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어우러진 한국인의 휴식공간
정자기행
저기 추녀 끝에 가을이 걸려있네!
가을을 재촉하는 바람이 분다. 왠지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펜을 꺼내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라도 쓰고 싶어지는 이런 계절엔 풍치 좋은 강 언덕에서 오랜 세월 묵묵히 서있는 정자나 누각을 찾아 보는 게 어떨까. 퇴색한 마루에 앉아 조용히 귀 기울이면 어디선가 계절을 부르는 풀벌레 울음소리 들려올 듯한데...
▶ 삼척 죽서루
오십천 굽어보며 천년세월
지켜온 정자
동해바다와 접한 고을인 삼척은 이웃의 울진과 더불어 오지로 꼽힌다. 그래서 그 산골짜기
곳곳에는 굴피·너와집 등 강원도 산골의 가옥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집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삼척이 아름다운 까닭은 바로 젖줄인 오십천 바위
벼랑 위에 죽서루(보물 213호)라는 아름다운 누각이 서있기 때문이
아닐까.
오십천 층암절벽의 기암괴석 벼랑 위에 건축하기 위해 자연암반을 기초로 지은 죽서루는 1403년 지어진 이후 최근까지 수십차례 보수를
했고, 1982년 경내를 확장하면서 오늘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둘레
숲에는 고려시대의 죽장사와 조선시대의 진주관·응벽헌·연근당·서별당 등 고풍스런 건물들과 어울려 조화를 이루고 있다.
죽서루에 서면 멀리 백두대간의 산줄기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게
아스라이 보이는데 오십 굽이나 휘돌아 감으며 흘러간다는 오십천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부딪혀 돌아간다. 그리하여 관동팔경 중 하나로 꼽혔으니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잦은 건 당연한 일. 고려 명종 때는
김극기를 비롯, 이승휴, 안축 등이 흔적을 남겼고, 조선시대에는 숙종과 정조의 어제시를 비롯해 하륜, 이이, 양사언, 정철 등 내로라 하는
명인들이 이곳에 들러 남긴 시가 수백편에 이른다.
누각 동쪽 대나무 숲에 죽장사가 있어 죽서루라 이름하였다 하고, 또한 누각 동쪽에 명기 죽죽선녀(竹竹仙女)의 집이 있어 지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 여행정보
너와집과 굴피집을 구경할 수 있는 ‘대이리 골말’은 10년쯤
전만 해도 오지였지만 몇년 전 환선굴(천연기념물 178호)이 개발되면서 입구까지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어 옛 맛은 덜하다.
환선굴 주차장 부근에 민박집이 여러 채 있다.
- 찾아가는 길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대관령을 넘어 동해고속도로를 타고 동해시까지 간 다음 7번 국도를 타고 6km쯤 가서 38번 국도를 타고
태백 방향으로 3.5km 간 다음 삼척시내 방향으로 좌회전해
3km 가면 된다. 죽서루에서 다시 38번 국도로 나와 태백 방향으로 20분쯤 달리다 보면 환선굴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우회전해 8km쯤 들어가면 굴피·너와집이 있는 환선굴 주차장.
▶ 담양 식영정
송강 정철이 머물던
가사문학의 산실
담양은 대나무의 고을이다. 읍내를 조금만 벗어나도 나지막하게 담을 쌓고
그 안쪽엔 대숲이 늘 푸르다. 아마 담양 사람들을
키운 건 80%가 대숲을
스치는 바람이 아닐까. 그리고 그 나머지는 바로 전망 좋은 곳곳에 세워져 있는 정자가 될
것이다. 무등산(1187m) 북쪽의 담양 창계천은 정자가 많은 호남
가사문학의 중심지.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 <장진주사> <성산별곡> 등이 태어난 이 아담한 냇물을 따라가는 여행은 ‘정자
나들이’라는 아주 특별한 테마가 된다.
가사문학의 대가인 송강 정철의 대표작인 <성산별곡>이 탄생한
식영정은 부근의 정자들 가운데 가장 전망이 좋은 곳. 마루에 앉아 호수에 잠긴 산 그림자를 감상하는 맛이 좋다. 식영정에서 창계천 너머로 건너다 보이는 환벽당은 송시열이 쓴 현판이 남아
있어 유명하다. 이곳들은 송강정과 함께 ‘정송강 유적’으로
불린다. 또 취가정은 환벽당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정자로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 장군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 김만식이 구한말에 지은 것.
꼭 들러보고 싶은 곳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민간 정원인 소쇄원.
햇살도 거를 정도의 울창한 대숲, 자연석이 조화를 이룬 아담한
계류, 그리고 그 속에 절묘하게 자리잡은 정자가 어우러진 풍경은 잘 그려진 한 폭의 산수화 같다.
- 여행정보
담양 읍내의 민속의 집(061-381-2515)은 죽순회와 백반으로 유명하다. 대통밥과 죽순회도 맛보고 푸른 대숲도 거닐고 싶으면
죽림원(061-381-8252)이 좋다. 대나무 고을답게 담양읍 천변리에는 세계 유일의 죽물박물관(061-381-4111)이 있다.
- 찾아가는 길
88고속도로 담양 인터체인지로 나온다. 2km쯤 떨어진 면앙정을 본 후 15번 국도로 나와 광주 방향으로 2km쯤 가면 유산교.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 산 위에 송강정이 있다. 송강정에서 다시
15번 국도로 나와 광주 방향으로 1km 달린 뒤 좌회전해 887번
지방도로를 탄다. 6km쯤 가면 왼쪽으로 가사문학관이 나오면서
계속 식영정, 소쇄원, 환벽당 등이 나타난다.
▶ 철원 고석정
임꺽정 전설 전하는
한탄강의 선경
1천여 년 전 삼한통일을
꿈꾸던 불행한 영웅인 궁예의 한이 서려있는 철원의 한탄강은 화산활동에
의해 생성된 거대한 현무암 협곡. 평지로부터 20∼30m 아래로 패어 들어간 계곡은 조물주가 오랜 세월 다듬은 듯한 기암절벽이 양쪽으로 웅장하게 둘러섰고, 강 가운데 홀로 우뚝 서있는 암봉이 고석암이다.
암봉의 정자와 머리에 소나무 몇 그루가 어우러져 멋을 더해 경관 좋은 철원팔경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신라 진평왕이
이 암봉 주변 풍치를 즐기기 위해 정자를 짓고, 고석정이라 부른
후 이곳 지명으로 굳어졌다고.
조선조 명종 때는 의적 임꺽정이 이 고석정을 은신처로 삼아 활동했는데, 관군이 나타나면 임꺽정은 강물의 꺽지로 변해 살아남곤 했다는 전설도 전한다. 실제로 고석정 맞은 편 절벽 위에는
임꺽정이 쌓았다는 고석성이 남아 있다.
- 여행정보
여름이면 래프팅을 하면서 고석정을 감상하는 맛도 유별나다. 3만∼5만원. 거산레저(02-3474-2848), 한국레저개발(033-452-7578). 고석정 집단시설지구에는 승일회관(033-455-8787) 등 민물고기 매운탕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여럿 있다. 꺽정가든(033-455-3128)은 야생우렁이 요리를 내놓는다. 고석정관리사무소(033-455-3129).
- 찾아가는 길
서울에서 의정부∼신철원(갈말)∼문혜리를 거쳐 간다. 갈말읍에서 4km 북방의 문혜리 삼거리에 이르면 고석정 팻말이 서 있다.
여기서 좌회전하여 463번 지방도로를 타고 3km쯤 가면 승일교다. 다리를 건너 1km쯤 가면 전적기념관이 도로 왼쪽에 보인다.
기념관 뒤쪽에 고석정이 있다.
▶ 여주 영월루
'여강 백리길'을 굽어보는 마암 위의 누각
남한강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영남지방과 강원
등지에서 거둬들인 세금을 한양으로 운송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지금의 고속도로나 철도 역할을 해냈기 때문에 이 남한강 물줄기를 국도, 곧 ‘나라의 길’이라 했다. 그 물길 중 나루터가
열두 군데나 있었다는 경기도 여주의 물길엔 아름다운 백사장이
펼쳐져 있고, 정자가 십여 동이나 자리할 정도로 경관이 수려하다. 그래서 고려시대부터 이규보, 이색을 비롯한 많은 시인묵객들이 머물렀고, 당대 내로라 하는 문사 중 이곳 풍광을 그냥 지나치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여주 사람들은 요즘도 이 땅을 지나는 남한강 물줄기를 자랑스레 ‘여강백리길’이라 부른다.
신륵사에서 여강을 건너다보면 여주대교 쪽 깎아지른 벼랑 아래
마암이라는 큰 바위가 보인다. 영월루는 남한강 조망이 아주 뛰어난 마암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이 누각은 원래 여주 군청의
정문 역할을 했으나 파손의 우려가 있어 1925년 이 자리로 옮겼다. 누각 앞에 있는 두 기의 3층석탑들도 창리와 하리의 옛 절터에서 1958년 각각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 여행정보
신륵사는 뜨락 앞으로 여강 물길이 흘러가고 있어 아름다운 절집으로 꼽힌다. 천년고찰답게 나라의 보물이 일곱 점이나 있다.
절 동쪽 강변에 있는 강월헌의 풍치도 보물급. 여주 북서쪽 이포대교 동쪽 마을 ‘천서리’는 막국수로 유명한 마을로 매년 초가을 천서리 체육공원 안에서 막국수 축제가 열린다. 부근엔 막국수를 즐길 수 있는 집이 많은데, 그중 강계봉진막국수(031-882-8300)의 비빔막국수가 소문이 나있다.
- 찾아가는 길
영동고속도로 여주인터체인지로 나와 37번 국도를 타고 여주
방향으로 5km 가면 사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여주대교 방면으로 우회전하여 8백m 직진하면 여주대교 직전의 상리 사거리. 우회전해 강변 관광지 방면으로 1백m쯤 들어가면 길 왼쪽에 영월루 주차장이 있다.
▶ 파주 화석정
율곡 이이가 학문 논하던 임진강 제경
임진강 철망 너머로 북녘
땅을 바라보며 자유로를
달리면 만날 수 있는 파주
화석정은 율곡 이이의 5대 선조인 이명신이 1443년(세종 15) 세운 정자.
임진강 풍치를 좋아했던
율곡은 고향에 올 때면 늘 이곳을 찾았고,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여기서 제자들과 학문을 연구했다. 하지만 당시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탔고, 1703년에 복원했다가 한국전쟁 때 또 불탔다.
현재 건물은 1966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율곡설화’ 한 토막.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한 율곡은 매일 화석정을 찾았는데, 그때마다 하인에게 송진을 정자 기둥에 바르게 했다. 그리고 죽으면서 하인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열어보라”고 하며 봉투를 남겼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선조가 피신을
가다가 임진나루에 도착했을 때는 비바람이 치는 칠흑 같은 밤.
이때 율곡의 하인이 전달한 편지엔 ‘화석정에 불을 질러라’고
씌어 있었다. 선조 일행은 화석정에 불을 붙인 뒤 근처가 대낮같이 밝아져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고. 그후 한때는 화석정의 화(花 )자가 불화(火) 자로 씌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 여행정보
임진강에서 나는 자연산 민물장어와 황복이 미식가의 입맛을 돋운다. 화석정 바로 앞에 화석정가든(031-952-1818)에선 자연산
장어와 황복회의 찜을 맛볼 수 있고, 임진나루터(031-952-2723), 임진강변가든(031-952-3423) 등 임진리 일대 식당에서도 장어와 황복요리 민물매운탕을 즐길 수 있다.
- 찾아가는 길
자유로를 달리다 문산으로 빠져나온다. 문산 사거리에서 37번
국도를 타고 2.7km 간 다음 만나는 선유리 삼거리에서 좌회전해 3km 들어가면 화석정이다.
▶ 보길도 세연정
고산의 어부사시사 들려올 듯한 연못
육지의 끝인 해남 땅끝에서 뱃길을 따라 파도를 헤치고 한시간쯤 가면 보길도에 이른다.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가다 항복소식을 들은
윤선도가 정치권에 환멸을 느끼고 은둔하기 위해 터를 잡은 섬이다. 원래는 제주도로 향하려 했다가 연꽃을 닮은 섬의 산세에 반해 보길도에 정착했다고 한다. 부용동이란 이름도 윤선도가 지은 것. 하긴 보길도가
절경이 아니었다면 고산이 여기에 머물지도 않았겠지만, 국문학사상 명작으로 꼽히는 <오우가>와 <어부사시사>도 빛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고산이 사랑해마지 않은 세연정은 부용동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다. ‘세연’은 ‘주변경관이 물에 씻은 듯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하다’는 뜻이다. 자연적인 계류를 돌로 둑을 쌓고 연못을
만들어 인공섬 주변에 이 정자를 지었다. 제방에는 당시 심은 동백이 숲을 이루고 있으며 연못 주변의 바위와 물 위의 연꽃이 조화를 이룬다.
- 여행정보
청별항에서 독사재 고개를 넘어 예송리까지 가는 동쪽 해안길의
경치가 일품이다. 예송해수욕장의 파도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깻돌 구르는 소리가 신비롭다. 세연정 주변과 부용·예송·선창·보옥·통리 등 섬 지역에는 어부사시사(061-553-5019), 청명여관(061-552-8506), 예송민박(061-553-6375) 등 민박집이 여럿 있다. 보길면사무소(061-550-5651).
- 찾아가는 길
일단 강진이나 해남을 거쳐 갈두리 땅끝까지 간다. 땅끝 마을 갈두여객선터미널(061-533-4269)에서 보길도까지는 금영훼리호가 하루 4회 운항한다. 1시간 10분 소요. 완도에서 보길도까지는 완도훼리호가 8회, 대진호가 4회 운항한다. 1시간 30분 소요.
▶ 울산 작천정
정몽주가 학문을 닦던 반석과
솔밭의 조화가 일품
신불·간월산 동쪽 자락에서 발원한
작천정계곡은 암반과 노송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일찍부터 부산·경남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온갖 형상의 바위들이 맑은 물과 손잡고 작품을 빚어내는 작괘천의 아름다움이
이 작천정 일대에서 절정을 이룬다.
작괘천이라는 이름은 ‘냇가 암반에
패인 모양이 큰 것은 절구, 작은 것은
술잔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계류가 수만년간 빚어낸 널따란 암반과 주변의 솔밭은 고려말의 충신 정몽주가 젊은 시절에 공부하던 곳. 작천정은 1438년 그를 흠모하는 지방 유림들이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의 정자는 남아 있지 않고 지금의 정자는 일제시대에 새로 세운 것이다. 작천정에서 간월산 쪽으로 3㎞쯤 들어가면 감상할 수 있는 홍류폭포 경치는 덤이다.
- 여행정보
작천정 계곡 상류인 신불산이나 간월산 입구에 야영장이 있고,
간월자연휴양림 안에도 시설이 잘되어 있는 야영장이 있다. 간월산이나 신불산 등산로로 접근하는 곳에 민박집이 많다. 또 작천정계곡의 최상류 깊은 산속에는 간월자연휴양림(052-262-3700)이 있다.
- 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언양인터체인지에서 나와 35번 국도를 타고 부산
방면으로 2km쯤 달리면 작천교. 다리를 건너지말고 ‘언양온천(등억온천)’ 팻말을 따라 우회전하면 왼쪽으로 작천정계곡이
있다. 작천교에서 계곡을 거슬러 1.3km 가면 왼쪽으로 작천정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