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사상계』 67호, 1959.2)
[작품해설]
이 시는 셈세한 뉘앙스를 풍기는 소박하고 평이한 시어와 소곤거리는 듯한 나직한 가락으로 전통적 정한(情恨)의 정서를 노래하고 있다. 특히 ‘-고나’ · ‘것네’와 같은 종결 어미를 사용함으로써 시조와 시를 함께 쓰는 시인다운 말솜씨를 유감없이 보여 주고 있으며, 현대시와 옛 노래 사이의 문체상 단절을 극복하고 여성스런 가락을 창출하고 있다.
화자는 제사를 치르기 위해 큰집이 있는 고향을 찾아가는 길목에서 마을 앞을 흐르는 강을 바라보며 그의 얽힌 어린 시절의 슬픈 추억을 반추하고 있다. 그런데 이로 인해 나타나는 한(恨)의 정서는 단순히 관념화되고 보편화된 정서가 아니라, 사랑의 실패를 겪은 화자의 체험 속에 녹아 있는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시에서 주목되는 것은 화자의 슬픔과 이에 연결되는 물과 불의 이미지이다. ‘서러운’ · ‘눈물’ · ‘울음’ 등의 시어가 전편을 슬픔과 한의 분위기로 이끌어 주며, ‘가을 강’ · ‘눈물’ · ‘산골 물소리’ · ‘바다’로 이어지는 물의 이미지와 ‘가을 햇볕’ · ‘불빛’ · ‘해질녘’으로 연결되는 불의 이미지가 조화롭게 결합되어 나타난다.
한편 이 시의 묘미는 저녁놀이 울음으로 환치되어 있는 데 있다. 저녁놀이 붉게 물들어 가는 ‘가을 강’을 바라보면서, 그 시각적 이미지를 내면의 정서로 끌어들여 ‘울음이 타는’이라는 표현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자연의 정경과 시인의 정서가 하나로 통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녁’은 ‘가을’과 함께 소멸 · 종말의 의미를 지니며, ‘가을’과 ‘놀’은 모든 사라져 가는 것들의 슬픔을 노래하기에 적당한 배경이 된다. 그러므로 인간 본원의 사랑의 슬픔과 고독과 무상함에 대한 한을 지닌 화자의 가슴에 저녁놀은 단순한 저녁놀이 아닌, 울음으로 비쳐지는 것이다. 이처럼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의 결합을 통해 정한의 정서를 더욱 감각적으로 통합시킴으로써 이 시는 우리 서정시의 전통속에서 중요한 시사적 위치를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작가소개]
박재삼(朴在森)
1933년 일본 동경에서 출생하여 경상남도 삼천포에서 성장
고려대학교 국문과 중퇴
1953년 『문예』에 시조 「강물에서」가 추천되어 등단
1955년 『현대문학』에 시 「정적(靜寂)」, 시조 「섭리(攝理)」가 추천되어 등단
1956년 제2회 현대문학 신인상 수상
1967년 문교부 문예상 수상
1977년 제9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82년 제7회 노산문학상 수상
1983년 제10회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1986년 중앙일보 시조대상 수상
1997년 사망
시집 : 『춘향이 마음』(1962), 『햇빛 속에서』(1970), 『천년의 밤』(1975), 『어린것들 옆에서』(1976), 『뜨거운 달』(1979), 『비듣는 가을나무』(1980), 『추억에서』(1983), 『아득하면 되리라』(1984), 『거기 누가 부르는가』(1984), 『간절한 소망』(1985), 『대관령 근처』(1985), 『찬란한 미지수』(1986), 『박재삼시집』(1987), 『사랑이여』(1987), 『가을 바다』(1987), 『바다위 별들이 하는 짓』(1987), 『울음이 타는 가을 강』(1987), 『햇볕에 실린 곡조』(1989), 『해와 달의 궤적』(1990), 『꽃은 푸른 빛을 피하고』(1991), 『허무에 갇혀』(1993), 『나는 아직도』(1994), 『다시 그리움으로』(1996), 『사랑하는 사람을 남기고』(1997), 『박재삼시선집』(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