느낌을 글로 전하려면 양이 엄청 길어 그냥 여기에선 생략하겠습니다. 일단 이분은 기본적으로 글을 전개해 나가는 방식에 대한 작문의 기법 이런 게 제가 언어를 다루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타고난 재능인지 아니면 갈고 닦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단언합니다. 요즘은 예전에는 신부님이 부임을 하면 4년 정도 계셨다고 하는데 이젠 3년으로 1년 단축됐습니다. 평균입니다. 제가 봤을 때 이런 분의 이 정도 실력의 강론을 만약 3년 동안 평일미사를 포함해 끊임없이 듣는다고 가정을 했을 때 저는 이렇게 되리라고 예상합니다. 정말 혼신을 다하고 집중해 강론을 듣는다면 신앙에 비약적인 발전이 있을 거라고 확신을 합니다. 그정도로 아주 훌륭한 강론입니다. 저는 실제로는 강론 원고도 훌륭하지만 그보다 더 훌륭한 것은 전달력입니다.
저는 언어를 가르친 선생으로서 그런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확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이런 가정은 성립을 할까요? 이런 강론을 3년 정도만 들으면 이 정도 비약적인 신앙의 발전을 가져올 것이라면 실제 이걸 말씀하시는 신부님은 더 변화가 될 것이라는 가정입니다. 이 가정도 성립을 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 희박한 게 사실입니다. 이건 교육의 하나의 이론이 있습니다. 쉽게 표현해 이렇습니다. 흔히들 이렇게 강론하시는 신부님들이 계실 것입니다. "내가 강론을 이렇게는 하지만 나도 강론대로 살지는 못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만약 신부님도 자신이 한 강론대로 살 수 있다면 그야말로 그렇게 되면 그건 성인의 수준까지도 갈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부님이 성인사제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 사제의 강론으로 많은 신자가 더 훌륭한 영성을 발전시키는 게 더 중요한 것입니다. 고 이건희 삼성 명예회장의 말을 빌리자면 삼성의 우수한 인재가 대한민국을 먹여살릴 수 있다는 그런 표현말입니다. 강론이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미사 전체 구조를 보면 형식면에서는 독서와 복음도 매일 다르지만 절차면에서 보면 전체 미사 구조는 동일합니다. 다만 강론만 큰 틀에서 보면 다릅니다. 그렇게 본다면 강론이 의미상 미사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강론이 부실하다면 그 다른 부분이 가지는 상징성이 있는데 그 상징성이 깨지는 것이 되고 무미건조한 미사가 될 수 있습니다. 원래는 그렇지는 않지만 사람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매너리즘에 빠지기 때문에 늘상 그 미사가 그 미사인 것처럼 별 차이를 못 느끼는 미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 강론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주지 못하면 마치 생기없는 조화처럼 생화를 보지 못하고 매번 조화를 하느님 대전에 봉헌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겉모습은 분명 꽃이 맞습니다. 근데 생명 없는 꽃을 봉헌하는 것이 됩니다. 저는 이렇게 비유를 하고 싶습니다. 그만큼 강론은 중요합니다. 그런 중요한 강론에 대해 저는 아주 강력하게 생각하는 주관이 있습니다. 원래 제가 이 묵상글 제목으로 달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제는 강론에 목숨을 걸어야 됩니다. 이걸 제목으로 잡으면 너무 강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완하한 것입니다. 근데 요즘 현실을 보면 이와 같은 신부님을 좀처럼 찾기 힘듭니다. 그냥 훌륭한 강론 정도에 머무는 수준입니다.
제가 오늘 언급한 신부님 같은 강론이면 정말 이런 강론은 좀처럼 듣기 어려운 강론입니다. 이분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 아주 훌륭한 달란트를 하느님으로부터 받으셨습니다. 모든 신부님이 이런 재능을 다 가지고 계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모든 사람이 다 이런 재능을 받을 수가 없는 게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재능이 없다면 노력이라도 해야 합니다. 최소한 우리가 강론을 들었을 때 아주 훌륭한 강론이라고 자부할 만큼은 못하시더라도 사람들이 듣고 나서 " 이 신부님 강론은 뭔가 남는 게 없다" 이런 말을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1년 열두달 그런 말을 할 정도의 수준이라면 정말 심각한 것입니다. 이건 저의 주관적인 생각이 아니고 제가 앞전에 저에게 상처를 준 그 사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와의 개인적인 불편한 관계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건 주변 신자들의 평가입니다. 저는 이 신부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를 언급하기 위해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니고 앞으로 천주교의 미래를 생각해 언급한 것입니다.
주일 광고 때 확실한 것은 모르지만 내일 이 본당에서 새신부 첫미사가 있다고 합니다. 이 본당에서 배출한 신부인지는 제가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내일 저녁에 있다고 합니다. 이 광고를 듣고 집에 가면서 한 묵상이었습니다. 화살기도를 한 것입니다. 부디 강론에 목숨을 거는 사제가 되시어 신자들에게 훌륭한 사제가 되어주십사 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사실 저는 어제 이 본당에서 미사를 하면서 집중을 하기 아주 힘들었습니다. 주변에서 약간 악취 같은 게 풍겨서 말입니다. 그래서 미사 마치고 돌아가면 이것에 대해 약간 경종을 울리는 글을 작성하려고 했는데 이 글을 먼저 올리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왜 사제는 강론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지 한번 강조를 하고 싶은 이유가 있습니다. 사제의 생명은 저는 가장 큰 생명은 강론 실력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목 이런 것도 중요합니다. 이건 인간 세상 정치에 비유하면 정치를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물론 정치를 잘 하면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긴 하지만 정치를 잘한다고 해서 국민이 피부로 와 닿을 수 있을 정도로 행복하느냐 하면 그렇지 못하는 것입니다. 훌륭한 지도자는 국민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도록 선정을 잘 베풀 수 있는 지도자의 덕목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사제도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신앙적으로 말하면 이보다 더 좋은 목자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무릇 양이 잘 성장하도록 영적으로 잘 보호해줄 의무가 있습니다. 이 의무를 잘 이행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강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강론 준비에 소흘히 한다면 그 사제는 직무유기를 한 것입니다. 그 어떤 죄를 지어도 만약 사제에게 유보된 죄가 있다면 이 죄만큼은 하느님께서 단호히 엄벌에 처할 것 같습니다. 그만큼 강론이 영혼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건 순전히 제가 그동안 묵상한 내용이고 저의 지극히 개인적인 신앙 묵상글이기 때문에 맞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정상적인 사고로 생각을 한다면 그렇지 않을까 하는 이성적인 판단을 할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부디 이 땅에 있는 모든 사제님들에게 훌륭한 강론을 하실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곡히 하느님께 기도드리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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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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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3. 연중 제1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1,21ㄴ-28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오늘 복음은 갈릴래아에서 복음 선포를 시작하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회당에서 진행되던 예배에 참석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누구도 의심을 품거나 부정할 수 없는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셨다고 기록되어 있지요. 그런 예수님의 권위가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는 ‘표징’으로 구체화된 것이 바로 더러운 영을 사람에게서 쫓아내시는 ‘권능’이었습니다. 사람을 제멋대로 쥐고 흔들던 더러운 영이 예수님의 단호한 말씀 한 마디에 저항 한 번 못해보고 쫓겨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분 말씀에 권위가 있다고 느끼게 된 겁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에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힘이 실려 있어서, 반드시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는 거라고 여긴 것이지요.
권위를 가진다는 것은 사람들을 원하는대로 움직일 ‘힘’을 지녔다는 뜻입니다. 그럴 수 있는 참된 힘은 오직 한 분, 하느님으로부터 나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게’ 우리 마음을 파고들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과 영혼을 꿰뚫어 보시며 우리가 어떤 생각과 속셈을 품고 있는지를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런 하느님이 하시는 말씀은 감히 거스르거나 저항할 수 없습니다. 결국엔 당신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시는 하느님의 권능에 승복하여 그분께서 바라시는대로 따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에게 그렇게 하는 모습을 보이시니, 그 모습을 본 이들이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권능’을 느끼게 된 것이지요.
우리가 하느님 말씀을 거스를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우리를 향한 사랑,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시는 호의에서 우러나온, 즉 우리를 위해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권위라는 뜻으로 번역되는 라틴어 ‘아욱토리타스’(auctoritas)에 그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단어는 ‘아우제레’(augere)라는 동사에서 유래하는데, 이 동사는 ‘자라게 하다’, ‘증가시키다.’, ‘커지게 하다’라는 뜻이지요. 즉 진정한 권위는 자기 힘과 능력을 뽐내거나 다른 이를 굴복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그가 살면서 느끼는 기쁨과 보람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여 그가 하느님 나라에서 ‘큰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행사되어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권위를 그렇게 행사하셨지요.
예수님께서 말씀을 통해 행사하신 그 권위가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시게 하려면, 그분 말씀을 그저 귀로 듣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내 이야기’로 여겨 귀기울여 듣고 마음에 새기며, 삶 속에서 그 뜻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요. 그분 말뜻을 제대로 알아들으려는 노력도, 실천해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그 말씀이 주는 유익을 받아 누리려고만 하면 그것은 물속에 잠긴 씨앗처럼 제대로 싹을 틔우지 못한 채 썩어버리고 말 겁니다. 그러니 매일 성경을 열심히 읽으며 주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잘 들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내 마음 안에 받아들이고 따름으로써 그 안에 스며있는 ‘행복의 권위’가 내 삶 속에서 풍성한 결실을 맺게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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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3. 연중 제1주간 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이라는 주제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해석하는 데에서도
권위가 있으셨지만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데에서도 권위를 가지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놀라기만 할 정도이지만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으로 알아봅니다.
즉 예수님의 권위는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그는 알아보고 있습니다.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이기에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이루기 힘든 것들 앞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이루어지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 필요도 없어지고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나를 들어 높이는 우쭐함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도 있지만
인간의 힘을 넘어가는 일들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또 한 번 느끼게 됩니다.
그러한 것들을 경험하면서
단순히 놀랍다고 느끼고 끝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낄 수 있다면
놀라움은 기쁨과 행복으로 바뀌어갈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는 우리의 삶에 큰 힘이 됩니다.
기도를 통해 매번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기도가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하느님을 체험한다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할 때에는
하느님의 부재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한 번 경험한 하느님의 함께하심은
우리에게 힘이 되어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상황에
머무를 수 있고
그렇게 하느님과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한 번 느낀 사랑은 쉽게 잊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쉽게 포기하게 되지만은 않습니다.
우선 삶 안에서 놀라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함께하심을 느끼면서
기쁨과 행복으로 넘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다음은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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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영근 신부님과 조재형 신부님 강론글 감사 합니다.
많이 공유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평화와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