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 / 김동식
아침에 눈을 뜨면 커튼부터 열어젖힌다. 햇살 가득한 회색 빌딩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천변 따라 만개한 벚꽃이 눈부시다. 검은 탄천도 이때만은 금빛 물결로 흐른다.
어젯밤 커튼을 닫으며 내다 본 밤 풍경은 간데없다. 길을 메우던 헤드라이트 물결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어렴풋하던 건물들의 실루엣, 탄천은 가로등 빛을 안고 가만가만 일렁이고 있었는데…. 미색 커튼 너머로 다른 세상이 다가온다.
홀을 가득 메운 관중들의 긴장된 눈빛들이 하나같이 커튼을 향해 있다. 무겁게 드리워진 진홍빛 커튼은 미동도 없다. 박수 소리가 난다. 어둑한 무대 밑, 흐린 간접 조명 속에서 오케스트라와 지휘자가 나타난다. 낮고 느리게 연주되는 전주곡이 곧 펼쳐질 전쟁의 비극과 주인공의 비련을 예고한다. 연주가 마무리되며, 묵직한 커튼이 서서히 올라간다. 관중들의 낮은 탄성. 막에 가려 있던 고대 이집트가 다가온다. 멤피스 궁전의 석조전과 돌기둥이 장엄하다. 라다메스와 람피스 제사장 일행이 옛 이집트 복장으로 서 있다. 현세가 온통 고대의 블랙홀로 빨려드는 순간이다. 커튼의 매직이다.
커튼의 매직은 우리 몸에도 있다. 엄지손톱 반쯤 크기의 초미니 커튼, 눈꺼풀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번 아무 의식 없이 이 얇은 막을 여닫으며 살고 있다. 그랜드캐니언도 나이아가라도 이 커튼만 살짝 닫으면 사라진다. 세상만사 보고 싶으면 열고 보기 싫으면 닫아버리면 되는 최고의 편의 장치이다. 잠잘 땐 닫히고 깰 때면 알아서 열리는 자동 캐폐식 커튼이다. 이 자동 장치가 고장으로 닫히고 다시 열리지 않으면 영원히 잠자야 한다. 삶과 죽음이 이 초미니 커튼의 작동 능력에 달려 있다.
원죄의 인간은 거추장스러운 커튼을 걸치고 살아야 한다. 만고 무죄의 동물들에겐 필요 없는 물건이다. 아담과 이브가 걸친 나뭇잎 한 장이 인간 가림막의 원조다. 원시 시대엔 나뭇잎, 풀잎을 엮어서 주요 부분만 가렸다. 요즈음 아슬아슬한 손수건 사이즈의 커튼을 보면 인간도 결국 원초적 향수를 못 벗어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옷 얘기를 할 때마다 풀지 못할 의문점이 인다. 왜 중세나 조선 시대엔 그리도 풍덩하고 치렁치렁한 천을 겹겹으로 걸치고 살았을까. 손수건 크기면 충분한 걸 말이다. 답답한 우리 조상님들.
인간은 태생적으로 막과의 인연을 피할 수 없다. 엄마의 뱃속에서도 양수 막에 갇혀 산다. 이 막을 벗어나야 세상의 광명을 맞을 수 있다. 아이 둘 낳을 때 아내의 산고 현장에 함께 있었다. 산모 허리 아래로 가림막이 쳐졌다. 의사, 간호사는 막 저편에, 이 상황의 원인 제공자는 막 이편에 있었다. 땀범벅으로 비명을 지르는 여인의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아이 울음소리가 터지자, 여인은 비명을 멈췄다. 간호사 양손에 받혀진 아이가 막 저편에서 나타났다.
"공주님이시네요. 축하합니다."
막은 인간 회로애락에 늘 함께하는 불가분, 불가피의 존재이다. 그러나 없어야 더 좋은 존재가 있다. 인의 장막이다. 인간 사회 곳곳에 바이러스처럼 웅크리고 있는 악의 화신이다. 역사적 사례에 환관 조고가 있다. 춘추전국 시대를 마감하고 광대무변의 대 제국을 세운 영웅 진시황도 조고라는 간신의 장막에 가려 비극적 종말을 맞는다. 후한 말의 십상시도 이름난 인의 장막이다. 아둔한 황제를 가로막고 국정을 전횡했던 열 명의 환관들, 200년 후한의 막을 내리게 한 장본인들이다.
요즈음 신문에도 현대판 십상시에 대한 의구심 기사가 나올 때가 있다. 가슴이 철렁한다.
재미와 즐거움, 비극과 희극, 삶의 지혜나 깨달음을 전해주는 막이 있다. 이름도 고운 은막이다. <바람과 함게 사라지다>의 대서사, 웅대 무비한 <벤허>, 그리고 반전의 블랙 코미디 <기생충>에 이르기까지. 심금을 울리던 스크린의 추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아, 지금도 가슴 뛰게 하는 은막의 여인들도 있었지.
반면 이름도 고약한 흑막이라는 것도 있다. 냉전 시대에 중국과 소련을 일컫던 죽의 장막, 철의 장막과 동의어다. 위정자들은 막 뒤에 모여 음모하기를 좋아한다. 이런 정치 행위를 그들은 막후 정치, 막후 협상이라 그럴싸한 명칭으로 부른다. 흑막 속에서 벌어지는 일, 권력자는 알고 국민은 모른다.
선거철이다. 막 뒤에서 결정된 공천자 발표가 났다. 위원들은 고도로 엄정한 심사과정을 거쳐 선정되었다고 강변한다. 낙천자들은 반발한다.
'흑막정치의 결정판이다,' '막후에 뭔가가 있다.'
10년, 20년 정치 동지가 막 타령, 내부 총질을 해대며 등을 돌린다.
정치판의 앞길, 참 막막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