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1주간 금요일 강론
송영진 모세 신부 ・ 2025. 3. 13. 6:49
URL 복사 이웃추가
본문 기타 기능
<사순 제1주간 금요일 강론>(2025. 3. 14. 금)(마태 5,20ㄴ-26)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 라고 하는 자는 최고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26).”
1)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이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같은 위선자가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들의 생활을 기준으로 삼아서 그들보다 더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처럼 살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인 예로, 21절-26절에서는
십계명 제5계명을 실천하는 일을 말씀하시고,
27절-30절에서는 십계명 제6계명을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실제로 죽이지만 않으면 십계명 제5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증오심과 분노까지 모두
없애야만 제5계명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다.”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실제로 간음죄를 안 짓기만 하면 제6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음욕까지 모두 없애야만 제6계명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다.”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위선자들은 마음속에 있는 증오심과 분노는 그대로
놓아두고,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십계명을
잘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위선자들은 “나를 화나게 만든 저자들은 죄인들이고,
저자들을 죽이지 않은 나는 죄를 짓지 않았다.” 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다.” 라고 가르치십니다.
<그 미움과 분노의 원인이 상대방에게 있다고 하더라도......>
십계명을 겉으로 보이는 행동으로 지키는 것은 분명히
중요한 일이지만, ‘마음으로부터’ 진심으로 지키는 것과
‘온 삶으로’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는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실제로 살인을 하지 않더라도, 그 증오심과 분노는
자기 자신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고통을 주고, 많은 사람이 불행하게 됩니다.
그것은 신앙인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이고, 실제로 인간 세상에서 흔히 보는 일입니다.
2) 23절-24절의 말씀은, ‘내가’ 누군가에게 고통과
상처를 준 일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의 원인과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누구의 잘못이 더 컸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고,
‘그 형제’가 나 때문에 상처를 받았고, 나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만 말씀하십니다.
그 상황은, ‘내가 그를’ 용서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
‘그가 나를’ 용서해 주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즉 그에게 가서 내가 용서를 청해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내가 용서를 하는’ 일만 생각하고,
용서를 청해야 하는 일은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은데,
살면서 한 번도 용서를 청할 일이 없는 경우는 없습니다.>
앞의 21절-22절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나의 폭언과 모욕과
분노 때문에 그가 큰 상처를 받았고, 그래서 큰 고통을
겪고 있고, 몹시 힘들어하는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를 죽이지 않았지만, 그는 나의 폭언과 모욕과
분노 때문에 정신적으로 거의 죽은 것과 같은 상황이 된 것.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 위선자들은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라는 생각만 합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만을 기준으로 삼아서 판단하면
누구든지 위선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편안하다고 해서 나는 잘했고,
잘못은 그쪽에만 있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위선자가 되지 않으려면, ‘나 자신’이 아니라
‘그 형제’를 기준으로 삼아서 판단해야 합니다.
‘사랑’은 항상 ‘나’를 기준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너’를 기준으로 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음’이 편안한 것과
‘양심’이 편안한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위선자가 아닌 사람들의 양심은 늘 살아 있고, 뭔가
잘못되었을 때 양심이 편안하지 않다는 것을 바로 느낍니다.
그러나 위선자들은 양심이 마비되어서 양심의 소리를
못 듣거나, 양심의 소리를 들어도 무시해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와 너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그가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네가 먼저 가서
용서와 화해를 청하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상황에서는 자존심을 눌러야 하고,
누구의 잘못이 더 크냐를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화해는 항상 ‘내가 먼저’ 청해야 합니다.
3) 25절-26절의 말씀은, “회개를 미루지 마라.
지금 당장 회개하고 보속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법정으로 가는 도중’은,
우리 각자의 ‘지금의 인생’을 가리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출처] 사순 제1주간 금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