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어령 교수의 딸 이 민아의 치열했던 삶
이 민아는 이 나라 최고의 지성 이 어령교수의 딸이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었나?
이화여대 영문과를 3년에 졸업하고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김한길 과 결혼했다.
그녀의 나이 스물 둘, 한길이 스물여덟.
둘은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났다.
민아는 단간방에서 기식하며 아르바이트를
하며 연명하였다. 아버지에게 손 벌릴 염치가 없어서
이를 악물고 힘든 생활을 이어갔다. 한길은 미주 한국어 신문
지국장을 했으나 수입은 신통치 않았다.
그녀는 한길과 낳은 두 아이는 탁아소에 맡기고
일을 나갔고 법률 전문학교에 다녔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공부를 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주 검사 시험에도 합격하여 10년 동안 검사 생활을 했다.
늘 상 범인과 씨름하는 검사 직업에 환멸을 느끼고
검사직을 떠나 변호사로 새 출발 했다.
한길은 검사가 된 아내에게 열등의식을 느꼈는지, “피곤해 죽겠는데 왜 이렇게 귀찮게 해!“
이런 식으로 짜증을 부리기 시작하면서 이 둘은 결국 헤어졌다. 결혼하고 5년 만이었다.
이혼은 동물에게는 없는 비극적 행태이다. 생을 잘못 산 죄에
대한 업보이다.
그 후 한길은 미인 탈렌트 최명길과 결혼 하였는데
그는 아내를 폭행한다는 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다음은 민아의 친구의 전언이다.
“민아가 말했어요. 다 용서했는데 끝내 하지 못한 게 있었던 거 같다고요. 마음속에 있는 걸 다 끌어냈는데,
그 끝에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게 있었다고요. 그건 남편으로 인한 상처였어요.
그 상처는 깊은 세포막에까지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어요.”
한길 사이에서 난 아들 유진(26)이가 명문 버클리대를
졸업했는데 갑자기 쓰러져 병명도 모른 채 타계하였다.
그녀는 슬픔을 추스르고 예수님 믿기를 결심했다.
이 나라 기독교의 양심, 하영조 목사의 도움이 컸다.
그리고 목사안수를 받는다. 유진의 죽음은 그녀의 계속되는 불행의 시초였다.
그녀는 재혼했고 아이 셋을 더 낳았다.
나쁜 일은 이어서 온다고 했나? 두 째아이가 자폐증으로 판명
되어 이민아 목사는 또다시 절망한다. 그러나 그녀의 눈물겨운 기도와 정신과적 치료는
그의 자폐증을 낫게 하는 기적을 낳았다. 아이가 스무살이 되던 해에 완치 판정을 받았다.
악전고투 끝에 얻은 값진 승리였다.
2002년부터 한인 교회를 순회하면서 간증 강사로
사역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투명한 신앙심, 간난을 극복하는
부단한 노력에 감동한 많은 신도들.
그러나 그녀의 불행은 멈출 줄 모른다: 갑상선 암, 망막 박리증,
위암의 판정을 받는다. 위암 수술 받고 보이지 않는 눈으로
8개월을 기도하였다. 무신론자인 아버지 이어령 선생은 딸의
불행 앞에 생전 처음 기도 하였다, “하나님 아버지, 제 딸의 눈을
뜨게 해 주시면 저는 기꺼이 예수님을 믿겠사옵니다.“
아버지의 애타는 기도의 덕인가 그녀의 망막이 제 자리에 붙어
그녀는 다시 볼 수가 있었다. 암치료에
필수 코스인 항암치료 방사능 치료를 거부하였다.
우리네 속인들은 감히 엄두도 못낼 용기요 신앙이다.
그녀는 죽음을 뛰어넘는 신념을 가지고 살인자 암과 맞이했고 암을 외면했다.
많은 곳을 순례하며 전도와 강연을 열정적으로 하였다.
그녀는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소망의 빛을 전하고 싶다.”
“제게 고난을 허락해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천국을 보게 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2015년 3월 어느 날
이 세상 끝내는 날 편안한 얼굴을 하고 떠났다는 이 민아 목사
나이 겨우 쉰 셋이었다.
“땅끝의 아이들” 이라는 신앙 간증 책을 발간하여 11만부 판매라는 간증서 초유의 베스트 셀러를 생산했다.
눈이 멀었을 때 사연을 구술하면 녹음하여 이를 글로 옮긴 첵이었다.
아버지 이 어령 교수께서도 위암 개복수술은 했는데
민아를 흉내 내어 항암 방사선 치료를 거부하고 있다.
그런 치료 받느니 책 쓰고 친구들 만나겠다고 하셨다.
이 번에는 “그 딸에 그 아버지”라고 해야 하나?
약관 20대에 한국문단에 나타나 기성문단을 초토화 시켜 버렸던 선생님.
2년 동안 일본에 건너가 자취하면서 마치 문화의 스파이처럼 일본의 고대 중 근대 문화를 샅샅이 뒤지고
내 놓은 “축소 지향의 일본“.
발간되자 마자 일본이 발칵 뒤집혔다. 그것은
또 다른 원자탄이었다. 어느 일본의 대가 보다 일본을 더 잘아는
선생님. 그 책은 오랜 기간 일본의 베스트 셀러였다.
군사정권 때 데모는 하지 않았지만 감옥에 들어간 문인들의
가정에 생활비를 꼬박 꼬박 챙기셨다는 선생님.
항암 주사는 아니어도 오래 사시길 빈다.
첫댓글 . . . 강가에서 님께서는 어떻게 위에 올리신 그런 사실을 다 알고 계시는지 - 신기합니다.
우리는 19601년 아니면 1962년 - 그때 무척 젊은 이어령 선생의 강의를 대힉로 교양학부에서 들었었는데 . . .
그때 Encyclopedia Britannica 를 계속 인용하셔서 처음엔 그게 무언가? 궁금했었는데, - 그리고 나중에 캐나다에 와서
공부 끝내고 정착하고 살 때, Encyclopedia Britannica 전권을 다 산게 아직도 가지고 있는데 - 지금은 창고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어령교수의 따님 얘기는 전혀 몰랐습니다. 이어령교수님은 지금 아마 연세가 많으실텐데 . . .
건강하셔야 할텐데 걱정입니다.
방사선 항암치료를 거부한 이 민아와 이 교수님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하고 계시네요
나이 80인 나는 상상도 못할 일을 하셨습니다.
이 선생님이 우리 학교에 부임 하셨을 때 기하 선생님인 김 정래 선생님 께서, "우리 학교에 천재 한 분이 오셨다."
라고 하신 말씀 잊혀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