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의 자화상은 예술의 거울이었다.
이것은 그의 최초의 초상화도 마지막 초상화도 아니었다. 그는 약 100여 차례에 걸쳐 유화와 드로잉과 에칭화로 자화상을 제작했다. 이 점에서 그를 능가할 화가는없다. 1625년, 그는 성 스데방에게 돌을 던지는 군중 틈에 자신을 그려 넣었다. 1626년에는 손에 하프를 쥔 모습으로 1665년에는 대화가인 제욱시스처럼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으로 자신을 그렸다. 근심에 찬 모습, 환희에 찬 모습, 상냥한 모습, 자신만만한 모습, 잘난 체하는 모습, 오만한 모습, 환멸에 지친 모습, 나이가 들어 얼굴에 살이 오르고 주름이 진 모습 등 그는 다양한 모습을 그렸다. 노쇠가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의 초상화는 사실을 모사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넝마 같은 옷을 입었던 화려한 옷을 입었던 자화상을 통해 그가 밝히려 했던 것은 고독이라는 주제였다. 그는 숨겨진 확실성을 찾아내 고독에 저항하려는 절망적인 시도를 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그의 삶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의 자화상은 그가 지닌 화가로서의 야망을 구체화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목록을 작성하듯 자신의 얼굴을 통해 표현이나 자세의 가능성을 하나하나 탐구하려 한 시도들이다. 또한 그의 자화상은 선언이다. 티치아노나 라파엘로의 그림에 대한 스스로의 판본을 창출한 결과였으며 이를 통해 렘브란트는 자신이 미술사의 이정표인 이 대가들을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의 자화상은 기도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가 매달려 있는 십자가를 세우는 것을 도와 주는 죄인이나 혹은 돌아온 탕아의 모습으로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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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가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고 가장 다루기 쉬운 모델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렘브란트는 수많은 자화상을 그렸다. 자화상은 얼굴 표현이나 다양한 예술적 기법을 연구하려는 시도만은 아니었다. 그의 자화상은 불안, 항변, 절규, 그리고 변화하는 삶의 태도와 감정의 기록이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100여 점이 될 것으로 추산하나, 그 정확한 숫자는 파악하기 힘들다. 제자들의 모사품, 렘브란트 자신의 개작, 최근에 제작된 위조품, 또한 그 자신이 그린 또 다른 판본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자화상 목록을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귀기울이려는 듯 앞으로 몸을 숙인 자화상>(1628) <주먹코를 한 자화상>(1628),<모피 모자와 밝은 옷을 입은 자화상>(1630),<화난 모습의 자화상>(1630),<소리를 지르듯 입을 벌린 자화상>(1630)<부드러운 모자를 쓴 자화상>(1634): 왼쪽 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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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한 렘브란트
각각 1629년과 1634년에 제작된 자화상에서 렘브란트는 똑같은 갑옷을 입고 있다. 철제 목가리개는 렘브란트가 조국에 자유를 찾아 준 주연합의 시민군과 자신을 동일시했음을 일러준다. 군대경험은 없었지만 그는 고객들과 공유했을 애국심을 형상화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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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에게는 아직도 경제적인 문제가 계속되었다.
1658년에도 렘브란트는 1653년에 얀 식스로부터 빌린 1000길더의 돈을 상환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빛의 채권자는 상인이자 수집가인 로데베이크 반 뤼딕으로 바뀌었다. 반 뤼딕은 3년 이내에 이자와 원금을 상환하고 거기에 덧붙여 보충 배당금의 형채로 그림 한 점을 달라고 요구했다. 렘브란트는 어떤 요구도 들어주지 않았다.
렘브란트는 티투스의 상속분 문제를 제외하면 특별한 법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에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한 몇몇 채권자들은 1647년에 책정된 티투스의 유산이 과대평가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증인이 소환되었다. 배심원들은 렘브란트가 <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의 부대>를 그릴 때 초상화 값으로 100길더씩을 지불한 두 남자. 렘브란트에게 루벤스를 구입한 반 뤼딕, 화가 필립스 코닌크, 은세공인 얀 반 로와 사스키아가 가지고 있던 보석의 설명서를 썼던 반 로의 아내 등에게 증언을 들었다. 배심원은 증언에 설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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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년 12월 18일, 렘브란트는 마침내 신트 안토니스브레스트라트의 집을 떠났다. 모든 재산이 팔렸고 빚은 다 청산되었다.
1657년과 1658년에 자신의 드로잉과 에칭화 수집품이 매각되었던 카이제르스크론 여관에서 렘브란트는 며칠을 보냈다. 그리고 그는 기능공과 상점 주인이 사는 요르단 구역의 로젠흐라흐트에 위치한 작은 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 집은 도시를 둘러싼 운하 세 개 중 가장 외곽에 위치한 카이제르스흐라흐트 서쪽에 위치해 있었다. 1년 집세가 225길더인 이곳에서 그는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12월 15일, 렘브란트는 공증인이 기재한 계약서에 서명했다. 계약서는 티투스와 헨드리켸가 렘브란트를 책임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렘브란트가 1634년에 가입한 예술가 연합인 성 누가 길드의 규율 때문에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파산 때문에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에서 어떠한 거래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채권자가 된 티투스와 헴드리켸는 그런 렘브란트를 먹여 주고, 재워 주고, 돌봐 줄 의무를 지게 되었다. 렘브란트는 티투스에게 800길더, 헨드리켸에게 950길더의 빚을 지고 있었다. 렘브란트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제작할 모든 유화, 드로잉, 에칭화 작품의 소유권을 티투스와 헨드리켸에게 양도했다. 이 양도는 그의 사후 6년까지 유효했다.
그래도 가끔씩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아르트 데 헬데르도 그중 한 명이었다. 초상화 주문도 가끔 있었다. 당시 그린 야콥 야콥츠 트리프의 초상화는 마치 예수의 제자 중 하나를 그린 듯하다. 이 시기에 그가 그린 얼굴은, 예수, 성자, 라비, 남자, 여자 등 그 어느 것을 봐도 고독하고 심각하며, 렘브란트 자신의 심적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성서>의 세계에 사로잡힌 신화와 꿈에 표현을 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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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사 차림의 티투스>(1660)
이 초상화의 모델은 아들 티투스이다. 렘브란트는 거친 수도복에 드리워진 갈색 그림자를 하나하나 묘사하는 기쁨으로 티투스를 그렸을까? 아니면 관객의 눈길로 티투스의 창백한 얼굴로 이끌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일까? 혹은 티투스로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를 표현하려 했던 것일까? | |
렘브란트는 참을성 없는 수집가 하르멘 베케르를 달래기 위해 위풍당당하고 위엄 있는 <주노>의 초상화를 그렸다. 얼굴, 목걸이, 오른손에서 여신의 권능을 느끼게 만드는 이 초상화는 세부가 무시되어 있으며, 왼손과 왼팔은 가까스로 스케치만 끝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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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시에서 색다른 그림을 주문했다. 네덜란드의 영광을 표현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원래 렘브란트의 옛 제자 호바르트 플린크가 맡은 그림이었다. 그러나 플린크는 미완성 스케치만을 남긴 채 사망했다. <율리우스 키빌리스의 음모>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로마와 스페인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려는 네덜란드의 힘을 과시하려는 것이었다. 네덜란등인은 자신들의 투쟁을 타키투스가 묘사한 대로 로마인에 대항하는 바타비아인의 투쟁에 비교했다. 바타비아인이 로마인의 지배를 종식시키기로 결의한 곳은 지도자의 율리우스 키빌리스의 연회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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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2년, 렘브란트의 그림이 완성되어 시청에 걸렸다.
그러나 그림은 불과 몇 달 만에 떼어졌다. <율리우스 키빌리스의 음모>는 다시 렘브란트에게 돌아왔다. 대신 요리스 오벤스라는 사람이 다시 이 그림을 그렸다. 그는 플린크의 스케치로 되돌아가서 키빌리스의 옆모습을 그렸다.
암스테르담의 시의원들은 렘브란트의 그림 가운데 어떤 면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탁자 위로 뻗친 무기들 위에 떨어지는 빛이 키빌리스의 상실된 한쪽 눈을 드러냈던 까닭일까? 상징적인 인물은 결함이 없어야 했다. 국민적 자부심이 손상을 입을 수는 없지 않은가. 또한 시의원들은 물감을 칠한 방식도 못마땅해했다. 팔레트 나이프의 거친 자국은 과시를 위한 그림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렘브란트의 그림을 팔 수 있도록 사방 6m정도로 잘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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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가 그림을 그리는 방식은 고객뿐만 아니라 미술애호가들까지 당혹스럽게 했다.
렘브란트가 사망한 뒤 몇 년이 지나 1685년 프랑스의 작가인 앙드레 펠리비앙은 <가장 탁월한 고대와 현대 화가들의 삶과 작품>에서 이렇게 썼다.
"그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의 방식은 대부분의 플랑드르 화가들이 채택한 지나칠 정도로 정교한 묘사와 매우 다르다. 예컨대 그는 넓은 붓질을 통해 두꺼운 물감층을 한겹 발라 나갔다. 물감을 혼합하거나 부드럽게 하지도 않고 말이다. 하지만 취향이 바뀜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에 높은 평가를 내렸다."
18세기 초에 아르놀트 하우브라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언제나 그림들을 같은 방식으로 제작했다. 나는 몇몇 세부는 최대한도로 세심하게 그리는 반면 나머지 부분은 마치 집을 칠하는 것처럼 형태에는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칠해 버리는 그의 그림을 여러 개 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런 작업방식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화가가 자신의 의도를 성취했을 때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라 말하며 자신을 정당화했다." 이 말은 사실인 듯하다. 렘브란트가 작품을 제작한 방식이 고객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았다는 것은 몇몇 그림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하우브라켄은 이렇게 덧붙였다. "그의 초상화가 하도 두껍게 칠해졌기 때문에 인물의 코를 잡아 그림을 들어올릴 수 있었고, 귀금속이나 진주목걸이, 혹은 터번은 새겨 넣은 것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그의 작업방식 때문에 그의 그림들은 멀리서 보면 매우 강한 인상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
새로운 주문이 들어오다.
암스테르담 직물제조업자들은 렘블나트에게 그들의 길드 모임을 그려 줄 것을 요청했다. 그 집단 초상화는 잘려진 <율리우스 키빌리스의 음모>보다 크기가 약간 작았다.
제목이 <직물 제조업자 길드 이사들의 초상화>인 이 작품은 길드 본부에 걸릴 예정이었다. 이 그림은 검은 모자를 쓴 다섯 명의 남자가 양탄자로 덮인 탁자 주변에 모여 있고 비서 한 명이 뒤에 서 있는 모습이다. 가장 주의해 봐야 할 부분은 한 남자가 넘기고 있는 펼쳐진 책이다. 계산을 맞추어 보고 있는 것일까? 렘브란트는 그들이 잠시 일손을 멈추고 있는 순간의 모습을 포착했다. 그들은 시선을 위로 하고 고개를 돌리고 있다. 누군가가 들어온 것이다. 이들은 방으로 들어온 사람을 보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그림을 바라보는 우리를 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거의 감지하기 힘들지만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들의 시선과, 탁자에 부여된 원근법을 통해 그들이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화가가 인물들을 올려다보며 그렸다는 것을 알수 있다.
이 인물들이 각각 1661년과 1662년 의류 검사위원이었던 얀 비테르, 코르넬리스 에흐베르츠 코베르, 빌렘 반 레네벨트, 세르바스 델 카우르트, 얀 얀츠 아렌트뷔르흐인지, 혹은 같은 시기에 견본품을 감독하던 빌렘 반 도이엔뷔르흐, 볼케르트 얀스존, 야콥 반 론, 아르나우트 반 데르 미에, 요하켐 데네베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그림은 단지 개인들을 그린 초상화가 아니라 권위와 권력을 표현하고 있는 초상화이다. 암스테르담의 시의원들은 렘브란트의 <율리우스 키빌리스의 음모>가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신화에 부응하지 않는다고 거부했다. 그 다음해인 1662년에 제작된 <직물 제조업자 길드 이사들의 초상화>는 사정이 달랐다. 올려봐야 한다는 느낌을 주는 이 그림에서 그들은 그림에 권력이 표현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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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렘브란트가 부르주아들로부터 명성을 얻길 원했던 것일까?
1662년 출간되 시에서 얀 보스는 렘브란트가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라고 말했다. 그는 유럽 전체를 대표하는 대가로 인정되었다.
렘브란트는 자신의 작품이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소장품에 포함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렘브란트는 1661년, 두번째 그림 <알렉산더 대왕>을 시칠리아 메시나 가문의 돈 안토니오 루포에게 보내고 그 대가로 500길더를 받았다. 1660년, 이탈리아 화가인 구에르치노는 렘브란트가 제작한 몇 점의 에칭화를 보고 그가 대가임에 틀림없다는 편지를 루포에게 보낸 바 있다. 루포는 렘브란트에게 그림을 한 점 더 주문했다. 호머였다.
루포의 주문이 자신의 이상에 걸맞는 것이었기 때문에 렘브란트는 루포의 비판에 너그러웠던 것일까? 루포가 분리된 네 조각을 붙여 만든 <알렉산더 대왕>에 불만을 나타냈을 때 렘브란트는 이 초상화를 다시 제작해 시칠리아로 보내 주었다. 또한 루포가 다시 이 초상화의 미완성된 부분을 지적했을 때 렘브란트는 그것을 완성시켜 루포에게 보냈다. |
<호머의 흉상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긴 아리스토텔레스>
렘브란트는 철학자의초사오하를 그려 달라는 시칠리아 거부이자 미술품 수집가의 주문을 받고, 1653년에 <호머의 흉상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긴 아리스토텔레스>를 제작했다. 렘브란트는 시인이지 철학자,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자 친구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전사의 미덕을 부여했다. 알렉산더 메달을 건 철학자 아리스토텔리스는 장님 시인인 호머의 흉상에 손을 올려 놓고 있다. 메달에 각인된 알렉산더의 흉상과 렘브란트가 1663년 제작한 <알렉산더 대왕>은 무장을 하고 투구를 쓴 팔라스 아테나의 이미지를 빌려 형상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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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렘브란트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하려면 그 앞에서 2~3개월 동안을 앉아 있어야 한다고..그래서 고객이 줄었다구요?...하긴 멋모르고 초상화를 그려 달랬다가 상당한 날 앉아 있어야 하드만은~
읽기가 지루했지만,,설명까지 있으니 그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네요,,잘 보고 갑니다
얼마전 모티비에서 렘브란트 다큐를 방송했었는데..........여기서도 보게 되네요....잘 느끼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