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문 근교산&그너머에 소개되었던 부산 동구 근대산업유산길 일부를 따라 나섰다
1960~1990년 대한민국 경제의 한 축을 담당했던 부산 동구의 ‘근대산업유산길’은
모두 5개 코스로 나뉘어 있지만 대부분은 갈맷길 탐사 때 답사를 하였던 곳이라서
그중 아직도 미답지로 남아있는 몇 곳을 골라 오늘 답사를 한다
일터에서 오전 근무를 마치고 길을 나서면서
인근의 남해지방해양경찰청에서부터 시작한다
제자로교회 / 동구 성남일로 12(좌천동 68-302)
제자로교회 주변이 온통 옛 매축지마을이었는데 지금은 주위에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많이 들어서 있고
교회와 맞붙은 주변에는 아직도 매축지마을이 옛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 있다
매축지마을 골목길
이 지역은 1920년 이전에는 바다였으나 이를 매립해 말을 수용하던 마굿간으로 사용했다
광복과 함께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갔던 사람들과 6·25전쟁 피란민이 대거 매축지마을에 몰려들어
마굿간에다 방과 부엌을 넣고 ‘하꼬방’으로 개조해서 살았다
매축지마을 길 건너편의 두산위브 아파트단지
이곳도 예전에는 매축지마을이었으나 재개발이 되었다
제자로교회와 오른쪽의 매축지마을, 그리고 그 뒤의 아파트단지
매축지마을 가운데에 있는 안용복 장군 생가터를 찾아 간다
안용복 장군 생가 터 / 부산 동구 성남이로 57번길 10 (동구 좌천동 14-1)
대문 옆에 태극기가 걸려 있다
안용복(安龍福) 장군은 동래출신 어민으로 수군(水軍)인 능로군(能櫓軍)이었는데
1696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왜인들에게 독도가 우리 땅임을 확약 받아온 업적을 세워
후세 사람들에 의해 장군이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다
좌천동의 정공단(鄭公壇) 위에 있는 '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에 가면
당시 일본으로 건너간 선박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으며
수영사적공원에는 장군의 사당과 동상도 있다
<참고사진> 수영사적공원의 안용복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수강사(守疆祠)
<참고사진> 수영사적공원의 안용복 장군 동상
왜(倭)의 막부가 독도가 조선땅임을 자인한 두루말이 문서를 오른손에 쥐고
일본을 향해 호령하고 있는 안용복 장군의 늠름한 모습이다
<참고사진> 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 / 동구 좌천동 722
<참고사진> 안용복 장군 도일선(渡日船) 모형
매축지마을 옆의 과선교를 건넌다
‘바다를 메까 땅을 맹글다’는 제목의 매축지마을 이야기를 자료와 사진으로 만난다
매축지마을은 영화 ‘친구’와 '하류인생' '마더' ‘아저씨’ 등이 촬영된 명소이기도 하다
과선교(跨線橋)
과선교를 건너 좌천역 쪽으로 간다
‘역사 스토리 골목’인 좌천굴다리
좌천역
좌천역 2번출구 앞의 부산포왜관(釜山浦倭館) 표석
우리나라에 왜관이 언제 처음 설치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려 시대에는 김해(지금의 강서구 녹산동 일대)에 일본 사절이 머무는 객관(客館)이 있었다
객관은 왜관의 기능을 일부 담당하였다고 생각된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1407년(태종 7)에 동래 부산포(현 동구 범일동, 좌천동 일대)와
웅천 제포(내이포, 지금의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 일대)에 왜관이 설치되면서 부산 왜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426년(세종 8)에는 울산 염포(현 울산광역시 북구 염포동 일대)에 왜관이 추가로 설치되었고
이 세 왜관을 삼포 왜관(三浦倭館)이라 부른다
서울에는 상경한 일본 사절이 머무는 왜관인 동평관(東平館)이 있었다
삼포 왜관은 1510년 4월 삼포왜란(三浦倭亂) 이후 폐쇄되어
1512년 임신약조(壬申約條) 체결로 국교를 다시 열 때까지 계속되었다
부산에서의 왜관 역사는 1407년(태종 7)에 설치된 부산포 왜관(釜山浦倭館)을 시작으로
→ 절영도 왜관(絶影島倭館) 1601~1607 / 영도 대평동
→ 두모포 왜관(豆毛浦 倭館) 1607~1678 / 동구 수정2동
→ 1678년의 초량 왜관(草梁倭館) (중구 신창동, 중앙동, 광복동, 남포동, 대청동 일대)으로 이어진다
개화기까지 200년 간 존속되어오던 초량 왜관(草梁倭館)은
지금의 용두산공원을 중심으로 동관과 서관으로 나뉘어 형성되어 있다가
1876년 근대 개항 이후 1877년(고종 14) 부산구 조계 조약(釜山口租界條約)에 의해
초량 왜관 터에 일본 전관 거류지(日本專管居留地)가 들어서면서 왜관은 그 역사를 다하였다
좌천삼거리에서 건널목을 건너
성산교회 옆 절벽에 한때 ‘동굴집’으로 유명했던 좌천동굴로 간다
좌천동굴
길이 약 50m인 U자 형태 인공동굴로 일제강점기 방공호로 팠으며
한국전쟁 때는 피란민들이 살기도 하였고 이후에는 민방위교육장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고등학교 시절 한두 번 찾기도 했던 옛 동굴집의 추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2009년에 도로개설사업으로 동굴이 폐쇄되기 전까지 아구찜과 파전에 막걸리를 팔던 주점이 있었다
에어컨이 귀했던 그 시절에 동굴 안쪽에서 나오는 서늘한 냉기로 여름에 인기가 많았다
동굴의 높이와 넓이가 옛날보다 많이 낮고 좁아 보여서 관리인에게 물어보니
미래유산으로 전환하면서 낙석 위험과 습기 제거 등을 위해 한꺼풀 덧씌웠기때문이라 한다
성남초등학교 정문
좌천동굴을 나와 영가대(永嘉臺) 옛 터를 찾아 간다
성남초등학교 뒷길을 따라 조금 가면...
저기 전신주 높은 곳에 '영가대 본터'를 안내하는 이정표가 보인다
여기에서는 왼쪽으로... (오른쪽으로가면 부산진시장이다)
영가대(永嘉臺) 본터
영가대(永嘉臺) 본터에 미니어처로 만든 영가대
영가대는 조선 시대 통신사 일행이 일본에 갈 때 해신제(海神祭)를 지낸 장소다
영가대(永嘉臺)를 처음 건립할 당시에는 이름이 없었는데
1624년(인조 2) 일본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부산에 파견된 선위사(宣慰使) 이민구(李敏求 1589~1670)가
순찰사 권반(權盼 1564~1631)의 본향(本鄕)인 안동의 옛 지명 ‘영가(永嘉)’ 따서 이름 붙였다
이후 영가대는 조선 후기 통신사를 비롯한 역대 대일(對日)사신들의 무사 항해를 기원하며
해신(海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해신제당(海神祭堂)의 역할은 물론
출발과 귀환의 상징적인 지점이 되기도 하였다
영가대 기념비
영가대 기념비는 앞면 33.5cm, 높이 90cm, 두께 12.5cm의 화강암으로 되어 있는데
단기 4284년(1951년)에 세워졌다
<참고사진> 복원된 영가대
부산진성(자성대) 동문 인근 조선통신사 역사관 옆에 2003년에 복원된 영가대가 있다
<참고사진> 영가대 본터 위치도
부산 동구 진시장로 20번길 54-5 (범일동 254-8) 인근 공터
부산진역 2번출구에서 보는 고관(古館) 입구
이제 마지막 목적지인 두모포왜관 표석과 다대첨사 윤흥신장군 동상을 보기위해 고관으로 왔다
2번 출구에서는 쌈지공원으로 바로 건너는 횡단보도가 없어 1번 출구로 나왔다
부산진역 1번출구에서 보이는 고관(古館)입구
고관(古館)이라는 명칭은 부산의 마지막 왜관이었던 초량 왜관 이전의 왜관(두모포 왜관) 지역이라고 하여
고관(古館)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초량 왜관(草梁倭館)은 고관(古館)에 대비해 신왜관(新倭館)이라 불리기도 했었다
쌈지공원
양쪽으로 대로를 끼고 있는 삼각지에서 도심 속 숲속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쌈지공원 한복퐌에 우뚝 서 있는 윤흥신(尹興信)장군 동상
부산진을 공략한 왜군이 군사를 나누어 수륙으로 다대진을 침공하였는데
다대첨사 휸흥신 공은 동생과 휘하 군민을 이끌고 오직 죽음만 있을 뿐이라는 비장한 각오로 역전하여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첫 싸움에 이겼으나 화살이 다하고 칼이 부러져 마침내 관민 모두가 전사하였다
멀리 일본을 항해 눈을 부릅뜨고 두 주먹을 꽉 쥔 장군의 기개가 하늘을 찌를듯하다
다대첨사 윤흥신(尹興信)장군은 임진왜란 때 순절한 부산지역의 대표적인 인물로
동래부사 송상헌(宋象賢), 부산진첨사 정발(鄭撥)과 함께 충렬사 제단에 모셔져 있고
다대포에는 다대첨사 윤흥신(尹興信)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군관민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설치한 제단인 윤공단(尹公壇)이 있다
1981년 9월에 석상(石像)으로 처음 건립되었다가
2023년 12월에 지금의 동상(銅像)으로 재건립되었다
<참고사진> 다대포의 윤공단 입구 / 사하구 다대동 1234번지
<참고사진> 다대진성 결전도(多大鎭城 決戰圖)
이 그림의 원본은 충렬사 기념관에 걸려 있다
<참고사진> 윤공단 표지석
윤공단(尹公壇)은 왜군과 싸우다가 순절한 다대첨사 윤흥신(尹興信)과
함께 왜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군관민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설치한 제단이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그 날 바로 동래읍성과 다대진성을 공격하였다
다대진성의 윤흥신은 이날 성을 지켰으나 다음날인 15일에는 항전 끝에 전사했으며
많은 희생을 내고 성은 함락되었다
<참고사진> 윤공단(尹公壇)
다대진첨사 윤흥신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그의 사적(事蹟)이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1761년 경상감사 조엄이 윤흥신의 사적을 기록한 문헌을 입수하고
송상현 공과 정발 공의 사당에 윤흥신 공이 빠져 있음을 안타까이 여겨
조정에 포상을 청함으로써 그의 사적이 널리 알려지게 되고 윤공단이 건립되었다
1765년 당시 다대첨사로 있던 이해문이 제단을 쌓고, 음력 4월 14일을 제사일로 정하여 제사를 지냈다
신위는 충렬사 본전 (本殿)에 수위(首位) 3신위 중 하나로 동래부사 송상현, 부산진첨사 정발과 함께 모셔져 있다
두모포 왜관(豆毛浦 倭館) 표석
부산 동구 중앙대로 333 (부산진역 1번 출구) 고관 입구 쌈지공원 내 윤흥신장군상 인근에 있다
부산의 세 번째 왜관인 두모포 왜관(豆毛浦 倭館. 1607~1678)은
영도 대평동에 있던 절영도 왜관(絶影島倭館) 건물이 낡아 불편하다는 호소가 있었고
그즈음 조선 조정에서도 곧 일본과의 국교가 재개될 텐데
절영도에 일본 사절을 머물게 하는 것은 사절을 섬에 유폐한다는 오해를 받는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리하여 국교가 재개된 이후 사용할 새 왜관의 조성 준비에 들어갔다
일본은 조선 전기에 사용하던 부산포 왜관(釜山浦倭館)을 그대로 사용하기를 원하였지만
부산포 왜관 터는 이미 부산진성으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허락할 수 없었고
절영도에서 육지로 왜관을 이전하되 부산진성 근처인 이곳에 1607년 새 왜관을 조성하였다
군진(軍鎭)인 부산진 가까이에 두고 왜관의 일본인을 통제, 감시하려던 목적도 있었던 것이다
두모포 왜관은 1678년 초량 왜관으로 이전할 때까지 71년간 지금의 동구 수정2동에 존속하였다
첫댓글 1693년, 울릉도에서 어로하던 안용복은 일본 어선에 잡혀 일본으로 끌려갔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의 땅이다.” 이 일로 조선과 일본 사이에 공식적인 문제(울릉도 쟁계)가 발생했습니다.
1696년에는 일본 어민들의 침범이 이어지자 안용복이 스스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는 조선의 지도와 근거를 제시하며 독도가 강원도 소속임을 주장했고, 일본 막부로부터 다시는 일본인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확답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일본 막부는 울릉도·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님을 확인하고 일본 어민의 출어를 금지했습니다. 이후 1876년 메이지 정부는 과거 기록을 검토해 해당 섬들이 일본의 지적에 포함되지 않는 ‘조선 관련 지역’임을 행정적으로 확인했습니다.
다대포첨사 윤흥신이 을사사화 때 외척 대윤의 수장이었던 윤임의 아들임을 여기서 처음 알았네.
영남이 따라 다니면 '걸어서 역사문화 기행'을 할 기회가 무수히 있겠는데...
글이며 사진이며 답사를 통한 해박한 지식이며 모두가 경이로울 뿐이다.
많은 친구들이 홈피를 찾게 만드는 정성에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