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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묘실상선원 원문보기 글쓴이: 미월
9. 해인삼매세력고海印三昧勢力故
일출 촬영
동해 바다는
팔이 저리도록 잠에 안긴다.
희붐하게 다가선
금시 삶의 주제는 갈매기 영상이다.
희노애락이 동분서주 날개짓하고
해인 海印 은 사각 앵글에서 출렁인다.
기다려 달려온
천만년 대일여래 大日如來 가
겨울에 대한 예의를 차리지 않은 찬 손을
깊은 품에 끌어당긴다.
바다와 갈매기
그리하여 금빛 일출이다.
‘해인삼매세력고’는 앞의 ‘근본화엄전법륜’과 한 구절을 이루는 것으로 ‘근본화엄으로 법륜을 굴리는 것은 해인삼매의 다함 없는 힘 때문’이라는 완전한 한 문장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세력勢力
세력이란 힘을 말합니다. 살아가면서 힘이 없다면 아무런 용맹이 없습니다. 흔히 노인들이 어떤 일로 섭섭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들면 늙고 힘이 없어서 그렇다고들 하지요.
한 번은 스님 셋이서 울릉도에 갔는데 성인봉을 오르다가 비를 만나서 우의를 입게 되었어요. 승복 위에 우의를 걸쳐 입고 모자까지 푹 눌러썼더니 아무도 우리가 스님인지를 몰라봤어요. 그렇게 성인봉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마을로 내려오니 날이 개었어요. 그래도 우의를 입은 채로 마을에 있는 상점을 돌아보는데 어느 상점 앞에 팔뚝만 한 더덕이 진열되어 있는 것입니다. 스님들이 하도 신기하여 보고 있으니 젊어 보이는 주인 남자가 몸에 아주 좋다며 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디에 그렇게 좋은지를 물어봤더니 이 남자가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더니 “죽여줍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더덕이 진짜 힘이 있다는 거지요. 그 말이 너무 우스워 한바탕 웃었더니 그 사람은 우리가 스님인 줄도 모르고, “아저씨들, 웃을 일이 아닙니다. 힘이 있어야지요!”
힘!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힘이 있어야 합니다. 국가도 그렇고 종교도 그렇고 개인도 그렇습니다. 국력이 없으면 설움을 받습니다. 티베트가 저렇게 짓밟히면서도 꼼짝을 못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힘이 없어서지요. 멀리 갈 것도 없이 일본이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생떼를 부리고 있어요. 왜 그렇겠습니까? 우리나라가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싸움은 상대가 약해 보이기 때문에 덤비는 것 아니겠습니까. 미국과의 소고기 협상 때에도 왜 순순히 도장을 찍어 줬겠습니까? 강대국의 협박에 못 이겨 찍어 준 것 아니겠습니까?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혼란을 겪었습니까? 모든 게 다 힘이 없어서 생기는 일입니다.
힘이란 자존력自存力
올해 단기로 4342년입니다. 4342년 동안 외침이 931번 있었습니다. 약 4~5년마다 전쟁을 한 번씩 치른 셈입니다. 우리나라가 힘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때마다 난국을 잘 이겨 지금에 이르렀지만 만약 나라를 잃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국력을 잃으면 우리가 설 땅을 잃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국가도 힘이 있어야 합니다. 세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힘을 갖추어야 합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종교편향이 도를 넘었다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국토해양부에서 서울지도를 새로 제작하면서 골목골목마다 있는 교회는 전세교회까지 다 표기하면서 대한불교조계종의 직할교구 본사로서 서울을 대표하는 조계사나 봉은사 같은 도심 사찰은 모두 누락 시켜놓았어요. 왜 그랬겠습니까? 총무원은 우리 대한불교조계종뿐만 아니라 한국불교 전체를 관리하는 집행부입니다. 현재 총무원의 수장인 총무원장님은 ‘지’자, ‘관’자를 쓰고 계신 지관 큰스님입니다. 촛불집회와 관련해 총무원장 큰스님께 했던 몰상식한 행위에서는 대한불교조계종과 불교계의 전체의 행정책임을 맡고 있는 최고 어른에 대한 예우와 존중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이웃종교의 교만은 극에 달했습니다. 불교의 나태가 그들의 교만을 키웠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힘을 키워야 합니다. 불교는 대해大海와 같다하였습니다. 이웃의 허물도 감싸 안을 수 있는 대자비의 힘을 길러야 합니다.
개인도 힘이 있어야 합니다.
개인에게도 여러 종류의 힘이 있습니다. 첫째 육체적인 힘, 둘째 물질적인 힘, 셋째 의욕적인 힘, 넷째 삼매적인 힘이 있습니다. 육체적인 힘이라고 하는 것은 건강, 체력을 말하고 물질적인 힘은 경제력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의욕적인 힘이란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의 힘을 말합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힘을 못 갖추고 있으면 살면서 무시당하는 등 불이익을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삼매적인 힘은 전혀 다른 차원의 힘입니다. 삼매적인 힘, 삼매적인 세력은 선정의 힘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나아가 선정禪定에 의해 반야지혜가 드러나기 때문에 반야의 힘이라고도 합니다. 그 속에 들어있는 내면의 힘은 가히 알 길이 없어요. 매우 깊고 미묘하여 불가사의합니다. 삼매적인 힘을 획득하려면 참선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힘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삼매적인 힘으로, 가장 으뜸이며 앞에 언급된 힘들을 모두 수용하는 공덕을 지니고 있습니다.
해인삼매의 세력이란 전천후적인 삼매의 세력입니다. 바로 완벽하고 총체적인 삼매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삼매의 세력만 있으면 다른 세력들은 저절로 갖추어질 수 있습니다.
해인삼매, 화엄삼매로 꽃피다
해인삼매가 일체만상一切萬象의 실상을 비춘 세계라면 화엄삼매란 현실의 삶에서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행위로 나타납니다. 즉 비로자나의 세계인 해인삼매를 현실의 삶에 구현하고 부처님 세계, 정토세계를 이루기 위해 중생교화를 향한 자비의 대의지가 화엄삼매인 것입니다.
부처님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를 떠나 따로 존재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그래서 불교는 현재적 Present이고, 긍정적 Positive이고, 인간적 Personal이며, 대중적 Popular인 종교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해인삼매가 현실적 삶에 적용되어 화엄삼매로 꽃 피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불교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동시에 불교의 특징이기도 하여 ‘불교는 4P의 종교이다.’라는 정의를 내려 봅니다. 다음은 그것을 한 눈에 알아보고
이해하기 쉽도록 도식화 해놓은 것입니다.
1. Present, 현재적
覺 각 → 主人公 주인공
隨處作主 수처작주 立處皆眞 입처개진
2. Positive, 긍정적
佛性 불성 → 自性佛 자성불
無位眞人 무위진인
3. Personal, 인간적
緣起 연기 → 道透京 도투경
天地與我同根 천지여아동근
萬物與我一體 만물여아일체
4. Popular, 대중적
淨土 정토 → 拈花微笑 염화미소
常樂我淨 상락아정
불교는 현재적, Present 종교
불교는 각覺, 깨달음을 말하기 때문에 현재적 종교입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현재’ 깨어 있음을 말합니다. 현재 나는 깨어있는가? 주인공은 성성한가? 이런 것을 늘 살피면서 우리는 언제나 깨어있어야 합니다.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隨處作主 수처작주 立處皆眞 입처개진
이르는 곳마다 주인 됨을 지으니 서 있는 곳이 다 참됨이더라.
의과대학 교수가 자신의 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의사가 되려면 대담하기도 하고 세심하기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환자를 치료하고 보호해야 할 입장에서 큰 불상사를 낼 수도 있다.”
그런 후 교수는 환자의 소변을 받아놓은 통에 손가락을 넣었다가 다시 손가락을 입에 넣으며 학생들 모두 자신을 따라 하게 시켰습니다. 그 모습을 본 학생들은 구토를 하고 난리가 났어요. 그러자 교수가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정신을 바짝 차리라고 하지 않았나! 소변 통에 집어넣은 손가락은 두 번째 손가락이었고 내 입에 들어간 손가락은 세 번째 손가락이라네.”
언제나 의식이 또렷하게 살아있어야 합니다. 끝까지 지켜볼 줄 알아야 합니다. 똑같은 현재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재가 중요한 겁니다.
우리절(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 하늘법당에서 찍은 연꽃 사진을 ‘연꽃과 부처님의 만남’이라는 이름으로 갤러리와 하늘법당, 각 전각 계단마다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좋은 사진을 얻기 위해 수많은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연꽃을 찍는데도 찍을 때마다 사진이 달라져요. 왜 그렇겠어요? 그것은 하늘이 움직이고 땅이 움직이고 사람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움직인다는 그 자체가 아주 중요합니다. 움직임을 주시하며 그것이 포착되는 순간 그 생명력을 담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간순간의 생명력이 다르기 때문에 찍을 때마다 사진이 달라지며 현재만을 기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는 현재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깨어있어야 합니다.
깨어있기만 하면 순간순간이 거룩합니다. 화두 챙기는 것도 그렇습니다. ‘시심마’ ‘이뭣고’를 하면서 한순간 한순간 의식이 또렷해야 합니다. 현재 의식이 또렷하게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각覺, 깨어있음, 알아차림입니다. 관세음보살을 외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순간이라도 관세음보살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순간순간을 잘 챙기라는 말과 같습니다. 현재 이 순간의 삶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등부 수련회 때 학생들에게 물었어요.
“기독교 믿는 친구들은 왜 교회에 가는 것 같습니까?”
“죽어서 천당 가려고 갑니다.”
사실, 그것이 가장 정확한 답입니다. 그러한 종교를 희구태希求態 종교라 합니다. 사후死後를 더 중요시하여 나중에 죽어서 좋은 데 가기 위해 바라고 구하는 종교 형태지요.
그런데 우리 불교는 이미 돌아가신 분에게는 후손된 도리로 공덕을 쌓고 극락왕생을 위해 지극정성을 다 하지만 살아있는 동안에는 사후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지지 않습니다. 현재를 열심히 살면 될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마음공부 하고 진리를 터득해서 불교적 삶을 살면, 현재 속에 재미가 있고 삶의 큰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현재의 진리적인 삶을 추구하는 종교형태를 체주태諦住態라고 합니다. 어느 종교에서는 ‘내 탓’이라고 하는데 네 탓, 내 탓 할 것 없이 현재 열심히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지만 이는 관념적인 시간 개념일 뿐 지금, 바로 여기를 사는 것이 불교입니다.
부처님 10대 제자 가운데 우바리존자는 카스트계급 중 가장 천한 수드라 출신의 궁중 이발사였어요.
부처님께서는 천민 우바리가 제자로서 타의 모범이 되는 행동을 하는 것을 보시고 과거의 직업이나
과거의 흔적이 문제가 아니라 현재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인생의 위치가 달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재의 생각과 행동이 중요한 것입니다. 부처님도 사람의 운명은 과거가 아닌 현재의 생각과 행동에
의해 좌우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도의 고질적인 계급제인 카스트 제도를 혁파하신 것입니다.
현재 깨어있기를 주문하고 있습니다. 현재가 중요하니 정신을 늘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정신없는 간호사가 있었어요. 환자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데 무슨 일인지 막 흔들어 깨우는 것입니다.
“빨리 일어나세요. 지금 수면제 먹을 시간이에요. 수면제 먹고 주무셔야 합니다.”
깊은 잠에 빠진 불면증 환자를 깨워 수면제를 먹이려고 하니 정신없는 간호사지요.
지금 내 정신이 어느 정도 깨어있는지를 자주 점검해야 합니다. 그래서 정신 차리고 사는 삶, 주인공으로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언제나 깨어있기 위해서 참선하고 기도하면 반드시 늘 깨어있는 현재적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불교는 긍정적, Positive 종교
불교는 현재적 Present이면서 긍정적인 Positive 종교입니다. 불성佛性의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에 긍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존재에는 불성이 깃들어 있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불성은 바로 존재의 끝없는 긍정을 뜻합니다. 부처님 성품이 있으므로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긍정성을 심어 주는 것입니다. 이때 성품이란 지혜와 자비를 말합니다. 모든 존재가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희망적인 존재이므로 불교는 대단히 희망적인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불교는 인간이 갖고 있는 불성이라는 희망에서 출발하고, 이웃 종교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죄인이라는 데서 출발합니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죄인이므로 그 후손인 인류도 원죄를 가진 죄인이라고 규정짓고 있습니다. 간절한 열망이 꿈을 이루게 하는 긍정적인 자기 암시가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피그말리온 효과Pigmalion Effect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불교는 모든 인간이 불성을 갖고 있고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희망을 부여해 주고 있습니다. 희망, 이것이 세상 살맛나게 하는 것 아닙니까!
지금도 아프리카 대륙에는 끊임없는 내전 등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나라가 많이 있습니다. 그들을 돕기 위한 구호물자 중에 씨앗이 있었는데 그 양이 워낙 적어서 일부 지역에만 나눠주게 되었어요. 씨앗을 심긴 했지만 땅이 워낙 척박하여 거둘 게 별로 없을 것이 분명했어요. 그런데 몇 개월 지난 후 씨앗을 받지 않은 지역의 사람들보다 씨앗을 받은 지역사람들의 생존율이 훨씬 높게 나타났습니다. 그 척박한 땅에 심은 씨앗이 그 지역사람들에게 희망으로 작용한 것이지요.
희망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지요? 희망은 곧 생명력입니다. 집착해서는 안 되지만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긍정성을 띠는 불교를 믿고 있는 불자답게 우리의 마음은 항상 긍정적이어야 합니다. 과거 한때 얼룩진 그림자 때문에 또 다른 종류의 족쇄로 자신을 가둘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불교는 우리 모두에게 자성불自性佛이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고 합니다. 무위無位는 위치가 없다는 뜻으로 복잡하게 설명할 것 없이 ‘절대적’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존재가 다 절대적인 참사람으로서 자성불을 소유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모든 상대의 존재와 가치를 중히 여기고 그들의 삶도 긍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보살의 정신입니다.
인간관계에는 마법의 비율이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부정적인 메시지와 긍정적인 메시지가 5:1의 비율을 보이면 그 사이는 금이 가게 되어 있다 합니다. 반대로 행복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긍정적인 에너지를 다섯 배 이상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법의 비율, 즉 5:1의 비율입니다. 살면서 타인의 잘못을 나무랄 수도 있고 핀잔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정적 에너지입니다. 반면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은 긍정적 에너지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많은 관계를 맺고 살면서 긍정적 에너지인 칭찬과 격려의 말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700쌍의 부부를 대상으로 워싱턴대학의 심리학자인 존 고트만이 연구한 내용으로 상당히 설득력이 있고 수긍이 가는 내용입니다.
아이를 한번 꾸짖었다면 다섯 번은 칭찬을 해 주어야 합니다. 서너 번 질책하면서 칭찬을 하지 않으면 그 아이는 용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다섯 번 이상 칭찬하고 격려하며 긍정적인 에너지를 보내주라는 것입니다.
아이가 성적표를 받아왔는데 딱 한 과목만 ‘양’이고 전부 ‘가’였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얘야 한 과목에만 치중하지 마라.”
아이도 생각이 있었던지, 공부하는 태도에 변화를 보이며 성적이 점차로 오르게 되었어요. 어머니의 지혜로운 말 한마디가 아이를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긍정성을 심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불교는 바로 그런 좋은 에너지를 가진 긍정적인 Positive 종교입니다
불교는 인간적인, Personal 종교
불교는 인간적인 Personal 종교입니다. 연기緣起의 도리가 바로 우리의 삶,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연기란 인연 되어 일어난 관계성, 상관성을 말합니다. 일체의 만물이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끝없는 연기의 작용을 하고 있으니 바로 중중무진연기입니다. 중첩되고 중첩되고 또 중첩된 인연의 결과, 그것이 바로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 속에는 수 만대代에 걸친 조상과 공기, 물, 햇빛 등 세상 만물의 에너지가 고성능 칩처럼 내장되어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이 모든 시공간의 축이 되는 관계성 속에서 직접적으로 시공간과 연기되어, 천지와 같이 하고 모든 만물과 같이 하기 때문입니다.
天地與我同根 천지여아동근
萬物與我一體 만물여아일체
천지는 나와 더불어 한 뿌리요,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한 몸이라.
방생은 그 자체로 대단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적극적인 선善의 실천으로서 우리가 인연 맺고 살고 있는 것에 대한 인간적인 행위입니다. 이웃종교에서는 동식물을 인간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함부로 다루지만, 불교는 온갖 만물을 불성佛性을 가진 존재로 이해하고 그 개개의 가치를 존중합니다. 중중무진연기의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자연과 자연이 모두 중첩된 인연의 관계성을 생각한다면, 자연이라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불교는 또한 자통지법自通之法의 종교입니다.
타인을 자신한테 견주어 좋다고 생각되는 것만 해야 합니다. 그 반대의 경우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교는 연기법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우리는 연기의 진리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49재를 지내고, 백중에 조상 천도재를 지내는 정도는 인연법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인간성의 최소행위입니다. 부모 없는 자식이 어디 있습니까? 자신의 내면에 윗대 조상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의 피가 흐르고 있잖아요. 조상에 지극정성을 다하는 것은 바로 수많은 인연으로 이루어진 나의 생명의 근본에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참으로 도리에 합당하고 인간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조상 섬기는 일을 마지못해 하거나 그 일이 싫어 다른 종교를 찾아간다는 것은 인연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道透京 도투경, 길은 서울과 다 연결되어있다.
모든 길은 다 연결 되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드라망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연기되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모든 존재가 시간적, 공간적으로 모두 연기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더욱 인간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전쟁에서는 아군과 적군뿐, 어쩔 수 없이 서로 죽여야 하는 상황에 처해집니다. 6·25 전쟁 중에 월북한 사람과 월남한 사람이 뒤섞여 전쟁을 하다보니 자신의 핏줄을 죽이는 일도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택시 기사와 승객이 요금 문제로 시비가 붙어 싸우다가 그만 한 사람의 이가 부러지는 일이 생겨버렸어요. 그래서 경찰서에 가서 그 경위를 조사하면서 신분을
조회하던 중 그 두 사람이 6·25때 헤어진 형제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합니다.
우리는 남남인 것 같이 살지만 알고 보면 모두 인연되어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 같아 보이지만 사실 남이 아닙니다. 그것이 중중무진연기의 도리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뿐 아니라
사건과 사건, 행동과 행동의 관련성 등 세상의 모든 것은 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결혼을 앞둔 딸이 이것저것 자꾸 간섭하던 어머니와 다투게 되었어요.
“어머니, 이건 제 결혼이지 어머니 결혼이 아니잖아요. 어머니는 25년 전에 결혼해 놓고 왜 제 결혼을
어머니 맘대로 하시려는 거예요?”
화를 내는 딸에게 하는 어머니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25년 전에 한 결혼식은 네 외할머니 결혼식이었다.”
바로 이런 것도 다 연관성이 있는 겁니다. 자신의 어머니한테 받은 그대로 딸한테 한 것이지요.
모든 것이 다 연기적 관계로 나의 행동이 남의 행동과도 관련성이 있는 것입니다.
군에 간 김일병이 몇 개월 만에 애인이 보낸 편지를 받고 한껏 기대에 부풀어 급하게 편지를
개봉했습니다.
“오빠, 오빠가 군에 간 뒤에 고무신 거꾸로 신었어요. 과거에 있었던 일은 추억으로 생각하고 내가 보낸
편지, 사진 다 돌려줘요.”
열 받은 김일병, 군 내무반에 있는 동료의 애인 사진 30장을 모아 함께 넣어 이렇게 답장을 보냈어요.
“이 많은 애인 중에 나는 네가 누군지 기억이 안 난다. 이 가운데서 네 사진만 빼고 다 돌려다오.”
이것도 다 연기의 도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연기적 입장에서 봤을 때 따뜻한 인간성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나 아닌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남편을 낳아준 시부모에게도 잘하고, 남편이 좀 늦더라도 이해하고 따뜻하게 맞아주고, 또 출근할 때도 잘 배웅하며 사랑과 관심을 늘 표해야 합니다. 보험 회사에서 낸 통계에 그렇게 사는 남편이 실제 5년을 더 산다고 합니다. 이는 아내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겠지요.
불교는 바로 연기의 종교요, 그래서 저마다 나와 같은 소중한 존재이므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라고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연기는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우주의 진리, 바로 그 자체입니다.
불교는 대중적, Popular 종교
불교는 대중적 Popular 종교입니다. 정토淨土를 노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토란 ‘깨끗한 땅’, ‘지극히 행복한 공동체의 공간’을 뜻합니다. 혼자만의 해탈이 아니라 다 함께 손잡고 정토세계를 일구자는 메시지입니다. 이 세상 이대로 극락정토를 만들어야 한다, 죽어서는 너무 멀다, 지금 현재 여기에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현실적이고 대중적입니까? 우리는 이 시간 이대로 불국정토, 극락정토를 만들자는 불교가 얼마나 대중적이며 수승
한 종교인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웃종교에서는 그 종교를 믿지 않으면 무조건 지옥에 간다고 합니다. 우리 불교는 그런 배타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비록 지옥 중생일지라도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구제하겠다는 자비의 종교입니다. 함께 잘 살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중적인 종교, 정토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많은 대중 앞에서 법문을 하시다가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셨습니다. 그때 마하가섭이 미소로 화답합니다. 바로 탁트인 시원한 세계가 펼쳐집니다. 무언無言의 진리가 전해지는 행복하고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부처님께서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시자 마하가섭이 미소를 지어 답한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세계, 그곳이 바로 극락입니다. 거기가 다름 아닌
정토입니다.
拈華微笑 염화미소
부처님께서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자 가섭이 빙그레 웃더라.
최상의 행복이 있는 곳, 최상의 아름다운 땅, 정토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같이 공부하고, 같이 기도하고, 같이 참선수행하고, 같이 봉사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참으로 복된 시간이며 복된 공간입니다. 함께하는 그 시간과 그 공간이 바로 정토요, 극락인 것입니다. 그 안에는 분별과 다툼이 없어 화목을 이룹니다.
우리는 얼마나 화합하고 있습니까? 화합하고 화목하다면 말 그대로 대승大乘입니다. 우리 불자는 이렇게 화목하고 화합된 공간을 계속해서 확대시켜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포교와 함께 국내외 분원도량을 세우는 것입니다.
세속과 사찰의 경계를 이루는 일주문一柱門에서 천왕문天王門, 불이문不二門을 통과하면 부처님의 세계에 든다 하였습니다. 그곳은 저 바깥세상과는 달리 부처님 법法만이 살아 숨 쉬는 청정무구淸淨無垢의 ‘절대행복지역’입니다. 바로 그 행복감이 상락아정常樂我淨입니다.
부처님 법을 공부하려고 절을 찾은 우리는 이미 정토의 맛, 상락아정의 즐거움을 즐기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더 많은 사람이 그 즐거움과 참 맛을 볼 수 있도록 성의를 보이고 배려를 해야 합니다.
늘 새벽 3시에 들어오는 남편이 있었어요. 말없이 지켜보던 아내가 더는 못 봐주겠던지 들어오는 남편의 턱밑에 얼굴을 들이대고 따져 물었어요.
“당신은 왜 꼭 3시가 돼야 들어오는 거예요?”
“이 시간에 문 열어 놓는 데가 여기 말고 또 어디 있겠소.”
더는 갈 데 없어서 집에 왔다는 말이지요.
이런 이유이든 저런 이유이든 부처님 세계, 정토세계에 들어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토는 반드시 대중성을 요구합니다. 함께 가면서 너와 내가 고루 잘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서로 돕고, 서로 이해하고, 서로 화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토세계를 꿈꾸고 한 푼의 시주금이나마 마음을 보태어 일구어 놓은 이 공간에, 많은 사람이 모여 정토세계에 감사드리고 열심히 기도하고 공부하니 얼마나 대중적이고 좋은 일입니까? 혼자서 저 바위 밑에 가서 촛불 켜고 기도했다면 이런 공간을 마련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정토로 바꾸려면 늘 대중적으로 같이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혹시 어렵고 소외된 이웃이 있으면 그 속에 들어가서 이웃을 보살피고 구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보살행을 해야 합니다.
아들 셋을 둔 아버지가 양 17마리를 남겨두고 죽으면서 유언을 했습니다.
“큰아들아, 맏이인 너에게는 살림의 반을 주겠다. 그러니 양의 2분의 1을 가져라. 그리고 둘째 아들은 양의 3분의 1을 갖고, 셋째 너는 양의 9분의 1을 가져라. 하지만 절대 양을 죽여서는 안 된다. 반드시 산 채로 나누어야 한다.”
형제들은 양 17마리를 가지고 비율대로 나누려고 하니 문제가 생겨 싸움이 붙게 되었어요.
그때 이웃에 살던 어떤 착한 사람이 그 이야기를 듣고 싸움을 해결해주려고 자기가 키우고 있던 양 한 마리를 그 형제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니 양이 모두 18마리가 됐겠지요. 그래서 큰아들이 반을 챙겨 9마리를, 둘째 아들은 3분의 1을 챙겨 6마리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아들은 9분의 1인 2마리를 가져갔어요. 아들들이 가져간 양이 모두 몇 마리입니까? 17마리지요. 다 나누고 나니 한 마리가 남았어요. 그래서 형제는 일이 잘 해결된 것을 감사하며 남은 한 마리에 각자 한 마리씩 보태 모두 4마리를 그 이웃 사람에게 주었습니다.대중적이란 이런 재미가 있는 것입니다.
누구를 도와준다는 것은 사실 즐거움을 낳는 일입니다. 당장은 손해 보는 것 같지만 그것이 복전福田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 사심 없이 도와줬더니 자신은 아무런 손해 본 것도 없고 오히려 양 세 마리를 더 얻게 된 거지요.
이것이 세상사는 이치입니다. 대중적으로 사는 것이 제일 잘 사는 것입니다. 대중적으로 행복한 세상을 정토세계라 합니다. 우리 불교는 바로 대중적인 종교입니다. 부처님 법을 믿으면 다 같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4P의 종교 즉, 의식이 또렷하게 깨어있는 주인공으로 현재를 살며, 모든 존재가 불성을 지니고, 무한한 가능성을 갖는다는 긍정적 마인드를 갖고, 중중무진연기 속에서 나 아님이 없음을 알고,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인간적 관계 속에서 궁극에는 나와 남이 모두 행복한 정토세계를 구현하는 대중적 종교라는 것을 되새기며 이를 바탕으로 화엄삼매의 대자비행으로 꽃을 피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부지런히 정진하여 삼매의 힘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보기에는 신통찮은데 하는 일이 남다른 사람은 내면에 삼매의 힘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 힘이 원천이 되어 육체적인 힘도 발휘하고 물질적인 힘도 발휘하고 의욕적인 힘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적 수행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공부, 기도, 참선, 수행 그리고 회향으로 이어지는 봉사를 누누이 강조하는 것은 다 깨달음[지혜]과 실천[자비]으로 이 사바세계를 정토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화엄삼매 속에서 고갈되지 않는 즐거움을 맛보며 달라진 인생을 경험할 것입니다.