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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묘실상선원 원문보기 글쓴이: 미월
8. 근본화엄전법륜
‘근본화엄전법륜根本華嚴轉法輪’에서 법륜은 ‘진리의 수레바퀴’를 말하는 것으로 이르지 않은 곳 없이 어느 곳에나 쉼 없이 굴러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법륜을 굴린다는 것은 부처님이 설법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매우 짧은 대목이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 말씀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접목시켜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지금부터 법륜을 굴리겠습니다.
‘어떤 직업을 가지고 살 것인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떻게 살 것인가?’입니다. 직업은 자기 성격에 따라, 취향에 따라서 수천 종의 직업 가운데 하나를 택하면 되는 것입니다. 꼭 의사, 변호사, 판사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책을 만드는 출판사를 하든, 균형 잡힌 식단을 짜는 영양사를 하든, 요양보호사를 하든, 또는 간병인, 간호사, 사회복지사,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교사를 하든, 농사를 짓든, 사업을 하든, 시장에 나가 옷 장사를 하든, 그 어떤 일이든 자기 성격과 적성, 취향에 따라 하면 되는 것입니다. 직업에 따라 각자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누구를 막론하고 삶의 지침으로 삼아야 할 공통적인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떻게 살 것인가?’입니다.
마음자리 찾기
80권의 방대한 내용을 지닌 <화엄경>이 전달하고자 하는 가장 큰 메시지는 바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입니다.
一切唯心造 일체유심조
모든 일은 오직 마음이 짓는다.
마음이 창조주라는 말입니다. 마음을 먹는다 해서 슬쩍 먹는 것이 아니라 단단히 먹어야 합니다. 단단히 먹었을 때 일체유심조가 적용이 됩니다. 내 마음 먹은 대로 잘 안 되는 것은 처삼촌 벌초하듯이 슬쩍슬쩍 마음을 먹어서 그런 것입니다. 아주 다부지게, 골수에 사무치도록 온몸과 마음으로 오로지 그 생각으로 일관하면 마음먹은 대로 되게 되어 있습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어느 거사님이 인편을 통해서 산삼 두 뿌리를 보내왔어요. 내용인즉, ‘스님이 요즘 비쩍 야위신 것 같군. 나라도 산삼 두어 뿌리 캐서 드려야겠다.’하는 마음을 먹고 목욕재계하고 산에 갔는데 산삼을 캐어야겠다는 생각을 아주 간절하게 한 덕분인지 정말 산삼 두 뿌리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 덕분에 제가 산삼 두 뿌리를 먹게 되었습니다.
마음만큼 보이고 마음만큼 이루어지는 것이 진리입니다. 산도 내 마음 안에 있고, 강도 내 마음 안에 있고, 성취도 내 마음 안에 있으며, 부처님도 내 마음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인 달마대사達磨大師로부터 이어져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의 뒤를 이은 분은 육조六祖 혜능慧能 스님입니다. 스물네 살 때 파격적으로 계戒도 받지 못한 행자의 신분으로 법을 이어받은 육조 혜능 스님은 자신을 해치고 가사와 법을 빼앗으려는 무리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자신이 거처하던 황매산을 떠나 15년을 이리저리 은둔해 다니면서 법 펼칠 때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이런 것을 불교에서는 시절인연이 도래할 때까지 기다린다고 합니다. 큰일을 성사시키려면 때로는 기다리기도 해야 합니다.
드디어 서른아홉 살이 되어 광주 법성사法性寺 인종印宗 법사法師의 <열반경> 강의를 들으러 사냥꾼으로 위장해서 나타납니다. 시절인연이 도래한 것을 예감한 것이지요. 강의 중간 스님들이 마당에 나와서 쉬는데, 당간지주에 걸린 깃발이 바람에 나부껴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한 스님이 ‘깃발이 움직인다.’라고 말하자, 또 다른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라고 반박하다가 나중에는 패가 둘로 나누어져 논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행자인 혜능 스님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비풍비번非風非幡,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니라 오직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느니라.”
모든 것이 다 마음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일체유심조입니다.
心外無法 심외무법, 마음 밖에 법이 없다.
마음 밖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마음 바깥에는 일체 대상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다 마음 안에 있다는 일체유심조의 또 다른 말입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아직 행자의 신분이었던 혜능은 인종 법사 앞에서 오조 홍인의 인가를 받아 법맥法脈을 잇는 육조임을 확인받습니다. 그 자리에서 인종법사는 혜능 행자를 바로 스승으로 모시게 됩니다.
스승을 모시는 일에는 체면이 없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나이, 신분, 경력, 승가에서의 법랍法臘 등은 스승을 삼는 데 있어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세간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승이라 하는 것은 나이, 신분, 남녀를 떠나서 위대한 것입니다. 인종 법사가 바로 혜능 행자를 스승으로 삼게 되면서 그 인연으로 드디어 법을 펼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마음이란 것은 마음대로 되느냐? 마음대로 안 됩니다. 바로 그것이 중생의 마음입니다. 부처의 마음과 중생의 마음 바탕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중생의 마음은 거칠 대로 거칠어져 있어 닦고 또 닦아야 합니다.
三日修心 삼일수심 千載寶 천재보
삼 일간 닦은 마음 천 년의 보배로다.
죽도록 힘을 다해 삼 일간만 마음을 닦아도 천 년의 보배를 얻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편안할 때는 그 수행이 잘 되지 않습니다. 동기나 어떤 충격이 있어야 수행할 마음을 냅니다.
가까이 있던 가족의 죽음은 큰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아이가 아프거나 또는 아이가 시험에 떨어져도 충격이 됩니다. 하던 일이 잘 안 되거나 아예 문을 닫게 된 때나 청춘남녀가 실연을 당하게 되었을 때 충격을 받습니다. 바로 그때 기도가 됩니다. 그때 마음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절을 찾게 됩니다.
계기가 어떤 것이든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충격을 받았다는 그 사실만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충격을 계기로 기도와 참선 등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충격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충격을 소화만 잘하면 나 자신이 나 되도록 하는 큰 에너지가 됩니다. 이것이 불교를 통해 배우는 지혜이며 불자들은 그렇게 해서 더 큰 세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불교를 모르는 사람은 거기에서 주저앉고 맙니다. 그래서 불교공부가 중요한 것입니다.
마조馬祖 스님의 법을 이어받은 등은봉鄧隱峰 스님은 그 기행奇行으로도 유명합니다.
“나는 오늘 물구나무서서 죽겠다.”라는 말을 남긴 후 정말 물구나무 선채로 그대로 열반에 드신 일화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살아계신 동안 그런 기행으로 유명했던 만큼 법도 높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등은봉 스님을 찾아 그 절에 모여들었습니다.
어느 날 절에 스님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공양주 스님이 공양간에서 바쁘게 불을 지피고 일을 하던 중 자기 옷에 불이 붙은 줄도 모른 채 있다가 그만 그대로 다비식까지 치르고 말았습니다. 공양주 스님은 죽는 순간 자기에게 공양주를 시킨 등은봉 스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염라대왕 앞에 섰습니다.
“아직 젊은데 어쩌다 왔는고?”
“저는 스님이었는데 등은봉 스님이 저를 억지로 공양주를 시켜 일을 하다가 몸에 불이 붙어서 꼼짝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등은봉 스님이 너무 원망스럽습니다. 염라대왕이시여, 저 등은봉 스님을 잡아다 벌 좀 주십시오.”
염라대왕이 보니 크게 벌 줄 일은 아닌데 공양주 스님이 애걸하니 등은봉 스님을 잡아오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절에는 신장의 기운이 있어요. 호법의 역할을 하는 신장들입니다. 절 전체를 살피며 외호하는 그런 신장을 가람신伽藍神이라고 합니다.
등은봉 스님이 있는 절에 저승사자가 나타났어요.
“등은봉 잡으러 왔다.”
저승사자의 말을 들은 가람신장은 찾아보라 했지요.
“가람신장으로 여기에 12년을 있었는데 등은봉이라는 스님을 본 적이 없다.”
시치미를 뚝 떼며 이렇게 저승사자를 되돌려 보냈어요. 저승사자가 그냥 돌아가 염라대왕에게 있었던 일을 고하자 공양주 스님이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염라대왕님, 거짓말입니다. 분명히 그 절에 등은봉 스님이 있습니다.”
저승사자는 없다고 하고, 공양주 스님은 있다고 우기니 염라대왕은 기가 찰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직접 가서 등은봉 스님을 데려 오너라.”
공양주 스님이 절에 도착하자 등은봉 스님이 마당을 쓸고 있는 게 보였어요. 법이 높은 등은봉 스님은 얼마 전 불에 타서 죽은 제자, 공양주 스님이 온 것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엔 왜 왔느냐?”
“저, 스님 모시러 왔습니다. 스님이 저를 공양주 시켜서 억울하게 죽었다고 염라대왕께 고했더니 스님을 데려 오라 하여 이렇게 왔습니다.”
“그래, 네가 죽었단 말이냐? 죽었으면 아무것도 없는데 어찌 왔느냐? 죽었다면 아무것도 없을 텐데 내게 와서 이러는 것을 보면 네가 죽지 않은 모양이로구나? 짐승이고 사람이고 다 본래 마음자리가 있는데 그 없어지지 않는 마음자리를 자각한다면 죽은 게 아니야.”
등은봉 스님의 말에 공양주 스님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래, 죽었으면 아무것도 없어야 할 텐데……. 그러면 스님을 원망하는 나는 무엇인가? 무엇이 원망하는가? 무슨 마음이 있어서 원망하는가?’
공양주 스님은 깊이 생각하다가 그 순간 탁 깨쳤어요. ‘마음이 부처’라는 것을 깨닫고 나니 부질없이 원망할 것도 없고 염라대왕 앞으로 다시 갈 필요도 없었습니다.
깨달음의 자리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영가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念念菩提心 염념보리심 處處安樂國 처처안락국
생각 생각에 보리심이면 가는 곳마다 안락국이라.
깨닫겠다는 보리심을 일으키면 이미 부처님 나라입니다.
주인공 자리
卽心卽佛 즉심즉불, 마음이 곧 부처니라.
마음이 곧 부처, 내 안에 부처님이 계신다는 의식은 삶의 질을 바꾸어 놓습니다. 수처작주隨處作主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제 마음을 제 마음대로 운영할 수 있는, 의식 있는 성성聖性한 존재가 됩니다.
어느 자리에 있든지 주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어디에서든 주인공으로 살아야지 노예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시켜서 마지못해 한다면 그건 노예나 다를 바 없습니다. 주인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활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인공입니다. 주인공으로 사는 삶이 훨씬 더 재미있고 훨씬 더 활발합니다.
아무리 지고지순한 진리일지라도 현실에 응용되지 않고 현실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현실을 살아가면서 주인공이 어떻게 응용되어야 하겠습니까? 내가 주인공으로 깨달음을 얻어서 또는 크게 자각해서 즉심즉불卽心卽佛의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주체적 자각自覺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상相은 없애고, 주인공으로 주체성은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 심불급중생시삼무차별
마음, 부처,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
<화엄경>의 중심사상인 일체유심조의 내용을 잘 들여다보면 궁극에는 비로자나 부처님의 화현인 우리는 불성이 있는 위대한 존재로서 개개 낱낱이 주인공이며, 절대 그 주인공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나, 얼마나 위대한가!
此有故彼有 차유고피유 此起故彼此 차기고피차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 세상에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존재는 시간상으로 공간상으로,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중첩되고 중첩되어 존재합니다. 그것을 중중무진연기重重無盡緣起라 합니다. 이러한 불교적 세계관을 화엄경에서는 인드라망因陀羅網이라 말합니다.
본래 인드라망은 제석천이 계신 궁에 걸쳐 있는 보석망을 말합니다. 큰 하늘 공간에 샹들리에가 드리워져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샹들리에가 종으로 횡으로 하늘 끝가지 사방 가득 달려있고 샹들리에 작은 알마다 불이 켜져 있어요. 불빛은 서로서로를 비추고 반사되어 샹들리에 알 하나에 전체 샹들리에의 에너지가 다 들어오게 됩니다. 이것을 중중무진연기라 합니다.
2500년 전 이러한 부처님 말씀이 현대의 첨단과학으로 모두 증명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사실을 그 옛날 부처님은 어떻게 표현을 하셨을지 생각하면 늘 감동스럽기만 합니다.
一中一切多中一 일중일체다중일
一卽一切多卽一 일즉일체다즉일
하나 속에 여럿 있고 여러 속에 하나 있어
하나가 모두이고 모두가 하나이네.
머리카락 한 올에 내 온몸, 인체의 비밀이 다 담겨 있어요. 내 몸 자체가 소우주입니다. 우리 몸을 가만히 관찰 해 보면 얼마나 신기한지 모릅니다.
샹들리에 전구의 빛이 서로서로를 비추고 반사되어 결국 전구 하나에 전체의 빛이 다 들어 있게 되듯 우리 몸도 모두가 하나로 조화롭게, 어느 것 하나도 고립되지 않고 전체적인 상호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중무진연기의 과정이며 인드라망은 그 설계도 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화엄華嚴이라 합니다.
우리절(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의 카페인 불교인드라망도 살아 숨 쉬는 유기체로서, 또 다른 화엄세계입니다. 카페 불교인드라망에도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모든 부처님의 말씀과 진리가 있고, 우리 불교대학의 모든 것이 그 속에 담겨 있습니다. 불교인드라망이 연기적 진리를 형상화하며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저 혼자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윗대 수많은 조상의 피가 내 몸에 같이 흐르고 있습니다. 내가 접하는 모든 것이, 그것이 물이나 공기 등 어떤 환경이든 나의 존재와 관계없는 것은 없습니다.
전구 하나에 모든 샹들리에 빛이 들어와 있는 것처럼 내 존재 안에는 조상이 들어와 있고, 자연이 들어와 있고, 모든 공간이 들어와 있고, 모든 존재가 들어와 있습니다.
우주가 내 몸과 마음에 들어와 있으니 내 자체가 우주입니다. 일체一切가 나와 관계없는 것이 없으며 다 내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과 역사를 넘어 있는 모든 것입니다. 온 우주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가 한 몸이며 한 생명입니다. 다른 존재를 위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하는 일이 됩니다. 조상 천도 하는 것, 자연 보호 하는 것, 이웃을 돕는 것 등 이 모두가 중중무진연기의 인과와 순환의 원리에 의해 다 나에게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주 속에서, 나와 관련된 그 어떤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연기적 진리로 봤을 때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모든 것은 불성佛性을 가진 존재로서 서로의 연기적 인연 관계 속에서 아주 또렷하게 빛나는 샹들리에 전구로 있는 것입니다. 그 빛나는 전구 하나하나가 주체적 자각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든 존재를 받아들여 거대한 아름다움의 세계를 연출해 가는 것, 이것을 화엄세계라 말합니다. 전체가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그 속의 각각의 개체가 자기 역할을 아름답게 해냈을 때 화엄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중중무진연기의 법칙으로 그 자체가 화려하게 장엄을 이룰 수밖에 없습니다. 근본화엄이라고 말할 때 ‘근본’이 붙은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모든 존재는 다 독특한 개성과 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개개인이 가진 개성과 향이, 모든 존재와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각각의 존재는 다 위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春蘭秋菊 춘난추국 各自歆香 각자흠향
봄에는 난초 가을에는 국화, 저마다 제 향 일레라.
난초는 난초대로 국화는 국화대로 사람은 면면대로 다 자기 나름의 가치를 가집니다. 그 낱낱이 서로서로 인연 지어지면서, 아름다운 세계로 무르익는 것입니다.
화엄세계에서는 상충하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절(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 하늘법당에 있는 꽃은 꽃대로 갖가지로 피어나고, 동물은 동물대로 어울려 놀며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아주 아름답습니다. 옥불보전 하늘법당을 한 번 둘러 보면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게 됩니다. 진리에 대한 또는 그 무엇에 대한 간절한 향상심向上心, 기도심祈禱心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법당에는 황금 대원불이 계십니다. 황금 대원불 앞에서 꽃은 꽃대로, 벌은 벌대로, 과일은 과일대로, 채소는 채소대로 기도하고 있으니 아름다울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 앞에 있는 모든 존재는 기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낱낱이 다 부처님 몸이며, 법신의 한 부분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塵塵刹刹法王身 진진찰찰법왕신
낱낱이 다 부처님 몸이라.
중첩되고 중첩되는 연기緣起는 우주 만물의 법칙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존재의 빛을 나타내면서도 늘 이웃을 생각하는 불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우주의 주인공으로 성성하게 살아있는 나는 늘 이웃과 함께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또렷하게 나타내는 것이 바로 연기적 진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는 순간, 결과는 이미 잉태된다.
근본화엄에서 ‘근본’은 진국, 진짜란 의미도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만사천 법문 가운데 가장 먼저 설하신 것이 <화엄경>입니다. 젖으로 말하면 초유初乳에 해당합니다. 깨달으시고 나서 21일간에 걸쳐 최초로 설하신 <화엄경>이 초유가 되는 것입니다. 최초로 설하신 법문이기에 그 속에 영양덩어리, 말씀의 핵심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근본이라는 말이 붙은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설하셨던 그 마음이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들을 향하신 첫 마음이셨던 것입니다. <화엄경>은 부처님께서 중생을 향하신 첫 마음의 산물입니다.
중생의 첫 마음, 초심初心, 초발심初發心은 바로 부처님을 믿는 마음, 신심에서 출발합니다.
信爲道元功德母 신위도원공덕모
믿음은 도의 으뜸이요 공덕의 어머니라.
믿는 그 순간에 이미 결과가 잉태됩니다. 초심, 초발심 가운데 믿음이 이미 자리합니다. 진정한 믿음을 일으키는 그 순간이 초심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도의 으뜸이요 공덕의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부처가 무엇입니까?”
“내가 말하면 믿겠는가?”
“예”
“믿는 그 마음이 부처니라.”
그 믿는 마음자리 안에 이미 부처가 들어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믿음, 믿음 말하지만 처음 냈던 그 마음을 그대로 지속하기가 힘듭니다. 공부하다 보니 조금 아는 것 같아 스님의 법문도 자신의 잣대로 분별하고, 내 안에 부처님이 계시고 처처處處가 법당이라는데 굳이 절에 가서 공양 올려야 하나 싶고, 작년에 그만큼 했으니 올해는 그냥 넘어가도 될 것 같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감사도 점점 희미해져 갑니다. 첫 마음, 초발심이 안 되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다 보면 ‘어떻게 한국불교대학에 오게 되었고 어떤 행운으로 大관음사와 인연이 되었지?’ 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순간 그 마음이 초발심이고 그곳이 바로 초발심의 자리입니다. 바로 초유가 펑펑 나오는 그 순간인 것입니다. 그 순간, 너무 행복해서 눈물 날 지경이 되는 것입니다.
初發心時便正覺 초발심시변정각
처음 마음 냈을 때가 바로 정각이라.
초발심 자체가 바로 깨달음, 바른 견해가 됩니다. 처음 마음 내었을 때 바로 그때 신심이라는 엑기스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화엄경>에서는 특별히 보살이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 정도에 따라 52단계를 설하고 있는데 이것을 52계위階位라고 합니다. 그 52계위 중 처음 단계인 십신十信의 열 단계 중에서도 가장 기초, 근본이 되는 중요한 수행 단계가 바로 신심信心입니다.
믿는 마음, 믿음! 믿음에서 출발하여 묘각이라고 하는 부처님의 단계까지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바로 그러한 보살행을 되새기려고 우리절(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 대웅전 옥상의 황금 대원불을 52계위를 상징하는 52척尺 대불로 모신 것입니다.
물을 끓이려면 100도가 될 때까지 계속 불을 지펴야 합니다. 그런데 조금 지피다가 안 끓는다고 불을 꺼 버리거나, ‘언제쯤 끓을까?’ 하고 자꾸 뚜껑을 열다 보면 물은 더디게 끓게 됩니다.
100도가 될 때까지는 아무 말 말고 불씨를 꺼뜨리지 않게 불만 지펴주면 됩니다. 그러다 100도에 다다르면 물은 분명히 끓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가 바로 성불의 자리, 부처님의 가피를 받는 자리입니다. 믿음, 한결같이 순수하고 깨끗한 그 마음이 바로 초발심입니다.
刹塵心念可數知 찰진심념가수지
大海中水可飮盡 대해중수가음진
虛空可量風可繫 허공가량풍가계
無能盡說佛功德 무능진설불공덕
온 세계의 티끌들을 한 생각에 다 헤아리고
큰 바다의 물을 남김없이 다 마시고
저 허공을 재어 알고 저 바람을 잡을 수 있어도
부처님의 무량한 공덕은 다 말할 수 없으리.
이처럼 부처님의 무한 공덕 속에 무한 자비와 무한 가피가 우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무한 가피에 놓인 불자로서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려 포교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부처님 말씀에는 행복과 생명과 영원의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주고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불자들의 권리이고 사명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엘리트 불자로서의 자존심을 가지고 법륜 굴리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근본화엄으로 법륜을 굴리셨습니다. 지혜의 수레바퀴를 굴리셨습니다. 부처님께서 굴리신 법륜을 부처님의 가피를 입고 있는 우리가 부처님을 대신해서 굴려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피를 입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바로 부처님의 화신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륜,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진정한 엘리트 불자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