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얼마전에 가입을 해서, 이 카페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토론이 이루어지는지 잘 모르겠습
니다. 이렇게 리플라이로 달면 되는 것입니까?
1. 저는 "기록을 따진다" 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파장 파장임을 설명하는 것 뿐입니다.
백제가 중국에 쳐들어갔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488년이나 490년에 고구려가 백제에 쳐들어갔
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둘 다 기록이 없는건 매한가지입니다.
북위에서 함선 건조가 힘들었음을 들어 이 전쟁이 중국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면, 백제가 고구려를 미워하여 匈梨 라고 적어 보냈다고 주장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북위가 백제 침공군을 수송할 함선을 보유하지 못했다는 증거도 역시 없습니다. 수/당대의
예를 들어 선박 건조가 무리한 일이었음을 말씀하시기에, 저는 "노력하면 안될게 뭐냐" 는
식으로 고려의 예를 들었던 것입니다. 또한 저는 북위 침공군의 규모를 수십만 기병으로 보
지도 않으며, 진정으로는 북위기 침공한 일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이 점을 계속
지적하시는 것이야말로 실제로는 핀트가 맞지 않는 일입니다.
2. 태황태후가 사망한 490년에 북위가 정말 수십만 대군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했다면 북위
의 역사인 위서에 나오지 않을 까닭이 없으나 실은 남제서 위로전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남
제가 북위를 백제보다 하찮게 여겼을 까닭도 없으니, 백제전에 적어넣었다고 해서 위로전에
서는 이를 생략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기실 저는 왜 이 "수십만 기병" 이라는 말에 글자 그대로 천착하시는지 실로 의문입니다. 거
란의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는 말이 거짓말인 것 처럼, 이 막연한 "수십
만 기병" 이라는 표현은 "침략군의 규모가 무서웠다" 는 것 외에 다른 뜻이 아니라고 봅니
다. 이런 식의 과장된 표현은 역사서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니, 더구나 남제로서는
자기 나라에서 일어난 일도 아닌 외국에서 전해들은 사실을 기록한 것 뿐으로 그 신뢰성이
더욱 인정될 수 없습니다.
제 생각에 "수십만 기병" 을 강조하심은 일종의 순환논증이라고 생각됩니다. 다음과 같은 것
이지요.
(1)북위는 해군력이 부족했으므로 수십만 기병이 바다를 건널 수 없다.
(2)그러므로 이 전쟁은 중국에서 일어난 것이다.
(3)중국에서는 당시에 수십만 기병을 동원한 전쟁이 많았다. 그러므로 역시 수십만 기병이라
는 숫자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수십만 기병" 이 과장된 표현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근본 전제자체가 사라져 버리
는 셈입니다. 이 점은 검토해 보셨는지요.
**사실 네이버에 쓰신 글에서는 마치 제가 "북위는 수십만 기병을 육성할 수 없다" 고 쓴
것 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얘기는 전혀 안했습니다. 저는 북위의 "전심전력" 이 백
제로 갔다고는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으니, 제 글의 내용을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백제에
쳐들어간 병력이 수십만이 아닐것이라고 한 것이지요. 방금 순환논증 얘기하면서 지적하였듯
이, 당대에 기병을 동원한 대규모 전투가 자주 있었다고 해서 백제에도 수십만 대군이 가야
하는것은 아닙니다.
역사 공부하면서 너무 상상력 발휘하지 맙시다.
3. 고구려와 백제-신라의 전쟁에 대해서입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481년, 484년,
489년, 494년, 495년에 남쪽으로 침입하였습니다. 그런데 고구려 본기에 나오는 기사는 489
년의 승리 사례 뿐입니다.
481년에는 말갈 병력과 함께 신라에 침입하였다가 신라-백제-가야 연합군에게 패배하였고(신
라본기), 484년에 또 침입하였으나 신라-백제 연합군을 만나 다시 패배하였습니다.(신라본
기) 494년에 신라군사가 살수원에서 패하여 견아성으로 퇴각하였으나, 동성왕이 구원군을 보
내어 고구려군은 후퇴했습니다.(신라본기, 백제본기) 495년에는 백제에 침입하였으나 이번에
는 신라군사가 원병으로 와서 다시 고구려는 실패합니다.(신라본기, 백제본기)
한편 480년 신라 북쪽 변경을 공격하고(신라본기) 482년에 백제의 한산성을 공격한(백제본
기) 것은 말갈로 되어 있으나, 이는 483년 고구려-말갈의 침입 기사에서 보듯이 고구려에 부
용한 말갈 병력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고구려는 480년부터 시작해서 481년, 482년, 484년, 489년, 494년, 495년
에 연달아 남쪽 나라들과 전쟁을 한 셈입니다. 세 본기를 동시에 놓고 보면 비로소 그 진면
목이 드러나는데, 고구려 본기의 기록은 가장 소략하고 그 패배한 일을 제대로 적고 있지 않
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제본기 488년의 북위를 "고구려" 로 본다고 해서 치명적인 흠결이
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삼국사기는 이 사실을 자치통감에서 채록하여 기록했음이 확실한
데,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삼국사기 찬술 당시에 참고한 삼국사의 자체 전승에는 고구려의
488년 침공 기록이 없었음은 물론이거니와 북위의 488년 침공 이야기도 전해지지 않았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고구려 본기에는 "패배한 사실이 기록되지 않은" 현상이 일반적이라 한다면 단순히 이것
은 "고구려가 백제에 침입했다가 패한 사건이 백제 본기에만 기록된 것" 이 될 뿐입니다.
거듭 말씀드리되,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험윤=고구려" 설을 부정하는 논거는
될 수 있을지언정, 이 전쟁이 북위의 영토에서 일어났다는 증거도 될 수 없습니다. 일단 백
제가 그 지역을 차지했다는 기록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씀드린다면, 제 주
장을 반박하신다고 하여 그것이 "백제 산동 점거설" 의 근거로 쓰일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4. 臺船의 臺를 강조하신다고 해서 船을 무시할 수는 없지요. 이 부분은 잘 해주어야 "돈대
와 선박" 이라는 말일 뿐으로, 동성왕의 표문에 나오는 490년 경오년 전역에서 육상전과 해
상전이 동시에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를 통해 보면 마치 목간나가 육군
도 이끌고 수군도 이끈 듯 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백제군의 육-수군 분화 상태가 어땠는지
는 확실하지 않지만, 臺가 船을 수식하는 것으로 보아 樓船의 의미로 보고 목간나는 수군을
이끈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그에 반해 臺의 뒤에 있는 船이 臺를 수
식할 수는 없습니다.
북위가 배로 백제를 침공할 수는 없었으리라 자꾸만 이야기하시지만, 상표문에서 船을 없앨
수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이 문제는, 魏虜가 "수십만 기병" 을 발하여 백제에 쳐들어왔다는
표현이 글자 그대로의 사실은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최소한 "수십만 기병" 과 "배" 가
같이 왔거나, 그 "수십만 기병" 이 "배" 에 타고 왔거나, "수십만 기병" 가운데 일부는 육로
로 오고 일부는 배로 왔던 것이지요. 결국 무언가 대단히 미묘한 내용이 생략되었으리라 생
각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수십만 기병이 왔다고 여기 분명히 쓰여 있지 않으냐? 배로 왔다는 말이 어디있냐?" 하는
비판 자체가 성립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침공군에는 분명히 수군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한편 臺에 대해서는 다른식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상륙한 침략군이 진채를 구축했
을 가능성을 고려해 보셨습니까? 비슷한 뉘앙스의 내용은 님의 글에도 언급이 되어 있으니,
바로 북위군이 항해를 통해 백제로 왔다면 얼마동안은 회복을 위해 쉬고 있었으리라는 대목
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바로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면 진채를 구축해야 하겠지요. 동성
왕의 표문에는 곧장 이긴 사실만 서술되어 있으나, 실상은 몇 몇 성을 빼앗겼느니도 모를 일
입니다.)
저는 이것이 일종의 균형감각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남제서의 어느 부분은 "확실한 사실"
일 것이라 생각하고, 어느 부분은 "대충 적은 것" 이라 생각하려면, 마땅히 무슨 확고한 기
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남제서에 수록된 동성왕의 두번째 표문은 495년에 남제에 도착하였으나, 493년에 북위 문
제가 남제 정벌 계획을 발표하였을 때 올라온 반대 상소 중에는 북위의 위협 세력 가운데 고
구려는 지적되어 있으나 백제는 없습니다. 백제가 수차례나 북위의 지경을 위협하였고 두차
례 이상 북위의 대군을 격파하기까지 했다면 (그것도 490년은 문제 친정 원년이니 더욱 중대
하게 인식되었을텐데 말입니다.)단순한 위협을 넘어 명백한 적성 세력인데 말입니다.
****제가 방어해야 할 입장이 "북위의 해상 침공설" 과 "험윤=고구려설" 의 두개나 되니 대
응하기가 어렵군요. 사실 이런 얘기들은, 저를 비판하기보다는 어떤 것이 타당성이 있는지
공평하게 검토함이 좋을 것입니다. 어차피 기록이 없기는 다 피장파장이니까요. "그건 기록
없지? ㅎㅎ" 하는 말에는 의미가 없어 보이는군요.
첫댓글개인적으로는 대륙에서의 백제와 북위전쟁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병수십만은 과장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며 많아야 수만이겠지요. 또한 수만을 태울 수 있는 선박도 확보하고 있었으 가능성도 큽니다. 그러나 만약 한반도의 백제를 공격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굳이 바다건너 백제를 공격해야 했을까요? 만약 바다건너 백제를 공격했다면 원칙적으로 연안항로를 따라 이동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순순히 길을 내주었을까요? 혹은 2차 고당전쟁과 같이 직접 서해를 가로질러 공격했을까요? 바다를 가로질러 병력을 태워보내려면 선박의 규모가 크고 튼튼해야 합니다.
수나라 이후야 많은 기술자를 데려와 기술이 향상되었지만...-황룡이란 배는 800명까지도 태웠다는군요-그 이전에는 그런 능력이 북위에게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군요. 꼭 산동지역에 백제가 영토를 확보하고 있어야 대륙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남조와 백제의 관계를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여러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고 봅니다.
엄연히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계에 들어갔다, 라는 표현이 존재하니, 남제서를 글자 그대로 읽는다면 백제가 먼저 공격한 전쟁이라고는 할 수는 없겠습니다. 臺船이라는 표현도 이 전쟁에서 선박이 사용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정 북위에게 그럴 능력이 없다면, 그 다음 순서는 위로가 고구려의 오기라고 보는 것이지 산동에서 백제와 북위가 전쟁을 했다고 보는 것은 맨 마지막 차례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측이 자신의 패배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다면 고구려도 남기지 않을 수 있겠지요. (실제로 빠진 것들이 있고요) 남조의 다른 사관들이 백제사를 서술할 때 실수나 다른 이유로 이를 누락시키는 경우가 있다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남아있던 백제측 사료에도 이런 것들이 빠져 있었을 수 있겠지요. (실제로 빠져있었으리라는 점이 제 글에 수박 겉핥기 식으로 지적되어 있습니다...)
그리고,,저번에 SHaw 님이 말씀하시기를 북위가 백제군의 침공이나 반대로 원정에 대한 기록이 남지 않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봤는데 만약에 북위군이 백제군을 남제군으로 착각햇거나 백제군이 사전 합의 하에 남제군으로 위장해서 남제군의 전쟁에 함께 동원된 것이라면 북조 기록에 백제군이 남지 않을 가능성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한단인// 흥미로운 생각이십니다. 그런데 백제가 단발적인 전투에 동원되었다면 몰라도(그럴 가능성이 충분함은 저도 인정하였습니다) 뭔가 거점을 두고 주둔까지 하는 상황이 오래 지속되었으니, 아무래도 북위가 이런 일을 몰랐다고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개별 전쟁의 담당자들은 몰랐다고 해도 말입니다.
저는 백제가 북위를 칠 의사도, 능력도 없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남조와 연계되었다면 북위의 수군 기지에, 후대 발해의 장문휴가 가했던 것 같이 치고 빠지는 공격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몇년씩 주둔하여 북위의 본격적인 침략을 격퇴하기까지 하는건 힘들지 않겠는가... 그런 입장입니다. 사실 남조가 엄청난 지원을 해서 그 거점을 유지시켰다면, 남북조사의 다른 부분에 안 나올 까닭도 없고요.
다른 분들이 구체적인 상황을 재연하지 않으시니 저도 위에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일단 남제와 백제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백제를 불러들인 것입니다.그런데 이 부분에서 예전에 김용만선생님 글을 보며 생각한 것인데, 고구려가 평주를 지배한 것이 아님에도 남조는 고구려의 평주에의 욕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평주의 지배자로 공식인정했다는 점입니다. 연관지어 생각한다면 산동지역에서 전쟁이 일어난 것이었더라도 남제서에 북위가 백제를 정벌했고, 그곳이 백제의 경계였다고 기록한 것이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너무 했던 말 또하는 것 같습니다만)저는 역시 백제와 남제가 연합한 공격이 있었다면 수군 기지에 대한 "우아한" 요격이었을 것 같습니다. 산동의 몇개소를 점거하여 수년간 유지하기까지 했다면(그것도 외국군인 백제군도 참전해서) 남북조 대결에서 실로 중대한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다른 기록에 보이지 않는것은 "좀 빼먹을 수도 있지..." 라고 생각할 도를 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소설 쓰는 분들이 많이 계시니, 저도 마음놓고 한번 써 보겠습니다. 1. 발단... 북위는 남조와 연결되어 세계정복(...)계획을 사사건건 방해하는 백제를 쳐부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바다건너 있는 백제를 공격하러 가려니 좀 어렵다. 2... 제일 좋은것은 고구려와 동맹하여 백제를 무찌르는 것이다. 그러나 마침 고구려는 백제-신라 동맹군과 맞서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다. 고구려의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어서, 대군을 동원하여 백제를 치기도 어렵다. 3. 그래서 제안한다. 북위는 고구려의 연안을 따라 수군을 보내어 백제에 상륙하고, 고구려는 한산쪽에서 공격하여 내려오는 것이다.
4. 이 제안을 받은 고구려는 '무슨 헛소리야' 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북위의 제안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도 곤란하다. 제안은 받아들이되, 북위 수군이 갑자기 돌변하여 고구려에 상륙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많은 병력은 백제쪽으로 진군하지 않고 오히려 비사성과 평양성에 배치된다. 5.... 북위군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고구려 연안을 통과하여 백제에 상륙한다. 그리고 고구려가 한산을 공략할 때 같이 공격하기 위해 진채를 쌓고 대기한다. 아뿔사, 그러나 고구려 병력은 북위가 다른 마음이 없다는걸 확인한 다음, 평양에서 이제 출발했다.
6... 고구려군이 미처 내려오기도 전에 동성왕이 용맹한 장수들을 보내어 북위군에 공격을 가한다. 그들은 숫적으로 우세한 편이었지만 익숙하지도 않은 바닷길에 지친 뒤라 손도 못쓰고 발린다. 7... 동성왕이 전면적인 승리를 거두고, 고구려군은 그 뒤에야 어슬렁 어슬렁 국경 인근에 나타났다가 도망친 북위 병사들로부터 패배 사실을 듣게 되고, 돌아가 버린다. 8... 이 훌륭한 승리를 거두고 동성왕은 남제에 사건 정황을 통보한다. 남제 조정에서는 생각한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위나라 놈들 거 참 고소하다. 낄낄"
저번에도 말씀드린거 같은데,,고구려가 북위의 백제 침공을 과연 용납할까라는 의문이 발생합니다. 북위와 고구려가 관계상에서 동맹적인 관계라곤 해도 그것은 서로의 영역에 대한 개입,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암묵하에 발생한 관계입니다. 기본적으로 양국은 잠재적인 적성국입니다. 따라서 고구려는 자신의 천하에 속한 백제를 북위가 함부로 공격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저 번에 위노지정에 대한 해석이 위노가 백제를 정벌했다라는 표현이 된다라고 하더라도 저번에 했던 토론글에서 북위가 백제와 어떤 이해관계를 가졌어야만 북위의 백제원정이 명분상 가능하다라는 제 말에 의거하면 이 전쟁 이전에 또 한번 백제가 북위의 이해관계에 타격을 주는 행위를 했어야 북위의 전쟁이 발생하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백제가 어떤 뚜렷한 적대 행동을 했는지는 전혀 기록이 없으니... 알 수 없지만 남조를 공격하기 위한 대사업은 수군의 정비 없이는 힘든 것이고, 백제의 해운력(백제가 해군국이었는지는 역시 확실하지 않습니다만..)이 여기에 모종의 차질을 가져오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장수왕의 외교술과 당시 여러 곳에서 어려움에 처해있던 고구려의 군사적 상황으로 보아, 북위가 동맹을 제안했다면 "천하관" 같은 추상적인 이유로 꼭 거부했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모든 글을 똑같이 끝내는게 아닌가 하는 느낌입니마단, 역시 여기까지 가면 상상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군요.
천하관 문제가 아니더라도 북위가 백제를 치기 위해서 해로로 오던지 육로로 오던지 상관없이 고구려의 영역을 통과하는데 동의를 구해야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북위군이 백제 원정을 위해서 영내 진입을 하게 되면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경로에 대한 정보 입수가 가능하고 향후에 군사적으로 실제 이용될 소지가 있습니다. 이것과 직접 연관은 없지만 고구려 장수왕이 북위와 혼인동맹을 맺으려다가 북연과 북위의 고사를 예로 북위가 혼인 행차길을 군사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신하들의 간언에 혼인동맹을 철회한 기사도 있는데 하물며 병력 통과라뇨. 고구려가 용납할리 없습니다.
첫댓글 개인적으로는 대륙에서의 백제와 북위전쟁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병수십만은 과장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며 많아야 수만이겠지요. 또한 수만을 태울 수 있는 선박도 확보하고 있었으 가능성도 큽니다. 그러나 만약 한반도의 백제를 공격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굳이 바다건너 백제를 공격해야 했을까요? 만약 바다건너 백제를 공격했다면 원칙적으로 연안항로를 따라 이동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순순히 길을 내주었을까요? 혹은 2차 고당전쟁과 같이 직접 서해를 가로질러 공격했을까요? 바다를 가로질러 병력을 태워보내려면 선박의 규모가 크고 튼튼해야 합니다.
수나라 이후야 많은 기술자를 데려와 기술이 향상되었지만...-황룡이란 배는 800명까지도 태웠다는군요-그 이전에는 그런 능력이 북위에게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군요. 꼭 산동지역에 백제가 영토를 확보하고 있어야 대륙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남조와 백제의 관계를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여러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고 봅니다.
예전에 어떤 글에는 이런 반론도 있었죠. 중국측 기록은 자신이 패배한 것을 남기지 아니하는 사례가 많다. 북위는 북방민족임에 반해 남조는 본래 중원세력으로서 남조가 북조에 비해 기록이 소흘할 이유가 없다... 등등
엄연히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계에 들어갔다, 라는 표현이 존재하니, 남제서를 글자 그대로 읽는다면 백제가 먼저 공격한 전쟁이라고는 할 수는 없겠습니다. 臺船이라는 표현도 이 전쟁에서 선박이 사용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정 북위에게 그럴 능력이 없다면, 그 다음 순서는 위로가 고구려의 오기라고 보는 것이지 산동에서 백제와 북위가 전쟁을 했다고 보는 것은 맨 마지막 차례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측이 자신의 패배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다면 고구려도 남기지 않을 수 있겠지요. (실제로 빠진 것들이 있고요) 남조의 다른 사관들이 백제사를 서술할 때 실수나 다른 이유로 이를 누락시키는 경우가 있다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남아있던 백제측 사료에도 이런 것들이 빠져 있었을 수 있겠지요. (실제로 빠져있었으리라는 점이 제 글에 수박 겉핥기 식으로 지적되어 있습니다...)
SHaw 님 바로 밑에 김용만 선생님께서 백제의 북위 원정에 대한 건강실록 사료를 언급하셨습니다. 간단한 문구이지만 선박, 돈대에 대한 기준점을 제시할 사료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건강실록은 북위가 백제를 공격해서 깨뜨렸다는 내용으로 해석했는데... 한문 쓰임새상 주어와 목적어를 바꿀수도 있는건가요?
백제에 대한 서술이 있은 후에 魏虜征之大破라고 되어 있습니다. 만약 위노가 백제를 정벌하다 격파당했다라고 한다면 魏虜之征大破라고 해야겠죠.
영명 2년 다음에 바로 위로가 나오고 있으니 위로가 주어이겠지요. 之가 백제 아니겠습니까. "위로가 백제를 정벌하여 대파했다" 는 뜻으로 해석함이 자연스럽지 않은지?
문장 전체를 보시기 바랍니다. 계속 백제에 대한 서술이 주를 이루고 있으니 주어는 위로가 아니라 백제입니다.
아니죠. 魏虜征之인데 어떻게 백제가 주어이겠습니까. 征魏虜大破 라고 나와야 백제가 주어임이 드러나는 거지요. 외국에 대한 열전에는 주로 나라이름 주어가 생략되어 있지만, 이렇게 문장 앞에 다른 주어가 엄연히 나오는 경우에는 그렇게 말 할 수 없습니다.
유원재 교수는 위로를 주어로 보았는데, 백제를 주어로 본 연구는 제가 모르겠습니다. 아시면 알려주십시오.
그리고,,저번에 SHaw 님이 말씀하시기를 북위가 백제군의 침공이나 반대로 원정에 대한 기록이 남지 않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봤는데 만약에 북위군이 백제군을 남제군으로 착각햇거나 백제군이 사전 합의 하에 남제군으로 위장해서 남제군의 전쟁에 함께 동원된 것이라면 북조 기록에 백제군이 남지 않을 가능성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한단인// 흥미로운 생각이십니다. 그런데 백제가 단발적인 전투에 동원되었다면 몰라도(그럴 가능성이 충분함은 저도 인정하였습니다) 뭔가 거점을 두고 주둔까지 하는 상황이 오래 지속되었으니, 아무래도 북위가 이런 일을 몰랐다고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개별 전쟁의 담당자들은 몰랐다고 해도 말입니다.
저는 백제가 북위를 칠 의사도, 능력도 없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남조와 연계되었다면 북위의 수군 기지에, 후대 발해의 장문휴가 가했던 것 같이 치고 빠지는 공격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몇년씩 주둔하여 북위의 본격적인 침략을 격퇴하기까지 하는건 힘들지 않겠는가... 그런 입장입니다. 사실 남조가 엄청난 지원을 해서 그 거점을 유지시켰다면, 남북조사의 다른 부분에 안 나올 까닭도 없고요.
다른 분들이 구체적인 상황을 재연하지 않으시니 저도 위에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일단 남제와 백제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백제를 불러들인 것입니다.그런데 이 부분에서 예전에 김용만선생님 글을 보며 생각한 것인데, 고구려가 평주를 지배한 것이 아님에도 남조는 고구려의 평주에의 욕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평주의 지배자로 공식인정했다는 점입니다. 연관지어 생각한다면 산동지역에서 전쟁이 일어난 것이었더라도 남제서에 북위가 백제를 정벌했고, 그곳이 백제의 경계였다고 기록한 것이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너무 했던 말 또하는 것 같습니다만)저는 역시 백제와 남제가 연합한 공격이 있었다면 수군 기지에 대한 "우아한" 요격이었을 것 같습니다. 산동의 몇개소를 점거하여 수년간 유지하기까지 했다면(그것도 외국군인 백제군도 참전해서) 남북조 대결에서 실로 중대한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다른 기록에 보이지 않는것은 "좀 빼먹을 수도 있지..." 라고 생각할 도를 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동성왕의 책봉직에도 이렇다할 특이점이 없고 말씀입니다.
알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은 문제인데 애초에 얘기를 괜히 꺼냈나 하는 후회도 솔솔 드는군요.
소설 쓰는 분들이 많이 계시니, 저도 마음놓고 한번 써 보겠습니다. 1. 발단... 북위는 남조와 연결되어 세계정복(...)계획을 사사건건 방해하는 백제를 쳐부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바다건너 있는 백제를 공격하러 가려니 좀 어렵다. 2... 제일 좋은것은 고구려와 동맹하여 백제를 무찌르는 것이다. 그러나 마침 고구려는 백제-신라 동맹군과 맞서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다. 고구려의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어서, 대군을 동원하여 백제를 치기도 어렵다. 3. 그래서 제안한다. 북위는 고구려의 연안을 따라 수군을 보내어 백제에 상륙하고, 고구려는 한산쪽에서 공격하여 내려오는 것이다.
4. 이 제안을 받은 고구려는 '무슨 헛소리야' 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북위의 제안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도 곤란하다. 제안은 받아들이되, 북위 수군이 갑자기 돌변하여 고구려에 상륙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많은 병력은 백제쪽으로 진군하지 않고 오히려 비사성과 평양성에 배치된다. 5.... 북위군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고구려 연안을 통과하여 백제에 상륙한다. 그리고 고구려가 한산을 공략할 때 같이 공격하기 위해 진채를 쌓고 대기한다. 아뿔사, 그러나 고구려 병력은 북위가 다른 마음이 없다는걸 확인한 다음, 평양에서 이제 출발했다.
6... 고구려군이 미처 내려오기도 전에 동성왕이 용맹한 장수들을 보내어 북위군에 공격을 가한다. 그들은 숫적으로 우세한 편이었지만 익숙하지도 않은 바닷길에 지친 뒤라 손도 못쓰고 발린다. 7... 동성왕이 전면적인 승리를 거두고, 고구려군은 그 뒤에야 어슬렁 어슬렁 국경 인근에 나타났다가 도망친 북위 병사들로부터 패배 사실을 듣게 되고, 돌아가 버린다. 8... 이 훌륭한 승리를 거두고 동성왕은 남제에 사건 정황을 통보한다. 남제 조정에서는 생각한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위나라 놈들 거 참 고소하다. 낄낄"
오...이것도 괜찮은 시나리오네요. 진짜로...소설로 써도 적당할 듯...^^ 잘 봤습니다.
(으윽.. 웃자고 한 얘기니 저게 제 견해라고는 다들 믿지 말아주세요)
저번에도 말씀드린거 같은데,,고구려가 북위의 백제 침공을 과연 용납할까라는 의문이 발생합니다. 북위와 고구려가 관계상에서 동맹적인 관계라곤 해도 그것은 서로의 영역에 대한 개입,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암묵하에 발생한 관계입니다. 기본적으로 양국은 잠재적인 적성국입니다. 따라서 고구려는 자신의 천하에 속한 백제를 북위가 함부로 공격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저 번에 위노지정에 대한 해석이 위노가 백제를 정벌했다라는 표현이 된다라고 하더라도 저번에 했던 토론글에서 북위가 백제와 어떤 이해관계를 가졌어야만 북위의 백제원정이 명분상 가능하다라는 제 말에 의거하면 이 전쟁 이전에 또 한번 백제가 북위의 이해관계에 타격을 주는 행위를 했어야 북위의 전쟁이 발생하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백제가 어떤 뚜렷한 적대 행동을 했는지는 전혀 기록이 없으니... 알 수 없지만 남조를 공격하기 위한 대사업은 수군의 정비 없이는 힘든 것이고, 백제의 해운력(백제가 해군국이었는지는 역시 확실하지 않습니다만..)이 여기에 모종의 차질을 가져오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장수왕의 외교술과 당시 여러 곳에서 어려움에 처해있던 고구려의 군사적 상황으로 보아, 북위가 동맹을 제안했다면 "천하관" 같은 추상적인 이유로 꼭 거부했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모든 글을 똑같이 끝내는게 아닌가 하는 느낌입니마단, 역시 여기까지 가면 상상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군요.
천하관 문제가 아니더라도 북위가 백제를 치기 위해서 해로로 오던지 육로로 오던지 상관없이 고구려의 영역을 통과하는데 동의를 구해야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북위군이 백제 원정을 위해서 영내 진입을 하게 되면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경로에 대한 정보 입수가 가능하고 향후에 군사적으로 실제 이용될 소지가 있습니다. 이것과 직접 연관은 없지만 고구려 장수왕이 북위와 혼인동맹을 맺으려다가 북연과 북위의 고사를 예로 북위가 혼인 행차길을 군사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신하들의 간언에 혼인동맹을 철회한 기사도 있는데 하물며 병력 통과라뇨. 고구려가 용납할리 없습니다.
연안 항로는 이미 북위인들도 많이 이용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군대의 통과를 허용하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일이지만, 꼭 정보전 차원의 문제는 아닌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