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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31장 1절 ~ 3절
주가 말하노라. 바로 그때에 내가 이스라엘 모든 족속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1)
At the same time, saith the LORD, will I be the God of all the families of Israel, and they shall be my people. 1)
at the same time 바로 그때에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조건적인 구원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무조건적인 구원이라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나 우상숭배 하는 사람이나 무교인 사람이나 모두 구원받아 천국에 가야하는 것입니다.
위 말씀에 나오는 "바로 그때"는 이스라엘이 고난을 거친 후입니다. 이 말씀은 고난을 견디어낸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고난과 축복이 나열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인내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섞여있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보여집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고난과 축복이 함께있는 상황이며, 그 실제 모습은 백신 접종을 인내하여 거부한 사람들과 백신접종을 받은 사람들이 함께 있는 지금 우리의 모습이라고 여겨집니다. 지금 우리는 말씀에 대한 순종과 세상과의 타협중에서 계속 선택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직 우리의 눈앞에 드러나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의 삶이라는 역사로 말씀에 순종만이 유일하게 사는 길임을 우리에게 미리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칼에서 살아남은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얻었나니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려고 간 때니라. 2)
Thus saith the LORD, The people which were left of the sword found grace in the wilderness; even Israel, when I went to cause him to rest. 2)
칼에서 살아남은 백성은 광야에서 은혜를 입은 경우는 모세를 따라 이집트를 탈출한 백성이기도 하고, 예레미야 당시의 바빌론에 끌려갔던 이스라엘이 돌아온 백성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이 말씀을 읽고 있는 이유로 볼때에는 백신접종이라는 칼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로도 여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가지 모든 경우가 모두 광야와 같은 시대에서 은혜를 입고 안식을 얻는 것까지도 닮았습니다.
백신접종을 거부한 사람들은 광야에서 안식을 취하는 모습입니다. 안식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그저 평안입니다. 병원에 가면 첫번째로 묻는 것이 접종 몇회차냐 하는 것입니다. 모든 신체증상의 원인으로 의사들도 코로나 백신을 염두해두고 있는 것입니다. 아파도 원인을 모르는 것처럼 큰 고통이 없습니다. 의료란 약백년간의 삶과 죽음 사이에서 축적된 임상의 혜택인데 완전히 새로운 백신접종하신 분들은 그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파도 백신에 대한 염려를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 광야에서의 평안이라고 느껴집니다.
주께서 옛적에 내게 나타나시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였으므로 내가 자애로 다가섰노라. 3)
The LORD hath appeared of old unto me, saying, Yea, I have loved thee with an everlasting love: therefore with lovingkindness have I drawn thee. 3)
therefore with lovingkindness have I drawn thee.
자애로 다가섰노라 - 말씀보존학회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노라 - 킹제임스 흠정역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 개역개정
다른 역본과 번역이 달라서 언급을 하려고 합니다. drawn은 draw의 과거분사형입니다. 앞에 have가 있는데 I have drawn thee. 가 have I drawn thee.로 쓰인 것처럼도 느껴집니다. 앞에 old와 everlasting이 나오므로 해왔다라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draw 1. (…쪽으로) …을 잡아당기다2. (그릇에서) 퍼내다3. 끌다4. 끌어당기다5. (끌리듯) 움직이다(move, go)
draw의 뜻중에 끌어 당기다라는 의미가 있는데 앞에 예레미야 31장 2절에 나오는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은 역사적인 사건을 연결하여 묘사하는 부분입니다. 출애굽의 역사에서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끌어당기어 은혜를 주셨던 역사를 상기시켜주시는 의미가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어왔다." 라는 번역이 가능합니다. 어왔다라는 번역은 have I drawn thee. 의 과거분사의 의미도 반영해보았습니다. 출애굽과 바빌론에서 이끄심을 모두 포함한 번역입니다.
개역개정이 한자성경에서 다시 한글성경으로 번역된 것인데 킹제임스성경에 매우 가깝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이끄심과 바빌론에서 이스라엘을 이끄심을 표현하는 말씀이며, 이 말씀이 당신에게 읽혀짐은 곧 백신에서 빠져나온 당신도 주의 인자함의 인도함을 입은 것입니다.
옛적부터 그 영원한 사랑을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달리 유한하지 않고 영원하시기에 그의 사랑이 옛적부터 영원까지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의 사랑은 인내의 믿음이 전제된 것임을 잊지 마십시요. 위 말씀만을 본다면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구원으로 오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조건적인 사랑을 사람의 조건적인 사랑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조건적인 사랑은 창조의 속성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빛을 만드시어 빛과 어둠을 나누셨습니다. 빛이 있어서 어둠이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창조는 곧 구분됨입니다.
이를 착각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조건적인 사랑을 사람의 조건적인 사랑으로 생각해서 발생하는 오류입니다. 사람의 조건적인 사랑은 사람이 유한하고 무능하기 때문에 이기적으로 인색한 조건적 사랑입니다. 이는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그의 뜻에 의한 조건적 사랑과는 전혀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무조건적인 부분은 복음을 듣는 기회입니다. 이또한 하나님의 조건적인 사랑의 공의가 담겨있는 부분입니다.
이러한 말씀이 현상으로 증거되어 나타나는 것이 접종자들이 아프고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고통이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주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고 무지하여 그들에게 속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차별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조건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조건이 존재하는 것을 확인하면서도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외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동성애자들이 이런 교회의 오류를 파고들어 동성애라는 죄를 받아들이라고 주장하며, 무조건적인 사랑을 외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오해하는 것은 말씀의 뜻을 잘못해석하여 성경을 거스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이 무조건적이 아닌 이유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은 짐승의 표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장하려면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도 구원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무조건적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에게는 인내와 죄에 대한 절제가 필요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의 열매로 교회만 오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구원은 확보된 것으로 여기고 교회문화생활에 열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열매는 복음의 확장을 내세워 세상과의 타협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세상과의 타협은 죄와의 타협이 됩니다.
위 말씀에 전체적으로 나타나는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포로로 끌려가 죽임당하는 고난 후에 남은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지금의 한국교회가 위 말씀에 부분만을 인용하여 교회만 나오면 다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O 내 백성이 지식의 부족으로 멸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거부하였으므로 나도 또한 너를 거부하리니, 네가 나에게 제사장이 되지 못하리라.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또한 네 자녀를 잊어버리리라.
호세아 4장 6절
그 책임은 목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에게 있습니다. 지식이 없어 멸망하는 것은 결국 그 자신인 것입니다.
그 고통의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가리라. 그 짐승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가 있으며 여기에 하나님의 계명들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있느니라."고 하더라.
요한계시록 14장 11절 12절
짐승의 표를 받고도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장하시렵니까? 무조건적인 사랑에는 인내가 필요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인내가 기록된 말씀으로 존재합니다.
예레미야서의 시대의 사람들에게 짐승의 표를 인내해야할 성도의 인내는 필요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와 당신은 위 말씀에 나타난 성도들의 인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인내는 백신에서 그 모습이 조금 보여졌었습니다. 그 모습은 고립되고. 비난받고, 매도당하고, 폭력의 위협까지 겪어야 했습니다.
짐승의 표도 이와 동일할 것입니다. 백신에서는 질병의 두려움으로 매도되고 위협당하였지만 짐승의 표의 시대는 부정과 비리, 비효율의 원흉으로 낙인 찍히고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백신이 질병이라는 두려움을 사용한 것이므로 질병에 대한 속임수가 끝나면 그 위협이 지속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표는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금융의 무결성을 훼손하는 자들로 매도되어 공격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융시스템이 짐승의 표로 정착이 되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은 그 시스템이 파괴되지 않는 한 고립과 위협을 계속 견디어 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짐승의 표는 모든 금융거래가 생체인식으로 기반으로 투명해지므로 부정은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의 부분을 통하여 나올 것입니다. 짐승의 표는 생체인식기반 치안에 대한 솔루션이 되므로 모든 범죄는 짐승의 표를 거부하는 자들의 부분에서 발생하고 의심받을 것입니다. 또한 백신처럼 생체인식기반 전염병 솔루션으로 모든 전염병의 문제가 짐승의 표를 거부하는 자들의 부분에서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소유자와 소유물의 증거도 문제가 될 것입니다. 지금은 딥페이크와 위조기술이 정교합니다. 그러므로 누가 재산의 소유자인지를 혼란스럽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면 가장 확실한 개인의 DNA나 생체인식을 요구하게 될 것이며, 이 또한 고의적인 해킹사건을 유도하여 결국 생체인증칩이 가장 확실한 수단으로 받아들이도록 조작할 것입니다.
그들이 조장한 해킹위기속에서 짐승의 표를 거부함은 모든 재산과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됩니다. 예금주가 예금을, 건물주가 건물을, 토지주가 토지를 포기해야하는 것입니다.
O 그후 예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
또다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쉬우니라."고 하시더라.
마태복음 19장 23절 24절
당신은 아마도 많은 낙타들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낙타가 될 만큼 부유하지 않음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건물주와 같은 부자들이 건물을 포기하면서까지 짐승의 표를 거부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의 많은 건물주들이 그들의 무지로 그들의 건물의 옥상에 5G 안테나를 이웃을 향해 설치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받는 옥상임대료는 이웃의 건강과 생명의 댓가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웃의 건강과 생명은 자신이 받을 돈보다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 마음이 부자를 바늘앞의 낙타보다 더 크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열둘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도 가려느냐?" 고 하시니
요한복음 6장 67절
열두사도와 우리는 다를 것이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앞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모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서 우리 모두는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대한 애착이 바늘앞의 낙타보다 더 큰 사람들을 목격한 저와 당신에게 예수께서 위 말씀의 질문을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실 것인가요?
우리는 이러한 모든 것을 기한 없이 인내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인내이며, 예수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외치는 교회는 여기에 필요한 인내를 갖추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짐승의 표를 인내하여 거부한 사람들이 받는 인내이후에 하나님의 위로를 인내없이 짐승의 표를 받고도 누리려 해서는 안되고 될 수도 없습니다. 지금도 백신을 거부한 사람들이 누리는 건강에 대한 불확실성이 없음은 백신을 접종한 사람들은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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