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한 가방 / 황혜경
지구본을 옆구리에 끼고 수선집에 가던 길에서
명랑한 만세를 외치던 내 친구 붉은 치마를 만났다
수심 없는 얼굴에는 가든에 가둔 가득처럼
종(種)이 다른 꽃들 화려하게 피어났다
붉은 치마의 서랍 안으로 착지하는 새들과 정지하는 말들
수선집 아줌마가 바지로 가방을 만들어 준다고 했을 때
떠오르던 실내
뒤집어도 볕이 들지 않던 실내
안을 떠올린 건 그날뿐만은 아니었다
헌책방 구석에 앉아 누군가 그어놓은 븕은 밑줄을 읽다가
애인여기(愛人如己)를 발음할 때도
서랍 안의 얼굴들 서로서로 겹쳐보였다
남을 내 몸같이 깊이 사랑한 적 있었나
쌍둥이 자리는 질투를 배제하는 별자리라는 걸
비서 아가씨 k가 내 좁은 서랍을 뒤져 읽어주던 그날 오후
눈을 돌려 바라본 밖의 문양들은
뒤늦게 누가 누구를 감싸주는 형태였고
수선집 아줌마는 바지의 앞면과 뒷면을 잘라내고 붙여
겉과 겉을 맞대거나 속과 속을 이어 붙여
바지의 겉과 속으로
가방의 안과 밖을 만들기 위해 바느질을 시작하고
나는 그 곁에서 외부와 내부에 대해 생각한다
외부에 의해 내부가 내부에 의해 외부가 결정되는 일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 법
그러므로 이후의 모든 생일에 출생할 나는 방 안에서
부고(訃告)란을 맡아 쓰는 아저씨와 밤새 안과 밖의
사람의 붉은 부위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고
또, 잘린 케이크와 시든 꽃 사이로 핏물인지 꽃물인지
얼룩진 치마를 입고 한 아이가 뛰어 들어오다가 밖으로 사라질 것이고
바지의 외부의 바지의 내부의 외부의 내부의 바지에 의해
가방이 완성될 때까지
나는 외부의 내부의 외부의 내부의.......를 반복하다가
어려운 가방에 무심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지구본을 슬쩍 넣어본다
무엇이 무엇을 감싸고 무엇이 무엇을 담는지
확인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으니까
주위가 깜깜해지고 곧 밝아오기도 하니까
상호적인 것들은 모호하기도 하니까
안과 밖의 배후를 갖게 된 가방
수선집 아줌마가 바지로 만들어준 모호한 가방을
나는 하나 갖게 되었다
- 2010년 <문학과사회> 신인상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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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혜경 시인
1973년 인천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졸업
시집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 외
황혜경의 시는 생활의 사소한 단편을 비범한 의미를 내재한
존재론적 사건으로 통찰하는 시인의 직관이 빛을 발한 경우이다.
사건의 의미성이 무엇인지 간파하여 그것을 그 자체로 드러내는
유일어를 찾아내고, 오직 그러한 유일어로만 이루어진 말도
높은 시를 빚어내는 힘은 자기 고유의 시 세계를 창조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이미 오래전부터 활동한 기성 시인이 아니냐는
즐거운 오해를 살 만큼, 황혜경의 시는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미숙함을 찾아볼 수 없는 완숙한 경지에 달해 있고, 그것을
세련되게 제엏는 능력뿐만 아니라, 자기 시의 문법을 어떻게
주조해야 할지를 본인 스스로가 터득하고 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 덧붙여 그의 시가 2000년대 등장한 젊은 시인들의
단점과 아쉬움을 한 단계 극복하면서 그만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라는 평도 있었다..
첫댓글 지구본을 옆구리에 끼고 수선집에 가던 길에서
명랑한 만세를 외치던 내 친구 붉은 치마를 만났다
수심 없는 얼굴에는 가든에 가둔 가득처럼
종(種)이 다른 꽃들 화려하게 피어났다
붉은 치마의 서랍 안으로 착지하는 새들과 정지하는 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