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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인(문인석인 듯)과 석견상이 있는 모습 개모양의 돌조각상은 공양왕이 마지막까지 데리고 다니던 개를 새긴 것이라 함. |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기구한 운명의 고려 공양왕(1345~1394)! 475년 동안 이어오던
고려왕업을 더 이상 잇지 못하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에게 나라를 내주고 쓸쓸히 죽어간 왕..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 자신은 왕이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왕이 되는 것이 영광이 아니란 것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성계 일파는 공민왕의 뒤를 이은 우왕이 공민왕의 실제 아들이 아니고,
신돈의 아들이라 주장하였다.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므로 우왕의 아들인 창왕 또한 고려왕의 직계가 아니라며,
창왕을 폐하고 고려왕족으로 자신들이 좌지우지 할수 있는 사람을 왕으로 앉히게 되었다.
그게 공양왕이다. 공양왕은 고려 20대 신종의 7세손인 정원부원군 균의 아들이다.
그런데 기구하게도 620여년이 지닌 지금에 와서는 그의 묘가 2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하나는 오늘 소개하는 경기도 고양시와 또 하나는 강원도 삼척시에 고려 공양왕릉이 있는 것이다.
두 도시는 서로 자기 지역에 있는 묘가 공양왕릉 진짜라고 주장하고 있다.
두 도시는 나름대로 근거를 가지고 주장하기에 발굴조사를 통한 증명이 있기 전에는
확증할 수는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궁금증을 더한다.
과연 2곳이 모두 맞는 것인지, 아니면 2중에 한곳만 진짜이고 나머지 한곳은 가짜인지..
오늘 보여주는 사진은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에 위치하고 있는 공양왕릉이다.
본시 이곳은 옛부터 왕릉골이라고 불리웠으나,
왕릉다운 모습이 전혀 없어서 오랫동안 옛부터 전해오는 지역의 이름으로만 알고 있었다.
공양왕의 마지막 전설같은 이야기는 오래토록 전해오고 있었지만,
왕릉다운 묘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러는 언젠가 왕릉이 들어설만한 명당자리가 있음으로 지명이 그렇게 붙었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왕릉이라고 불리다가,
1958년 이곳 근처에 살던 한 고등학생(이은만, 당시 17세)이
역사선생님의 "자기 지역내 문화재에 대하여 조사해오라"는 숙제를 하러 주변을 살피던중,
바로 이곳 땅속에 묻혀있던 공양왕릉이라고 쓰여진 비석을 발견하고서 보고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조사한 결과 그동안 정확히 알수 없었던 바로 그 공양왕릉이라고 인정받은 것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공양왕의 마지막 장면은 너무도 비참하였다.
그는 이성계일파의 강권에 의하여 왕이 되었지만,
그는 왕이 되기 전에는 개경근처에 살던 왕손일 뿐이었다.
당시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그는 남 부럽지 않은 풍족하고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성계의 왕조찬탈을 위한 적합한 인물로 왕손이면서 욕심도 없고
또 자신들의 뜻대로 좌우지할 수 인물로 낙점되어 왕위를 잇게 되었다.
그런 운명을 안고 그는 왕이 된지 2년 8개월만에
이성계 일파의 강압에 이성계에게 새로운 왕조를 넘기고 말았다.
그리고도 살아 있다는 자체가 굴레가 되어 또 언제나 목숨의 위태로움을 느끼며 살았다.
그리하여 그는 어느날 밤을 기하여 송도의 거처를 버리고 자신의 부인과 무조건 남으로 도망첬다.
하루종일 도망치다 날이 어두워져 잠시나마 밤샐 곳을 찾던 공양왕은
깜깜한 어두움 속에서도 희미하게 비치는 불빛이 있어 찾아갔다.
어두운 가운데도 문을 두드리니 그곳에는 한 스님이 나와서 맞이 해주었다,
그러나 스님은 공양왕의 모습을 보더니
그가 일반 백성의 자태가 아님을 직감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의 임시거쳐를 안내했다.
스님은 이곳에 숨겨두었다가는 자신도 화를 당할 것을 짐작하고,
자신의 거처에서 10리 떨어진 누각에 머물게 하고
매일 남모르게 공양왕 부부에게 식사를 대접했다고 한다.
공양왕은 한 동안 스님이 전해주는 밥을 먹으면서 연명하였다.
이곳은 공양왕에게 마지막으로 식사를 제공했던 절이 있던 곳이라해서
식사(食寺)동이라는 이름이 생기게 되었다.
그렇게 연명하던 공양왕과 왕비는 어느날 갑자기 자취가 보이질 않았다.
그런데 공양왕이 기르던 충성스런 청삽살개가 바로 근처 연못을 향해서 울부짓으며 짓어대다가
결국 물속으로 뛰어들어 빠져 죽고 말았다.
이를 수상히 여긴 주민들은 연못의 물을 빼고 보니 그곳에 왕과 왕비가 죽어있었다.
나라를 잃은 고려왕족들은 물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던 왕과 왕비를
바로 연못 위에 있던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고,
끝까지 공양왕을 따르던 삽살개의 충성을 되새기며,
삽살개 모양의 조각상을 새겨서 능의 앞에 세웠다고 한다.
그리하여 공양왕릉은 왕릉이면서 조선조 제대로 쓴 왕릉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고,
왕릉의 주변에는 석호나 석양도 없이 괴상한 형태의 동물(삽살개)모양의 돌조각상이 있게 된 것이다. .
기울어가던 왕조의 자손으로 태어났기에 평범하게 살수없었던 공양왕,
살아서는 이성계의 눈치만 살피다가,
구차한 목숨을 연명코자 목숨을 걸고 탈출한 송도에서 멀리 떨어져 도망왔던 공양왕은
구차한 생을 더 이상 연명치 못하고 쓸쓸히 이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바쳤다.
고려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공양왕릉의 초라한 모습을 돌아보고,
새삼 흥망성쇠의 무상함을 느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