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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의 큰 근심
롬 9:1-5
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롬 9:1-5 /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나의 겨레 이스라엘 사람들이여! 나의 동족 유대인들이여!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나아가기를 내가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 여러분은 모를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 때문에 밤낮 마음이 무겁고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만일 나의 영원한 파멸이 여러분에게 구원을 가져올 수 있다면 나는 차라리 그 편을 택할 것입니다. 이것이 단순히 겉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도 아시고 성령께서도 아십니다. 4)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직도 하나님의 명령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특별한 백성으로, 선민으로 삼으셔서 영광의 광채가 가득한 구름으로 인도하시고 또 얼마나 여러분에게 복을 주고 싶어하시는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여러 규칙들을 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시고 위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5)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을 섬긴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 있습니다. 육신으로 말한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의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합시다! 아멘.
바울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라는 그의 심정을 표현하면서, 이스라엘이 갖고 있는 구원의 특권을 설명합니다.
바울에게 있는 큰 근심(1-3)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택함(1:1)받은 바울의 마음에는 그를 괴롭게 하는 큰 근심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개인의 내적인 상태를 거짓이 아닌 진실한 것임을 바울은 자신의 양심과 성령을 언급하며 강조합니다. 바울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이유는 아마도 다른 유대인들로부터 골육의 친척에게 등을 돌렸다는 의심과 비난을 받고 있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바울의 진심은 모세가 죄를 지은 이스라엘을 중보하면서 고백했던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출 32:3-34). 이런 모습은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지도자의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어떤 면에서 바울은 지금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에게서 자신의 과거의 모습을 떠올릴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과거에 부르심을 받기 전, 그리스도를 대적했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진실을 알고 나자 여전히 복음을 떠나 있는 동족의 모습에 괴롭고 염려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모세처럼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구원이 사라지는 것도 감수할 수 있다는 마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4-5) 바울은 유대인이 갖고 있는 여덟 가지 특권을 설명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①양자 됨(출 4:22), ②하나님의 영광(출 13:21-22) ③하나님이 주신 언약들(출 20:1-17; 신 29:14-15; 삼하 7:16; 렘 31:33) ④율법(출 20:1ff; 신 5:1-22) ⑤예배 ⑥메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⑦축복받은 조상들 ⑧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유대인의 여덟 가지 특권은 두 가지 기능을 합니다. 첫째, 그리스도를 향하는 안내자와 같다는 것이고, 둘째, 이 좋은 안내자가 있음에도 유대인들은 바른 방향에서 이탈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이러한 특권은 바울이 이 사실을 깨닫기 전부터 있던 비밀이었습니다. 과거 바울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핍박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시기 위해 예비하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적용: 바울은 복음을 거부하고 있는 동족들을 향한 애타는 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믿지 않는 가까운 사람들을 향해 어떤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나와 연관이 있고, 나에게만 유익을 주는 자들만 인정하고, 용납하는 마음가짐과 자세를 버리고 모든 이들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삶이 복음을 위해 사는 삶이며 우리가 끝까지 지켜야할 모습입니다.
< 설 교 >
바울의 큰 근심과 고통
박덕기 목사
여러분, 기우(杞憂)라는 고사 성어를 아시지요? 옛날 중국의 ‘기’나라에 “하늘이 무너지면 어떻게 하나?” 하면서 주야로 걱정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걱정도 팔자다.”라는 말처럼, 쓸데없이 공연한 걱정을 하는 사람을 두고 핀잔하는 말입니다. 두 사람의 유대인이 말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나는 꼭 기독교로 개종하겠어!”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말도 안 되는 소리, 자네가 기독교로 개종하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천당은커녕, 비석 밑에서 돌아눕고 말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첫 번째 사람이 “걱정도 팔자일세. 내 아우도 곧 개종할 텐데, 그러면 우리 아버지는 도로 제자리로 돌아올게 아닌가?”라고 대답했다는 유머가 있습니다.
영국의 여류작가 엘리엇은 사람들이 5 가지의 감옥, 곧 1)자기 사랑의 감옥 2)근심의 감옥 3)향수의 감옥 4)선망의 감옥 5)증오의 감옥에서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녀에 의하면 인간은 근심의 감옥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괴테는 “이 세상에서 가장 벗어나기 어려운 것은 근심이라는 마귀다.”고 그의 작품 ‘파우스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 인생들에게 근심의 문제는 실로 심각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으로 말미암아 죽은 미국 청년의 수가 30만 명이었는데, 아들과 남편을 전쟁터에 보내놓고 근심과 염려 때문에 심장병에 걸려 죽은 미국 시민들은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염려가 지나치면 위장 통증, 종양, 두통, 설사, 두드러기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찬송가 가사처럼,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구이며,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 진 누구입니까?
성경에서는 근심이나 염려가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염려를 헬라어로는 ‘메리므난’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여러 조각으로 나누다’라는 동사 ‘메리조’에서 유래한 단어로 ‘마음이 나누어지는 것’ ‘상이한 방향으로 분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여러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를 염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근심이나 염려를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한 근심이나 염려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결여되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근심이나 염려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이 되고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근심 속에서 살아가는 인생들을 향하여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고, 사도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했고, 사도 베드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또 근심이나 염려를 하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히 3:12에 “형제들아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마음이 가장 악한 마음이고,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는 것은 뿌리에서 끊어진 꽃과 같이 영원히 죽고 말 것이기 때문에,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교훈을 받게 됩니다. 또한 고후 7:10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는 말씀에서, 사망에 이르게 하는 세상 근심은 하지 말아야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필요하다는 교훈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큰 근심과 고통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로마서를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하면, 1-11장까지의 교리 편과, 12-16장까지는 실천 편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리 편중에서 9-11장까지는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역사에 있어서 유대인은 무엇인가? 특히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서 유대인의 문제는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가? 이것은 대단히 곤란하고 어려운 질문입니다. 하늘 아래 그 어떠한 민족도 이스라엘만큼 놀라운 영광을 누렸던 민족은 없습니다. 그 어느 나라도 이스라엘 민족만큼 세계의 주목을 받은 나라도 없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선민이었으며, 하나님의 축복된 약속이 그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축복과 특권들을 생각할 때, 은혜에 충만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세상의 무수한 민족들 가운데 하나님에 의해 특별히 택정함을 입었다는 사실,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특권도 그들의 것이었으며, 훌륭한 조상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모든 인류의 운명과 장래에 대한 언약을 부여받았다는 사실, 이 모든 일들에 대하여 과연 어떻게 다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4, 5절에 보면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하면서 감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독특하고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믿음이 그들의 조상들로부터 전해졌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유대인에게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시자, 그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자기의 동족 때문에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고백을 합니다. 1-2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거하노니.” 라고 하였습니다. Living Bible의 우리말 번역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성령님이 내 안에서 양심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나는 동족 때문에 정신적인 고민과 많은 슬픔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위대한 신앙의 사람에게,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니 이게 웬 말입니까?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하기를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향하여서는 ‘항상 기뻐하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하고서, 정작 바울 자신에게는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니, 이건 자가당착이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대로, 사도 바울의 근심과 고통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어떻게 집을 마련할까? 하는 의식주에 대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가난과 질병에 대한 근심도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는데, 그러한 바울 자신이 세상적인 큰 근심과 그로 인한 그치지 않는 고통을 느끼며 살았을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근심과 고통이야말로 성경이 말씀한 바와 같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의 큰 근심과 고통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3절에 밝혀져 있는 대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서 하게 된 근심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은 비록 이방인의 사도였지만, 동족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의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기는 하나,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보인 책임이 있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부인하고 있으니, 이스라엘의 구원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큰 근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됨을 역설한 바울은, 제아무리 자신의 동족이라도, 불신 유대인들에게 구원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는 어느 누구라도 구원받을 영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불신하는 동족의 멸망은 뻔한 것이며, 그래서 사도 바울의 동족 때문에 근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신 동족을 위한 바울의 근심과 고통은, 간절한 구원의 소원으로 나타나는데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했습니다. 여기 ‘저주’란 말은 헬라어로 ‘아나데마’ 라고 하는데, 이 말은 천벌을 뜻합니다. 단순한 어떤 경제적인 손실이나 시간적인 손해, 또는 육적인 죽음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과 육이 아울러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를 받아 지옥으로 떨어지는 무서운 멸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소돔 고모라가 멸망한 것과, 니느웨성이 멸망한 것이 바로 아나데마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멸망이 자기에게 오는 한이 있을지라도, 자기의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자신은 그 저주를 달게 받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생명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사랑했으므로, 그리스도와 끊어짐은 그의 모든 것이 끝남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그보다 더 큰 아픔은 있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한 것은 사도 바울의 최대의 고통, 최대의 희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도 바울의 동족애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신앙적인 동족애요 민족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동족애는 그가 단지 이스라엘 백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기 민족이 잘되어야 한다는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동족애는 골육의 친척인 이스라엘 민족의 번영과 안일을 바라기보다는, 민족 전체가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는 신앙적 차원의 애국심이었습니다. 이러한 애국심, 이러한 민족애를 갖기까지에는, 먼저 바울의 철저하고 확신에 가득 찬 신앙이 밑받침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의 신앙이 희미한 자는 결코 이러한 애국심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내가 믿는 신앙의 확신이 있어야만,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힘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찰리 피스’ 라는 사람은 중한 죄를 지은 범죄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법과 사람의 법을 모조리 무시한 흉악범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영국 리즈시 아멜리 교도소에서 그는 사형 집행일의 아침을 맞았습니다. 교도소 목사님이 언제나처럼 졸리는 듯한 목소리로 성경을 낭독하면서, 그의 앞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찰리는 지옥에 대해 목사님이 직접적으로 읽고 있는 태도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 동료 인간이 잠시 후에 떨어질 지옥 구덩이에 대하여, 그렇게도 초연하게 줄줄 읽어 내려 갈 수가 있단 말인가? 이 전도자는 도대체 영원한 불 못이 그 희생물을 영원히 태운다는 말씀을 과연 믿고 있는가? 믿는다면 어떻게 조금의 떨림도 없이 그러한 말씀을 읽어 내려 갈 수가 있겠는가? “그대는 사망에 이를 것이며, 사망은 모든 소망을 상실한 상태를 의미하오.” 이런 말을 눈물 한 방울 없이 해낼 수 있는 전도자도 과연 사람인가? 이 모든 말이 찰리에게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외쳤습니다. 목사님!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제가 목사님과 하나님의 교회에서 이같이 주장하는 것을 믿는다면, 동해에서 서해까지 영국이 온통 깨어진 유리 조각으로 덮여 있을지라도, 한 영혼을 그처럼 영원한 지옥에서 건져내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맨발로 걸으며 나아가겠습니다. 아니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면, 손바닥과 무릎으로 기어서라도 가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지옥이 실재하는 것을 확실히 믿는다면, 영국 천지가 온통 깨어진 유리 조각으로 덮여 있을지라도, 한 영혼을 건져내기 위해서라면, 무릎으로 기어 다니면서라도 외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떠합니까?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신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 저주를 받을지라도 개의치 않겠다는 사도 바울의 이 간절한 소원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춤추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내릴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모세가 하나님께 드린 간절한 기도와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큰 죄를 범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은 목이 곧은 백성이니,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내가 이 백성을 다 진멸하고 너와 네 후손을 창대케 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통 사람 같으면 “하나님 아버지! 다른 사람은 다 진멸하시고, 저 혼자만 살려주시겠다니 너무도 감사합니다. 어쩌면 저를 이렇게도 사랑하십니까?” 라고 하면서 감격할 것인데, 그러나 모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거룩한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모세의 기도에서, 또는 사도 바울의 소원에서, 끓어오르는 애국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애국심은 결코 정치적 애국심이나, 편협한 민족주의에서 나온 그러한 애국심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애국심은 모든 동족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역사가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한다는 것은, 참 신앙에 거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는 자는, 곧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자인 것입니다.
나만 편안하고 무사하겠다는 것, 나만 구원받겠다는 생각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절대로 옳지 않는 태도입니다. 다른 사람은 망하더라도 ‘나만’ 하는 마음은 하나님 앞에 열납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 ‘하만’이 꾸민 일로 이스라엘 백성이 다 죽게 될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유대인으로 ‘에스더’가 왕후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에스더의 삼촌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무서운 경고를 했습니다.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 민족이 다 죽을 때 너만 무사하리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준엄한 책망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죽어 가는 사람에 대하여 무감각한 사람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인가를 의심해 보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가족들 가운데 아직도 믿지 않는 식구들이 있는데, 아무런 감각이 없다면 정말로 내가 그리스도인인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식구 중의 한 사람이 죽는다면 당장 지옥에 갈 텐데, 이렇게 보고만 있을 것입니까? 이대로 놔둘 것입니까? 여러분의 가족, 형제, 친척 중에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 때문에 사도 바울처럼 큰 근심과 고민과 고통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차라리 내가 저주를 받는 한이 있을지라도, 그들이 구원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한 번 이라도 가져 본 적이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마음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에게 있었던 큰 근심과 고통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큰 근심과 고통은, 결코 의식주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가난이나 질병에 관한 것도 아니었고, 사망에 이르게 하는 세상에 속한 근심도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근심과 고통이야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었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믿지 않는 동족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원한 지옥의 멸망을 당하느니 보단, 차라리 바울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 저주를 받을지라도, 동족이 구원을 받았으면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가장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불교에서 사용하는 용어 가운데 ‘비원’(悲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곧 모든 중생이 극락왕생하기까지 자신의 구원을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사도 바울의 심정과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진리가 없고, 그래서 구원과 생명이 없는 이교도들도 이러한 마음을 갖고 있다면, 오늘 불신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가져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겠습니까? 조난자의 외침을 듣고서도, 구경만 하고 있을 선원이 있을까요? 죽어 가는 환자 곁에서, 태연히 앉아 신문이나 읽을 의사가 있을까요? 불이 나서 사람들이 타죽어 가는데, 가만히 앉아 있을 소방관이 있을까요? 세상의 많은 이웃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영원한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데, 어찌 우리만 예배당에 편히 앉아서 예배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고,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 진리를 확실히 믿습니까? 천국이 실재하는 것처럼, 지옥도 실재하는 것을 확실히 믿습니까? 그렇다면 불신 가족이나, 불신 친척이나, 불신 이웃과, 불신 동족에 대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해피 데이를 앞두고 우리 모두 사도 바울의 불타는 구령의 심정을 가지고, 불신 가족과, 불신 친척, 불신 이웃과 동족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진력하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더욱 큰 사랑
바울은 확신의 사도다. 당당히 이김을 선포하는 승리의 사도다.
롬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외친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에 빠졌다.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함 앞에 죽음이라도 맥을 못추며 그 어떤 환난, 위험, 칼이라도 위협이 되지 못한다. 세상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자신의 삶을 끊을 수 없다는 확신을 노래한다.
그러나 롬9:1~5로 넘어가면 갑자기 그의 당당함이 사라진다. 그의 넉넉히 이긴다는 선언이 사라진다. 바울은 로마서 8장과 정반대의 사람으로 바뀌어진다.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바울의 동족에 대한 문제 때문이다. 구원 받은 영혼이 개인적으로는 노래할 것 밖에 없는데 자기 동족을 생각하면 괴로움이 있다. 아니 괴로움이 밀고 들어온다. 그 이유는 예수를 거부하고 예수를 오히려 핍박하는 동족의 죄 때문이다.
바울의 동족에 대한 심령 상태는 이렇다.
1. 구원을 받지 못하는 동족을 볼 때 슬프다. (롬9:1)
롬9: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바울은 진심을 말한다. “큰 근심이 있다.” 동족들이 예수를 배척하고 동족들이 예수를 거부한다. 율법의 종교에서 은혜의 종교로 건너 뛴 바울은 승리의 확신 속에 머물러 있지만 동족들이 은혜의 복음을 거부하다 못해 예수 믿는 자를 죽이려 하고 바울을 죽이려 한다. 바울은 그러한 동족의 영적 무지를 생각할 때 슬픔에 빠진다. 여기 큰 근심이라 함은 압도될 만큼의 큰 슬픔이란 말이다. 왜 우리의 형제들이 이 예수를 모를까? 동족들의 영혼 구원에 불타는 바울은 슬퍼할 수 밖에 없다.
진실한 사랑은 슬픔은 동반한다. 내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을 수용하지 못할 때 한 없이 비탄스럽고 슬픈 것이다. 구원을 받지 못한 동족을 보면서 아무런 슬픔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2. 구원을 받지 못하는 동족을 볼 때 아프다. (롬9:1下)
롬9:1下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자기의 동족들은 누구인가? 이스라엘 사람이다. 롬9:4~5을 보면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 「예배」와 「약속」이 있는 자다.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다. 그리스도 예수가 이스라엘 혈통에서 오셔서 구원자가 되셨다. 그런데 자신의 혈통에서 나온 구원자를 유대인들이 배척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슬프다 못해 이제 아프다. 그치지 않는 고통이라 하였으니 끊임없이 엄습하는 마음의 고통이란 말이다.
모든 아픈 것은 쉬었다가 다시 일어난다. 강한 고통에서 잠깐 쉬었다가 다시 고통이 엄습해 온다. 그러나 이 동족 사랑에서 오는 고통은 중단되지 않는 고통이다. 동족을 구원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고통은 그냥 파도처럼 쉴 사이 없이 밀려오는 아픔이었다.
사랑은 아파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혈육들이 죄에 눌려 살고 죄에 종노릇하고 율법의 짐에 눌려 신음하는 모습을 볼 때 아프지 않는 것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이든지, 집단이든지, 한 종족이든지 그들을 볼 때 엄습하는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 바울은 부르심을 따라 선택받은 유대인에게 복음을 들고 가지 않았다. 그러면 유대인의 구원이 바울의 안중에 전혀 없었던 것인가? 아니다. 사실은 바울이 이방인에게 열심히 복음을 증거한 것이 유대인의 구원을 앞당기기 위한 열심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롬11:13~14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이방인이 구원을 받으면 그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시기가 나서라도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이라는 바울의 생각이다. 롬11:25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이방인의 구원의 수가 채워질 때까지 이스라엘이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이 다 구원 받는 것을 보고 그 구원의 수가 채워지면 이스라엘이 예수를 믿는다는 말씀이다. 롬11:26을 보면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방인의 전도자로 목숨을 바쳐 일한 것은 결국 이방인의 수를 채워서 유대인의 구원을 앞당기려는 동족 사랑이었다. 뜨거운 사랑이다. 그가 40에 하나 감하는 매를 5번이나 맞고 굶고 춥고 먹지 못하고 자나깨나 복음을 전한 전도자가 된 것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혈육, 친척, 동족을 건지겠다는 사랑의 일념이다. 그러니 어찌 그의 마음이 아프지 않겠는가? 바울은 특별한 심장을 가진 사도다. 하나님의 열심을 지닌 심장이다.
3. 구원을 받지 못하는 동족을 볼 때 저주라도 불사한다. (롬9:3)
롬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는 칭의의 은혜를 받은 복음의 영광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 그 무엇도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동족이 구원을 못 받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자신이 저주를 받고 동족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자신이 망하므로 동족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어떤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 망하는 것을 소원한다는 각오를 밝힌다. “동족을 구원할 수 있다면...” 그것만이 바울의 최대 바램이다.
바울은 이런 면에서 동족 사랑에 미친 애국자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이지만 결코 유대인의 구원을 가슴 속에서 지워버린 적 없는 사도다. 우리는 과연 내 동족에 대한 사랑, 내 나라에 대한 애국심이 있는가? 죄의 사슬에 놓여 영적 무지와 오만함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한 동족을 생각하면 슬프고 아픈 마음이 있는가? 아니 구령열에 불타기에 내가 부서지고 내가 망해도 된다는 절대 소원이 있는가?
김교신 선생은 우리 조선을 성경 위에 세우는 것이 그의 인생의 목표였다. 성서 조선이란 잡지를 만들고 삼천리 반도 이 강산을 말씀 위에 세우게 하였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동족 사랑이고 애국심이고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정신이다. 우리는 우리의 복음을 들고 그 사랑이 나의 만족에서 끝나지 말고 내 동족 형제에 들려지도록 구령열에 불타야 하겠다.
① 내 가족 식구의 구원을 위해 구령열에 불타야 하겠다.
복음의 구원의 단위는 가정이다. 행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다. 나만 영생을 가지면 안된다.
② 내 이웃, 친척의 구원을 위해 구령열에 불타야 하겠다.
아브라함은 믿음 없는 롯이 전쟁 포로로 잡혀갔을 때 단까지 쫓아갔다. 창14:13~16을 보라.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 백 십 팔명을 거느리고 모든 것을 찾아오는데 전력하였다.
③ 내 나라, 민족 구원을 위해 구령열에 불타야 하겠다.
남북이 분단된 지 70년이다. 남북의 허리가 잘라진 채 신음하며 지나고 있다. 북한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하여도 기도할 수는 있다. 기도를 쌓아야 한다. 우리 크리스챤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세워진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내 나라, 내 국경 안에 갇혀서 나만을, 우리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태어난 내 동족이 회복되어야 되고 죄와 불의의 억압에서 해방되는 일이라면 행동하는 애국심,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1919년 4월 15일, 제암리교회가 일경에 의해 불에 탔다. 그때 24명이 죽었다. 또 일경은 4.15 제암리 학살 이전에 수촌리 마을을 다 불태웠다. 세 차례에 걸쳐 35채 이상의 가옥을 잿더미로 만들고 130명을 끌고 가서 고문하고 수촌 마을에 수촌교회가 불에 타서 전소되었다. 우리 동족의 그 슬픔이 극에 달했다. 그런데 일본의 제국주의 앞에 내 나라의 주권을 찾자는 만세 운동이 그리스도인의 삶인가 아닌가? 내가 저주를 받는다 할지라도 동족 구원을 소원한 오늘의 본문을 읽노라면 거기에 답이 있다. 주저할 것이 없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나라를 구원하려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사람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더 나아가 이 나라를 지키려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연평도 포격 사건이 있었을 때 해병대원 철모에 불이 붙어서 탔다. 그것도 모르고 전방을 주시하고 대처한 해병 청년을 가리켜 이 시대의 영웅이라 하였다. 우리는 이런 정신으로, 이런 애국심으로 나라를 사랑해야 하겠다.
④ 내 교회를 세우려는 구령열에 불타야 하겠다.
우리 교회 역사가 100년이 되었다. 독립운동 시 일경들에 의해 움막 초가집을 빼앗기고 6.25사변 시 잠시 예배당을 빼앗긴 고난 받은 교회가 100년을 맞았다. 일제의 핍박, 전쟁의 고통, 가난의 어려움을 돌아보면 이 모든 것을 사랑으로 이겨내며 100년 이후를 꿈꾸고 있다. -17억에서 예배당을 세운 오목천교회는 구령열의 사랑으로 희생했다. 오목천교회는 지금 무명의 교회에서 세계 선교, 민족 복음화에 앞장 서야 할 큰 사명을 요청 받고 있다. 그러나 아직 많은 것이 부족하다. 다시 이 교회를 섬기려는 사랑이 불붙어야 한다. 사랑의 희생이 없으면 가식이다. 금년에 한 사람당 300시간 기도 작정을 하고 시간을 드리자. 교회의 100주년 준비와 100주년 감사를 위해 물질을 드리자. 한 번씩의 물질 봉헌이 있으면 모든 것을 잘 해낼 수 있다. 구령열에 불타는 사람은 교회를 진실로 사랑한다. 가정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그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란 교회를 귀히 여기고 교회 사랑의 열정에도 불탄다. 교회가 바로 서서 예수를 이 민족 앞에 전하면 온 세계를 구원할 수 있기에, 교회가 이 시대의 희망이라고 믿기에 교회를 세우는데 모든 것을 드린다.
한국의 초대 선교사 최치량 장로는 비오는 어느 날 교회에 갔다가 비가 새는 교회를 보았다. 그는 당장 자기 집으로 달려가서 자기 집 기왓장을 떼어 가지고 왔다. 이것이 초기 한국 교회 장로의 수준이다. 하나님의 집을 새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교회 윤광덕 권사는 교회를 지을 때 삼형제의 이름으로 건축 헌금을 드렸다. 상상할 수 없는 액수였던 650만원을 드렸다. 그 후 쑥떡 장사를 해서 하루에 꼭꼭 만원씩 드렸다. 그 후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로 병원에 치료를 받고 그 피 묻은 산재보상금을 몽땅 드렸다. 주님의 교회에 대한 사랑이다. 그 분은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예배당 청소를 했다. 난로불을 피웠다. 교회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세상 사람들이 도무지 가질 수 없는 교회 사랑의 애교심을 갖자. 교회 백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회복되어야 할 것은 구령열이다. 폭넓은 사랑이다. 사람 사랑을 뛰어넘어 나라와 교회에 대한 사랑이다.
가족을 위한 가슴앓이
로마서 9:1-3 / 김남준 목사
I. 본문해설
로마서 8장에서 사도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저희를 구원하였도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성화의 삶을 이야기 한 다음에 마지막으로 “환난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가 없다”고 감격에 찬 목소리로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9장에 오면서 울음 섞인 목소리로 어조가 바뀌면서 자기 안에 있는 큰 근심과 그칠 줄 모르는 고통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동포, 친척, 가족을 향한 고통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 안에 있는 그치지 않는 큰 근심이 있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 근심은 예전에는 없었던 근심이었습니다. 그도 한때는 나사렛에서 목수의 집안 아들이 인류의 구원자일수 없다고 굳게 믿었고 오히려 하나님에 관한 허망한 풍설을 퍼뜨리는 이단의 괴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확신에 차서 대제사장의 공문을 취하여 다메섹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날 수 있을까? 바울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충된 논리였지만 성령의 강력한 빛이 비취게 되었을 때 복음의 신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으신 것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대신 저주를 받으셨고 그래서 예수님은 저주를 받았어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것을 전파하는 복음전도자가 되었습니다.
II. 가족을 향한 고통
A. 그치지 않는 큰 근심
이런 커다란 하나님의 복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것은 한편으로는 이 사람에게 감격을 가져다주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끔찍한 근심과 처절한 고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골육지친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빛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예전에 자신처럼 허무한 일에 굴복하며 거짓된 유대교의 가르침 속에 살아가는 동포들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은 그의 인생 전부를 뿌리 채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아직도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어둠 속에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골육지친들을 생각할 때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B. 저주를 받을지라도
더욱이 사도는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로다.” 즉 골육지친 중 몇이라도 구원을 얻게 할 수 있다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라고 노래를 하였습니다. 저주를 받다 라는 말은 희랍어 성경에 ‘아나데마’(ἀνάθεμα)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에게도 저주를 받는 것을 싫어하는데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핵심은 ‘저주를 받을지라도’가 핵심이 아니라 ‘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러한 정신은 스스로 터득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배운 것입니다. 하나님이심에도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고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아 죽어가시면서까지 구원받아야 할 불쌍한 자기의 백성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시는 광경을 생각하면서, 자신도 저주를 받을지라도 골육지친 중 몇이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바로라고 담대하게 고백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C. 예수님의 모본
이것은 예수님이 친히 보여주신 모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의 생애는 불쌍한 영혼들에 대한 눈물로 가득 찬 생애였습니다. 그 중 한번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기도의 소원을 올린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당신 자신이 잠시 후에 형벌의 십자가를 감당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이렇게 못 박는 사람들이 이후에 당하게 될 끔찍한 형벌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바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본이었습니다.
믿지 않고 아직까지도 불신 가운데 머물러 있는 여러분들의 가족들은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까? 잠시 후 이 세상을 떠날 우리 엄마가 예수 믿지 않고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지 그 결과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가족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키드민스터의 청교도 리처드 벡스터는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영혼을 위해 눈물 흘릴 수 없는 사람은 누군가 대신 울어 주어야 할 불쌍한 영혼을 가진 사람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어두움에 가득 찬 우리 가족들의 영혼에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믿어지는 것은 성령의 역사 없이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안됩니다. 정말 하나님이 하늘을 열고 은혜와 사랑을 부어주셔서 우리 어머니의 맘을 녹이셔야 합니다. 우리 아버지의 돌 같은 마음을 깨뜨리셔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 홀로 우리 가족을 구원하지 않으시고 먼저 예수를 믿은 나를 사용하셔서 가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III. 가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가족을 구원하시려고 하실 때 주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 받는 도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가족들에게 놀랍고 은혜로운 역사의 일들을 이루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A. 사랑하라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과 함께 해야 할 일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족들에게 자신 있게 ‘어머니 예수 믿으세요, 아버지 구원 받으십시오’ 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충분히 가족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충분히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자신 있게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고,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아버지도 만났으면 좋겠어요.’ 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먼저 가족들과 마음으로 화해를 해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나를 때리고 폭언으로 나를 짓밟은 아버지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으며, 젊어서 나를 버리고 바람난 엄마를 어떻게 내가 사랑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 때문에 아버지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 때문에 어머니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받은 십자가 사랑을 기억하면서 용서하고 화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이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불쌍한 영혼을 보면서 울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영혼이 가장 순수해지는 때가 두 번 있는데,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십자가 앞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릴 때와 하나님 모르는 영혼이 너무 불쌍해서 눈물을 흘릴 때 인간의 영혼이 가장 순수해지는 때입니다.
B. 기도하라
두 번째는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른 새벽 미명부터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셨고 깊은 밤도 기도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실 때가 다가왔을 때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를 올렸고 남겨두고 가야하는 우리를 위해 땀이 피가 되어 흐르도록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공으로 되돌아오는 법이 없습니다. 간절한 기도는 혹시 우리가 살아있을 때 가족이 구원받지 못해도 우리가 죽어도 기도는 살아남아서 우리가 기도하던 사람들의 마음을 일깨워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할 것입니다. 가족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는 것은 운명론자입니다. 내가 아니면 누구도 이 복음을 전할 사람이 없다고 믿고 소명에 불타 영혼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가족들의 영혼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지 않았던 것을 회개하여야 합니다.
C. 희생하라
마지막 세 번째는 희생해야 합니다. 가족들은 원래 다른 가족들에게 인정받기가 참 어렵습니다. 우리의 결점과 약점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가 무엇입니까? 영생의 확신이 있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가족들은 가소롭게 여깁니다. 가소롭게 느껴지지 않기 위해서는 영적인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한 것 중 하나가 이 복음이 참된 것이라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희생입니다. 어버이날이 되었는데도 애들하고 놀러가느라고 전화 한 통 걸어서 ‘어머니 아버지 어버이날 축하해요.’ 그 말 한마디로 전화 끊는 자녀들이 담대하게 ‘엄마 아빠 사랑해요. 예수님 믿으세요.’ 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아버지가 남겨두고 간 유산을 가지고 소송 중인 동생이 형한테 ‘형님 우리의 소망은 복음 밖에 없어.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 말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아예 낯모르는 사람하고는 신앙 이야기를 재미있게 주고받아도 가족들이 모이면 신앙에 관해서는 입을 딱 닫습니다. 이것은 위선적인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이 교회에 와서 아무리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도 집안에서 인정을 받지 않는 사람은 신뢰할 수 없는 봉사자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여러분들이 예수 믿고 진실하게 변화된 혜택을 가족들이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희생입니다.
IV. 결론
희생해야 합니다. 그 잃어버린 영혼이 예수를 믿고 우리와 함께 복음의 빛 가운데 살면서 하늘 가족이 될 수만 있다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내가 하나님께로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나는 관계없습니다. 어느 날 죽음이 불현듯 찾아오고 우리 모두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 가겠죠. 그때 주님이 우리에게 물을 것입니다. “네 가족들은 어디에 있느냐?” “예수님 죄송합니다. 제가 한번도 복음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가족들이 모두 지옥에 있습니다. 저기 울부짖는 소리가 우리 가족들의 소리입니다.” 라고 말해야 할 때 거기가 어떻게 우리에게 천국일 수가 있습니까? 먼저 불쌍한 것은 하나님을 믿은 우리에게 돌봄을 받지 못하고 버려졌던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의 불쌍한 영혼이 아닐까요? 그럼 그 보다 더 불쌍한 것은 그렇게 불쌍한 가족을 위해서 기도할 줄도 모르고, 눈물 흘려줄지도 모르고 희생할 줄 몰랐던 더러운 우리의 영혼이 아니고 누가 불쌍한 영혼이겠습니까?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깊이 회개하고 여러분들의 가족을 가슴에 깊이 끌어안고 눈물 흘리는 전도자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전도자의 또 다른 아픔
이정익 목사
제 친구 목사님 중 한분은 열심히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많은 분들이 사랑하는 목사님입니다. 그래서 제가 보기에 그 목사님은 근심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언제나 말이 없고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서려 있었습니다. 언젠가 그 목사님이 남모를 걱정이 있다며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내 부모님이 아직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이것이 내게 주어진 가장 큰 십자가입니다. 즐겁다가도 이 문제만 생각하면 즐거운 마음이 가시고 힘이 쭉 빠집니다. 남들은 잘도 믿던데 왜 내 부모님은 믿지 않으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나의 최대의 기도제목입니다.” 여러분, 그 목사님의 그 심정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지금 여러분 중에도 그런 근심이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남들은 잘도 믿더구만, 전도하면 잘 따르더구만, 왜 내 부모나 내 형제는 믿지 않고 고집만 부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 심정이 오늘 읽은 본문에서 고백하는 사도바울의 심정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하면서 1장부터 8장까지 어떻게 구원받는가, 구원은 무엇인가 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9장부터 11장까지 나 개인의 구원을 넘어 온 우주에서 구원이 어떻게 완성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읽은 본문 9장에서 사도 바울은 개인적인 고통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8장 31절에서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니 “누가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끊으리요…… 죽음이나 칼이랴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끊어낼 수 없다”고 장담하였습니다. 그리고 9장에 와서 자신에게 말 못할 고민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고민
사도바울은 1절에서 “나에게 큰 근심과 마음의 고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마다 마음에 고통이 있습니다. 그것이 질병일 수도 가난일 수도 자식이나 미래의 걱정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개인적인 일상의 고민도 있을 수 있지만 또 다른 고민 즉 영적인 고민도 있습니다. 내 자녀가 예수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내 부모가, 내 형제가 예수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문제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해 보셨습니까? 사도바울은 그것이 고민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고통입니까? 3절을 보면 “나의 형제 곧 골육지친이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바울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예수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돌아다니며 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물론이고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하면 다 잘 믿습니다. 다 잘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 동족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를 거부하고 한사코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도바울이 느끼는 아픔이고 고민이었습니다. 이 아픔이 서두에서 말씀드린 어느 목사님의 아픔이고, 이 아픔이 신앙인들이 느끼게 되는 진정한 아픔입니다. 우리는 이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그래야 전하게 되고 믿지 않는 분들을 위해서 중보기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래 바울의 모습
원래 사도바울은 부활 같은 허황된 이론을 퍼트리고 다니는 예수를 싫어했습니다. 그는 예수가 사기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부활한다는 것이 가능한 말입니까? 그런데 부활을 전하고 다닙니다. 바울은 그것은 사기라고 본 것입니다. 또 예수의 제자들이 그런 허황된 이론을 전하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그 제자들을 핍박하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섰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던 중 그는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눈을 뜨게 되게 되었고 눈을 뜨고 보니 모든 것이 참 진리였습니다. 예수의 오심, 십자가의 죽음, 부활 등이 모두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섭리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인생이 180도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핍박하던 그 예수의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바울은 죽음을 불사하고 전도하러 다녔습니다. 그렇게 전도하다가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고 변화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마음 한편이 뼈저리게 아파옴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나는 구원받았는데, 이방인들도 복음을 전하니 순순히 받아 구원받았는데 내 동족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보낸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제는 내 동족이 멸망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백성을 사랑하셔서 애굽에서 불러내셨습니다. 재앙 중에서 그들을 보호하셔서 마침내 출애굽 하여 홍해를 건너게 하셨습니다. 광야에서는 생수와 만나로 먹이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지켜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백성들에게 가나안 들어가 정착하도록 꿈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민족이 감사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매일같이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불기둥 밑에서, 구름기둥 밑에서, 아침도 저녁도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먹어가면서 불평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아론과 공모하여 금송아지까지 만들어 놓고 그것에게 절하고 제물을 바쳐가며 이것이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경배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이 백성을 다 광야에서 죽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볼 때도 이 백성은 아주 타락한 민족이었습니다. 참 우매하고 무지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래도 멸망은 막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나서서 이렇게 중보기도를 하였습니다. “여호와께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소서.”(출 32:31) 모세도 화가 났지만 일단은 이 백성을 심판에서 살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을 향하여 용서의 중보기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모세의 심정으로 사도바울이 이 백성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기도한 것은 그들이 동족이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실 장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은 무한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우선 양자가 되는 복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가는 곳마다 지키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애굽에서의 돌보심을 보십시오. 더 이상 할 수 없을 만큼 축복하십니다. 또 각종 언약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고 많은 자손과 넓은 땅과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모세와도 언약을 맺기를 내가 장차 이 백성으로 하여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 백성에게서 메시야가 태어나리라는 약속까지 주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먼저 된 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이 약속들을 모두 저버리고 포기하고 무시했습니다. 에서가 소중한 유산들을 포기하듯이 버렸습니다. 예수의 오심도 거부하고 오히려 핍박하고 마침내 그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먼저 된 자가 결국 나중 된 자가 된 것입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이것들을 생각하면 기가 막힌 것입니다. 이점을 생각하면 마음이 상하고 분노가 일어나고 안타까움이 일어났습니다. 내가 지금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할 때 이방인들도 순순히 따르고 믿는데 내 동족 이스라엘은 거부하고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까지도 잡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그 심정을 표현하기를 “내 자신이 주께로부터 저주를 받아 끊어질지라도 바라는 바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잘못된 신앙
그러면 유대인들이 왜 이렇게 무지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들의 신앙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율법과 전통과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새 시대, 복음시대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오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돌아다니며 그 부활을 전하고 다니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역설하고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여전히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죽이고서도 회개를 하지 않고 다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예정론을 강하게 말하고 다니지는 않습니다. 예정론은 멸망당할 운명을 지닌 사람이 있다는 이론입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멸망당할 사람을 미리 운명지어 놓았다는 이론이 성립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을 보면 그렇게 멸망당하기로 작정된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에 저주를 받으면 강퍅해지고 무슨 말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믿지 않으려고 귀를 막고 못들은 척하고 거부하고 고집 세게 행동합니다. 별소리를 다 들려주고 보여주어도 믿지 않습니다. 믿지 않으려고 열심히 귀를 막고 있습니다. 옛날 양반들이 가족들이 교회에 가서 변화되어 오는 것을 보고 속으로 자신도 교회에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끝까지 고집을 부리다가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멸망당할 사람은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그 형편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의 고집과 무지와 잘못된 점을 사도바울은 신랄하게 질타했습니다. 그러다가 독백처럼 외쳤습니다. “차라리 내가 저주 받는다 할지라도 내 백성이 믿는다면….” 그는 이 말에 자기 심정을 피력합니다. 그 마음은 사랑입니다.
모세가 자기가 백성들을 봐도 너무 타락한 백성이었습니다. 보통 타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봐도 심판받고 저주 받아도 마땅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중보기도를 합니다. “이 백성을 용서하소서. 언제는 이 백성이 선한 백성이었습니까. 언제는 선해서 이 백성을 선택하셨습니까. 아니면 나도 저주받아 죽겠습니다.” 예수님도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고 중보기도를 하셨습니다. 스데반도 “저들을 용서하소서” 하고 중보기도 하였습니다. 사랑이 크면 처음에는 미움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막 질책하고 책망하고 매를 듭니다. 그러다가도 나중에는 용서를 하게 됩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또 하나님의 의를 왜곡하였습니다. 롬 10:3을 보면 “저희가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아는 척 했습니다. 그들은 열심도 있었고 뜨거운 열정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진리가 없었습니다. 열심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공산주의에도 열심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은 모순된 열심입니다. 이단의 열심도 모순된 열심입니다. 이스라엘의 열심은 대단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을 보면 안타까울 정도로 철저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했다고 잡아서 사형에 처했습니다. 간음한 자를 데리고 와서 돌로 칠까요 말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짐승이 우물에 빠져도 건지지를 못하였습니다. 이런 무지로 인해 구원이 가까이 왔을 때 선뜻 받지 않고 거부하였고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도 거부하고 죽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부활도 거부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내 의에 기준을 삼았기 때문입니다. 또 내 지식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니라”(10:3)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 안에서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내 의를 주장하고 내가 강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왜곡되는 것입니다. 모든 신앙인이 하나님의 의에 기준을 둔다면 갈등은 금방 사라질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자기의 의를 믿으니까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누구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롬 10:13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예수를 알고 믿게 되었습니까? 여러분들이 예수를 알고 믿게 되었다는 것은 굉장한 사건이고 은혜이고 복입니다. 사람이 예수를 믿는 일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어도 당장 생기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오늘 예수를 믿거나 안믿거나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뭐가 생깁니까? 아무것도 주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바쁜 시대에 주일날 할 일도 많은데 왜 교회에 가야 합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안믿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무관심 때문입니다. 먹고 살기에 바쁜데 예수에 관심 갖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왜 안읽는가 하면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손에 들기만 하면 잠이 오는 것입니다.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관심이 있어 보십시오. 잠이 오겠습니까? 이 무관심이 참 무서운 것입니다. 어느 여인이 책 한권을 사서 읽었는데 재미가 없어서 그냥 버렸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결혼을 하고 보니 그 책을 쓴 저자가 남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찾아 다시 읽어보니까 그렇게 재미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뭐가 달라졌습니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관심만 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그 책이 재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전도를 하면 잘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관심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주 쉽게 예수를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에게 주어진 은혜입니다.
유대인들은 큰 오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을 오해한 것입니다. 하나님 생각은 온 인류가 구원받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예수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를 오해하여 하나님은 우리들만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말했다고 십자가에 달아 죽였습니다. 이런 오해가 어디 있습니까? 사도바울이 이같은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깨닫고 난 후 그 사실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 하자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잡아 죽이려 했습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내 자신이 저주받아 예수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바라는 바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결국 유대인들 믿을 것 기대
바울은 이 백성들이 결국은 하나님을 믿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10:2절에 근거해서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탕자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매일 밤 문을 열어 놓고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또 호세아가 집나간 아내가 돌아오기를 밤새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지금 거스르는 이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이 말씀은 바울은 결국 이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믿고 기대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의 가족이 모두 믿는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런데 자식 하나가 그리고 아버지가 믿지 않는다면 또 무슨 불행입니까? 즐겁다가도 그 생각만 하면 즐거움이 사라집니다. 그 고민이 나의 고민이고 우리들의 고민이고 사도바울의 고민이고 하나님의 고민입니다.
외면할 수 없는 부담
이규현 목사
로마서 8장은 로마서 중에서도 보석의 가장 영롱한 부분과 같다고 했습니다. 굉장한 확신과 기쁨에 찬 바울이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는 듯한 모습이었는데, 9장으로 넘어오면서 먹구름이 끼는 듯 어둡습니다. 바울은 이방의 사도로 부름을 받아 복음을 전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기쁨을 맛보았지만, 동족인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것을 보며 굉장히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워하면서 고통과 아픔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유대인 중심으로 흘러왔고, 하나님의 언약이 유대인으로부터 출발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으로 나셨고 모든 뿌리가 유대인인데, 정작 예수 그리스도가 출현하고 복음이 나타났을 때는 유대인들이 그 복음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사역하는 현장에서 많은 이방인들이 돌아오는 것은 참 감사하고 기쁘지만 동족인 유대인들은 소수의 사람들만 돌아왔고, 복음을 거부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에 바울은 굉장한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언제나 가슴에는 동족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솔직한 자기 심정을 본문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롬 9:1~2)」 바울은 진심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자기에게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자기가 저주를 받겠다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저주를 받는 한이 있어도 내 형제 골육 친척이 구원을 받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그들의 구원에 대해서 강한 애착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어떤 피조물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이 없다(롬 8:39)”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의 골육 친척이 구원을 얻기 원한다는 말입니다. 특히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라는 표현은 동족의 구원에 대한 바울의 열망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드러냅니다. 이런 모습은 구약의 모세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으로 하나님이 심판해서 멸하려 하실 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구하는 기도를 합니다. 그러면서 만약에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면 주께서 기록한 책에서 자기 이름을 지워달라며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구합니다. 자기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것입니다. 모세 역시 동족의 구원에 대한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느끼고 있는 고통이나 근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는 복음의 사도, 이방인의 사도로서 구원의 사역을 위해서 애를 써왔고 과거에 유대주의 안에 깊이 들어가 있었던 사람으로 성경의 전체 맥락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유대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데, 왜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반응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1절에 보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11)」라고 했습니다. 복음서에도 예수님의 출현을 가장 적대시했던 사람들이 유대인이었습니다. 바울도 이전에는 예수를 핍박하는 일에 앞장서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의 인생이 바뀌면서 이방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생명을 걸고 지금까지 달려왔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고통과 고민이 더 깊어집니다. 왜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부하고 구원으로 들어오지 못하는가? 혹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변경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까지 생긴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6절을 시작하면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 복음의 능력이 첫째는 유대인에게로 미쳐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바울의 진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가 이방의 사도이지만, 동족이 복음의 바깥에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려 안타까운 것입니다. 자기가 이방의 사도로 살아갈 때 이방인들이 돌아오는 기쁨이 크지만, 반면에 또 다른 면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안타까움이 같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가까운 가족들이 예수를 믿지 않고 있는데 나의 구원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구원을 받아서 정말 좋은데, 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가족들이 주변에 있다면 너무나 안타까운 것입니다. 바울은 구원의 풍성함이 무엇인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부터 구원의 경륜을 이루어나가셨고 마침내 그리스도가 오셨고, 자신도 복음의 바깥에 있었다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구원의 광대하고 풍성하고 황홀함을 누리지 못하는 유대 동족을 바라볼 때 이 고통이 끝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주신 것에 대해서 깊이 감사드리지만, 자신이 얻은 구원을 자랑하며 그것만으로 기뻐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너무 좋은 것을 혼자 누리면 가족들이 함께 누렸으면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혼자 좋은 것을 먹을 때도 같이 먹었어야 하는데, 같이 누렸으면 좋은데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으로 이방인들은 마치 지옥의 땔감 정도로만 여기고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자기들은 선택받았고 다른 사람들은 버려졌다는 배타적이고 종교적인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무관심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를 보면 탕자의 형은 동생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선택 받은 자로, 아버지의 아들로서 누릴 특권만 생각하지, 아버지가 가슴을 졸이며 가슴 아파하는 동생에 대한 마음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동생이 돌아왔을 때도 “아버지의 아들이 돌아왔다”고 말합니다. 아버지와 상관이 있지, 자기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예수님이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부자는 날마다 연회를 베풀고, 그 부잣집 앞에 앉아있는 거지 나사로는 개들이 헌 데를 핥을 정도로 비참하게 살아가지만, 부자는 나사로에게 어떤 자비도 베풀지 않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에게 공평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둘 다 죽었지만, 부자는 지옥에, 나사로는 천국에 갔습니다. 부자는 음부에서 목이 타고 고통 중에 높은 곳을 바라보니, 자기 집 앞에 앉아있던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부탁하기를 나사로를 보내어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좀 서늘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옥은 물 한 방울의 자비도 없는 곳입니다. 들어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고통 속에서도 부자는 갑자기 지상에 남아있는 자기의 다섯 형제가 생각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부탁합니다. 나사로를 아버지의 집에 보내어 다섯 형제에게 증언하여 그들이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합니다. 마침내 부자에게 각성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고통의 자리에 오면 안 된다는 각성이지만, 너무 때늦은, 소용없는 각성입니다. 지상에 살 때는 전혀 관심이 없던 일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의 이런 태도와 관점이 우리의 가슴에 와 닿았으면 좋겠습니다. 열왕기하 7장을 보면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아람의 군대에 둘러싸인 사마리아가 고립되어 굶어 죽을 지경이 되고, 나중에는 돌아가며 자식까지 잡아먹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기근이 너무 심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람의 군대를 함락시켜 놓은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네 명의 나병환자들이 아람의 진영으로 들어가보니, 아람군사는 다 도망가고 거기에는 먹을 것과 금은보화가 흘러넘쳤습니다. 그들은 정신없이 먹고 챙기다 보니 그런 일들이 옳지 않다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서로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한다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너무도 좋은 소식을 가지고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는다면 벌을 받을 일이라는 말입니다. 복음 안에서 구원을 얻고 변화가 일어난 사람일수록 이런 마음이 일어납니다. 고린도전서의 바울의 마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귀한 것을 나누는 것이 사랑입니다. 바울이 느끼고 있는 고통이 무엇입니까?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동족을 사랑하는 만큼 고통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아프면 가장 많이 고통스러워 하고 그 아픔을 같이 느끼는 사람이 가장 많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도 바울의 이런 아픔이 나에게도 있는지 한번 확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좋은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어떤 여자분이 자신의 생일이 다가올 때 선물을 준비하는 남편에게 다른 어떤 선물보다 당신이 교회에 나오는 것이 최고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 남편의 구원이고, 아무리 세상적으로 좋은 것을 해준다고 해도 기쁨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임종을 앞두고, 찾아온 목사에게 자신이 죽어서 장례식을 치를 때, 강력한 복음의 메시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무리 전도를 해도 예수 믿지 않는 가족들이 내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 복음을 듣고 변화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죽음이 닥쳐와 있는 상황 속에서도 가족들의 구원을 챙기는 그 영혼이야말로 구원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가지는 가장 강한 애착이 있다면 ‘영혼구원’입니다. 특히 가까운 사람들의 구원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영혼구원에 대한 간절함이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내 주변의 가족과 친지들, 이웃들에 대해서 이런 부담을 가지고 있는가? 여기에 따라서 우리 신앙을 진단해볼 수 있습니다. 어떤 선교사님은 다른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지만, 정작 자기의 가족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것으로 인해 너무나 괴로워하셨습니다.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 부담을 떨쳐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믿기까지는 내 마음에 그 고통이 늘 있는 것입니다. 가족 전도를 하지 않으면 정말 그 마음에 큰 눌림이 있습니다. 저희 가정이 불교에서 기독교로 전향할 때, 저희 아버지는 가족들이 교회에 나가는 것에는 동의하셨지만, 본인은 오랫동안 믿지 않으셨습니다. 손톱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완고하셨고 술 담배도 하셨습니다. 제가 사역자의 길을 가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안 믿으셔서 마음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 특별히 기도해야 되겠다고 결단을 하고 일주일간 금식을 목표로 기도원에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아버지께는 그냥 일주일 동안 기도원에 갔다 오겠다고만 말씀 드리고 갔는데, 돌아와 보니 아버지가 완전히 변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기도원으로 떠나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고 마음에 회심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바로 새벽기도에 나가셨고, 제가 돌아오자 마자 가정예배를 드리자고 하셔서 그날부터 제가 가정의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고 좋은 것이 있으면 교회에 바치려고 하시고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으시고 예수를 잘 믿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감격이 됩니다.
본문을 통해 바울이 가진 입장과 마음의 태도를 통해서 그가 가지고 있는 구원과 신앙의 진정성을 우리가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구원의 밖에 있는 사람들을 방관할 수가 없습니다.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쉰들러는 독일의 나치 하에서 유대인들이 죽어갈 때 자기 돈을 들여서 유대인들을 구출해내는 일을 합니다. 나중에는 천백 명까지 살려냅니다. 전쟁이 끝나고 쉰들러의 “한 사람이라도 더 건져낼 수 있었는데…”라는 안타까움과 후회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바울이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사람의 목숨을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일입니다. 바울은 이미 구원을 받았고, 전도도 할 만큼 했고, 동족들을 위해 노력을 안 한 것도 아닙니다. 그 정도면 자신이 할 도리를 다했다고 입장을 정리하고 대충 넘어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큰 근심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바울은 로마서를 8장으로 끝내고 12장으로 넘어가도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9~11장은 삽입된 장 같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장은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되는 동족의 구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인의 구원에 대한 그의 강한 애착입니다. 가족 친척 혈육에 대한 구원의 문제를 바울이 얼마나 집요하게 붙들고 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나에게도 바울과 같은 마음이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없다면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구원에 무관심할 수가 없습니다. 구원의 귀중함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구원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았지만 그 구원과 복음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구원 안에서 주어지는 풍성함이 얼마나 놀랍고, 구원의 바깥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이 복음을 가까운 사람에게도 전하지 못하고 소극적일 수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 그 구원을 풍성하게 누릴수록 그 간절함은 더 깊을 것입니다. 바울이 표현한 대로,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라는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저주가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저주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 끔찍한 저주를 언급하면서까지 혈육의 구원을 간절히 갈망하는 것은 그가 구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구원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가까운 골육 친척이 거기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단순히 감상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그에게 주시는 마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심판을 동족들이 받는 것은 너무도 끔찍한 일이고, 자신의 어떠한 희생을 통해서라도 그것을 막고 싶은 것입니다.
신자가 가져야 할 최고의 관심이 무엇입니까? 영혼구원입니다. 영혼구원에 대한 간절함보다 우리의 관심을 끌만 한 것이 없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히 9:27)」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이 땅의 삶은 잠깐이고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바울은 우리가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지만 우리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무엇이 진짜 사랑입니까?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세상의 좋은 것을 다 준다고 해도 그런 것은 모두 일시적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아무리 부유하게 산다고 해도 그 영혼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장례식에 가보면 더 그런 것 같습니다. 다 끝났는데 고인이 무슨 일을 했으며 얼마를 남겼고 어떻게 살았는지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딱 하나, 그가 구원받은 것밖에 없습니다. 요즘에는 웰빙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러나 웰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웰 다잉, 잘 죽는 것입니다. 잘 죽을 때 그것이 잘 산 것입니다. 죽음을 통해 내 과거의 모든 것들이 결판나는 것입니다. 잘 죽는 것이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 아닐까요? 그러므로 우리의 초점은 영혼구원입니다. 사람을 볼 때 우리의 관점은 구원을 받았느냐 입니다. 믿지 않는 가족을 위한 최고의 선물은 구원입니다. 요즘 우리가 남편사랑, 자식사랑, 부모사랑 하지만, 우리가 최상으로 줄 수 있는 사랑은 구원의 길을 알게 하고, 영생의 삶을 확신하게 하고, 천국을 준비하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가족을 사랑한다면 안타까움을 가지고 기도하며 애를 써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그치지 않는 고통으로 남아있을 때, 내 구원으로만 끝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부산성시화, 민족복음화, 세계복음화를 외치는 교회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사명이고 비전입니다. 그런데 가까운 가족들의 구원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가지지 않은 채 세계복음을 외친다면 그것은 공허하고 위선입니다. 가족의 구원에 관심이 없는 세계 선교는 진정성이 없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가족과 친척을 사랑한다면 그들이 구원을 얻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영혼의 귀중함을 날마다 인식하고, 그 일을 위해 헌신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영혼구원의 열정이 이렇게 강력할 수 있는지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게 됩니다. 로마서 8장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감격적으로 선포했던 바울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한이 있어도 가족 친척이 구원을 얻기를 원하는 간절한 열망, 열정이 우리에게도 주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이 가진 영혼에 대한 사랑과 고통이 우리에게도 일어나서 가족과 친척, 이웃의 구원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애를 쓰고 기도하고 사랑을 베풀기 위해 노력할 때 주께서 놀라운 열매를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러브부산운동을 하고 아프리카에서 구제하고 집을 고쳐주는 일들을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 베푸는 일일 뿐입니다. 교회가 복지를 아무리 잘해도 그것으로만 끝난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 모든 행위를 통해서 궁극적으로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영생과 천국을 가지게 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은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오늘도 구원 없이 달려가는 사람들을 향해서 다시 한 번 사랑과 애정을 다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안타까워하면서,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사람을 향해서는 안타까움이 없다면 이상한 일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바울의 심정이 회복되어서 우리를 통해 구원의 역사가 날마다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
로마서 9:1-13 / 이삼규 목사
위대한 음악가였던 쇼팽은 폴란드 사람입니다. 그는 20세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납니다. 집을 떠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당부했습니다. “너는 폴란드 사람임을 잊지 말라.” 아버지는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아들의 마음에 심어주었습니다.
유학을 떠나는 제자에게 선생님은 조그마한 병에 고국의 흙을 넣어주며 당부했습니다. “어디를 가든 나라를 잊지 말게” 쇼팽은 유학 가서 공부하는 동안 선생님이 주신 조그마한 병 속의 흙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자신이 폴란드 사람임을 기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3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날 때 쇼팽은 한마디를 남겼습니다.
“내 조국 폴란드의 흙이 담긴 그 병을 내 무덤에 묻어 달라.”
우리나라 속담에 “피는 물보다 진하다.” 혹은 “팔은 안으로 굽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인의 정서에 잘 맞는 속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9-11장까지를 읽어보면 사도 바울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상식을 뛰어넘지 못하는 사람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방 선교를 위해서 전 생애를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슴 속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교만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배척하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대적하였습니다. 바울이 이방에 복음을 열심히 전한 결과 곳곳에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많이 돌아올수록 그의 마음은 자기 동족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롬 9: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바울은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이 고통 때문에 양심이 괴로워서 견딜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인간 됨이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양심적 존재로 사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양심을 주셨습니다. 이 양심은 율법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는데 그 양심을 통해서 옳고 그름을 알게 하고 불의와 의를 알게 했습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과 내 속에 있는 양심 이 두 가지는 나를 점점 놀라움으로 채운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1:19). 양심을 버리면 모든 것이 파선됩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 남이라"(잠4:23). 인간의 생명은 그 마음의 양심에 있습니다. 양심은 우리 마음에 새긴 율법이요(롬2:15), 내 마음에 등불이요(시18:28),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벧전3:21)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의 가슴 속에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근심이나 고통이 어떻게 다르냐고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두 가지가 다 비슷합니다. 바울의 가슴 속에 응어리져 있는 고통이 얼마나 대단했나 하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이중적인 표현 방법을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큰 근심과 마음속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무엇입니까?
1. 형제와 골육친척들의 구원을 위한 고통이었습니다(3절).
바울의 속에서 그치지 않고 일어나는 고통이 무엇입니까? 자기 동족이 구원받지 못함으로 오는 고통입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이 예수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고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고통은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더욱 커지는 고통이요, 믿음이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커지는 고통입니다. 이 고통은 신앙의 연조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욱 커지는 고통입니다. 다른 사람이 예수를 잘 믿을수록 고통스럽습니다. 자기 식구들은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도 바울의 고통이었습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신앙적 애국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간 월요일에 3.1절을 보냈습니다. 삼일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이들도 바울과 같은 고통이 있었기에 독립운동을 주도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민족 모두가 자기와 같이 되기를 소원하였습니다.
행 26:29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바울의 소원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큰 근심, 그치지 않는 고통’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실 바울은 여러 지방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파할 때마다 많은 이방인들이 돌아옵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을 얻습니다. 그래서 기뻐합니다. 그런데 정작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은! 골육은 도무지 돌아 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핍박을 하고 괴롭힙니다. 바울은 이방인이 돌아오는 것을 볼 때마다 그의 양심과 심령 깊은 곳에서는 그칠 줄 모르는 고통이 그를 찔렀습니다. "차라리 내가 저주를 받더라도 내 가족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까지 자기 동족을 사랑했건만 사도행전을 보면 자기 동족으로부터 엄청난 핍박을 받았던 것을 봅니다. 일차 전도여행 때 바울이 루스드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런데 멀리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극렬분자 유대인들이 원정을 와서 그곳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돌로 치게 만들었습니다.
행 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유대인들의 극성은 이 정도였습니다. 바울이 가서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자신이 비록 이방인의 사도라 할지라도 자기 동족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도 바울의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의 내용은 3절 말씀대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의 영혼구원 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치지 않는 고통을 아픔으로 소화하면서 구체적으로 표현하기를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저주를 받는다 할지라도 자신의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저주’는 ‘아나데마’라는 말인데 이것은 단순히 손해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천벌’을 뜻하는 말입니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은 무서운 멸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런 저주도 감수하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레미야도 그러했고 모세도 그러했습니다.
출 32: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에게도 바울이 가졌던 그런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습니까?
지난 일년 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내이구역의 김현순 성도님이 계십니다. 지난 금요일이 1주기 추도식 날이었습니다. 자녀들의 연락을 받고 추도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따님이 전화할 때 추도예배도 추도예배이지만 자기 아버지 전도를 위해서 와달라는 부탁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자녀들이 그렇게 신앙생활을 한지 오래된 분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자기 골육을 전도하기 위하여 애쓰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감사한 마음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믿지 않는 남편, 믿지 않는 자녀들, 믿지 않는 형제들을 보고도 마음이 편하다면 그 신앙은 뭔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바울과 같은 큰 근심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형제 곧 골육 친척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2. 이스라엘에게 주신 특권 때문에 느끼는 고통이었습니다(4-5).
바울이 그토록 크게 근심하고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누린 특권 때문이었습니다.
롬 9:4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롬 9: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이 말씀은 그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받은 민족입니다. 이런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백성이 하나님을 모르고 구원에서 멀어진 것을 생각하니 바울은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린 특권이 무엇입니까? 여덟 가지가 있습니다. 양자됨, 영광, 율법, 예배, 약속들, 그리스도, 이 여덟 가지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은총이었습니다.
1)양자됨
신 14: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출 4:23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출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호 11:1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셔서 자기 자녀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자기의 자녀로 입양시켰다는 말입니다. 제 친구목사님들 몇 분도 자녀들을 입양하여 키우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남의 자녀를 입양하여 키운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낳은 자녀처럼 똑 같이 사랑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아무 공로도 없는데 일방적으로 양자를 삼았으니 이스라엘 백성들 편에서는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2)영광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친히 찾아오셔서 그들과 만나주시고 그들 가운데 계신 것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임재 하였습니까? 구름이 성막과 성전에 가득하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세계 어떤 민족도 이런 특권을 누려보지 못했습니다.
3)언약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과 맺은 언약을 말합니다. 이 언약은 최대의 유산이며 재산입니다.
4)율법
이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5)예배
예배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 나가서 경배할 수 있는 영광, 특권을 말합니다.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만 항상 지정된 장소에 나와서 제사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도록 허락하셨습니다.
6)약속들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들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축복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7)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위대한 조상이 있습니다. 그 조상들을 통해서 형성된 자랑스러운 역사와 전통이 있습니다.
8)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혈통을 통해서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이러한 여덟 가지 특권 즉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들은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잘 믿을 수 있는 기득권을 이미 가진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특권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멀리하고 멸망 길로 가는 자기 동족을 바라보는 바울의 마음은 그치지 않는 고통이 찾아온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나라에도 복음이 들어 온지 10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과거에는 예수 ‘예’자도 들어보지 못하여 믿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한두 번 교회 안나와 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특히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기득권을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저는 그 점에 대해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 집은 신앙의 전통이 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제사 지내는 것이나 우상숭배 하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어려서부터 주일학교 다녔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살았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런 특권을 누리고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얼마나 불쌍한 인생입니까? 이렇게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 예수 믿고 구원받고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목회자가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은 구원받았습니까?
3.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느끼는 고통이었습니다(6-13절).
바울의 열렬한 소원이 무엇이었습니까? 자기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자기 동족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바울은 6절 이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로 폐하여질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이 강퍅해지고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며 대적하는 것일 까요? 그것을 생각하면서 바울은 근심하고 고통을 느낀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바울은 어떤 해답을 가지고 있을 까요?
1)믿음에 근거해서 해답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는 약속을 믿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잠깐 있는 일로써 ‘이것 때문에 복음을 받지 못했다.’ 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위대한 신앙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핍박하는 동족을 보면서도 하나님께서 선민을 향한 축복을 부정하려 들지 않은 것입니다.
롬 9: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약속)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에 신앙적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고 해답을 얻은 것입니다.
2)구약성경을 근거로 해답을 얻습니다.
역시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구약에서 아브라함이 복을 받았는데 그렇다면 그의 자손들이 다 복을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그의 자손 가운데는 육신의 자녀도 있었고 약속의 자녀도 있었습니다. 오직 약속의 자녀만 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과 이삭이라는 아들이 있습니다. 물론 후처인 그두라를 통해서 낳은 육신의 자녀들도 있습니다. 누가 복을 받았습니까? 약속의 자녀인 이삭만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삭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에서와 야곱입니다. 같은 리브가 어머니가 낳은 쌍둥이 아들이었지만 야곱은 사랑받고 에서는 미움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과 주권에 속한 일입니다. 이런 역사를 살펴볼 때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볼 때 복 받은 자가 있고 못 받을 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전부다 의인이며 복 받을 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조건 죄인으로 취급해서도 안 되는 것이지요. 그들이 비록 예수님을 핍박했고 거역하여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결코 패배할 수 없다는 것을 바울은 깨달은 것입니다.
구원은 집단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가정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기득권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났다고 무조건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참 이스라엘 사람은 누구일까요?
참 이스라엘이란 혈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혼이요, 정신이요, 믿음인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분명하게 개별적으로 고백해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는 분위기에서 같이 있었다고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바울의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1)구원의 확신과 기쁨에는 반드시 고통이 수반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과 기쁨을 누가 주십니까? 성령님께서 주십니다. 그렇다면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형제들을 보고 가슴아파하는 고통을 누가 주는 것입니까? 역시 성령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통이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2)전도는 가까운 내 형제, 내 동족부터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멀리 가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를 등한히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안디옥교회는 세워진지 얼마 안 되었어도 선교사를 파송하는 위대한 일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언제나 자기 형제들, 골육을 먼저 생각하였던 것을 봅니다. 멀리 가서 이방 사람 구원하지 못해도 내 집 근처 다니면서 건질 죄인 많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지금 우리들에게 똑 같은 두 가지 질문을 하십니다. “너에게도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가?” “너희 형제, 너희 동족을 위한 눈물이 있는가?” 바울처럼 양심적으로 대답해 봅시다. 아직도 남편이 믿지 않습니까? 아직도 자식이 믿지 않습니까? 아직도 형제들이나 친척들이 믿지 않습니까? 그래도 여러분들만 구원받았다고 기뻐하시겠습니까? 바울의 큰 근심이 바로 나의 근심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바울의 그치지 않는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고통이 없다면 강퍅한 마음을 녹여 주시옵소서! 라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함께 천국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간절한 소원
로마서 9:1-3 / 박덕기 목사
오늘은 교회력에 따른 어버이 주일입니다. 먼저 정채봉 시인의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이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단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엄마와 눈 맞춤을 하고/젖가슴을 만지고/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엄마!/하고 소리 내어 불러보고/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엉엉 울겠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찬밥을 먹다가도 '엄마'를 생각하면 목이 매입니다. 몇 천 번을 불러도 더 부르고 싶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어머니',' 어머니' '내 어머니'.....유난히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언덕을 오르니 오늘따라 어머니께서 베풀어 주신 끝없는 사랑에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이 비가 되고, 강이 되어 흐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렇게 소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정채봉 시인처럼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어머니가 5분이라도 휴가를 나와 주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소원이 있고, 볼 수도 들을 수도 말하지도 못했던 헬렌 켈러는, 단 사흘 동안만 볼 수 있다면, 첫째 날에는 자기를 지금까지 가르쳐준 설리반 선생님의 얼굴을 보고, 산으로 가서 아름다운 꽃과 풀과 빛나는 노인을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둘째 날에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먼동이 터 오는 모습을 보고, 저녁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별을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셋째 날에는 아침 일찍 부지런히 출근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고, 점심에는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저녁에는 화려한 네온사인과 쇼윈도우의 상품들을 구경하고, 집에 돌아와 사흘간 눈을 뜨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바닷가 작은 창문이 달린 집에서 살고 싶다는 사람의 소박한 소원이 있는가 하면, 브에 나비스타 홈 엔터테이먼트 코리아가 17개 인터넷 사이트 이용자 약 4만여 명을 대상으로 '일주일간 전지전능한 신의 능력을 받는다면 가장 해보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조사한 결과, 45%가 "돈벼락을 맞겠다."라고 답했는데, 20대 여성을 비롯해 모든 연령층에서 고르게 나타난 응답이라고도 합니다.
국가적인 소원도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꿈에도 소원이 통일/이 정성 다해서 통일/통일을 이루자/이 겨레 살리는 통일/이 나라 살리는 통일/통일이여 오라/통일이여 오라.♫ 우리들이 어렸을 많이 부른 노래인데, 지금은 사실 통일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 것을 압니다. 우리 교회적인 소원은 무엇입니까? 새 성전이 무사히 완공되는 것과, 완공 후에 1만 성도로 부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사도 바울에게도 실로 간절한 소원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곧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이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독특하고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믿음이 저들의 조상들로부터 전해졌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유대인에게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시자, 그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자기의 동족 때문에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고백을 합니다. 1-2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거 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Living Bible의 우리말 번역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성령님이 내 안에서 양심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나는 동족 때문에 정신적인 고민과 많은 슬픔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위대한 신앙의 사람에게,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니 이게 웬 말입니까?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하기를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감사함으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하여서는 ‘항상 기뻐하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하고서 정작 자신에게는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니, 이건 자가당착이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대로, 사도 바울의 근심과 고통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어떻게 집을 마련할까? 하는 의식주에 대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가난과 질병으로 인한 고통도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는데, 그러한 바울 자신이 세상적인 큰 근심과 그로 인한 그치지 않는 고통을 느끼며 살았을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근심과 고통이야말로 성경이 말씀한 바와 같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의 큰 근심과 고통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3절에 밝혀져 있는 대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서 하게 된 근심이었습니다. 바울 자신은 비록 이방인의 사도였지만, 자기 동족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의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가진 백성이기는 하나,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책임이 있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부인하고 있으니, 이스라엘의 구원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고통에 찬 근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됨을 역설한 바울은, 제아무리 자신의 동족이라도, 불신 유대인들에게 구원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는 어느 누구라도 구원받을 영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불신하는 동족의 멸망은 뻔한 것이며, 사도 바울의 근심과 고통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불신 동족을 위한 바울의 근심과 고통은, 간절한 구원의 소원으로 나타나는데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했습니다. 여기 ‘저주’의 뜻은 그저 단순한 손해를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헬라어로 저주를 ‘아나데마’ 라고 하는데, 이 말은 천벌을 뜻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어떤 경제적인 손실이나 시간적인 손해, 또는 육적인 죽음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과 육이 아울러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를 받아 지옥으로 떨어지는 무서운 멸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소돔 고모라가 멸망한 것과, 니느웨 성이 멸망한 것이 바로 아나데마 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멸망이 자기에게 오는 한이 있을지라도,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자신의 저주는 문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생명보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했으므로, 그리스도와 끊어짐은 그의 모든 것이 끝남을 의미하기에, 이 이상 더 큰 아픔은 있을 수 없는 최대의 고통, 최대의 아픔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도 바울의 동족애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신앙적인 민족애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동족애는 그가 단지 이스라엘 백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기 민족이 잘되어야 한다는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동족애는 골육의 친척인 이스라엘 민족의 번영과 안일을 바라기보다는, 민족 전체가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는 신앙적 차원의 애국심이었습니다. 이러한 애국심, 이러한 민족애를 갖기까지에는, 먼저 바울의 철저한 신앙이 밑받침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의 신앙이 희미한 자는 결코 이러한 애국심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내가 믿는 신앙의 확신이 있어야만,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힘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찰리 피스’ 라는 사람은 중한 죄를 지은 범죄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법과 사람의 법을 모조리 무시한 흉악범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영국 리즈시 아멜리 교도소에서 그는 사형 집행일의 아침을 맞았습니다. 교도소 목사님이 언제나처럼 졸리는 듯한 목소리로 성경을 낭독하면서, 그의 앞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찰리는 지옥에 대해 목사님이 직접적으로 읽고 있는 태도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 동료 인간이 잠시 후에 떨어질 지옥 구덩이에 대하여, 그렇게도 초연하게 줄줄 읽어 내려 갈 수가 있단 말인가? 이 전도자는 도대체 영원한 불 못이 그 희생물을 영원히 태운다는 말씀을 과연 믿고 있는가? 믿는다면 어떻게 조금의 떨림도 없이 그러한 말씀을 읽어 내려 갈 수가 있겠는가? “그대는 사망에 이를 것이며, 사망은 모든 소망을 상실한 상태를 의미하오.” 이런 말을 눈물 한 방울 없이 해낼 수 있는 전도자도 과연 사람인가? 이 모든 말이 찰리에게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외쳤습니다. 목사님!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제가 목사님과 하나님의 교회에서 이같이 주장하는 것을 믿는다면, 동해에서 서해까지 영국이 온통 깨어진 유리 조각으로 덮여 있을지라도, 한 영혼을 그처럼 영원한 지옥에서 건져내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맨발로 걸으며 나아가겠습니다. 아니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면, 손바닥과 무릎으로 기어서라도 가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지옥이 실재하는 것을 확실히 믿는다면 영국 천지가 온통 깨어진 유리 조각으로 덮여 있을지라도, 한 영혼을 건져내기 위해서라면 무릎으로 기어 다니면서라도 외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떠합니까?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신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 저주를 받을지라도 개의치 않겠다는 사도 바울의 이 간절한 소원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춤추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내릴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모세가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와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큰 죄를 범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은 목이 곧은 백성이니,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내가 이 백성을 다 진멸하고 너와 네 후손을 창대케 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보통 사람 같으면 “하나님 아버지! 다른 사람은 다 진멸하시고 저와 후손만을 창대케 해주시겠다니 너무도 감사합니다. 어쩌면 저를 이렇게도 사랑하십니까?”라고 하면서 감격할 것인데, 그러나 모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거룩한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모세의 기도에서, 또는 사도 바울의 소원에서, 끓어오르는 애국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애국심은 결코 정치적 애국심이나, 편협한 민족주의에서 발흥하는 그러한 애국심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애국심은 모든 동족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한다는 것은, 참 신앙에 거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 자는 곧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자인 것입니다.
나만 편안하고 무사하겠다는 것, 나만 구원받겠다는 생각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절대로 옳지 않는 태도입니다. 다른 사람은 망하더라도 ‘나만’ 하는 마음은 하나님 앞에 열납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 ‘하만’이 꾸민 일로 이스라엘 백성이 다 죽게 될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유대인으로 ‘에스더’가 왕후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에스더의 삼촌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무서운 경고를 했습니다. “네가 지금 왕궁에 있다고 해서 너만 면하리라고 생각지 말라.” 이 민족이 다 죽을 때 너만 무사하리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준엄한 책망이었습니다.
누군가 말하기를 “죽어 가는 사람에 대하여 무감각한 사람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인가를 의심해 보는 것이 좋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족들 가운데 아직도 믿지 않는 식구들이 있는데, 아무런 감각이 없다면 정말로 내가 그리스도인인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식구 중의 한 사람이 죽는다면 당장 지옥에 갈 텐데, 그대로 보고만 있을 것입니까? 그대로 놔둘 것입니까? 여러분의 형제, 친척 중에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있고, 그것 때문에 사도 바울처럼 심한 정신적인 고민과 고통을 가지고 있습니까? “차라리 내가 저주를 받는 한이 있을지라도, 그들이 구원받았으면 얼마나 좋겠는가?”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마음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문 중 일부분입니다. <제가 아는 우리 교회 여 집사님 한 분이 계시는데, 당뇨와 뇌졸중으로 거동이 어려운 시어머니를 모시고 고생을 참 많이 합니다. 게다가 그 분은 자폐증에 걸린 아들을 하나 두고 있습니다. 그 삶을 짜증스럽게 생각하면 웃을 날이 하루도 없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자기처럼 자폐아를 가진 어머니들을 중심으로 모이는 사랑부 다락방의 순장을 하고 있습니다.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니까 틈틈이 시간을 내서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눈코 뜰 새 없는 하루하루를 쫓기듯이 살고 있는 집사님입니다. 어떤 때는 너무 짜증스럽고, 너무 힘들어서 살맛도 안 납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하나님...!" 하고는 눈물, 콧물 흘려가면서 원망하고, 하소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성령께서 그 분의 마음속에 이런 음성을 들려 주셨다고 합니다. “네 십자가는 네 믿음을 강하게 만들고, 네 인격을 성숙시키는, 내가 준 나의 프로그램이야." 이어서 성령은 마음속에 이런 질문을 주셨습니다. “네가 천국에 갈 때까지 이 땅에서 해야 할 최고의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그 때 성령은 그 분의 마음을 열어 주셔서 이렇게 대답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 영생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지요. 맞아요. 이것이 주님의 기쁨입니다. 가장 가치 있는 일은 저와 제 삶이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의 복음 전하는 일에 쓰임 받아야지요." 그러자 그 분의 내면에 환한 전깃불이 켜지면서 어지럽게 널려 있던 많은 잡된 생각들이 정리되고, 기쁨과 고통의 크기와 무게들이 정직한 모습으로 제자리를 찾아갔다 것입니다. 그 분은 지난 가을에 전도폭발 훈련을 받았는데, 그 훈련을 마친 후 자기와 같이 자폐아를 가지고 씨름하는 안 믿는 부모들을 상대로 전도를 해서 지금은 그 다락방이 배가에 배가를 거듭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분은 간증 문 끝 부분에 이런 말을 썼습니다. “이제 새해 전반기 사역을 시작하면서 다시 성령 충만해진 베드로가 되어 현장으로 달려가려고 합니다. 한 영혼을 묶고 있던 결박이 끊기고, 어두움의 세력이 물러가는 자유의 감격을 상상하며, 내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기쁨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얼마나 멋있습니까? 이런 주부를 보고 누가 평범한 여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야 말로 사도요, 제자요, 복음의 선지자요, 하나님의 자녀요, 어떤 면에서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바쳐 뛰는 살아있는 순교자입니다. 목회를 하는 보람이 어디 있습니까? 바로 이런 분들이 교회 안에서 열심히 뛰고 있다는데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우리 교회 안에는 이런 집사님 같은 분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에게 있었던 큰 근심과 고통에 그리고 그의 간절한 소원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근심과 고통은, 결코 의식주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가난이나 질병에 관한 것도 아니었고, 사망을 이루는 세상에 속한 근심도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근심과 고통이야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었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믿지 않는 동족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영원한 지옥의 멸망을 당하느니 보단, 차라리 바울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 저주를 받을지라도, 동족이 구원을 받았으면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가장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불교에서 사용하는 용어 가운데 ‘비원’(悲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곧 모든 중생이 극락왕생하기까지 자신의 구원을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사도 바울의 심정과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진리가 없고, 그래서 구원과 생명이 없는 이교도들도 이러한 마음을 갖고 있다면, 오늘 불신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가져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겠습니까? 조난자의 외침을 듣고서도, 구경만 하고 있을 선원이 있을까요? 죽어 가는 환자 곁에서, 태연히 앉아 신문이나 읽을 의사가 있을까요? 불이 나서 사람들이 타죽어 가는데, 가만히 앉아 있을 소방수가 있을까요? 세상의 많은 이웃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영원한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데, 어찌 우리만 예배당에 편히 앉아서 예배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은 어버이 주일인데 여러분의 부모님 가운데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않는 분들은 안 계십니까? 꽃 속에 푹 묻히신/엄마의 영정이/환하게 웃고 있습니다./바로 내 옆에서/막내딸인 나를 무척이나 기다리던 어느 해 5월 8일/카네이션을 사려고 해마다 늦게 갔던 날/엄마는 말씀하셨습니다./"카네이션이 무슨 소용이니?/진짜 꽃이 오는데..." 큰딸을 시집보내며/하얀 천에 꼭꼭 싸맨 꽃병을 내 보이시며/나는 이렇게 살지 못했지만/너는 꽃병에 예쁜 꽃 꽂으며/예쁘게 살아라./꽃병에 예쁜 꽃 꽂고 살지 못하셨지만/인생의 가장 마지막에/예수님을 그의 마음에 꽂으셨습니다./엄마의 얼굴은 꽃보다 예쁘게 되었습니다./꽃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엄마의 영정을 보며/나도 엄마처럼 웃고 싶은데/내 눈에는 자꾸 눈물이 맺힙니다./받기만 한 사랑 때문에/하지만 예수님은 나에게/영원한 이별이 아닌/짧은 이별이란 소망을/엄마의 빈 자리에/채워 주셨습니다. /머지않아....몇 년 뒤.../나도 바로 엄마 옆에서/그렇게 환하게/웃고 있을 겁니다. 여러분과 부모님도 꼭 이렇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고,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 진리를 확실히 믿습니까? 천국이 실재하는 것처럼, 지옥도 실재하는 것을 확실히 믿습니까? 그렇다면 불신 가족이나, 불신 친척이나, 불신 이웃과, 불신 동족에 대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바라옵기는 우리 모두 사도 바울의 불타는 구령의 소원을 가지고, 다가오는 총동원 전도주일에 불신 가족과, 불신 친척, 불신 이웃과 동족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진력하는, 열심 있는 전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의 심장
이정익 목사
이제 6월 중순을 맞이하였습니다. 우리민족에게 6월은 남다른 뜻을 가진 달입니다. 6월은 나라를 생각하고 민족을 생각하는 현충일이 들어있고 6,25가 들어있는 호국의 달입니다. 우리나라 국민은 타 국가의 국민에 비해서 국가에 대한 충성도가 제일 낮다고 합니다. 그리고 국가에 대한 자부심도 가장 낮고 합니다. 자기가 태어난 나라에 대해서 자부심도 없고 충성심도 적은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참 슬픈 일입니다. 여기는 내 나라이고 내가 태어난 곳입니다. 국민은 자기가 태어난 나라와 국가에 대해서 자긍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내 민족, 내 골육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의를 되찾고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할 수만 있다면 나는 저주를 받아도 원하는 바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영광, 언약, 양자됨, 그 밖의 많은 약속들을 받은 민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으로 누구보다 가장 먼저 구원을 받아야 하고 복을 받아야 하는 민족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이 현재는 버림받은 백성이 되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그래서 제물을 열심히 드리기는 하는데 하나님의 의나 뜻이나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들에게 부여된 특권도 모두 빼앗기고 하나님의 축복에서 제외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선택한 것에만 집착하고 하나님이 왜 자신들을 선택하고 자기들에게 주권적인 언약을 맺으셨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일찍이 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고 구원을 선전하게 하기 위해서 선택하였고 택함 받았는데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의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를 세우는데 만 힘을 쏟았습니다. 그래서 여기 본문에서 바울은 그 선조들이 하나님을 떠남으로서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마침내는 약속의 땅을 잃어버린 것처럼 오늘도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상태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1절에서 “내가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노라, 내게는 큰 근심이 하나 있고 마음에 사라지지 않는 고통이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내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내 동포, 내 백성이 예수를 믿어 예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언약을 회복할 수만 있다면 비록 내가 저주를 받아 내 백성에게서 끊어져 버리는 한이 있어도 나는 그것을 기꺼이 감수하겠다” 그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시대를 살면서 이런 심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시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 삶이 그 시대에 빛과 소금의 삶입니다. 우리는 이 바울의 뜨거운 심장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내 나라, 내 동포, 내 이웃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6월은 내 나라와 내 민족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곳이 내 나라이고 내 민족이고 내 이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뜨거운 심장을 가지고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나라를 위하여 몸 바친 선인들
6,25전쟁 때 얼마나 많은 소중한 목숨을 잃었습니까. 그때 우리의 젊은 국군만 185,000명을 잃었고 유엔군이 38,000명, 학도의용군이 2,000명이나 희생되었습니다. 거기에 민간인 150만 명이 죽었고 30만 명의 과부와 20만 명의 고아가 발생했습니다. 이 전쟁이 이렇게 참혹해서 근대사에서 최악의 전쟁으로 기록되었고 전쟁을 위해서 그 당시 돈으로 150억불을 썼으면서도 남은 것은 참혹한 파괴뿐입니다. 우리 국민 뿐 아니고 우리교단만 해도 6,25때 250여명의 순교자를 내었고 20여명이 납북되어 갔습니다.
오늘 이렇게 목숨을 바친 우리의 선조들이 있고 선배들이 있고 군인들이 있기 때문에 오늘 이 나라가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희생된 분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들이 있음으로 오늘이 있습니다. 그들의 그 숭고한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시대를 잘못 만나서 일찍 목숨을 잃기도 하였지만 또 그들이 있음으로 해서 오늘 우리들이 존재하고 이 나라가 존재하게 된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업들의 고마움
우리나라의 기업들이 참 고맙습니다. 세계의 관문인 각국의 공항에 내려 보면 높이 세워진 우리나라 기업들의 선전간판을 보게 됩니다. 우리민족은 참 대단한 민족입니다. 각 나라 곳곳에 가 보면 요지마다 한국기업들의 간판이 걸려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참 우리민족이 참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참 기업들이 대견하고 고맙기 까지 합니다.
지난해 우리나라 기업들이 수출한 총 액수가 2,500억불이라고 합니다. 이 금액은 전 아프리카 53개국이 수출한 금액 1700억불 보다 800억불이 더 많은 금액이라고 합니다. 또 전 남미 32개국이 수출한 금액 2100억 불 보다도 400억 달러가 많은 액수라고 합니다. 이것이 이 조그만 나라에서 이루어 낸 기적입니다. 그래서 지난해 국가 GDP 순위가 11등이었는데 금년에는 10등으로 상향되었다고 합니다.
참 대단한 민족입니다. 지난 몇 년 동안 한국의 기업들을 국가에서 도와주지도 않고 그렇게 괴롭혔는데도 이렇게 기적을 일구고 있는데 마음껏 나가서 수출하고 기업 활동 하도록 국가가 앞장서서 도와준다면 얼마나 신나서 더 잘하겠습니까. 물론 대기업들이 잘못한 것도 있고 실수나 불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대기업을 모두 부정스럽다고 매도하면 되겠습니까. 오히려 대단한 칭찬을 받을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은 대기업들을 모두 죄인취급을 하고 도둑질한 사람 취급을 하니까 공장 증설은 안하고 이꼴 저꼴 보기 싫으니까 공장을 자꾸만 해외로 빼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이 나라가 피폐해지고 실업자들이 양산될 것 아닙니까.
이제는 국가가 기업들을 도와주어야 하고 국민들이 흔쾌하게 밀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대기업들이 맘껏 설비를 증설하고 일자리를 창출해서 길거리에서 젊은이들이 헤매고 다니는 일이 없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대기업들로 하여금 정부가 나서서 약한 하청업체에 어음을 주지 말고 현금으로 결제하도록 해서 중소하청업체들이 부도나지 않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참 고마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있음으로 해서 오늘 이 나라가 이만한 경제력과 국가 경쟁력을 이루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민족의 가능성
우리민족은 참 여러 면에서 대단한 민족입니다. 술 소비량으로도 세계 제일이고 흡연율로도 세계 제일이고 교통사고율로도 세계 제일입니다. 거기다 사건사고도 단연 세계 최고이고 모조품 만드는데도 일가견이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우리민족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를 들면 월드컵 때 거리로 몰려나오는 젊은 인파들을 보십시오. 하루 밤에 30만 40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서 밤새도록 방방 뛰는 민족이 이 지구상에 우리 말고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정치하는 분들이 이런 정열을 가진 국민들을 방향만 좀 잘 제시해 준다면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는 국민입니다.
그리고 우리민족이 얼마나 우수한 민족입니까. 이 작은 땅덩어리 안에서 얼마나 많은 우수한 인재들이 태어나고 있습니까. 영국 얼스터대학교 심리학 교수 리처드 린과 핀란드 헬싱키 대학의 타투 반하넨 교수가 세계 185개국 국민 평균 IQ검사를 실시했습니다. 조사결과 1등은 홍콩으로 IQ지수가 107로 나타났습니다. 2등은 한국으로 106이고 3등은 일본과 북한으로 105이고 21위는 미국으로 98이고 45위는 이스라엘로 94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조사한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고 영국과 핀란드 교수들이니까 객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통계 아닙니까.
우리나라는 IMF를 2년 만에 극복한 나라입니다. 이것은 세계에도 없는 일입니다. 1분에 핸드폰으로 문자 300자를 치는 나라는 세상에 한국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금 한국민족이 세계 124개국에 나가서 4,687개의 교회를 세워놓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164개국에 14,012명의 선교사들이 나가 있습니다. 이렇게 나가다 보면 정말 언젠가 타골이 예언한 말 그대로 멀지 않아서 “그 등잔에 불이 다시 켜지는 날에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 그대로 맞아 떨어질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내 민족을 사랑해야 하고 내가 태어난 이 나라에 대해서 자긍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노대통령도 좀 맘에는 흡족하지 않지만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잘 못 뽑은 우리들이 잘못 아닙니까. 그래서 요즘에는 여기에도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6,25는 분명 불행한 사건이었지만 하나님은 그 전쟁을 통해서 우리민족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훈련하셨습니다. 그래서 전화위복의 기회를 주신 것처럼 IMF를 통해서 잃은 것도 많지만 또 생각해 보면 얻은 것이 더 많은 것처럼 노대통령을 위해서도 그렇게 생각하면 더 진지하게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깨닫게 해야 하고 눈을 뜨게 해 주어서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오게 해야 합니다. 어떻게 저런 사고방식으로 계속 이 시대를 살아가겠습니까. 이렇게 가다가 어느 날 저 장벽이 독일처럼 갑자기 무너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누가 어떻게 수습하겠습니까. 그러면 통일이 되어서 좋지 않으냐고 말할 수 있지만 지금은 통일의 때가 아닙니다.
독일이 어느 날 갑자기 장벽이 무너지는 바람에 얼마나 놀랬습니까. 그때 독일 수상도 외국 여행 중에 장벽이 무너진다는 소식을 접하고 급거 귀국을 했다고 합니다. 통일을 준비하느라고 주변 국가들에게 상당기간 로비를 했고 미국에게는 통일되더라도 확실하게 우방으로 남아있겠다는 약속을 철저하게 해서 양해를 얻었고 영국과 프랑스에게는 독일이 통일 되더라도 결코 위협이 되지 않을 것임을 신뢰감을 주기 위해서 각 나라마다 찾아가 2차 대전 때의 일을 사과하고 참회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에게는 독일 통일을 이루는데 협조해 달라고 150억 마르크(한화로 9조 2천억 원)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준비했는데도 막상 어느 날 장벽이 무너지는 바람에 이를 수습하는데 2조 마르크(한화로 1천 2백 3십 6조원)의 돈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에는 하룻밤에 450억 마르크(한화로 28조원)를 화물차에 싣고 가서 동독지역에 풀기도 했는데 그 일로 인해서 독일 경제가 장기간 침체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북한이 어느 날 독일처럼 무너지면 우리가 어떻게 그 일을 감당하겠습니까. 그것은 분명 이 땅에 재앙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밀려오는 통일도 자꾸만 미루고 지체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자꾸 주어서 자주 왕래해서 긴장을 완화하는데 주력해야 합니다. 자유롭게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이 접촉하게 되면 이해의 폭이 더 넓혀지고 우리의 사랑과 관심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 몇 년 전만 해도 남한에서 가져가는 물품들을 도착하자마자 겉포장을 다 뜯어냈습니다. 물품의 겉포장에 남한의 글씨가 쓰여 있고 상표가 붙어있기 때문에 다 뜯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얼마든지 그냥 그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것만 해도 남북관계가 좁혀지고 발전한 것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는 중국 땅에 떠돌고 있는 우리 탈북한 동포들도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중국 땅에 머물러 서성대는 탈북자들이 150,000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서성대다가 한국 땅에 들어온 숫자는 겨우 8,300명밖에 안됩니다. 그들을 도와주고 먹을 것을 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하루하루를 황망하고 조마조마 하게 살아가겠습니까. 지금 중국에서는 남한으로 갈 목적을 가지고 중국 땅에 와 있는 사람들을 붙잡으면 한 사람당 상금으로 3천 원씩(한국 돈 30만원)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잡히면 그대로 북으로 송환됩니다. 그래서 우리 동포들이 아주 살벌한 가운데서 밤낮없이 일제 강점기도 아닌데 도망 다니고 있다고 하니 하루하루가 얼마나 긴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겠습니까. 그들이 붙잡혀 북으로 송환되어 돌아가면 어떻게 되고 젊은 여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도망 다니다 잡혀 겁탈당하기 일쑤이고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기약 없이 오늘도 헤매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그들도 모두 우리의 동포들입니다. 그런 모습들을 생각하고 있다 보면 참 내 마음도 그렇게 아파옵니다. 우리민족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민족은 왜 이런 전근대적인 정치상황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자탄이 나오고 비애가 느껴집니다. 내 마음도 그렇게 슬퍼오는데 그런데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인데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그 아픈 마음이 바로 오늘 읽은 본문에서 말한 사도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언약, 이삭에게 야곱에게 주어졌던 양자됨, 영광, 언약, 약속들 얼마나 소중한 축복이었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다 잃어버리고 다 빼앗기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하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義도 저버리고 예수도 믿지도 않으니 분명 이 백성이 멸망당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도바울의 입장에서 얼마나 마음에 안타까움이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그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한 말씀이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예수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고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내 형제, 골육,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심정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뜨거운 심장이니까. 우리는 이 사도바울의 심장을 가져야 합니다. 이 심장은 뜨거운 것 뿐 아니고 자기민족을 품는 가슴이었고 민족의 멸망을 염려하는 아픈 마음입니다. 결국 사도바울은 이 마음으로 로마도 품었고 세상도 품었던 넓고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심장 속에는 동포애, 민족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한 심장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가슴에 이런 뜨거운 가슴과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 마음은 성령이 주시는 마음이고 가슴입니다. 그 마음으로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고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나를 통해서 그 뜨거운 가슴과 사랑하는 마음과 뜻이 이 땅에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6월은 내 나라와 내 민족을 생각하는 달입니다. 다시 한 번 이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의 발로가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민족을 위한 근심과 고통
이수영 목사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였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자기가 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 사명감에 투철했지만 자기 민족에게도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관심 또한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그는 동족인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복음전도를 방해하며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일 때문에 매우 가슴 아파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의 그 심정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사도 바울이 자기 민족으로 인해 자기에게 있다는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에 관한 증언을 들어봅니다. 본문 1-3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점에 주목합니다. 첫 번째 점은 사도 바울의 자기 민족을 위한 근심과 고통의 “진정성”입니다. 그는 자기 민족을 위한 자신의 근심과 고통이 진실한 것임을 거의 몸부림치듯이 외치고 있습니다. 그는 그 진정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자기의 양심을 내세우는가 하면 게다가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까지 공동 보증인으로 동원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자기 민족을 위한 자신의 근심과 고통의 진실성을 강조한 것은 유대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일에 대한 자신의 관심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그저 지나가면서 한 번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동족이 자기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좋고 안 믿으면 할 수 없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안 믿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꼭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꼭 믿어야 할 터인데 믿지 않으니 큰 근심이 되고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유대 민족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게 되도록 기도하게 하려고 그 글을 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두 번째 점은 사도 바울의 자기 민족을 위한 근심과 고통의 “깊이”입니다. 본문 1-3절을 다시 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사도 바울은 3절에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함으로써 유대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 구원의 은혜에서 단절되어 있음을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심정이 어떠한지를 드러내며 동족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의 깊이를 내비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옛날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모세를 기억하게 됩니다. 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나와 석 달 만에 시내 광야에 이르렀습니다(출19:1). 그는 거기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시내 산에 올라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율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지체되자 백성은 그를 기다리지 못하고 모여 모세의 형 아론에게 그들을 대신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출32:1). 그래서 아론은 그들이 모은 금붙이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주었고 백성은 거기에 제사를 드리며 좋다고 뛰놀고 있었던 것입니다(출32:7). 하나님께서 진노하셨고 이를 알고 내려와 현장을 목격하고 경악한 모세가 다시 산에 올라가 하나님께 아뢰며 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였습니다(출32:31-32). 이것이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지도자 모세의 심정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세워 쓰신 모세가 하나님의 구원에서 끊어져나갈 리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하시고 구원하셔서 복음의 사도로 귀하게 사용하신 바울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리도 없습니다. 그러나 차라리 그렇게 되도 좋으니 자기 민족을 구하여달라고 부르짖을 줄 아는 것이 민족을 위하는 사도의 마음인 것입니다. 모세처럼 바울도 그런 위인이었던 것입니다.
유대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일로 인해 사도 바울이 크게 근심하고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을 갖는 것은 그 당연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민족도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민족이라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다른 그 어느 민족보다 더더욱 믿어야 했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의 복음은 바로 유대 민족의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사역의 복된 소식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유대 민족이 갖고 있는 모든 특권적 역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베푸신 역사가 아니냐는 것이 바울의 제시하는 논조입니다. 유대 민족에게 주어진 역사적 특권을 바울은 본문 4-5절에서 다음과 같이 열거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먼저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은 그저 수많은 민족의 이름 가운데 단순한 한 이름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야곱의 새 이름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을 거치며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확인되어온 하나님의 언약이 드디어 실현된 이름이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언약의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라는 것은 대단한 특권입니다. 그 다음 “그들에게는 양자 됨이 있다.”고 합니다. 출4:22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바로에게 가서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하라” 하셨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양자로 삼으셨습니다. 특권 중에 특권입니다. 또 바울은 “그들에게는 영광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영광스러운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이 이집트에서 나와 광야를 행진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시며 그들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셨고(출13:21-22) 하나님께서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며 지키시는 민족이었습니다(시121:4). 또 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그들에게는 언약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고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으며 다윗과 더불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렇게 유대 민족은 독점적인 하나님의 언약을 소유한 민족입니다. 그들에게 또 무엇이 있다고 합니까? “율법을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일하게 이스라엘 민족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또 무엇이 있다고 합니까?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른 예배의 모범을 다른 민족 아닌 그들에게 세워주셨습니다. 그들에게 또 무엇이 있다고 합니까? “약속들”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언약과 율법과 예배모범과 약속들을 받은 “조상들”입니다. 그리고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 즉 메시야가 그들에게서 나오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특권을 물려받은 민족이 바로 바울의 동족인 유대 민족입니다.
이렇게 자기 민족이 받은 바 특권을 열거하는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필경 두 가지 생각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하나는 이런 특별히 택함 받은 민족이, 그래서 마땅히 어느 민족보다도 더 잘 믿어야 할 민족이 믿지 못하는 데 대한 슬픈 생각입니다. 더군다나 그 같은 하나님의 모든 언약의 완전한 실현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졌으므로 언약의 백성인 유대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것은 바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그를 믿는 이들을 핍박하며 복음전도를 방해하기까지 하는 이들 때문에 그의 근심과 마음에 고통이 그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 민족이 받은 역사적 특권을 열거하는 가운데 사도 바울이 가졌을 다른 하나의 생각은 유대 민족이 그런 특별한 민족이기에 결국은 그 같은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일을,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리라고 하는 희망적인 생각입니다. 물론 유대 민족이라는 것은 구원받는 데 아무런 특권이 되지 못합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받습니다. 다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받는 구원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유대 민족은 그 믿음을 이해하기에 가장 유리한 역사적 특권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단지 사도 바울과 옛 유대 민족에게만 관계된 말씀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의 말씀으로 여겨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가졌던 자기 민족을 위한 애끓는 심정을 우리 모두가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국민 모두가 예수 믿고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우리에게도 불일 듯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자기 민족이 하나님으로부터 여러 가지 특권을 받았는데 예수를 믿지 않는 것 때문에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을 갖고 있었음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우리나라와 민족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은혜를 생각하며 우리 국민이 정말 하나님 경외하며 순종하는 국민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남이야 믿든 말든 상관없다는 냉냉한 자세를 버립시다. 지금 이 나라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국방 종교 등 어느 분야 할 것 없이 총체적으로 부패와 부실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나 몰라라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정말 나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저 예수만 잘 믿으면 된다는 태도도 잘못입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 우리 정치의 문제, 경제정의의 문제, 우리 민족의 문제에 무관심하면서 예수 잘 믿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또 신앙인이라 하면서도 전도하는 데는 아무런 관심 없는 것도 문제입니다. 양쪽 다 관심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알지 못하고 복음 알지 못해서 허무하게 살다가 죽어가는 사람 불쌍히 여길 줄 몰라도 안 됩니다.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해서 우리 교회만 대형교회 만들자는 것 절대로 아닙니다. 다른 교회 나가게 해도 좋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게만 하면 됩니다. 우리의 <새문안 새 생명 운동>이 그러한 차원에서 전개되기를 바랍니다. 이 운동을 귀찮게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민족의 불신앙 앞에서 자기 민족이 당할 저주를 차라리 자신이 감당했으면 할 정도로 민족에 대한 애정이 강렬했던 사람입니다. 동족 때문에 근심과 고통을 겪으며 번민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처럼 우리의 목숨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생명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한 생명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기 위해서 얼마나 시간과 열심을 바치고 있는지 생각해 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실까요
최창훈 목사
지난 수년간 외래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 중요사안이 논의될 때마다 언론에 회자된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라는 뜻을 가진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는 말입니다.
노블리스는 “귀족”을 뜻하는 말이고, 오블리제는 “의무”를 뜻하는 말로서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귀족의 의무”라는 뜻입니다.
본래 이 단어의 유래는 로마시대에 귀족들이 보여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을 높이는데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런 단어가 우리 사회에서 갑자기 유행한 배경에는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귀족들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가나 사업가들이 존경받을 수 없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기인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의 귀족들 특히 부자들은 가질수록 평민들과 더 나누고 더 베품으로 리더십의 존경을 유지했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 사회에 고갈되어 있다는 것이 우리의 고민이 아닙니까?
어떤 의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모두가 신앙을 갖는 순간부터 특별한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가 하늘나라의 기업을 받게 되고, 영생을 소유하고, 우리가 기도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응답받는 삶을 살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정녕 특권중의 특권을 부여받은 인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런 특권에 부응하는 의무를 다하고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소위 선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특권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정말 지적하고 싶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특권을 바르게 사용하지 못했다는 것과 특권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기대를 져버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님께서 허락하신 특권과 기대를 생각하면서 동시에 여러분과 저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특권을 생각해 보십시오.
4-5절을 읽겠습니다.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본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민으로 선택되는 순간 그들에게 주어진 특권들에 대하여 열거하고 있습니다.
1)양자 됨의 특권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던 그들이 이제는 민족적으로 하나님의 장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출4:22에 보면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했고, 신14:1에는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라고 하였습니다.
2)영광을 경험하는 특권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성막이나 성전에 들어 갈 때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주님의 영광 안에 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3)언약들을 선물로 받은 특권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순간부터 하나님은 그들에게 언약을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언약하시고, 모세와 언약하시고, 다윗과 언약하십니다.
마치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괜히 자녀들과 약속을 하시고 미래를 향한 희망을 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4)율법을 수여받은 특권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도착했을 때, 모세를 산위로 부르시고 그들의 새로운 삶의 규범이 될 거룩한 법을 주셨습니다.
이 율법은 그들의 삶의 원칙이 되고 삶의 표준이 된 것입니다.
삶의 방향자체가 혼란한 세상에서 분명한 표준을 갖고 살수 있다는 것이 특권이 아닌가요?
5)예배의 특권입니다.
구약에서는 피조물이요 죄인된 인생이 하나님을 대면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을 날마다 대면하고 그분을 찬양하고 경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거룩한 특권입니까?
6)약속들을 붙들고 사는 특권입니다.
그렇습니다.
메시아의 약속은 그들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희망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약속들이 있었기 때문에 고난의 역사의 격랑을 헤치고 날마다를 희망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7)명예로운 조상들을 갖게 된 특권입니다.
성경에서 소개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아모스, 느헤미야, 등 자랑할만한 조상들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역대 노벨상 수상자가 한 300명되는데, 그중 100여명이 모두 유대인 출신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전체 수상자의 약 30%가 되는 셈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한 집안에서 군수만 나와도 자랑인데, 이스라엘인들은 얼마나 자랑거리가 많은 백성들입니까?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 뉴튼, 색채의 마술사 샤갈, 작곡가 쇼팽, 천재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정신 분석학의 원조 프로이트, 세계 경제계의 큰손들이요, 투자가들인 그린스펀, 조지 소로스모두가 다 유대인들입니다.
거기다가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육신적으로 말하면 예수님도 유대인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5절을 한번 더 읽겠습니다.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여러분, 이스라엘이 자랑할만한 특권들이 아닌가요?
그런데 이런 특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 것을 이스라엘은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이 특권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2. 그것은 하나님의 기대입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자녀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런 하나님의 기대를 져버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누리고 있었던 외적인 특권들이 그들을 자동적으로 특권을 누릴만한 자로 만든다고 착각하여, 오히려 그 특권이 그들을 눈멀게 하고 오판하게 만든 것입니다.
물론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특권들은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다운 자녀가 되게 할 수 있는 조건들인 것은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조건들이 개인의 책임을 면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선민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며, 선민이 되기 위해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질문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모태 교인들이 종종 빠지는 신앙의 함정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아버지나 어머니가 목사이고 장로이고 권사이고 집사이기 때문에 나도 자동적으로 신앙인이 된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책임과 상관없이 자기가 믿음의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나도 신앙인이 된 것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무디 신학교의 학장이었던 조지 스위팅(George Sweeting)이라는 분은 “하나님에게는 손자가 없다”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각자의 결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부모가 신앙인이라는 것은 축복된 특권이지만, 그것이 나를 자동적으로 신앙인이 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즘 오죽하면 모태 교인을 “못해요 교인”이라고 말하게 되었을까요?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특권이상으로 관심을 가져야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롬9장 전체를 살펴보면, 바울 사도가 강조하고 있었던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육신적인 태어남이 아닌 약속의 말씀에 의지한 영적인 태어남의 중요성입니다.
7절을 읽겠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여러분, 이삭이 어떻게 태어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사라의 잉태가 더 이상 불가능한 가운데에서도 마침내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은 것입니다.
9절을 읽겠습니다.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 말씀을 믿고 의지함으로 이삭이라는 새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적인 환경 안에 태어나거나, 교회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개인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아드리고 내가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믿음야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경험이 있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누리는 그 어떤 특권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의 중요성입니다.
31-32절을 읽겠습니다.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행위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주관적인 의에 근거한 행위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무서운 교만입니다.
그런데 당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교만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날마다 율법을 읽고 토론했고 남보다 많은 시간을 들여 기도하고 봉사했기 때문에, 그것이 그들을 의롭게 하는 것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종종 좋은 성경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내가 그런 공부를 하였기 때문에 그런 수준에 와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좋은 설교를 듣고 있기 때문에 내가 그런 수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잘 기억하십시다.
듣는 것이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들음은 중요하지만 그 들음을 행함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최선을 다해 행하더라도 나의 행함은 여전히 주님 앞에서는 더러운 옷(걸레)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인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리시고 돌아가신 예수의 보혈을 믿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구주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런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바울 사도는, 이런 여러 가지 우월한 민족적, 사회적, 종교적인 특권들을 소유하고도 구원을 경험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골육 친척들을 인하여 사도 바울은 안타까워하며 고통스럽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 자신이 그들을 대신하여 저주를 받고 버림을 받는 한이 있어도 제발 이런 답답한 저주의 자리에 있는 내 가족 내 이웃들이 주께 돌아오기를 소원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주변에는 이런 답답한 영혼들이 없는지요?
인생의 여러 특권을 즐기고 사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주님의 구원을 알지 못하고 저주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말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들에게 그들이 누리고 있는 특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알려 주어야 합니다.
출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구원입니다.
성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생을 얻는 일입니다.
명예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가 되는 일입니다.
어떤 권세를 붙잡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원한 소망이신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을 그들에게 이제 알려 주시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전도요, 그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이 소식을 가까운 가족이나 이웃들, 그리고 더 나아가 땅 끝까지라도 가서라도 아직도 이 진리를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는 영혼들에게 전해주시는 고현의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고통
박찬길 목사
그리스도교 역사상 바울 이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이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입니다. 이 분은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마치고 열 다섯살 때에 부모 곁은 떠나서 유학을 가게 됩니다. 로마의 지배에 있던 '카르타고'라는 북아프리카의 도시에 가서 공부를 하게 되는데 그만 방탕한 생활에 빠져듭니다. 최고의 교육을 받으면서 신앙을 잃어버리고 퇴폐풍조에 빠져서 무질서한 생활을 하게 된 겁니다. 이 때에 한 여자를 만나 동거하면서 18살 때에 아들을 낳고 15년간이나 함께 지냅니다. 19세 때부터는 9년간이나 당시의 이단인 마니교에 빠졌습니다.
아들이 유학 가서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어머니가 듣습니다. 어머니 모니카는 근심이 되었습니다.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되었습니다. 잠을 편히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이 어린 나이에 방탕한 생활에 빠지고 이단에 휩쓸려 다니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너무나 큰 고통이 되었습니다. 피를 말리는 고통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아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30년 동안이나 한결같이 간구 합니다.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했던지 기도하는 곳마다 눈물로 땅을 적실 정도였습니다.
나중에 어거스틴이 회개하고 나서「고백록」이라는 유명한 썼는데, 그 책에서 어머니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어머니는 세상의 어머니들이 죽은 자식을 위해 우는 것보다 더 슬피 울면서 기도했다" 어머니의 이러한 기도가 열매를 맺어서 어거스틴은 32살에 회심하여 그리스도교로 돌아옵니다. 어거스틴은 나중에 히포의 감독이 되어 76세에 죽기까지 44년간 하나님을 섬기며 충성스럽게 헌신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에게도 이러한 고통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형제, 친척인 이스라엘에 대한 고통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이 주신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를 믿지 않는데서 오는 고통이었습니다. 얼마나 큰 고통이 되었는지 3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차리리 저주를 받고 하나님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내 동족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으면 좋겠다"
사실 바울이 처음부터 이런 고통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요. 바울은 원래 율법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다가 감옥에 넣고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람이에요.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데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울이 나오는데... 바울 이전의 이름이 사울인데,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러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지요. 하늘에서 환한 빛이 비치면서 음성이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깜짝 놀란 사울이 묻습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니라" 사울과 동행하는 사람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사울은 들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시이지요.
이 일이 있은 이후에 사울은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기가 그렇게 핍박했던 그 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비로서 구원의 눈을 뜨게 된 겁니다. 그때부터 인생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구원은 율법으로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를 알게 됩니다.
바울이 예수를 믿고 난 뒤에 신앙을 고백합니다. 로마서에 보면 주옥같은 말씀이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를 가리켜서 교리적인 책이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바울의 신앙고백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 보면 유명한 말씀이 나오지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5장 8절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8장에서는 더욱 확신있는 간증을 합니다. 1절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5절에서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38절에서는 "내가 확신하노니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뿐만 아니라 37절에서는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로마서를 주욱 읽어 가면 바울의 구원관이 얼마나 확실한가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전하고는 완전히 다르지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서 끊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자신 있게 말합니다. 자신이 받은 구원은 어떠한 위험이나 환란에도 흔들리지 않는 요지부동이라고 간증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자랑하며 감격하였던 것입니다. 얼마나 확신에 찬 모습인지 모릅니다. 바울이 외치는 모습을 그림으로 떠올리면 얼마나 멋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는 이상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9장으로 넘어오면서 갑자기 고통에 빠집니다. 여러분 좀 이상하지 않으세요? 8장까지는 구원받은 감격을 가지고 기뻐서 펄펄 뛰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9장으로 넘어오면서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구원받은 사람이 한 순간에 마음이 변해서 이랬다 저랬다 할 수가 있나요? 바람 빠진 풍선처럼 한 순간에 쪼그라들어서 낙심할 수가 있나요? 바울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요? 위선일까요?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뜻을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의미를 말씀드리기 전에 여러분에게 한가지 묻겠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서 여러분의 마음과 삶에 어떠한 현상들이 나타났어요? 예수를 믿으니까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지요. 기쁨이 찾아오지요. 느끼셨지요?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오는 평안은 일회적인 것도 아니고, 감정에서 오는 것도 아니지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에요. 경험하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저도 처음에 구원의 확신을 갖고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해 주셨다는 진리를 받아드리니까 마음에서 말할 수 없는 평안이 밀려옵니다. 돈버는 것도 좋은데, 예수를 믿으니까 돈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거예요. 돈을 벌면 돈만 보이잖아요. 예수를 믿으니까 세상이 달라 보이는 거예요.
교회에 오면 얼마나 좋은지,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도 좋지만..., 뭐 특별한 것을 하지 않아도 그냥 좋은 겁니다. 그러니 뭐 하나라도 하면 말할 수가 없지요. 찬양을 하면 얼마나 마음이 뜨거운지 몰라요. 기도를 하면 확신이 생겨요. 말씀을 들으면 마음에서 깨달음이 생기고, 은혜 받아서 회개의 눈물이 폭포수같이 쏟아지고...,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예배가 끝나면 집에 갈 생각을 잊어버려요. 일할 것이 없나 찾아보는 거예요. 허다 못해 할 일이 없으면 풀이라도 뽑았어요.
구원의 확신이 주는 기쁨은 교회 밖에서도 이어졌습니다. 일을 해도 기쁘고 즐겁습니다. 길을 가다가도 찬양이 저절로 나옵니다. 예배가 얼마나 기다려지는지, 고등학교 때인데 수요일이 그렇게 기다려지는 거예요. 한국 교회는 수요예배가 있잖아요. 학교가 밤 10시에 끝나기 때문에 교회에 갈 수 없는 형편인데도 수요일이 그렇게 기다려지고..., 주일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뿐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좀 어려운 일을 당해도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아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간증이 있을 겁니다.
바울이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고 나서 너무나 감격스럽고 좋았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자신만 좋아할 게 아니란 말이에요. 나 혼자만 구원을 받아서 좋아할 것이 아닌 거예요. 자기 민족이 예수를 믿지 않거든요. 구원의 기쁨을 이웃과 민족이 함께 누려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자기 민족을 위한 큰 근심이 있었고, 근심이 지나쳐서 고통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가만히 보면 바울이 안타깝게 말하는 이유가 있어요. 바울이 한 두 번 전도했는데 믿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의 감격을 누릴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셔서 여러 번에 걸쳐서 기회를 주셨어요.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받은 민족입니다. 선민백성이라고 하잖아요. 오늘 성경 4절에 보면 여섯 가지의 복을 거론합니다. 새번역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내 동족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이 있고,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있고, 율법이 있고, 예배가 있고 하나님의 약속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은 첫째 복은 자녀의 신분이지요. 양자 되는 복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다는 말입니다. 자녀의 신분이라는 것은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부시 대통령의 딸을 보니까 백악관에 마음대로 들어가고, 지난번에 보니까 아버지 따라서 한국에 가서 대접을 받더라구요. 이것이 자녀의 권세, 특권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이런 특권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영광입니다. 영광은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찾아오셔서 만나시고 함께 있는 것을 말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 봉헌할 때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면 그 누구도 당해낼 자가 없습니다. 셋째는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네 자손이 번성케 되고 네 후손들 가운데 왕이 많이 나오며 나는 너와 네 후손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넷째는 율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법이 있습니다. 보통의 나라는 사람이 법을 만드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만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셨으니 얼마나 완벽합니까? 다섯째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여섯째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하여 수 없이 많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의 혈통을 통해서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러한 특권을 가졌음에도 모두 거부했습니다. 혈통으로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났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는 아브라함의 후손만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교만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박해했습니다. 바울이 이러한 모습을 보고는 안타까워서 찾아다니며 전도하는데 그들은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핍박합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바울을 핍박한 사람은 유대사람입니다. 바울은 조상만 자랑하는 자기 민족을 보면서 너무나 안타까워서 고통이 되었던 거예요.
여러분, 예수를 믿고 구원의 확신과 기쁨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바울과 같은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친척, 친구들을 보면서 마음에 안타까운 근심이 있어야 하고, 근심이 지나쳐서 육체의 고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 예수를 믿지 않는 친척, 친구, 동포들이 얼마나 많아요? 요즘은 예수 믿기가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도 믿지 않는 이들이 많이 있잖아요.
어떤 이들은 예수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예수 믿기 쉬운 환경에 있는데 믿지를 않아요. 미션 스쿨에 다니면서 예배를 드렸는데도 예수님을 주를 고백하지 않아요. 교회는 다니지만 예수를 주로 시인하지 않고 영접하지 않아서 기쁨과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예수를 전혀 모르는 이들도 있지요. 교회 문턱에도 가본 일이 없는 이들도 있어요. 그런 이들을 보면서 마음에 근심이 있어야 하고 고통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심정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았지만, 민족을 전도하려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세 차례에 걸쳐서 이방인을 구원하려고 생명을 내놓고 전도하지요. 그러나 동족을 구원하는 데에도 소홀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전도에 국내, 해외가 따로 구분이 없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땅 끝까지 전도하라고 했으니까 해외 선교만 고집하고, 어떤 사람은 국내 선교가 중요하니까 국내에만 집중하려고 하는데..., 전도하는데.. 생명을 살리는데 국내 국외가 어디 있어요?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고집을 부리는 것은 옳지 못한 겁니다. 중요한 것은 자세입니다. 바울과 같은 고통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너무 자기 밖에 모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웃에 대하여 너무 관심이 없습니다. 남은 어찌되었든지 그거 별로 상관이 없어요. 고민을 해도 자기 중심적인 고민을 합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할 것인가,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이렇게 하면 내 명예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말을 하면 내 인격과 체면이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것들만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것도 자기만 구원받으면 되고, 자기만 잘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요. 다른 사람은 어둠 속에 있든 말든 자기만 생명 안에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전도하자고 하면 자신을 합리화하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습니다. 이민교회는 더욱 탁월합니다. 웬 이유가 그렇게 많은지..., 미국 직장에 다녀서 한국 사람이 없는데요. 만나는 사람이 없는데요. 시간이 없는데요.... 아니 한국 사람을 만날 시간이 없으면 미국 사람을 하면 될 것이 아니에요. 시간이 많으면 날마다 죽어라 하고 할 거예요. 그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이 세상에 시간이 많아서 전도하는 사람도 없고, 만나는 사람이 많아서 전도하는 사람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교회의 젊은 어머니들이 어린아이들에게 음식을 먹이는 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이는 안 먹겠다고 도망 다니는데 엄마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먹이려고 안간힘을 쓰잖아요. 붙들어다가 놓고는 한 수저만 더 먹으라고, 아주 애걸을 해요. 숫가락 들고 쫓아다니면서 먹이지요.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는 것이 아니지요. 아이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해주려고 애쓰는 거예요. 남을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우리가 그 마음으로 세상을 산다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한 수저라도 더 먹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겠다는 열정을 가지고 쫓아다니면서 정성을 기울이면 그것이 아름답고 복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영국에 윌리엄 부스라는 감리교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당시 영국 교인들의 삶이 너무나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 몇 사람을 모아다가 조직해서 "전도는 단순히 전도가 아니다. 전투다."라고 하며 군대식으로 전도하고 사회 구석으로 들어가서 최대한 봉사를 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처음에는 영국 사람들이 빈정거립니다. 아니 전도를 그렇게 군대식으로 해서 되나?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전도가 되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습니다. 나중에는 사람들이 인정합니다.
시간이 흘러서 엘리자베스 7세가 윌리엄 부스를 왕궁으로 초대했습니다. 식사 후에 여왕이 기념 앨범에 부스의 친필 싸인을 요청했습니다. 그때 윌리엄 부스가 이렇게 적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야망은 예술이고, 어떤 사람의 야망은 명성이고, 어떤 사람의 야망은 황금입니다. 그러나 나의 야망은 사람들의 영혼입니다."
하나님은 영혼을 향한 불타는 야망을 가진 사람들을 찾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관심은 구원받지 못한 우리의 친구, 우리의 동포, 우리의 민족들에게 두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안타까워하고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해야 합니다. 예수 믿은 구원의 기쁨을 그들에게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모두 나와 같은 구원의 기쁨과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바울의 통하여 저와 여러분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고민과 고통을 가지고 그들에게 전도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복음을 전파해서 그들이 구원의 감격을 누리게 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좋은교회는 그 동안 세 달 동안 새생명축제를 벌였습니다. 여러 교우들의 기도와 헌신으로 많은 교우들이 왔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분들이지요. 이제 우리가 계획한 날수가 한 주 남았습니다. 세계를 마음에 품고 세계 선교를 펼쳤던 바울처럼, 바울이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자기의 골육과 친척과 친구와 민족을 향해 애끊는 마음을 가진 것처럼, 오늘 저와 여러분이 바울의 열정을 가지고 한 주간 동안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영혼을 위하여 진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예수를 믿고 구원의 감격을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있는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바울이 고통과 같은 고통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저희들이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증거여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기쁨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참된 애국
임덕순 목사
6월은 나라를 지키다가 순국한 선열들을 추억하는 달이고, 지난주 목요일은 현충일이었으며, 이번 주간은 광역자치 단체장 선거가 있는 주간입니다. 이럴 때는 더욱 나라를 생각하게 되고 애국을 생각하게 됩니다.
지난 화요일 저녁, 한국에서는 역사상 최초의 백야가 있었습니다. 백야란, 북극권 지역에서 밤에도 해가지지 않는 현상을 말하는데, 지난 화요일 저녁, 폴란드와 한국의 월드컵 축구경기에서 한국이 폴란드를 이겨 역사상 최초의 월드컵 첫 승을 얻는 기분에 도취되어 전국이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그날 애국자 아닌 사람은 이 땅에 단 한명도 없었을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4일 밤 서울 광화문에서는 시민들이 만들어낸 거대한 질서와 조화가 또 하나의 감동적인 장면을 만들었답니다. 광화문 네거리에 운집한 15만 명의 거리의 응원단은 마치 예행연습이라고 한 듯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였답니다. 오후8시 30분에 경기장에서 애국가가 연주되는 장면이 비치자, 모든 사람이 일제히 일어서서 15만 명이 애국가를 합창하는데 참으로 대단했답니다. 90분간의 경기가 끝나 한국이 역사적 첫 승을 거둔 그 이후에, 광화문을 포함해 70여 곳에서 80여 만명이 거리응원을 벌이고 밤늦게까지 거리를 파티장으로 만들었지만, 경찰청에는 사소한 사고 한건도 보고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경찰청에선 “수십만 군중이 옥외에 모인 행사가 끝난 뒤에 단 한건의 불상사도 없이 끝나기는 이번이 처음” 이라고 했답니다. 어느 기자는 말하기를 “이들은 국가적인 축제에 참가한 시민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스스로 알고 있었고 그렇게 행동했다. 이 날은, 우리나라의 축구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격도 한 단계 올라선 날이었다”라고 썼습니다. 폴란드와 한국의 축구경기를 취재하기 위해 부산에서 민박을 하고 경기장에 참관한 폴란드 기자가 일간지에 부산체류기를 썼는데, 그에 의하면, 자기는 한국 응원단의 한 가운데 앉아서 폴란드를 응원했는데도, 자기를 적대시 하는 한국인은 한명도 없었고, 오히려 자기의 등을 두드리며 격려해 주었고, 민박집 주인의 친절은 끝이 없었다면서 한국은 너무나 친절했다 고 썼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보통 시민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애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참된 애국은 어떤 것일까요?
1. 참된 애국은 성경적 국가관을 갖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강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가장 많이 시달려온 민족이 있다면 이스라엘과 한국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북방의 페르샤와 로마, 남방의 애굽으로부터 시달려온 민족입니다.
우리는 북방의 중국과 소련, 남쪽의 일본으로부터 짓밟혀온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은 우리에 비하면 훨씬 더 심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저들은 1900년 동안 나라를 잃어버린 채 유랑민족이 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독일의 히틀러에게 6백만 명이나 학살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잃었던 조국을 너무도 값비싼 대가를 치루고 되찾았기 때문에 조국을 지키는 것은 곧 자기 생명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랍인은 전쟁에 져도 나라는 있지만, 저들은 전쟁에 지면 나라도 자기 생명도 없어진다는 각오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커다란 아랍제국들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그들을 제압하며 당당히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분명한 국가관이 있어야 합니다. 일본의 사상가 우찌무라 간조는 기독교에는 조국이 없지만 기독교인 에게는 조국이 있다 고 하였습니다. 김구 선생은, 옥중 일기에 "나는 감옥에서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을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우리나라가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거든 그 집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고 싶다" 고 썼답니다. 우리는 나라가 고난을 받을 때, 신앙도 위협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일제 36년 기간에, 일본은 한국의 신자들에게 칼을 들이대며 일본 천황을 섬기라고 위협했고, 6.25동난 때에는 총을 들이대며 하나님을 배반하라는 공산당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신자가 천국에 소망을 두고 있긴 하지만, 자기 조국을 지키는 마음은 누구보다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국가를 하나의 가정이요 교회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왕을 아버지라고 가르쳤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절기는 국가적 행사였습니다. 성경에는 자기 조국을 사랑하고 민족혼을 깨우는 선지자들의 눈물과 피맺힌 애국의 외침들이 가득합니다.
느혜미야는 자기 조국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수일을 앉아서 울며 금식하며 기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예레미야도 조국을 위하여 "내 눈에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소년시절에 자기의 군대가 불레셋 군대에게 모욕당하는 것을 분개하여 어린 몸으로 거대한 적장에게 도전하여 승리하였으며, 에스더는 자기민족이 남의 나라에서 위기를 당한 것을 보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의로 자기 백성을 보호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역시 조국을 위하여 우셨습니다. 감람산 위에서 자기조국의 멸망을 눈앞에 내다보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시며 피맺힌 동족애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참으로 애국한 사람들은 모두가 참으로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성도는 애국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나라 이 환경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를 세우시고 폐하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민주주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선거를 하지만 사회의 여론과 여건을 조성하여 사람이 부상하게도 하시고 침몰하게도 하면서, 당신이 세우실 사람을 세우십니다. 성경에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의 결정은 여호와께로서 난다 하였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가슴마다 성경을 끌어안고 성경을 읽는다면, 지방색 때문에 다투지 않을 것이요, 뇌물로 표를 매수하거나 자기기익을 위해서 권력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소신껏 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애국은 먼저 하나님이 이 나라를 세워주셨고 이 환경을 주셨다는 성경적인 국가관을 가져야 합니다.
2. 참된 애국은 자기민족이 구원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1-3절을 보면, 사도바울이 자기민족을 위하여 걱정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한 채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재림하신다면 자기민족은 구원에서 제외될 것이 안타까워서 몸부림치는 바울사도의 진실한 애국심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의 민족사랑의 마음은 3절의 표현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라고 말 했습니다. 그 말은, 내 동족이 구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내가 지옥에 가는 일이라도 하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애국심 이었습니다. 롬10:1에서도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 하는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얻기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이것이 자기 민족의 영혼을 위해서 애타는 바울사도의 음성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마음이 있습니까? 이웃이 예수모르고 돈과 세상즐거움에 취해서 살다가 죽어 지옥에 갈 것이 안타까워서, 이웃을 전도하기 위하여 얼마나 애를 써 보셨습니까? 이웃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전도는 사실은 가장 중요한 애국 운동입니다.
많은 종류의 애국활동이 있습니다. 국방을 위하여 군대에 들어가서 기꺼이 복무하는 것, 산업을 발전시켜 GNP를 높이는 것,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국민 개개인이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도록 정치하는 것, 무정 부패와 불법이 없어지도록 사회악을 제거하는 것, 훌륭한 문화적 유산들을 이어가는 것,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 것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 말고도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별 별것을 뜯어 고치고 아무리 더 많은 재물을 가져도,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지않으면 그 나라는 망하고 말았다는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과거에 영화로웠던 나라들이 하나같이 망한 이유는, 하나님을 등지고 죄를 지으며 교만하였던 결과라는 것을 역사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과거에 찬란하게 영화로웠던 국가와 도시들이 하루아침에 멸망한 유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습니다. 고대 로마제국, 잉카제국, 비잔틴 제국, 애굽과 폼페이와 소돔과 고모라 등등, 수많은 유적들이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한 국가의 흥망성쇠는 국방이나 사회제도나 물질의 풍요에 있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부유했고 문화가 대단히 발전되어 있었지만 아주 작은 요인으로 여지없이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등지고 교만하고 음란하며, 우상숭배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세 가지인데, 우상숭배와 음란과 교만입니다. 이것을 예방하는 길이 나라를 구하는 길인데 그 길은 전도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고 복지정책을 쓴다 해도 세상이 좋아 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고상하게 보였던 공산주의라는 사상도 결국 인간의 죄악성 때문에 성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더욱 파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사회를 개혁하는 그 어떤 제도보다, 국민을 편안케 하는 그 어떤 정책보다,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일인 전도가 더 시급한 일이며, 이보다 더 큰 애국이 없는 것입니다.
우상과 미신을 그대로 두고는, 음란과 교만을 버리지 않고는 우리민족이 번영할 수가 없습니다. 우상숭배는 자기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동기에서 나오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탐심은 곧 우상숭배라고 하셨습니다. 우상숭배를 하는 마음 가지고는 바른 양심, 건전한 생활이 불가능해집니다. 우상숭배는 어느 시대나 욕심과 음란과 방탕으로 기울어져 멸망을 가져왔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우상숭배와 음란과 교만 때문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전에, 그 성에서 의인 단 열명만 찾아도 용서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 성에는, 의인 열명이 없어서 망하고 말았습니다. 누가 우리나라를 지킬 것입니까? 과거에 우리나라에서 국민의 1/10도 못 되는 소수의 성도들이 고난을 이기며 신앙을 지키는 의로운 모습을 보시고 우리 민족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국민의 1/4이나 되는 성도들이 바른 신앙으로 정직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이 땅에서 우상을 물리친다면, 우리민족은 정말 크게 복을 받을 것이며 세계위에 쓰임 받을 것입니다.
지난 5월 마지막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나라가 과거에 아주 힘든 상황속에도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온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문을 열어 놓으셨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월드컵도 열린 문중의 하나입니다. 우리 앞에 열린 문을 계속 여는 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섭리를 아는 신자들이, 이웃에게 복음을 전도해서 이웃들이 다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 민족에게 복을 주십니다. 전도로 애국하십시다.
3. 참된 애국은, 이름 없이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는 애국자인체 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자기 가족들은 외국에 빼돌려놓고서 애국과 통일을 가장 크게 말하는 이도 있고, 일제 때는 일본의 앞잡이 노릇 하다가 해방이 되니까 자기만 나라위해서 애쓴 것처럼 주장하는 착각속의 애국자도 많습니다. 몰래 몰래 뇌물 받아서 부정부패로 사회를 온통 다 썩게 해 놓고도 선거 때만 되면 자기만 진짜 애국자처럼 나팔을 부는 사람들 천지입니다. 이들은 자기 이름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한 나라의 국가원수가 남의 나라를 공식으로 방문하면 거의 들르는 곳이 있는데 그곳은 어떤 위대한 사람의 묘소가 아니라 무명용사의 무덤입니다. 북한의 김일성제국이나 김일성의 묘소를 찾아가지, 정상적인 나라는 어떤 위인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름 없는 희생자들의 묘소를 찾아가 경의를 표하는 것이 그 국가에 대한 예의입니다. 어느 나라든지 이름 없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애국이 나라를 구했기 때문입니다.
워싱턴에 있는 미국 국립묘지에는 유명한 장군의 묘와 정치가와 대통령의 묘들도 있지만, 24시간 불침번 병사가 집총하고 있는 곳은 무명용사의 묘역 뿐이랍니다. 오늘의 미국이 있게 된 것은 이런 무명용사들의 순국과 희생의 대가라는 것을 국민들이 잊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 우리교회 옆 국립묘지에는 16만 여명의 나라를 위한 분들이 묻혀 있지만, 그중에는 이름도 없이 나라위해 목숨 바친 분들이 더 많습니다. 임진왜란이나, 6.25등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마다 이름없이 나라를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였습니다. 그분들이야 말로 참된 애국자들 입니다. 애국은 말로 떠드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의 페이지에 자기의 이름을 남기겠다고 조급하게 서두르는 것이 아니고, 아무도 몰라줄지라도 내 가족과 후손과 이웃을 위해서 희생하는 정신이 애국입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욱 많았습니다. 일제시대에는 친일파가 되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애국지사들을 밀고하고 일본 관헌의 앞잡이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독립이 되니까 국가 권력기관 요직에서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되었고, 나라가 어려움에 빠지면 특권을 누리던 부잣집 자제들이 해외로 나가서 안전하게 마음껏 공부하다가 폭풍이 지나간 후에는 감쪽같이 돌아와서 실력 있는 사람으로 대접받으며 온갖 좋은 것은 누리는 그런 일들이 되풀이 되었습니다. 이런 해바라기 인생들에 의해서 지조나 애국심의 부재현상이 우리사회에 채워졌고, 기회주의가 우리 사회에 판을 치게 된 것입니다. 말만하는 것은 애국이 아닙니다. 자기 이름을 내고 자기 동상을 세우는 것이 애국이 아닙니다. 이름 없이 각자 자기의 위치에서 자기의 일에 전념하는 사람들이 애국입니다.
월남의 공산주의자 호지명이 살아있을 때 그가 어느 지방당사를 방문하였는데 그 사무실에 자기 초상화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호지명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천리가 넘는 하노이에 앉아서 이 지방을 기억지도 못하는 나보다, 이 마을을 위하여 더 헌신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말인가? 어째서 내 사진을 걸어 놓았는가? 사진을 바꾸게" 공산주의는 다 망했지만 호지명이라는 사람이 인격자여서 월맹에서 존경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 이야기로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이번 지방자치제 선거는, 정말로 조용히 그 지역을 위하여 오랫동안 봉사해온 일꾼들을 주민들이 발굴해서, 주민들이 그에게 지역의 살림을 맡기는 기회가 되어야만, 민주주의가 정착 하는 것이며, 나라가 잘 될 수 있습니다. 이번의 선거는 그런 선거가 되어야 합니다. 4년 동안에 먹을것만 노리다가 선거 때만 되면 어디서 정당의 공천장하나 받아가지고 나타나서 자기가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꾸미는 그런 사람들은 모두가 외면해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애국자는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이름 없이 섬기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1979년 겨울 워싱턴 비행장에서 비행기가 이륙하다가 포토맥 강에 추락 한 사고가 있었습니다. 강은 얼었고 갑자기 물속에 잠겼으므로 승객들의 대부분은 죽었습니다. 여섯 명만이 기체 밖으로 나왔으나, 너무 추워서 몸들이 얼어가고 있었습니다.
헬리콥터가 와서 구조망을 내렸을 때, 제일먼저 구조망을 잡은 남자는 자기 차례를 다음사람에게 양보하고 그를 먼저 태웠습니다. 다음 차례도 다음 차례도 양보하며 다른 사람들이 구조망에 매달리도록 도왔습니다. 다섯 명을 다 구하고 마지막으로 헬리콥터가 왔을 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답니다. 그 몸이 얼어서 비행기 조각을 붙잡지 못하고 바다 속으로 빠져버린 뒤였습니다. 그의 이름도 확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신문들은 "훌륭한 여섯 번째 사람" 이라고만 보도 했답니다. 애국은 크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훌륭한 여섯 번째 사람처럼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한가람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 훌륭한 여섯 번째 사람이 되십시다. 그 사람이 참된 신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믿지 않는 영혼을 위하여 고통하라
조상호 목사
EX) 제가 1987년 호주 시드니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처음 만난 분이 머리가 희끗희끗하신 김기환목사님이라는 분이셨습니다. 김목사님께서는 이미 10여년 전에 하늘나라에 가셨지만, 87년 당시에 김목사님께서는 시드니순복음교회 협동목사님으로써 말씀사역 보다는, 성도들의 일상사를 돕는 일반사역을 하고 계셨습니다.
원래 그 목사님께서는 월남전에 헬리콥터 조종사로 파견되었다가 월남이 전쟁에서 패망하자, 호주로 건너오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김목사님께서는 당신이 경험하신 군대 이야기를 한번 시작하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군 시절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셨습니다. 당신이 호주에 오셔서 목사가 되지 않으시고 계속 군대에 있었다면 분명히 별을 단 장군이 되었을 것이고, 조국의 하늘을 지키고 있을 것이라고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그 김목사님은 민족과 조국을 대단히 사랑하시던 분이셨습니다.
김목사님께서 매번 저를 만날 때마다 하시던 말씀이 하나 있었습니다. "조형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국경이 없다네. 주님이 보내시면 가는 거야. 내가 싫어도 순종하고 가는 거야.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이 잊어서는 안될 한가지가 있다네. 그것은 조국이라네. 내가 월남과 호주에서 20년째 살고 있지만, 한시도 조국을 잊은 적이 없다네. 조국을 잊지 말게" 목사님께서는 매번 저를 만날 때마다, 이 말씀을 귀가 닳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부족한 저의 소견으로 "이거, 사꾸라 목사 아니야. 목사가 하나님 이야기하고 성경말씀 이야기를 해야지, 조국이 어쩌고, 민족이 어쩌고. 이거 사꾸라 목사 아니면, 운동권 목사가 분명해. 아마 나를 의식화 교육시키고 있는지도 몰라. 조심해야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처음에 김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영어 잘하고 현지에 잘 적응하면 현지인 행세를 할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해외 생활을 1년, 2년... 10년 이상 계속 하다보니, 그러한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해외 생활을 13년 넘게 하며 뉴질랜드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만, 이곳 현지인들이 저에게 와서 "Are you a Kiwi?"라고 물어 보는 사람을 저는 아직까지 한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앞으로도 그러한 질문을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대신에 "Where are you come from? What about your origin?"라는 말로 어느 나라 출신인지를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또 13년 동안 해외에 살고 있지만, 제 피부색이 이곳 현지인들의 피부처럼 백색으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또 제 검은 머리카락이 노랑 머리카락으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 내가 한번 한국인으로 태어나면 영원한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13년 전에 고 김기환목사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국경이 없다. 그러나 조국은 있다"라고 하신 목사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분의 가르침이 저의 삶과 사역의 기준이 되어 <복음 전파를 위해서는 국경은 없다. 그러나 조국을 잊지 말고 조국을 위해 기도하자>는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복음을 Kiwi든, 호주인이든, 한국인이든, 누구에게든 전파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조국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조국의 영적인 부흥과 복음화를 위해 계속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자기 동족을 위하는,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원래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방인을 섬기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2:8)에서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라고 말하며, 스스로 이방인의 사도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또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그는 (롬1:15)에서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라고 고백한 것처럼 이방인의 사도임에 분명히 했습니다.
그는 그의 사명에 걸맞게 타민족을 위해, 타 종족을 위해 소아시아와 로마에 이르기까지 나아갔을 뿐 아니라, 전설에 의하면 요즈음 스페인 지역인 서반아에 이르기까지 목숨 걸고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그는 타민족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타민족을 가슴에 품고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가 목숨걸고 복음을 증거한 결과, 수많은 이방 민족들이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속에는 항상 동족인 이스라엘 민족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방 민족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면 올수록 자기 동족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사도 바울은 그의 마음에 '큰 근심'이 있다고 합니다.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도 '거짓말이 아닌, 참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고통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무엇 때문에 고통하고 있습니까? 바울의 고민이 우리들이 고민하고 있는 자녀교육의 문제입니까? 아니면 앞으로의 진로 문제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머니, 돈 문제입니까? 무슨 문제 때문에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자, 사도 바울이 이토록 고민하며 고통하고 있습니까?
그는 우리가 지난 시간 8장31절 이하에서 살펴 본대로 수많은 고난과 역경 가운데에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넉넉히 이긴다고 큰 소리쳤던 사람이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송사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라고 당당하게 승리를 선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완전히 풀이 죽은 모습으로 고통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무엇 때문에 고통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자기 동족 때문이었습니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사도 바울은 아직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기 동족들을 생각하며 근심하고 있습니다. 일찍부터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하며 고통하고 있습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셔서 양자 삼으셨습니다. 자기 자녀로 입양시켰습니다. 그들에게 아무 공로도 없는데, 그들이 한 일이라고 아무 것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들을 양자 삼으셨습니다. 그들은 지구상의 어느 민족도 누리지 못하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선민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여러 가지 축복의 약속들과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예배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습니다. 적어도 이스라엘 민족은 누구보다도 먼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동족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에 심한 고통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동족을 생각할 때마다, 견딜 수 없었습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 말씀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저주를 받아도 좋습니다.
내 형제 골육 친척들을 구원해 주옵소서. 주님! 내가 주님의 구원으로부터 떨어져도 좋습니다. 내 친구를, 내 이웃을 구원해 주옵소서"
그는 지금 믿지 않는 동족을 위해 목숨 걸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동족들의 구원을 위해 눈물로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목숨걸고 처절하게 기도한 사람은 비단 바울 만은 아니었습니다.
구약시대의 모세도 이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기가 막힌 장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시내산까지 왔습니다. 지도자인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는 동안 산밑에서는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진노하여 이스라엘백성들을 진멸한다고 결심하셨습니다. 그 때 모세는 오늘 본문의 바울처럼 눈물로 간구합니다. 목숨걸고 간구합니다. (출32:31~32)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이것이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모세의 마음이요, 또한 사도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울보 사도, 눈물의 사도였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예레미야만 눈물의 선지자가 아니라, 사도 바울도 영혼을 생각하며 울었던 눈물의 사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행20:31)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 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그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3년 동안이나 울었습니다. 바울은 다른 길로, 잘못된 길로 가는 에베소 사람들을 보고 울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 현대 교회에서 눈물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바싹 말라 가고 있습니다. 그저 즐거움과 재미만을 찾으려고 합니다. 웃기는 말을 하면 좋아합니다. 그러나 심각한 도전을 주는 메시지를 주면 인상을 찡그립니다. 물론 예배가운데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을 맛보아야 하는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예배는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배 자리가 재미만을 찾는 자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배의 자리가 때로는 자신의 죄를 처절하게 뉘우치는 통곡의 자리도 되어야 합니다. 또한 예배의 자리가 아직까지 믿지 않는 영혼들을 안타깝게 여기며 고민하는 고통의 자리도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우리들에게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EX) 어느 교회에 연세가 드신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권사님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만큼 대가 세신 분이셨습니다. 하루는 목사님께서 그 권사님 댁에 심방을 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안방에 앉아 계시는 권사님께서 눈물을 다 흘리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궁금해서 권사님에게 물었습니다. "권사님! 저는 수십년 동안 교회에서 권사님을 지켜보았지만, 권사님이 우시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울고 계시는데,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를 주셨기에 오늘 이렇게 울고 계셔요?" 그랬더니 그 권사님은 "아이, 목사님! 목사님이 오시기 전에 보았던 연속극이 너무 슬퍼서 그래요." 목사님은 교회당에서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권사님이 연속극의 슬픈 장면을 보고 운다는 이야기를 듣고 더 이상 할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권사님! 제가 심방 왔으니까 예배 인도하고 가겠습니다. 그만 우세요"라고 하며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열정적으로 말씀을 증거하였습니다. 권사님이 조용히 말씀을 들으시다가 갑자기 눈물을 다시 철철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제야 말로 진짜로 은혜를 받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예배를 마친 후, 권사님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권사님! 하나님께서 오늘 어떤 은혜를 주셨어요? 아까 제가 말씀을 전할 때, 눈물을 흘리고 계시던데요" 권사님은 "아이, 목사님! 예배를 드리는데, 자꾸 목사님이 오시기 전에 보았던 드라마의 슬픈 장면이 생각이 나서 말이야. 자꾸 생각이 나니 눈물이 앞을 가려요."
사람들은 쓸데없는 것에 목숨걸고 쓸데없는 것에 눈물 흘립니다. 겨우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가 죽었다고 눈물 펑펑 흘리며, 학교도 가지 않고 급기야는 옥상에서 뛰어내려 죽는 얼빠진 아이들도 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탤랜트가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고 비관하여 눈물로 쓴 편지를 남겨놓고 자살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직장을 잃었다고 비관하다가, 사랑하는 가족들을 놓아두고 먼저 가는 비정한 가장도 있습니다.
여러분! 눈물은 그와 같이 하찮은 것 때문에 흘려서는 안됩니다. 생명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 진정한 눈물입니다. 천하보다도 귀중한 영혼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눈물이 진정한 눈물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생각하며 3년 동안 계속해서 울었습니다. 그는 믿지 않는 자기 동족을 생각할 때마다, 고통하며 울었습니다. 오늘 바울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눈물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영혼 사랑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의 기도, 눈물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우리의 입에서 건성으로 흘러나오는 기도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간절한 기도를 구별하십니다.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가짜울음'과 '진짜 울음'으로 구별됩니다. 가짜울음은 어린아이들이 잠자다가 뒤척거리면서 칭얼칭얼하며 울어대는 소리입니다. 이러한 울음소리는 별로 크지도 않고 간절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울음소리를 듣게 될 때 부모들은 즉시 찾아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잠시 칭얼거리다가 곧 잠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짜울음은 아주 다릅니다. 이 울음소리는 아주 크고 진지하며 간절합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가 이렇게 울기 시작하면 부모
들은 아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우, 어린아이는 자기가 바라는 것이 만족하게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하여 큰소리로 울어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부모들도 어린아이들의 진짜 울음소리를 식별할 줄 아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야 우리의 기도소리를 얼마나 잘 구별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간절한 심령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영혼들을 위해 심히 통곡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응답하십니다. 믿으십니까?
구세군의 캐더린 부쓰는 "오 하나님! 저는 가족 없이 홀로 주님 앞에 서기를 원치 않습니다"라고 하나님께 강청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눈물의 기도, 강청한 기도를 통해서 온 가족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며, 전적으로 주를 위해 헌신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16세기의 존 낙스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스코틀랜드의 메리여왕의 철권 통치 속에서 "하나님! 스코틀랜드를 주시옵소서. 아니면 제 목숨을 거두어 가시옵소서" 라고 부르짖으며 조국을 위해, 조국의 영혼들을 위해 목숨걸고 눈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기도를 통하여 스코틀랜드 전국에 다시금 복음이 증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믿지 않는 가족을 위해 눈물 뿌린 캐더린 부쓰 같은 여인이 나와야합니다. 스코틀래드에 영적인 부흥을 위해 목숨걸고 기도했던 존 낙스 같은 사람이 나와야합니다. 또한 민족을 위해, 사랑하는 동족을 위해 자신의 구원을 포기하면서 까지 간구했던 바울과 모세와 같은 영적인 지도자가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주위에 있는 믿지 않는 가족들을 위해, 친구들을 위해, 친척들을 위해, 이웃들을 위해, 더 나아가 이곳 뉴질랜드와 한국에 있는 믿지 않는 영혼들을 위해 목숨걸고, 눈물 뿌리며 통곡하며 기도함으로, 그들을 살리는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