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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2일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루카 19,11ㄴ-28
헬 조선? 어차피 살 거면 국뽕이 낫지 않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탈렌트의 비유’와 비슷한 ‘미나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탈렌트의 비유에서는 주인이 세 종에게 각자 다른 양의 탈렌트를 맡기고 간 것으로 나오지만, 여기서는 종 열 명에게 각 한 미나씩 맡기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떠나는 이유도 추가되었는데, 바로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주인이 모진 분이라 여긴 사람은 자신의 주인이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은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대합니다.
가진 것을 빼앗아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번 종에게 줍니다.
그리고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한 이들을 처형합니다.
우선 탈렌트의 비유와 같은 내용은 자신이 가진 재능을 땅에 묻어놓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이들은
‘감사’하지 않는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불만이 커져 피해의식으로 더 요구하기만 하지 갚아드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재능을 썩힙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자신이 받은 미나에 감사해서 주인께 더 많은 것을 돌려드리려고
노력하는 종들은 자기 주인이 ‘왕’이 되는 것을 긍정하는 이들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의 왕입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이 부모에게 받은 것에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감사하면 재능을 계발하여 성공에 이르고, 이것이 곧 나에게 은혜를 베푼 이를 나의 왕으로 삼는 방법이란 뜻입니다.
‘우와한 비디오’에 ‘흰 가루를 뒤집어쓴 채 자신의 몸을 토치로 지지는 의문의 남자’가 나왔습니다.
이분은 ‘베이비파우더’로 자기 온몸을 바르고 토치로 지집니다.
밤에도 부탄가스 토치로 자기를 괴롭히는 벌레들을 퇴치하는 일로 잠을 설칩니다.
그러다가 잠이 듭니다.
혼잣말도 하고 거의 조현병 수준입니다.
그분 지인의 말로는 어렸을 때 회사에서 머리에 구타당한 적이 있는데 그것으로 계속 약을 먹었다고 합니다.
20년 동안 결혼도 하고 자녀도 낳고 잘 살았는데 그동안 마음의 의지가 되었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러한 증상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이분에게 자신을 지켜주던 왕이었습니다.
어머니에게 감사한 것이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망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더는 감사할 존재가 남아있지 않게 되자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할 대상이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나를 존재하게 해 준 분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으로부터 받은 한 미나, 곧 생명이 허물어지지 않습니다.
나에게 생명을 주신 분을 위해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와한 비디오에 ‘가슴이 웅장해지는 애국가 만병통치약 썰’도 있습니다.
33년 동안 몸담아온 교직에서 갑자기 교직에서 허전한 마음에 우울증과 대인기피증, 알코올 중독에 걸려버린 한 분이 어느 날 TV에 나오는 애국가를 듣고 그것을 부르기 시작하면서 모든 게 고쳐졌다는 것입니다.
애국가를 새벽부터 부르면 나라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생기고, 그러면 가족에 대한 사랑, 그리고 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생겨 몸을 건강하게 지키게 되는데 어떻게 애국가를 부르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자녀가 부모에게 감사하는 것과 같고
우리가 주님을 왕으로 찬미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살립니다. 이분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애국가 가사 내용이 나라 사랑, 더 좁게는 가족 사랑, 더 좁게는 개인, 나 자신의 사랑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내 몸이 튼튼하고 건강해야지만 가족도 지키고 나라도 지킨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애국가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헬 조선이라고 하며 불평해봐야 무슨 이익이 있을까요? 역사상 지금만큼 살기 좋은 때는
없었습니다.
감사하면 감사하는 대상이 왕이 됩니다.
왕은 감사하는 존재를 뱀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보호해줍니다.
그러나 감사를 잃으면 그분이 왕이 되는 것을 거부하여 결국 뱀에게 사로잡힙니다.
뱀과 하나가 되면 그동안 받던 모든 것을 잃고 지옥과 같은 삶, 더 나아가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우리가 감사할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바치라고 했던 것은 이처럼 큰 은총입니다.
그런데도 십일조를 감사히 봉헌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우리에게 생명과 시간과 모든 것을 주신 그분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뱀의 꾀임에 속는 것일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봉헌함이 주님을 주인이실 뿐 아니라 왕으로 인정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22일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루카 19,11-28
제 집이 있는 자리에 교회를 세워주세요!
로마 산 갈리스토 카타콤베에 가시면 꼭 들러야 하는 명소가 한 곳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체칠리아 성녀의 조각상이 있는 장소입니다.
한때 산 갈리스토 카타콤베에 안장되어 있던 체칠리아 성녀의 시신이 다른 곳으로 이장되고 난 다음 이 조각상으로 대치되었습니다.
체칠리아의 무덤은 지금까지 딱 두 번 공개가 되었는데, 그녀의 무덤이 공개되었을 때 성녀의 시신은 순교 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고, 이에 감동받은 스폰드라도 추기경은 스물셋의 젊은 작가 스테파노 마데르노에게 이 모습 그대로를 조각할 것을 요청하여 오늘날까지 아름다운 조각상이 남게 된 것입니다.
체칠리아 성녀는 얼굴을 땅에 묻고 두 손을 앞으로 내민 채 옆으로 누워 있는데 마치 잠을 자듯이 편안한 모습입니다.
자세히 보면 성녀의 목에 칼자국이 보입니다.
참수당할 당시 목에 칼을 세 번 맞고도 목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사실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두 손을 보면 왼손은 세 손가락을 펴고 있고, 오른손은 검지 하나만 펴고 있는데 이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임종 마지막 순간까지 증거하였음을 보여줍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 무척이나 유명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성녀가 체칠리아 성녀지만 솔직히 그녀에 관한 기록은 거의 전무합니다.
오직 구전으로 내려온 전설들을 통해 그녀의 삶과 신앙을 추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
체칠리아는 로마 귀족 가문 출신의 총명하고 신앙심 깊은 딸이었답니다.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바치기 위해 동정으로 살고자 마음 먹었지만, 부모는 발레리아누스란 전도양양한 청년과 혼사를 밀어붙입니다.
하느님의 영과 지혜로 충만했던 체칠리아였기에 자신의 계획을 남편에게 설명하고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설득에 성공한 체칠리아는 비록 결혼한 몸이었지만 자신이 꿈꾸어오던 봉헌 생활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놀라운 일 한 가지, 체칠리아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이교도였던 남편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킵니다.
시댁 식구들도 차례로 개종시킵니다.
남편 발레리아누스에게 얼마나 신앙교육과 교리교육을 철저히 시켰으면 남편은 체칠리아에 앞서 순교의 영예를 얻게 됩니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후 체칠리아 역시 체포당하여 법정에 소환됩니다.
그녀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당당하게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밝히고, 갖은 위협과 감언이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버리겠노라고 외칩니다.
구전에 따르면 체칠리아는 언제나 성경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녀는 하루 중 기도를 드리지 않는 시간이 거의 없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답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기로 개인적인 종신서원도 발했답니다.
부모가 강제로 밀어붙인 결혼식 날 체칠리아는 아름다운 금실로 장식된 예복을 입었지만, 속에는 거친 삼베옷을 입었답니다.
체칠리아의 깊은 신앙에 감화를 받은 남편 발레리아노는 자신은 물론 동생까지도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남편은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순교자들에게는 무덤을 제공하였습니다.
결국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다는 죄명으로 참수당하여 순교의 영예를 얻게 됩니다.
그 가녀린 목에 세 번씩이나 칼을 맞고도 며칠 동안 목숨이 붙어있었던 체칠리아는 임종 직전 우르바노 주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저는 당신이 제 부탁을 들어주도록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제 집이 있는 자리에 교회를 세워주세요.”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강론>
(2023. 11. 22. 수)(루카 19,11ㄴ-28)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미나의 비유>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
그는 왕권을 받고 돌아와, 자기가 돈을 준 종들이 벌이를 얼마나 하였는지 알아볼 생각으로 그들을 불러오라고 분부하였다.
첫째 종이 들어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였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루카 19,12ㄴ-13.15-17)”
‘미나의 비유’는, 세부적인 사항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마태오복음의 ‘탈렌트의 비유’와 사실상 ‘같은 가르침’입니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승천’을 뜻하는 말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의 통치자로, 또 심판자로 재림하실 것입니다.
<‘먼 고장’으로 떠났다는 말은, 지금 예수님이 우리 곁에 안 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비유를 구성하기 위한 표현일 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신 뒤에도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마태 28,20).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주님’이십니다.>
‘종들’은 신앙인들입니다.
‘미나’는 ‘주님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신앙생활은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받아 누리는 생활이고, 그 은총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은총의 열매’는 ‘구원’입니다.
<성경의 부록에 있는 도량형 표에 의하면,
‘한 미나’는 60데나리온입니다.
그리고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계산 방식에 따라 ‘한 미나’를 백 데나리온으로 계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미나를 나누어 주면서 벌이를 하라고 지시한 일은, 일종의 ‘자격시험’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왕정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 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자격.>
따라서 종들의 돈벌이는 주인을 위한 일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을 위한 일입니다.
25절을 보면, 주인은 종들이 벌어들인 돈을 차지하지 않고, 종들에게 줍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첫 번째 종은 ‘열 미나’를 벌어들여서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받게 되고, 두 번째 종은 ‘다섯 미나’를 벌어들여서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받게 되는데, 이 비유에서 ‘열 미나, 다섯 미나’, 또는 ‘열 고을, 다섯 고을’은 중요하지 않고, 주인의 통치에 참여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결과가 아니라 노력을 보시는 분입니다.
신앙생활을 끝까지 꾸준하게, 또 성실하게 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지, 무슨 업적을 얼마나 남겼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실 끝까지 성실한 신앙인으로 살았다는 것 자체가 훌륭한 업적입니다.>
세 번째 종은, 돈을 벌어들이는 일에는 자신이 없고, 또 돈벌이를 하려다가 원금까지 잃는 일이 생길까봐 두려워서 한 미나를 잘 보관해 두었다고 말하는데(20절-21절), 그의 말은 ‘하기 싫어서 안 한 것’을 감추기 위한 핑계일 뿐입니다.
주인이 그를 엄하게 혼내는 것은, 그가 아무것도 안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무슨 거창한
신심행위도 아니고, 무슨 대단한 희생과 봉사도 아닙니다.
각자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 바로 그것을 바라십니다.
주님은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시키시는 분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을 시키시는 분입니다.>
신앙생활은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강제노동’이 아니라, ‘은총의 생활’이고, ‘기쁨의 생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열의만 있으면 형편에 맞게 바치는 것은 모두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형편에 맞지 않는 것은
요구되지 않습니다(2코린 8,12).”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이 말은, ‘헌금’과 ‘이웃 사랑 실천’에 관한 말이지만, 신앙생활 전반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억지로 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냥 ‘빈말’입니다.
만일에 ‘불우이웃 돕기’를 억지로 한다면?
도움을 받는 사람은 받았으니까 고마워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 없이’ 억지로 한 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사랑 실천’이 아니고,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실제 상황에서는 ‘사랑 없이’ 억지로 주는 것을 받는 일은, 받는 쪽에서는 기분 나쁜 일이고, 상처를 입는 일이 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자체가 은총이고 특권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신앙’과 ‘구원의 길’로 불러 주신 주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억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딴 생각만 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은총을 받았는지를 잊어버렸으니 불쌍한 것이고, 정말로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헛된 것만 찾고 있으니 어리석은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