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사(進士)
고려·조선시대 진사과(進士科;製述科)에 합격한 사람에게 주던 칭호.
958년(광종 9)에 과거제도를 처음으로 실시, 시(詩)·부(賦)·송(頌) 및 시무책(時務策)으로 진사를 뽑기 시작한 것이 시초였다.때에 따라 시험 과목과 선발 인원이 일정하지 않았다.
진사는 생원과 마찬가지로 3년마다 실시하는 식년시(式年試)와 국가 또는 왕실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수시로 실시하는 증광시(增廣試)의 소과에서 각각 100명이 배출되었다.
시험에는 초시(初試)와 복시(覆試)가 있는데, 한성시(漢城試)에서 200명, 지방의 향시(鄕試)에서 700명을 뽑아, 서울에서 2차시험인 복시를 보게 하여 100명을 뽑았다.
그 뒤 경기의 향시를 폐지하고 한성시를 두 곳으로 나누어서 보게 하였다. 이렇게 복시에 합격한 사람들에게 1438년(세종 20)부터는 그 합격증서로 백패(白牌)를 주었다.
이들은 생원과 더불어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고, 문과에 응시,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성균관에 들어가지 않고 참봉·훈도·오위장 등 종9품직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경학(經學)보다 사장(詞章)을 중시하는 풍조에 따라 그 전과는 달리 진사의 사회적 존경도가 생원보다 높았고, 특히 후기에 과거가 권문세가의 농락을 받게 되자 지방의 과거 응시자들은 거의가 진사 합격에만 뜻을 두어 대과(大科)에 응시하지 않는 풍조가 생겼다.
한편 진사가 선비의 존칭으로 보편성을 띠자 생원도 진사 칭호를 사용하였다.
▣ 생원 [生員] 조선시대 생원과(生員科)의 과거에 합격한 사람.
조선 시대에,소과(小科)의 종장(終場)에 급제한 사람을 일컫던 말.
신분상 선비로서 사회적 공인을 받았음.
생원의 발생지인 중국에서는 본래 국립 중앙대학인 국자감(國子監)의 감생(監生)을 이르던 말이었으나, 송(宋)나라 이후에는 주현학(州縣學)의 지방 생도를 생원이라 하여 감생과 구분하는 말로 쓰였다.
고려에서도 지방 주현학의 출신을 생원이라 하였는데, 이들이 치르던 시(試)·부(賦)·경의(經義)의 시험을 승보시(陞補試) 또는 생원시(生員試)라 하여 합격자를 국자감에 입학시켰다.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과거제도를 두면서 소과(小科)를 생원과와 진사과(進士科)로 나누고 생원시험에는 명경과(明經科)를 택하게 하여 오경의(五經義) 1편과 사서의(四書疑) 1편을 짓게 하였다. 이들의 시험은 3년에 한 번, 1차시험인 초시(初試)는 상식년(上式年:寅·申·巳·亥年)의 가을에 시행하여 전국에서 1,500명을 뽑고, 2차시험인 복시(覆試)는 이듬해 식년(式年:子·卯·午·酉年) 봄에 시행하여 여기에서 생원·진사 각 100명씩을 뽑았다.
이로써 생원은 진사와 더불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 및 하급 관원으로 입사(入仕)할 자격을 얻을 수 있었으며, 대과(大科:文科)를 지망하는 예비적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 시험은 양반 자격시험의 성격을 띠며 합격된 생원은 선비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공인받았다는 데 의미가 있다. 본래는 출세의 관문인 문과는 생원·진사시를 거쳐야만 치를 수 있었으나, 과거제도가 문벌 양반의 출세도구로 이용되어 이를 거치지 않고도 문과에 응시할 수 있게 되었다. 생원·진사는 합격자의 수가 많기 때문에 문벌 양반에게 밀려 문과 합격의 기회가 제한되어 있는 지방 양반들의 신분적 지위를 재확인하는 방편으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사정 아래 놓여 있던 생원·진사들은 스스로를 소성(小成)이라 하여 만족하고, 중앙에 진출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지방 사회의 지배자로 지방 사회 발전에 기여하였다. 생원과 진사의 비중은 그 시험에 따라 변하였는데 고구려에서는 진사시를 중시하였고, 조선 초기에는 반대로 생원시를 중시하여 한때 진사시를 폐지한 적도 있으나 단종 때 부활되면서부터는 진사시가 중시되었다. 이에 따라 진사가 통속적으로는 선비의 존칭으로 보편화되어 구별 없이 생원도 진사라 부르게 되었고, 따라서 생원은 나이 많은 선비를 부르는 말로 변하여갔다.
▣ 첨지僉知
① 나이 많은 남자 를 홀하게 일컫는 말
② 첨지중추부사 의 준말
조선 시대에, 중추부의 정삼품 당상관의 관직. 정원은 8명인데 그 중 3명은 한직(閑職)이었음.
▣ 초시 [初試] - 조선시대 각종 과거(科擧)의 제1차 시험.
조선시대에 시행되던 과거 중 문과(文科:大科), 소과(小科:생원진사시), 무과(武科), 잡과(雜科)의 1차 시험을 말한다. 문과와 무과는 초시·복시(覆試)·전시(殿試)를 실시하고, 소과와 잡과는 초시·복시를 실시했는데, 초시는 식년(子·午·卯·酉) 봄에 치를 복시에 대비하여 식년 전해의 9월 초순경에 치러졌다.
초시에는 관시(館試)·한성시(漢城試)·향시(鄕試)가 있었다. 관시는 문과에만 있던 시험으로 성균관 유생 가운데 성적이 우수한 사람들만 응시할 수 있었으며, 한성시는 서울에서, 향시는 각 지방별로 시행되던 시험이다.
문과의 경우 초시에서 모두 250명을 뽑는데, 관시에서 50명, 한성시에서 60명, 향시에서 140명을 뽑았다. 무과의 경우 원시(院試) 70명, 향시 120명 등 모두 190명을 뽑았다. 잡과는 해당 관청별로 초시를 치러 역과(譯科) 57명, 의과(醫科) 18명, 음양과(陰陽科) 18명, 율과(律科) 18명을 뽑았다. 한편 소과인 생원진사시는 한성시에서 생원·진사 각 200명, 향시에서 생원·진사 각 500명씩 모두 1400명을 뽑았다.
시험감독관은 문과의 경우 정3품 이하 3명이 하되 감찰(監察) 1명을 감시관으로 두었고 무과는 2품 이상 1명, 당하관(堂下官) 문신 1명과 무신 2명을 감시관으로 두었다. 소과인 생원진사시는 정3품 이하 1명을 상시관(上試官), 2명을 참시관(參試官)으로 하되 향시의 경우 수령과 교수 중에서 임명하였다.
첫댓글 친절한 설명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