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5.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문종 인효대왕 2(文宗仁孝大王一)
정미 21년(1067), 송 치평 4년ㆍ요 함옹 3년
○ 봄 정월에 흥왕사(興王寺)가 낙성되니, 2천 8백 칸이며 12년 만에 준공하였다. 왕이 재(齋)를 베풀어서 낙성하려 하니, 각처에서 중들이 모여 들었다. 명하여 계행(戒行)이 있는 자 1천 명을 택하여 법회에 참여하게 하고 이어 늘 머물러 있도록 하였으며, 특히 5일 동안 밤낮으로 연등대회를 개설하였다. 칙령으로 중앙의 모든 관청 및 안서도호부ㆍ개성부(開城府)와 광주(廣州)ㆍ수주(水州 경기 수원(水原))ㆍ양주(楊州)ㆍ동주(東州)ㆍ수주(樹州 경기 평부(平富)) 다섯 고을, 강화(江華)ㆍ장단(長湍) 두 현에게 뜰에서 절 문까지 채붕(綵棚)을 꾸민 것이 즐비하게 서로 뻗쳤으며, 왕의 연(輦)이 지나가는 길 좌우에는 또 등산(燈山)과 화수(火樹)를 만들어 대낮같이 환하게 하였다. 이날 왕이 행렬을 갖추고 백관을 거느리고서 분향하고 재물을 보시하니, 불사의 성대함이 전에 없던 것이었다.
○ 창릉(昌陵)을 배알한 다음 집사에게는 작 1급을 올려주고, 시종한 군사에게는 물품을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
○ 윤달에 동여진 회화장군 잉울(仍蔚) 등 22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 2월에 흥왕사가 낙성되었으므로, 사면령을 내렸다.
○ 제하여 이제부터는 여러 주ㆍ현에서 생선포[魚脯]는 공물로 바치지 말도록 하였다.
○ 3월에 중서령으로 치사한 왕총지(王寵之)가 졸하였다.
○ 제하기를, “고 문하시중 최항(崔沆)ㆍ강감찬(姜邯贊)과 참지정사 김맹(金猛)은 청절(淸節)과 곧은 도로써 여러 조정을 겪으면서 보필한 공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으니, 지금 사방이 평안하여 백성이 그 은혜를 받는 것은 모두 그들의 힘이다. 최항과 강감찬은 수태사 겸중서령을, 맹은 태자태사 문하시중을 증직하여야 하겠다." 하였다.
○ 장원정(長源亭)에 행차하였다.
○ 제하여 삭북(朔北 함경도) 여러 주에 잡곡 4만 9천 4백 석을 배로 실어다가 변경 백성에게 공급하였다.
○ 여름 4월에 관내(關內)와 패서도(浿潟)가 굶주리므로 안란창(安瀾倉)을 풀어서 구제하였다.
○ 5월에 국가 원로에게 합문에서 잔치를 베풀고 의물을 내려주었다.
○ 6월에 제하여 여러 주ㆍ군에서 해마다 공물로 바치는 소의 가죽ㆍ힘줄ㆍ뿔은 값을 쳐서 평포(平布)로 납부하게 하였다.
○ 제하여 안란창의 쌀 2만 7천 6백 9십 석을 배로 실어 삭북으로 운반하여 군수물자에 충당하게 하였다.
○ 가을 9월에 송악정(松岳亭)에 행차하여 술자리를 벌이고 사신(詞臣)에게 시를 짓도록 명하였는데, 평장사 최유선이 지은 시가 가장 뛰어났으므로 말 한 필을 내려주었다.
○ 국사(國師) 해린(海麟)이 늙어서 산중으로 돌아가기를 청하므로 왕이 친히 현화사(玄化寺)에서 전송하고, 차ㆍ약ㆍ금은 그릇ㆍ비단ㆍ보물을 내려주었다.
○ 겨울 12월에 요가 영천관내 관찰사(寧川管內觀察使) 호평(胡平)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 양주(楊州)를 남경 유수관으로 고치고, 이웃 군의 백성을 이주시켜 채웠다.
무신 22년(1068), 송 신종(神宗) 희녕(熙寧) 원년ㆍ요 함옹 4년
○ 봄 정월 초하루 갑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 동여진 귀덕장군 상현(霜鮌) 등이 내조하였다.
○ 최유선을 판상서이부사로, 왕무숭(王懋崇)을 판상서형부사로, 김의진(金義珍)을 판상서병부사로 삼았다.
○ 2월에 탐라 성주 유격장군(游擊將軍) 가야잉(加也仍)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 제하기를, “무릇 후사가 없는 자로서 형이나 동생에게도 양자로 삼을 만한 자식이 없으면, 3세 전에 버려진 남의 아이를 거두어 길러서 자식으로 삼아 즉시 그 성을 따르게 하여 호(戶)를 잇고 호적에 붙이는 것은 이미 정해진 법이 있다. 자손이나 또는 형제의 자식이 있으면서 성이 다른 아이를 거둬 기르는 것은 일체 금한다." 하였다.
○ 3월에 제하여 지난해 서울 북쪽 여러 군ㆍ현에 가을 농사가 흉년이 들어서 굶주리는 백성이 많으니, 창고를 풀어서 구제하였다.
○ 여름 4월에 최상(崔尙)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삼았다.
○ 최인(崔絪) 등 17명과 명경 2명, 은사 1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5월에 제하기를, “봄부터 여름까지 제때 비가 내리지 않았고 더위가 심하여 농작물이 타 들어가 말랐는데, 이것은 대개 과인의 덕이 박하여 이런 재앙을 불러들인 것이다. 몸을 조심하여 하늘의 꾸지람에 응답하기를 생각하니, 오늘부터 내외의 잡범과 공죄로 귀양간 자, 사죄로 도형을 받은 자 이하는 모두 용서하라." 하였다.
○ 6월에 동여진 귀덕장군 안구(安矩) 등이 내조하였다.
○ 동계 병마판관 임희열(任希悅) 등이 초도(椒島)를 순시하다가 적선 10척과 만나 싸워서 격파하여 7척을 노획하고, 사로잡거나 베어 죽인 것이 매우 많았다. 왕이 가상히 여겨 희열 등에게 의대를 내려주고, 공이 있는 여러 사람에게 모두 작상을 올려 주었다.
○ 제하여 형제나 손자 항렬을 양자로 삼는 것을 금하였다.
○ 가을 7월에 송 나라 사람 황신(黃愼)이 왔다. 송 나라 황제가 강회 양절 형호남북로 도대제치발운사(江淮兩浙荊湖南北路都大制置發運使) 나증(羅拯)을 불러서 이르기를, “고려는 옛날부터 군자의 나라라고 일컬어졌으며, 조종 때부터 매우 정성스럽게 우리를 섬겼는데, 그 뒤에 막힌 지가 오래되었다. 이제 듣건대, 그 나라의 군주가 어진 왕이라고 하니, 사람을 보내어 효유(曉諭)하여야 하겠다." 하니, 이에 나증이 아뢰어서 황신 등을 보내와 천자의 뜻을 전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객사에서 아주 후하게 대접하였다.
○ 송 나라 상인 임녕(林寧)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 동계 병마판관 임희열 등이 또 초도를 순시하다가 밤에 염라포(閻羅浦)에서 적선 8척과 만나 공격하여 3척을 깨뜨리니, 남은 적이 해안으로 달아나므로 뒤쫓아서 30여 급을 베었다. 왕이 작상을 후하게 더해 주었다.
○ 8월에 태자에게 명하여 송 나라 진사 신수(愼修)ㆍ진잠고(陳潛古)ㆍ저원빈(儲元賓) 등을 불러 옥촉정(玉燭亭)에서 시와 부를 시험하게 하였다.
○ 강원광(姜源廣)을 어사대부로 삼았다.
○ 9월에 수태사 중서령으로 치사한 최충(崔冲)이 졸하였다. 충은 해주 대녕군(大寧郡) 사람인데, 풍채가 훌륭하고 성품과 행실이 곧고 굳으며,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잘 지었다. 목종조에 갑과 1등으로 뽑혀서 4대의 조정을 거치며 벼슬하였고, 자질이 문무를 겸하여서 나가서는 장수로 들어와서는 정승이 되었다가 나이 70세에 이르러서 물러나기를 청하니, 왕이 그의 뜻을 어기기 어려워 특별히 윤허하였으나, 군사상 큰 일은 모두 자문하였다. 여러 차례로 추충(推忠)ㆍ찬도(贊道)ㆍ좌리(佐理)ㆍ동덕(同德)ㆍ홍문(弘文)ㆍ의유(懿儒)ㆍ보정(保定)ㆍ강제(康濟)라는 공신의 호칭을 더해주었다. 현종이 중흥한 뒤로 전쟁이 겨우 멈추어 문교(文敎)에 겨를이 없었는데, 충이 후진들을 불러 모아서 가르치기를 부지런히 하니, 여러 학생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드디어 낙성(樂聖)ㆍ대중(大中)ㆍ성명(誠明)ㆍ경업(敬業)ㆍ조도(造道)ㆍ솔성(率性)ㆍ진덕(進德)ㆍ대화(大和)ㆍ대빙(待聘)이라는 9재(齋)로 나누었는데, 시중최공도(侍中崔公徒)라고 일렀으며, 무릇 과거를 보려는 자는 반드시 먼저 그 도(徒)에 들어가서 배웠다. 해마다 더운 철이면 귀법사(歸法寺)의 승방(僧房)을 빌려서 여름 공부[夏課]를 하며, 도 가운데 급제한 자로 학문은 우수하면서 벼슬하지 않은 자를 골라 교도(敎導)로 삼아 구경(九經)과 삼사(三史)를 가르치게 하였다. 간혹 선진(先進 먼저 과거에 오른 사람)이 오면 촛불에 금을 그어 시한을 정하고 시를 짓게 하여 글의 등급 차례로 이름을 불러들여서 작은 술자리를 베푸는데, 아이와 어른이 좌우에 벌여 서서 술과 안주를 받들어 진퇴의 예의가 있으며, 장유(長幼)의 질서가 있어 종일토록 수작하니, 보는 자가 아름답게 여기고 찬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때에 와서 충이 졸하니, 태의감(太醫監) 이염(李鹽)에게 조서를 가지고 가게 하여서 조위(弔慰)하고 시호를 문헌(文憲)이라 하였으며, 정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그 뒤에도 과거를 보려는 사람이 모두 9재에 적(籍)을 두니, 문헌공도(文憲公徒)라고 하였다. 또 유신(儒臣) 중에 도(徒)를 둔 자가 11명이 있어 세상에서 12도라고 일컬었으나 충의 도가 가장 성하였다. 동방에 학교가 일어난 것은 대개 최충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당시에 그를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하였다.
○ 겨울 10월에 동여진 회화장군 아린(阿隣) 등이 내조하였다.
○ 12월에 요가 익주관내 관찰사(益州管內觀察使) 위성(魏成)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 상서좌복야 왕현(王顯)이 세 차례나 글을 올려서 노퇴(老退)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 남경(南京 한양)에 새 궁전을 창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