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월남으로 출발하는 날이 왔다.
두려운 마음으로 부산항을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아무리 죽으면 어머니에게 효도한다고 하는 생각을 가졌지만 내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한 번도 맞닥드린 적 없고 느껴보지 못한 죽음이란 다가올 현실은 두렵기만 했다.
수없이 되뇌었다.
죽음이란 것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나는 찾아 가니 두려워 하지 말자!
"죽음은 두려워 하는 자들에게만 간다."
"살려고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
그것이 전쟁에 임하는 군인정신이다.
졸병은 사람이 아니다.
적을 앞에 두고 후퇴를 하거나 돌격명령을 불응하면 상급자가 쏴 죽여도 되는 게 전쟁터의 법률이다.
나는 기차에 올라 수없이 자기최면을 걸고 있었다.
유족연금에 기뻐하실 어머니보다 비통하게 오열하실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교관과 조교들과의 술 한 잔 마신 지난 밤이 생각났다.
나쁜 자식들 ㅡ
차라리 어젯밤보다 오늘 같이 마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술이라도 취했으면 이런 궁상은 떨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정말 간절히 술이라도 한 잔 마시고 싶었다.
청량리역은 많은 환송객들로 붐볐다.
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아 나올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전반기와 후반기 교육을 마칠 때까지 어머니나 순이와 편지를 주고받지 않았다.
편지를 쓴다는 것은 내게 사치였다.
잠시도 틈을 주지 않았다.
한 방울의 땀은 한 방울의 피를 흘리지 않는다는 지독한 교관을 만나 죽지 않을 만큼 고된 훈련을 받았다.
나는 죽지 않으려고 모범적인 훈련을 코스마다 찾아다니며 스스로 받았다.
악에 받쳐 훈련 받는 우리 눈에서 살기 어린 섬광이 빛나는 것 같이 눈동자에서 빛이 났다.
차창 밖으로 가족 친지를 만난 병사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 환송객과 어울리고 있었다.
그네들은 잠시 두려움은 잊은 듯했다.
전쟁터는 살거나, 죽거나, 다쳐 불구가 되거나 그 중 하나에 선택될 뿐이다.
포탄을 정통으로 맞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나는 불구가 되느니 차라리 그 방법이 낫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흙으로 돌아갈 육신인데, 고통 없이 한 순간 사라지는 것도 좋겠다는 신념을 굳히고 있었다.
그들에게도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가족을 만나기 전까지 침묵하던 그들은 어쩌면 위선된 웃음과 여유를 보였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가지고 온 음식을 먹으며 잠시 만남의 시간이 주어졌어도 나는 외로이 열차 안에서 눈을 감고 어서 이 나라를 떠나 이국의 전쟁 속으로 가고 싶었다.
매일 싸움만 하던 세상을 떠나 인간답게 살다 죽고 싶었던 사내의 만용이랄까?
어서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만이 내 머리에 가득 차 있었다.
현실에서 잠재된 것을 도피행각 속에서나마 터뜨리지 못한 어떤 울분을 실컷 풀어보고 싶었다.
전쟁터는 죽으러 가는 곳이 아니다.
살아온다면 반대급부도 있고, 살아 돌아오면 어머니에겐 또 다른 효도도 될 것이다.
어머니가 이 나쁜 자식 월남으로 간다는 사실을 아셨다면 기찻길에 누워 못 가게 하려고 하실 분이셨다.
청량리역을 출발할 때까지 혹시나 기다렸던 순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편지를 주고받지 않았는데 어찌 순이가 알 수 있을까!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 내리던 가을비가 주척거리며 며칠 내리고 있었다.
막사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며칠이 지나가자 이상한 기류가 느껴졌다.
심상찮은 느낌은 소문으로 퍼지더니 결말로 나타났다.
우린 다시 더플백을 메고 각자 명 받은 부대를 향해 헤어졌다.
곧, 전쟁이 끝난다는 것이다.
끝도 없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퍼붓는 달러를 감당하지 못한 미국이 전쟁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인류의 자유, 평화를 위해서라는 미명도 결국 돈의 경제학에 의해 수많은 인명손실만 끼친 채 전쟁이 끝나가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미국이 벌인 전쟁 중 유일한 패배를 안겨준 월남전쟁은 월남의 패망으로 월맹 공산정권에 의해 함락되어갔다.
나는 또 유랑의 군대생활이 시작됐다.
눈보라 치는 수원의 겨울을 맞고서야 내 유랑은 끝났고, 10전투 비행단이 내 종착지였다.
졸병에게는 수원 10전투 비행장 활주로의 추위는 강원도 산골보다 더 추웠다.
고무장갑도 없던 시절, 콩나물, 두부, 생선을 건져주는 1,3종계를 맡은 졸병의 손은 거북 등처럼 갈라져 피가 흘렀다.
뺨까지 얼어터져 고생 많다고 내게는 불침번이나 보초를 세우지 않아 언제나 열외될 수 있었던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밤마다 어머니와 순이에게 편지를 썼다.
입대한 후 반 년이 넘어 겨우 어머니에게 편지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편지지에 어머니와 순이란 단어만 써도 눈물이 났다.
동생이 편지를 보내왔다.
어머니가 장독대에 정한수 떠 놓으시고 매일 밤마다 기도를 하신다고.
이 추운 겨울에도 어머니는 이불도 안 덮고 웅크린 채 주무신다고 했다.
순이에게는 편지가 오지 않았다.
숱한 그리움을 담아 보냈는데, 수취인이 없다는 내용의 편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용주사 기슭에 진달래가 피기 시작했다.
해가 가고 계절이 다시 제자리에 올 때까지 11개 월 동안 내게 면회 온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내게 면회를 와 봐야 볼 수도 없이 새벽부터 밤 늦어 끝나는 게 내 일과였다.
휴가 명령이 내려왔다.
반년 만에 목욕했다.
의무대에 가서 얼어터진 손등에 약을 발라도 굳어진 딱지가 벗겨지지 않았다.
어머니가 보시면 가슴앓이를 하실까 봐 손으로 긁어 떼어도 다시 피가 흘렀다.
고참들이 다려주는 줄 선 군복을 처음으로 입었다.
1년이 다 되도록 보급품 수령하러 영외로 나가는 외엔 외출 외박 한 번 없이 군대생활을 했다.
어머니와 상봉하고 있었던 이야기를 쓰려면 끝이 없다.
나는 순이네가 영월읍으로 이사를 갔다는 말을 순이와 동창인 동생으로부터 들었다.
그리고 방송국 기자와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틑날, 순이네 집앞에서 종일 기다렸다.
방송국 기자와 결혼한다는 얘기 ㅡ
거짓말 같았다.
순이네는 방송국 올라가는 곳에 있었다.
훈련소 정문까지 따라와 울던 순이가 결혼을 한다는 이야기는 내게 청천벽력처럼 들려왔다.
만나지 못하고 귀대하는 줄 알았다.
귀대 며칠 앞 둔 어느 날, 순이를 볼 수 있었다.
동생인 듯한 아이와 돌아오고 있었다.
빨간 원피스 ㅡ
유난히 흰 얼굴과 짙은 까만 머리에 빨간 원피스는 멀리서도 순이라고 느껴졌다.
순이가 군복을 입은 나를 보았다.
놀란 토끼처럼 큰 눈과 벌어진 입술이 굳어 있었다.
첫댓글 비슷한 시기에 군대생활을 했던
사람으로서 너무도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
다시금 마흔너댓해 전으로 가봅니다
잘짜여진 구성과 사실에 바탕을둔 글이 읽는이로 하여금 숨돌릴 여유도 허용치 않는 필력에 댓글을 달지않을수
없네요
잘읽었습니다
다음 편이 기다려지는 글입니다.
그 시절 우리들의 사연이네요. ~
소설이네요
아주 쟁있는 흥미진진한 글
다음편을 기대합니다
ㅎㅎㅎ 제가 파월장병아저씨께 위문편지 쓰던 때가 기억나게하시는 글입니다.맹호부대 최병장님이었는데...ㅎㅎㅎ
소설 한컷 읽었습니다.
다음편을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