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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조선 후기 당쟁이 가장 격렬했던 시기를 살았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46년간 장기 집권하는 동안 신권에 맞서 싸우면서 왕권이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보여줬다. 사상적으로는 성리학의 의리론과 명분론을 철저하게 조선사회 내에 구현했다. 그렇다고 이념만 추구하진 않았다. 상평통보 유통과 같이 실리적인 경제 개혁을 단행해 상업과 유통경제가 균형 있게 발전해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또 한양 도성과 북한산성 보수 공사를 적극 추진하면서 국방 강화에도 주력했다.
숙종의 국방 강화 의지는 북한산성과 한양 도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을 조성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한양 도성은 태조 때 정도전의 주도로 처음 건설된 이래, 세종대에 다시 도성을 수축(집·다리·성 등을 보수함)했다. 이후 200여 년간 대대적인 정비가 이뤄지지 않았던 한양 도성을 다시 보수한 이가 숙종이다.
당시 수축한 돌은 규격화된 것으로 지금도 한양 도성을 답사하면 태조나 세종 시절 쌓은 돌과 숙종 때 쌓은 돌의 차이를 알아볼 수 있다. 북한산성은 숙종 즉위 초부터 축성 논의가 제기됐다. 이후 숙종은 어영청, 금위영 등 군영에 축성 사업을 맡겼고 1712년 무렵 완성됐다.
1712년 6월 9일 북한산성에 왕이 임시로 거처하는 행궁(行宮)이 완성됐다. 1712년 10월 8일에는 북한산성의 성곽과 창고, 문루, 우물 등도 마무리했다.
숙종의 국방 강화 사업은 해안 지역의 돈대(墩臺·평지보다 높게 두드러진 평평한 땅) 축성으로 이어졌는데, 강화도에 48개 돈대를 설치했다. 수군 출신 안용복이 울릉도와 우산도(독도)에 출몰하는 왜인을 쫓아내고 일본과 담판 지어 이곳이 우리 영토임을 승인받은 것도 숙종대인 1696년(숙종 22년)이었다. 안용복 사건을 계기로 숙종은 더욱 적극적인 해군 방위 정책을 수립했다. 국방 강화 사업은 지도 제작으로 이어졌다. 청과 조선의 국경 문제가 쟁점이 될 무렵인 1705년, 이이명은 청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됐다. 청나라 측 대외비로 분류됐던 국경 지도는 명나라 지도 ‘주승필람(籌勝必覽)’과 청나라 지도 ‘산동해방지도(山東海防地圖)’, 청나라 지리지 ‘성경지(盛京志)’ 등이 있었다. 주승필람을 구하는 데 성공한 이이명은 곧 산동해방지도를 입수하는 일에 착수했지만 이 일은 쉽지 않았다. 청나라에서 이 지도를 대외 유출 금지 도서 목록에 올려놨기 때문이었다. 이이명은 수행한 화원을 시켜 잠시 지도를 빌린 후 현지에서 급히 이 지도를 베껴 그리도록 했다. 영화에서나 볼 만한 비밀 첩보 작전이 수행된 것이다.
요계관방지도
조선에 돌아온 후 이이명은 이 지도와 조선의 ‘서북강해변계도(西北江海邊界圖)’ 등을 참고해 ‘요계관방지도(遼薊關防地圖)’를 제작해 숙종에게 올렸다. 요계관방지도는 숙종에게 바치는 어람용(御覽用)으로 비단에 그려져 병풍으로 제작됐다. 우리나라 북방 지역과 만주, 만리장성 등 군사 요충지가 자세히 그려져 있다. 민족의 영산(靈山)으로 인식됐던 백두산은 ‘백두(白頭)’라는 단어의 뜻처럼 흰색을 써서 강조했다. 청과 조선의 국경 지역을 정확히 파악하고자 하는 숙종의 의지가 반영된 이 지도는 숙종이 늘 곁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숙종대에는 백두산 일대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청과 영토 분쟁이 시작됐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백두산을 신성시했지만, 청나라도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부르며 건국의 발상지로 여겼다. 양국 백성이 서로의 국경을 침범하는 사례가 빈번히 일어나 17세기 후반부터 이 지역은 조선과 청의 주요 외교 현안이 됐다. 1679년 청나라 사신이 백두산을 측량하고 돌아갔는데, 당시 청나라에서 가져온 지도에는 백두산을 비롯한 조선 산천에 대한 내용이 매우 자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조정에서는 조선 측 지도가 유출된 것으로 판단해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고자 했다. 1692년 청나라는 사신을 보내 국경선 조사를 요구했으나 조선 측의 강력한 반발로 성사되진 못했다.
1697년 숙종은 국방에 해박했던 남구만 등에게 대책을 세울 것을 지시했다. 남구만은 두만강 이북이 목조, 익조, 도조, 환조 등 태조 이성계 선조들이 활동하던 지역이었음을 주지시키고 이곳을 확실히 확보하는 방안을 세웠다. 같은 시기 청나라는 지리에 익숙한 서양인을 활용해 백두산 일대 지형을 살피면서 영토 분쟁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여건을 만들어 나갔다.
1711년(숙종 37년) 청과 조선 국민 사이에 서로 국경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살인 사건이 발생하자 양국 간 국경선을 확정하는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됐다. 1712년 청나라는 예부를 통해 정식 공문을 보내왔다.
“청의 사신 목극등이 황제의 명을 받고 봉성에서부터 장백산까지 우리 변경을 조사하려 했으나 길이 험하기 때문에 육로를 통해 토문강을 조사하려 하니 협조를 원한다.”
양국은 여러 차례 실랑이를 거친 끝에 1712년(숙종 38년)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워 서로의 영역을 정하는 데 합의했다. 당시 청나라 전성기를 이끌었던 황제 강희제(康熙帝, 1661~1722년)는 안정된 국력을 바탕으로 청 왕조 발상지였던 만주와 백두산 일대를 성지(聖地)로 만들기 위해 여러 차례 관리를 파견했다. 이 지역을 영토로 확정하기 위함이었다. 조선도 함경도 북방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영토 조사를 했고 마침내 양국이 백두산 마루 분수령에 정계비를 세워 서로의 영토 확정을 명문화했다.
“오라총관 목극등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변경을 답사해 이곳에 와서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강으로 경계로 하며 동쪽은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
양측이 합의한 비문의 내용이다. 그러나 정계비에 쓰인 ‘서위압록(西爲鴨綠) 동위토문(東爲土門)’이라는 구절의 해석을 둘러싸고, 19세기 후반부터 조선과 청의 영토 분쟁이 다시 일어났다. 바로 백두산정계비 사건이다. 서쪽을 압록강으로 정한 것에는 양측의 불만이 없었지만, 동쪽 경계로 설정한 토문강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양측은 의견이 달랐다. 청나라는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해석한 반면, 조선은 토문강을 만주 송화강의 지류로 해석한 것이다. 토문강을 송화강 지류로 해석하면 간도를 포함한 만주 일대가 조선 영토가 된다. 실제로도 이곳에 많은 조선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서위압록ㆍ西位鴨綠
동위토문ㆍ東位土門
백두산정계비 사건 이후 조선에서는 북방 지역 주민 거주와 경제 활동을 보장하고 행정구역을 신설하는 등 적극적인 북방 정책을 추진했다. 이 같은 노력은 역사적으로 북방 지역뿐 아니라 만주 지역까지도 과거 우리의 세력권이었음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이런 역사적 배경 아래 19세기 중엽부터 두만강 지역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두만강을 넘어 간도 지역에 이주하고 토지를 개간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19세기 말 간도 영유권을 둘러싸고 청과 국경 분쟁이 일어났을 때 조선은 두만강과 토문강은 다른 것이므로 정계비에 쓴 문구대로 압록강과 토문강을 국경으로 정하자고 주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일본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면서 이 지역에 대한 영토 의식은 점차 사라졌고 1931년 9월 만주사변 이후 정계비 또한 사라졌다.
1720년 6월 8일 숙종은 경희궁에서 60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숙종 이전까지 60세 넘도록 살았던 왕은 태조(74세), 정종(63세), 광해군(67세)에 불과했다. 하지만 세 왕은 모두 왕위에서 물러난 후 승하했다. 반면 숙종은 왕의 자리에 있으면서 60세를 넘긴 최초 왕이다.
숙종의 무덤은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자락에 조성된 명릉이다. 명릉은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무덤이 함께 있는 쌍릉의 형식인데, 두 번째 계비인 인원왕후의 무덤도 명릉 좌측 언덕에 위치해 숙종을 지켜보고 있다. 첫 번째 왕비였던 인경왕후의 익릉 또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여기에 더해 숙종 하면 떠오르는 인물 장희빈의 무덤은 원래 경기도 광주(廣州) 오포읍에 있다가, 1970년 명릉 근처로 이장됐다. 사후 270년 만에 다시 숙종을 가까이 모시게 된 셈이다.
장희빈 대빈묘
사람들은 숙종을 대개 기존 사극 드라마에서 봐왔던 이미지로 인식하는 경향이 크다. 즉 인현왕후와 장희빈, 숙빈 최씨의 치마폭에 둘러싸여 궁중 음모의 중심에 있었던 왕이라는 이미지다.
하지만 숙종의 본모습은 적장자라는 정통성을 바탕으로 오랜 기간 재위하면서 왕권을 본격적으로 행사한 ‘강한 왕’이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국방 등 각 분야에서 다양한 업적을 펼치며 왕조의 안정을 구축해 나갔다. 숙종 시기를 거치며 조선은 왜란과 호란의 상처를 극복할 수 있었다. 조선의 르네상스이자 정치, 문화 황금기라고 불리는 영·정조 시대가 만들어진 것은 숙종이 기반을 잘 닦아뒀기 때문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