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3월31일 [(백) 파스카 성야]
[수도회]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다리가 되어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서간 로마 6,3-11
† 복음 루카 24,1-12
◈ [인천] 성 토요일
성토요일에 교회는 주님의 무덤 옆에 머물러 주님의 수난과 죽음,
저승에 가심을 묵상한다. 그리고 기도와 단식을 하며 주님의 부활을
기다린다. 교회는 미사를 드리지 않고, 제대는 벗겨 둔다. 장엄한
파스카 성야 예식을 거행한 뒤에야 부활의 기쁨이 찾아오고, 이 기쁨은
50일 동안 넘쳐흐를 것이다. 이날은 노자 성체만 모실 수 있다.
(‘매일 미사’ 중에서)
유일하게 미사가 없는 오늘(물론 밤에 부활 성야 미사가 있지만)이게
성토요일 묵상 글은 없습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면서
오늘 밤, 주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기쁨을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가는 그의 감사함의 깊이에 달려 있다(존 밀러).
예수님을 십자기에서 내림.
나는 어떤 부류에 속하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반대하던 부류와 함께 한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을 반대하던 부류입니다.
1. 예루살렘 고위층으로서 한나스 일가의 쥐휘하에 있었던
수석사제들과 상류사회에 속하는 사두가이 계열의 최고의회
위원들입니다. 이들은 돈, 권력, 성전 관리권을 가지고 있었고
로마인들과 적당한 협잡을 이루었습니다.
2. 근본주의적 바리사이계 율법학자입니다. 이들은 형식주의에 빠져
있었고 자기들의 위상에 대한 자만심이 대단했습니다.
3. 본시오 빌라도와 그의 병정들입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늘 타협했습니다. 그리고 병정들은 혁명당원들과의
게릴라식의 격전을 통해 예수님이 우두머리라고 생각했기에 승리감에
도취되어 가시관을 씌우는 등 조롱합니다.
4. 해방운동가들입니다. 정치적 메시아를 바라고 있던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그 모습을 찾을 수 없어 바라바를 풀어달라고
외칩니다.
이제 예수님과 함께 했던 부류입니다.
1. 예루살렘의 부유한 고위층인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입니다.
십자가형을 당한 사람은 쓰레기 더미에 버리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예로운 무덤을 내주지요. 이는 곧 그 사회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는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2. 바리사이 율법학자 니코데모입니다. 그는 은밀히 예수님께
동조했지요. 그러나 성금요일에 자신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율법을
엄수하는 바리사이로서 대축제를 맞이하는 날 시신을 마주한다는
것은 부정한 사람이 된다는 것으로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3. 로마 백인대장도 있습니다. 그는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라고 고백합니다.
4. 예수님 함께 매달린 죄수입니다. 그는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면서 믿음을 고백합니다.
내 자신은 과연 어느 편에 있는 것 같습니까? 세상의 것들을 모두
버리고 주님과 함께 하는 편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것을 먼저
선택하면서 주님을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리스도의 죽음과 슬퍼하는 세 여인(Andrea Mantegna 작).
◈ [수도회]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다리가 되어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3월31일 부활 성야, 루카 24,1-12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루카 24,5)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다리가 되어
이 거룩한 밤에 교회는 우리를 어둠과 죄에서 빛과 생명으로 구원하신
주님의 업적을 노래합니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보여 주는
이스라엘의 파스카는 사실 희망의 발견입니다. 절망과 위기 상황에서
홍해를 갈라 건너게 해주심 또한 희망의 표지였습니다. 파스카는
광야의 목마름과 배고픔, 지침과 외로움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건너가는 희망의 순례입니다.
주님께서는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이사 55,1)
하시며, “변치 않는 자애로”(55,3) 친히 생명과 희망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고
용서해주시어, “새 마음을 주고 새 영을 넣어 주시며”(에제 36,26),
죽음의 과거에서 해방된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십니다.
오늘 복음의 빈무덤 사건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은
어두움과 두려움을 체험합니다. 천사가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고 안심시키며, 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지만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다고 알려줍니다. 그들은 “덜덜 떨면서 겁에 질려” 무덤에서 나와
달아납니다(마르 16,8).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죽음의 상징인
무덤문을 열고 나가시어 갈릴래아에서 제자들을 기다리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네 삶의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
친히 우리가 만든 두려움과 아집의 문, 이기심과 탐욕의 문, 편견과
차별의 문을 열어주시어 빛으로 나아가게 해주십니다. 이렇듯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이 곧 새로운 삶의 시작이요, 또 다른 창조요 영원한
삶에로 건너감이며, 죽여도 죽지 않는 생명임을 보여주십니다.
어떻게 이 부활의 신비를 바로 여기서 재현하며 살아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부활이 시공을 초월한 신비스런 사건이나 육신의
소생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야 합니다. 부활은 거짓과 폭력, 돈과
권력의 힘 그 어떤 것으로도 죽일 수 없는 하느님의 생명을 뜻합니다.
부활은 하느님의 생명이 죽음을 이김을, 절망이 희망을 이길 수 없음을
보여준 결정적 사건입니다. 이 진리를 굳게 믿고 빛과 희망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다음으로 부활신앙은 무덤을 비우시고 되살아나신 예수님처럼, 죽음에
이르는 헌신과 투신으로 살아내야 할 과제이기도 합니다. 이웃과
더불어 행복하고 정의로운 세상이 되도록 나 자신에 대해 죽는 것이
부활신앙의 본질입니다. 죄악과 허물, 탐욕과 무관심, 편견과 차별,
미움과 증오를 무덤에 묻어버릴 때 참 부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힘으로 연대하여
죽음의 문화에 맞서야 합니다. 생명을 되살리도록 자신을 내어놓고,
남의 짐을 져주지 않고서는 결코 부활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로마 6,8). 죽음의 문화를 생명으로 되돌리는 길은 그것뿐입니다.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 재현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분과 더불어
사랑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도록 힘써야 합니다. 죄스럽고 불의한
말과 생각과 행동의 쓰레기를 태워버리고, 주님의 영으로 나 자신과
다른 이들과 세상사를 ‘다시 새롭게 보도록’ 힘써야겠지요. 그리고
악을 무력화 할만큼의 큰 선과 무관심과 냉대를 녹이고도 남을 사랑을
지녀야겠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불신에서 믿음으로, 오류에서 진리로, 어둠에서 빛으로
건너가는 '신앙의 다리'입니다. 부활은 절망을 희망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바꿔주는 '희망의 다리'입니다. 부활은 미움에서 사랑으로,
다툼에서 용서로, 분열에서 일치로, 차별에서 평등으로, 이기심과
탐욕에서 공유와 나눔으로 나아가는 '사랑의 다리'입니다. 나아가
부활은 불의와 억압에서 정의로 건너가는 '해방의 다리'입니다.
우리 모두 죽여도 죽일 수 없는 부활의 신비를 묵상하며, 세상에 빛을
밝히는 믿음의 다리, 희망의 다리, 사랑의 다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원] 주님께서는 부활하셨다.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3월31일 부활성야: 주님께서는 부활하셨다.
복음: 마르 16,1-7: 예수님께서 되살아나셨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다음 날 부활하셨다. 구약의 안식일은 이제
주님의 부활하신 날 주님의 날로 바뀌게 된다. 옛 시대의 안식일은
해가 떠서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밤을 밝힌 촛불 같은 것이었다.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경배한 이들은 여인들이었다. 여인들은
향료를 준비하여 무덤에 간다. 여인들은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이었다. “매우 이른 아침”(2절)은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고귀한 품위를 얻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이른 아침을 경사롭게 만드시고, 당신 부활의 빛으로 빛나게 하셨다.
여인들은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2절) 무덤을
보러 갔다. 안식일을 지내고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되자 열심한
여인들은 향료를 준비하고(1절) 무덤을 향해 출발하여 새벽에 무덤에
도착하였다. “누가 그 돌을 굴려 내 줄까요?”(3절) 여자들은 돌아가신
분을 만나기 위해 돌을 굴려 내야 했다. 그러나 참으로 우리의 눈에서
우리의 마음에서 닫힌 돌을 굴려 내면 무덤의 영광을 볼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에 향유를 부으면 부족한 믿음 때문에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는 영광을 믿음의 빛으로 보게 될 것이다.
“그러고는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4절)
이것은 주님께서 무덤에서 나오실 수 있도록 돌을 굴린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 이미 부활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시려고 천사가 돌을 굴려낸
것이었다. 예수님은 닫힌 무덤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으로
들어가셨다. 여인들은 무덤으로 들어가 웬 젊은이가 하얀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여기서 오른쪽에
앉아있는 천사에 대해 말한다.
성경에서 왼쪽은 현세의 삶을 상징하고 사탄의 세력을 의미하며,
오른쪽은 영원한 삶을 상징한다. 예수님께서는 현세의 생명을 넘어
부활의 영광을 차지하셨으니 부활을 전하러 온 천사는 오른쪽에 앉아
있어야 한다. 천사가 하얀 옷을 입은 것은 부활의 기쁨을 알리는
것이다. 천사가 앉아있는 자세는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제직과
왕직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앉는다는 것은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나라의 당신 어좌로 오르시는 분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왕좌에 앉는 것은 임금의 행위이고, 희생 제사의 자리에 서는 것은
대사제의 행위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으로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죄에서 완전히 씻어주시는 사제이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왕국을 주시는 임금이시다. 그래서 천사들은 죽음을 이기신
분이 그 왕좌에 앉으시려 하늘 나라에 가셨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앉아있는 모습으로(마르 16,5 참조) 나타나기도 했고, 대사제로서
우리를 위해 중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고 서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루카 24,4 참조)
천사는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6절) 우리는 십자가를
공경하고 있다. 그러나 나무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공경하는 것이다.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우리 부활의 보증이 되셨다. 그분은 당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셨다. 우리가 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갈 때, 우리 안에서도 죽음이 죽을 것이다.
빈 무덤에서 위대한 사명이 여인들에게 공동체와의 연관에서 항상
유효한 사명이 세 마디로 내려진다. “가라, 제자들에게 알려라,
말씀들을 기억하게 하여라.” 항상 의심을 품고 있던 제자들을 위해
이를 유효화하고 있는 말씀이 바로 “그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7절)이다. 여기서 이 갈릴래아는 평야지대가 아닌 갈릴래아
산, 예루살렘이다. 거기서 하늘에 오르실 것이다. “거기서 그분을 보게
될 것이다.” 즉 성령과 함께 부활하신 그리스도, 아버지의 완전한
모상, 결정적 모상을 뵙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인류에게 보여주신 가장 큰
계시요, 인류를 위한 가장 큰 역사라고 할지라도, 이 부활사건이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부활하신
주 예수의 모습은 바로 영광스럽게 될 우리의 모습이어야 하며, 그
부활의 신비는 우리 안에서 드러나야 하며, 선포되어야 하는 신비이다.
영광의 주님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십자가라는
큰 대가가 지불되었던 사건이다.
우리가 전할 부활의 신비도 우리 자신이 지고 가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드러날 수 있도록 하여야 하는 신비이다. 이 삶이 바로 구원받은 자의
삶이 아니겠는가! 우리 신앙인은 매 미사 중에 우리는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하고 응답하지
않는가? 이 미사 중에 우리의 삶이 참으로 부활의 신비를 힘차게
선포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주님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도록 청하자.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성 토요일
지난 목요일 성유축성 미사에서는 뜻 깊은 축하식이 있었습니다.
사제생활 50년을 맞이하시는 신부님을 위한 축하식이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교부학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교부는 교회의
학자들입니다. 교리와 신학의 토대를 마련하신 분들입니다. 삶과
신앙에서도 모범을 보여주신 분들입니다. 신부님께서는 강의시간이면
지난 역사를 돌아보며 교회의 미래를 말씀하셨습니다. 금경축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잠시 기도시간을 가지신 후에 성유축성 미사의
의미를 설명해 주였습니다. 오늘은 신부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성유축성 미사의 의미는 독서와 복음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교회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 주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그들의 후손은 민족들 사이에,
그들의 자손은 겨레들 가운데 널리 알려져, 그들을 보는 자들은 모두,
그들이 주님께 복 받은 종족임을 알게 되리라.” 병자 성유와 예비자
성유를 축성하는 것은 바로 아픈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며,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매년 성유축성 미사에 함께 하였지만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제게 또 다른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선포는 600년이 지난 후 예수님에 의해서 다시
선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간 단식을 하였고, 깊은 침묵 중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성찰하였습니다. 그리고 회당에서 오늘 제1독서의
내용을 선포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이 복음의 선포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권력자와 기득권을
가진 자들에게는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헌신과 투신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들을 기꺼이
내어 놓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사제와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고, 제자들은 도망을 가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과연 어떤 자리에 있는지 돌아봅니다. 어느덧 교회는
가진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투신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들의
신앙은 투신과 헌신보다는 세상과의 적당한 타협점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래서 우리는 매년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다시금 기억하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의 제2독서인 요한에 의한 묵시록은 저항 문학의 상징이며, 인간의
권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그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입니다.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고,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로마의 박해로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박해하는
자들을 물리치실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기에 희망을 가지고
끝까지 참고 주님을 향한 열정을 포기하지 말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것이 바로 순교자들이 가졌던 영성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힘입니다. 교황님께서는 남과 북이 평화와 화해의
길을 모색하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셨고, 기도 중에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같은 말을 하는 우리 민족이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버리고, 하나가 되는 날이 올 수 있도록 교회도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축성 성유는 우리들이 세례를 받으면서 이마에 바르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사람입니다. 기름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시는
것이며,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은 이제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 역시 기름부음 받은 신앙인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충실하게 가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병든 이들, 갇힌 이들의 손을 잡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
선포입니다.
좋은 말씀을 해 주신 신부님께 감사드리며, 신부님께서 더욱 건강하신
모습으로 저희들에게 바른 길을 보여주시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이 신부님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기타] 인공지능(AI) 신/오늘의 능력말씀
2018년 나해 3월31일 부활 성야
인공지능(AI) 신
오늘은 “인공 지능 신”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출애굽기 20장 3절 말씀에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인공지능 신’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인공지능 신’을 숭배하는 교회가 있다면 또 믿으시겠습니까?
미국 실리콘밸리의 유명한 엔지니어 앤서니 레반도브스키(37세)는
'미래의 길'이라는 이름의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이 교회의 신은
바로 인공지능(AI)입니다. 이 교회의 사제인 레반도브스키는 결국에는
컴퓨터가 사람보다 똑똑해질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아직은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이지만, 미래학자들은
전지전능한 인공지능이 나올 것이라 말을 합니다.
인간은 샤머니즘에서 시작된 우상숭배의 대상을 이제 인공지능으로
옮겨가려 하고 있습니다. 왜 이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그것은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여 깨어
기도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 인천교구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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